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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사라진 편지

Autor: 지호
last update Fecha de publicación: 2026-08-31 19:44:23

사흘 밤낮을 거의 잠으로 보낸 채원은 눈을 뜨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은 여전히 아팠지만 몸에는 제법 힘이 돌아와 있었다.

채원은 곧장 부서진 서책함을 뒤졌다.

안에 든 서책과 편지는 어지럽게 섞여 있었다.

바닥 한쪽에는 손바닥 두 개만 한 빈자리만 남아 있었다.

"여기…… 무엇이 있었지?"

사흘 만에 나온 목소리는 거칠게 갈라졌다.

설이가 놀라 채원을 돌아봤다. 목소리가 나온다는 안도도 잠시, 곧 빈자리를 살피고 얼굴을 굳혔다.

"대감마님께서 보내신 편지를 모아둔 상자가 있었습니다."

"내용은?"

"마마께서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으셨습니다."

누군가 윤서아가 죽은 사이 자물쇠를 부수고 그 편지들만 가져갔다.

윤서아의 아버지가 딸에게 남긴 글을 없애야 했던 사람이 있다는 뜻이었다.

"마지막 편지는 누가 가져왔지?"

"친정의 하인이 가져왔습니다."

"지금은?"

설이는 고개를 저었다.

"댁이 몰락한 뒤 소식이 끊겼습니다."

채원은 남은 서책을 빠르게 훑었다.

중전에게 도움을 청한 날, 임금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온 날, 친정으로 보낸 사람이 돌아오지 않은 날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역모의 증거나 새로 들어온 하인에 관한 기록은 보이지 않았다.

가져간 편지 안에 있었을 가능성이 컸다.

채원이 서책을 챙기려는 순간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마마, 대전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최 상궁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평소와 달리 입술이 단단히 굳어 있었다.

"전하께서 세자저하와 빈궁마마를 함께 들라 하셨습니다."

"무슨 일이지?"

갈라진 목소리를 들은 최 상궁이 잠시 멈칫했지만 곧 대답했다.

"조정에서 마마를 폐해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왔다고 합니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설이가 들고 있던 편지를 떨어뜨렸다.

"폐하신다니요? 마마께서 이제 막 살아나셨는데……."

"역적의 딸을 국모가 될 자리에 둘 수 없다는 내용입니다."

최 상궁이 채원을 바라봤다.

"저하께서 먼저 대전에 드셨습니다.

마마께서는 아직 말을 할 수 없다고 아뢰셨지만, 전하께서 직접 상태를 보겠다고 하셨답니다."

채원은 옷을 준비하러 돌아서는 최 상궁을 붙잡았다.

"아버지의…… 역모 증거가 뭐였지?"

최 상궁이 당황한 얼굴로 채원을 바라봤다. 채원은 목의 상처를 가리켰다.

"정신을 잃기 전 일이…… 선명하지 않아."

거짓말은 아니었다. 이 몸의 기억은 제멋대로 떠올랐고, 필요한 순간에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다.

최 상궁이 목소리를 낮췄다.

"대감마님 댁 창고에서 군영의 명부와 무기가 발견됐습니다. 병사들에게 돈을 나눠준 기록도 나왔다고 했습니다."

"누가 발견했지?"

"댁에 새로 들어온 하인이 고발했습니다. 대감마님께서 몰래 병사들을 만나는 것도 보았다고 증언했고요."

"그 하인은 지금 어디 있어?"

"저도 모릅니다. 증언을 마친 뒤 보호받고 있다는 말만 들었습니다."

증거를 발견한 사람과 역모를 목격한 사람이 같았다. 그런데 그 사람은 지금 모습을 감췄다.

채원은 부서진 서책함을 돌아봤다.

사라진 편지와 사라진 증인. 어느 쪽이든 우연으로 넘기기에는 시기가 너무 절묘했다.

"하인의 이름은?"

최 상궁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기억나지 않습니다. 조사 기록에는 적혀 있겠지만 저희가 볼 수 있는 문서는 아닙니다."

왕 앞에 나가기 전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정해졌다. 증인의 이름과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였다.

편지는 사라졌고, 자신은 이곳의 사람과 법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이런 상태로 왕 앞에 나가야 했다.

그렇다고 아프다는 이유로 숨으면 세자빈 자리는 다른 사람들의 말만으로 결정될 것이다.

이 자리를 잃으면 스스로를 지킬 힘도 함께 사라진다.

역적의 딸이라는 이름만 남은 채, 아무 뒷배도 없이 궁 밖으로 쫓겨날 판이었다.

"옷을…… 준비해."

설이가 놀라 다가왔다.

"마마, 아직 걷기도 힘드십니다."

"갈 거야."

말할 때마다 목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채원은 한 손으로 서책함을 짚고 몸을 바로 세웠다.

"내 자리를…… 남들이 정하게 둘 수는 없어."

최 상궁이 채원을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예복을 준비하겠습니다."

"아니."

채원은 무거운 가체와 겹겹이 쌓인 옷을 떠올렸다.

지금 몸으로는 대전까지 가기도 전에 쓰러질 수 있었다.

"가장 가벼운 옷으로."

"하지만 전하를 뵙는 자리입니다."

"쓰러지는 것보다 낫잖아."

최 상궁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숙였다.

"그리하겠습니다."

채원은 자색 당의에 옅은 남색 치마만 걸쳤다.

화려한 노리개도 무거운 장신구도 없었지만, 당의 한 벌만으로도 신분은 또렷했다.

목의 상처는 흰 천으로 단단히 감쌌다. 머리는 가체 대신 뒤로 단정하게 묶어 올려 비녀를 꼽았다. 

거울 속 얼굴은 핏기가 없었다. 목에는 감추기 어려운 상처가 남았고, 눈 아래에는 짙은 그늘이 졌다.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이 모습을 보고도 자리를 내놓으라고 몰아붙인다면, 잔인해 보이는 쪽은 자신이 아니었다.

채원은 설이의 부축을 받지 않고 방을 나섰다.

다리에 힘이 완전히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걸음이 흔들릴 때마다 치맛자락 안에서 발가락에 힘을 주며 중심을 바로잡았다.

동궁의 문 앞에는 이운이 기다리고 있었다.

채원을 본 그의 얼굴이 굳었다.

"왜 나온 것이냐."

"전하께서…… 부르셨다면서요."

"내가 막을 것이다. 너는 돌아가 쉬어라."

채원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저하께서 막아주시면, 다음에도 저하 뒤에 숨은 역적의 딸이라고 할 겁니다."

이운이 채원의 앞을 막았다.

"지금 네 몸으로 감당할 일이 아니다."

"제 자리입니다."

채원이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러니 제가 지켜야 합니다."

이운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돌아가라고 다시 명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대신 채원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힘들면 말해라."

"쓰러지지 않을 겁니다."

이운의 입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두 사람은 나란히 대전으로 향했다.

굳게 닫힌 대전의 문이, 두 사람 앞에서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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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턴트우먼 세자빈이 되다.    17. 두 갈래 추적

    화살이 빗나가자 박칠성이 뒤를 돌아봤다.자신을 쫓아오던 사내들 중 하나가 다시 화살을 꺼내는 모습이 보이자 다친 다리를 끌면서도 필사적으로 비탈을 올라왔다.“살려주시오! 제발 살려주시오!”이운이 고삐를 당겨 말을 세웠다.먼저 땅으로 내려선 그가 채원에게 손을 내밀었다.채원은 그 손을 잡고 내려오자마자 박칠성의 뒤를 확인했다.검을 든 사내 셋이 빠르게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조금 전 화살을 쏜 자는 뒤쪽으로 물러나 다시 활을 들었다.“박칠성을 살려야 합니다.”“알고있다.”이운이 검을 뽑았다.“둘은 뒤로 돌아가라. 나머지는 앞을 막아.”호위들이 양쪽으로 흩어졌다.박칠성은 그들 사이로 뛰어들듯 올라왔고, 검은 옷의 사내 셋은 속도를 늦추지 않은 채 따라붙었다.곧바로 검이 부딪쳤다.이운이 가장 앞에 있던 사내의 검을 받아냈다. 호위들이 나머지 둘을 막아서면서 좁은 산길이 순식간에 뒤엉켰다.채원은 한쪽으로 물러나 박칠성을 찾았다.놈은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바지 한쪽이 피로 젖어 있었다. 허벅지를 베인 모양이었다.“움직이지 마세요.”박칠성이 채원을 올려다봤다.“당신들은 누구요?”“적어도 당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은 아니에요. 그러니까 살고 싶으면 움직이지 마세요.”박칠성의 시선이 채원의 어깨 너머로 향했다.얼굴이 굳었다.채원이 바로 뒤를 돌아봤다.사내 하나가 호위를 밀어내고 이쪽으로 빠져나오고 있었다. 검을 낮게 든 채 곧장 박칠성을 향하고 있었다.역시 목적은 하나였다.박칠성의 입을 막는 것.채원이 앞으로 나섰다.사내가 박칠성에게 검을 찔러 넣으려는 순간 채원이 옆으로 몸을 틀었다.칼끝을 피하면서 사내의 소매와 팔을 함께 잡아당겼다.달려오던 힘까지 그대로 실리자 사내의 상체가 앞으로 쏠렸다.채원은 그 힘을 억지로 막지 않았다.한쪽 발로 사내의 발목을 걸고 잡았던 팔을 같은 방향으로 밀었다.사내가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손에서 검이 떨어졌다.채원은 검을 발로 차서 멀리 밀어냈다.거기까지였다.

  • 스턴트우먼 세자빈이 되다.    16. 다른 사람

    지도 위에서 길이 둘로 갈라졌다.무기와 상자를 실은 수레는 북한산 남쪽 길로 내려오고 있었고, 박칠성은 혼자 말을 타고 서쪽 산길로 빠졌다.어느 쪽을 놓쳐도 좋지 않았다.한도겸은 동궁 안쪽의 빈방에 따로 가둬 두었다.연주와 말을 맞추지 못하도록 문도 서로 다른 곳에 두었고, 지키는 사람도 따로 붙였다.“누구도 한도겸을 만나게 하지 마라. 음식과 물을 들이는 자도 정해진 사람만 드나들게 하고.”이운이 명을 내렸다. 한도겸은 정보가 새어나간 사실은 인정했지만 누구에게 넘겼는지는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지금은 그 입을 열게 할 물증부터 찾아야 했다.“수레는 제가 맡겠습니다.”백건이 남쪽 길을 짚었다.“박칠성은 산 아래에 남겨둔 제 사람이 따라가고 있습니다. 들키지 않을 정도로만 거리를 두라고 해두었습니다.”채원이 서쪽 산길을 보았다.“더 가까이 붙지 않는 게 좋겠어요. 박칠성이 어디까지 가는지 본 다음, 멈추는 곳에서 잡아야 합니다.”이운은 대답 대신 채원을 잠시 바라봤다.전에는 남의 말이 끝날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던 여자였다.지금은 판단이 빠르고, 자신의 생각을 망설임 없이 내놓았다.큰일을 겪은 뒤 사람이 달라질 수는 있다. 이운도 그렇게 생각했다.하지만 달라진 정도가 어디까지인지, 그는 아직 판단하지 못하고 있었다.“백건은 수레를 맡아라. 나는 박칠성을 쫓겠다.”“저도 갑니다.”채원이 바로 말했다.이운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서 아래로 내려갔다.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몸이었다. 잠시 서 있기만 해도 안색이 옅어질 때가 있었다.“지금 네 몸으로 산길을 오르겠다고?”“산 아래까지는 가마를 타면 됩니다. 그다음엔 말을 빌려주세요.”이운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말을 탈 줄 아느냐?”채원은 순간 입을 다물었다.질문 자체가 이상한 건 아니었다. 문제는 이운이 윤서아를 오래 알았다는 데 있었다.자신은 자꾸 채원의 기준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그 움직임 하나하나가 윤서아를 알던 사람들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 수 있었다.

  • 스턴트우먼 세자빈이 되다.    15. 미끼를 물다

    서고가 조용해진 뒤에야 채원은 책상을 짚었다.긴장이 풀리자 다리가 떨렸다.이운이 팔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채원도 거절하지 않았다.그때 동궁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잠시 후 궁문에 말을 맡기고 뛰어온 무사가 서고로 들어왔다.옷자락은 군데군데 찢어졌고, 오른쪽 뺨에는 마른 피가 묻어 있었다."찾았다."무사는 예를 갖추기도 전에 말했다.이운이 처음으로 한도겸에게서 시선을 거뒀다."증인을?""증인은 박칠성이란 놈이다. 그놈만 찾은 게 아니다."무사의 이름은 백건이었다.이운과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친구이자, 동궁 밖에서 그의 손발이 되어 움직이는 호위였다.증인을 찾느라 여러 날 도성을 비운 상태였다.백건은 채원을 본 순간 말을 멈췄다.돌아오는 길에 세자빈이 목숨을 끊었다는 소문을 들은 모양이었다."빈궁마마께서…….""살아 있다."이운이 짧게 대답했다.세자빈의 둘째 오라비인 윤재경과 오랜 벗인 백건과 이운은 윤서아와도 각별한 사이였다. 백건은 묻고 싶은 말을 삼킨 채 깊이 고개를 숙였다."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채원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 증인은 어디 있습니까?"백건의 시선이 채원에게 머물렀다.예전의 윤서아라면 오랜만에 돌아온 피 묻은 무사에게 곧바로 본론부터 묻지 않았을 것이다."북한산에 있습니다."백건은 박칠성이 머물던 여관을 알아낸 뒤 나흘 동안 뒤를 밟았다.박칠성은 낮에는 방에서 나오지 않았고, 밤마다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사람을 만났다."그동안 왜 소식을 보내지 않았지?""제가 행선지를 보고할 때마다 박칠성이 먼저 자리를 옮겼습니다.안에서 새는 곳이 있다고 생각해 나흘 동안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습니다."백건의 시선이 비어 있는 책상으로 향했다. 조금 전까지 한도겸이 앉아 있던 자리였다."이제야 이유를 알겠군요."오늘 새벽에는 낯선 사내를 따라 북한산으로 들어갔다.백건은 말을 버리고 걸어서 뒤쫓았다.산 중턱에는 숯을 굽는 곳으로 꾸민 넓은 터가 있었다.그러나 안에서 들린 것은 나무를 패

  • 스턴트우먼 세자빈이 되다.    14. 한도겸

    호위의 보고가 끝나자 이운은 곧장 밖으로 나가려 했다.채원이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지금 들어가면 안 됩니다.""연주가 편지를 넘기는 순간을 놓칠 수 있다.""문을 여는 순간 안에 있는 사람이 편지부터 없앨 겁니다.누가 받는지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이운의 시선이 붙잡힌 소매로 내려갔다. 채원은 그제야 손을 놓았다."서고에는 드나들 수 있는 문이 몇 개입니까?""앞문과 뒤쪽 작은 문, 두 곳이다."이운은 호위에게 뒤쪽 문을 막고, 창 아래에도 사람을 두라고 명했다.연주를 따라간 사람에게는 안에서 다른 자가 나올 때까지 움직이지 말라는 지시를 보냈다.채원도 자리에서 일어났다."너는 여기 있어라.""제가 만든 미끼입니다.""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또 나서겠다는 것이냐?""서고까지 걷는 일은 할 수 있습니다."이운이 반박하려는 순간 채원이 먼저 방문을 나섰다.다리에 힘이 완전히 돌아오지는 않았지만, 벽에 손을 대지 않고 걸을 수는 있었다.이운은 결국 채원의 걸음에 맞춰 속도를 늦췄다.앞서지도, 팔을 붙잡지도 않았다.다만 채원이 흔들릴 때마다 손을 들었다가 다시 내렸다.서고는 세자가 신하들과 공부하는 곳 뒤편에 있었다.세자가 읽는 책뿐 아니라 상소의 사본과 조사 기록도 보관하는 곳이었다.등불 하나가 닫힌 창 안에서 흔들리고 있었다.호위가 어둠 속에서 다가와 속삭였다."나인은 안으로 들어간 뒤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목소리도 들렸습니다."이운이 문으로 다가가자 채원이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은 열린 창틈 가까이에 몸을 붙였다.안에서 연주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분명 마마께서 직접 숨겨두신 곳에서 꺼냈습니다.""뒤를 밟힌 것은 아니냐?"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낮고 침착했다."아무도 보지 못했습니다.""확실하겠지."잠시 종이가 스치는 소리가 났다.채원은 창틈으로 안을 살폈다. 연주가 책상 앞에 서 있었다.그 맞은편의 남자는 등불 아래에서 봉투의 붉은 점을 확인하고 있었다.그 얼굴을 본 이

  • 스턴트우먼 세자빈이 되다.    13. 가장 믿는 사람

    설이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저런 곳이 있는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도둑도 몰랐겠지."채원은 빈 봉투 안에 서책에서 찢은 종이를 넣었다.겉에는 윤서아 아버지가 사용하던 붉은 점 하나를 찍었다. 남은 편지에서 본 표시였다.봉투를 숨은 칸에 넣되 판을 완전히 닫지는 않았다.경대를 열어본 사람이라면 어긋난 틈을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만 남겼다.그날 저녁, 설이는 방문을 조금 열어둔 채 일부러 찻상을 정리했다.조금 전 상을 가져왔던 나인이 복도를 지나가다 걸음을 늦췄다.설이가 문밖의 그림자를 확인하고 물었다."마마, 없어진 편지에 정말 중요한 내용이 있었습니까?"채원은 목을 누르며 일부러 잠시 뜸을 들였다."아니. 중요한 것은…… 다른 곳에 있어."문밖에서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멎었다."아버지가 남긴 장부는 아직 무사해.""그 장부가 정말 아직 남아 있습니까?""응, 나만 아는 곳에 보관해 두었어"설이는 더 묻지 않고 문을 닫았다.해가 완전히 지자 이운이 보낸 호위 두 사람이 뒤뜰 담장 아래에 숨었다.최 상궁은 순찰을 핑계로 안쪽 뜰의 사람들을 물렸다.설이는 등불을 끈 뒤 바깥방으로 물러나 문 가까이에 앉았다.시간이 더디게 흘렀다.채원은 눈을 감은 채 방 안팎의 소리를 나눠 들었다.이 몸은 아직 오래 버틸 수 없었다.하루가 너무 길었고, 피로가 온 몸으로 쏟아졌다. 그래도 정신만은 놓지 않았다.한밤중이 지나자 문고리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누군가 틈으로 방 안을 살폈다.채원은 숨을 고르게 유지했다.발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침상 쪽으로 오지 않고 곧장 경대로 향했다. 서랍이 열리고, 나무판이 살짝 긁혔다.망설임이 없는 손길이었다. 봉투가 빠져나가는 소리가 났다.채원은 실눈을 뜨고 누구인지 보았다.연분홍 저고리였다. 낮에 상을 가져왔던 나인, 연주였다.채원은 곧바로 눈을 감았다.지금 붙잡으면 훔친 사람 하나만 얻을 수 있지만 이대로 보내면 편지를 받을 사람까지 찾을 수 있다.연주의 발소리가 침상 가까이

  • 스턴트우먼 세자빈이 되다.    12. 지켜봐야 할 얼굴

    이운은 대전에서부터 채원을 따라왔다.동궁에 도착한 뒤에도 돌아가지 않고, 안쪽 문을 지키는 호위들에게 지시를 내렸다.그사이 먼저 방으로 들어온 채원은 기둥을 붙잡았다.설이가 숨을 고를 틈도 없이 달려와 팔을 받쳤다.채원은 그 손에 기대지 않고 되도록 이면 혼자 설 수 있는지 확인했다.힘보다 균형을 잡을 수 있는지부터 확인했다.오른발에 무게를 싣자 무릎이 안으로 흔들렸다.허벅지와 허리가 모두 약했다.설이가 놀라 몸을 받쳤다."마마, 방금 대전에서 돌아오셨습니다.""그러니까…… 지금 해야 해."말할 때마다 목 안쪽이 따갑게 쓸렸다. 보름 안에 증거를 찾아야 했다.몸이 회복되기만 기다리면 그 보름은 눈을 깜빡이는 사이에 지나갈 것이다.움직이지 못할 때는 머리를 쓰고, 머리를 쓰는 동안에는 몸을 만들어야 했다.이 몸으로 누군가를 걷어차면 상대보다 자신이 먼저 넘어질 터였다.무엇보다 몸을 빨리 회복해야 했다. "설이야. 삶은 닭고기를 구해줄 수 있겠니?""닭을 말씀이십니까?""기름진 부분은 빼고 살코기로. 달걀도 있으면 가져오고."설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채원을 살폈다."목이 아프셔서 죽도 제대로 못 드셨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잘게 찢으면 돼. 약만 먹는다고 힘이 생기지는 않잖아.""알겠습니다. 수랏간에 일러두겠습니다."설이가 물러나자 채원은 다시 무릎을 굽혔다.이번에는 두 번 만에 다리가 떨렸다."당장 그만두어라."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렸다.호위들에게 지시를 마친 이운이 방으로 들어왔다.그의 시선이 채원의 떨리는 다리와 기둥을 움켜쥔 손을 차례로 훑었다.이운은 서아의 몸짓이 낯설었다. 죽었다 살아난 사람 같지 않았다.이상하다고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보름을 받아낸 것도 모자라 몸까지 망가뜨릴 셈이냐?""몸이 나아질 때까지 기다리면…… 보름이 끝납니다."채원은 다시 일어서려 했지만 무릎에 힘이 풀리며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이운이 한 걸음 만에 다가와 팔을 붙잡았가 채원이 바로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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