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채원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윤서아의 슬픔인지 자신의 마음인지 구별하기 어려웠다.
가슴 안쪽에 웅크리고 있던 무언가가 그제야 울음을 터뜨리는 것 같았다.
짧은 기억이 다시 스쳤다.
밤마다 문밖의 발소리에 고개를 들던 윤서아.
행여 이운일까 싶어 서책을 펼친 채 기다리다가, 날이 밝으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책장을 덮었다.
기다렸다고 말하지도 못했다. 와달라고 사람을 보내지도 못했다.
자신을 외면한 남자에게 매달리는 순간, 마지막 자존심마저 잃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채원은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자신이 달래줄 수 있는 슬픔이 아니었다.
이운이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상처를 피해서 채원의 뺨에 흐른 눈물만 손끝으로 닦아냈다.
채원은 피하지 않았다.
그 손길을 받아들인 것은 자신이 아니라 윤서아일지도 몰랐다.
지금만큼은 이 몸에 남은 마음이 원하는 대로 두고 싶었다.
"그간의 일을 지금 다 말할 수는 없다."
이운의 목소리가 다시 낮아졌다.
"누가 거짓 증언을 만들었는지, 병력이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아직 밝히지 못했다. 섣불리 움직이면 남은 증거마저 사라질 것이다."
채원은 눈물을 닦고 이운을 바라봤다.
그의 말속에는 분명 숨긴 것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설이의 생각과 달리, 이운은 이미 누군가를 쫓고 있었다.
그렇다고 곧바로 믿을 수는 없었다.
실패한 계획은 윤서아의 가족을 살려내지 못했다.
좋은 뜻으로 움직였다는 사실만으로 결과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채원은 사람의 말보다 행동을 믿었다.
촬영장에서도 안전하다는 말보다 직접 확인한 매트의 위치를 믿었다.
이운에게도 같은 기준을 적용할 생각이었다.
"용서해 달라고 하지 않겠다."
이운이 말했다.
"네가 나를 원망해도 받아들이겠다."
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
"다만 살아다오."
채원의 손끝이 이불을 움켜쥐었다.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내가 하는 말을 듣지 않아도 된다. 그러니 다시는 네 목숨을 버리지 마라."
이운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네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달려오는 동안, 숨이 막히는 줄 알았다."
그 말에 윤서아의 가슴은 다시 크게 뛰었다. 그렇게 기다렸던 마음을 이제야 확인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채원은 달랐다.
죽으려 한 사람도 윤서아였고, 이운을 기다린 사람도 윤서아였다.
지금 이 몸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은 강채원이었다.
채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운에게 한 약속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하는 약속이었다.
여기서 살아남겠다는 약속.
원래 몸으로 돌아갈 길이 있다면 반드시 찾아낼 것이다.
돌아갈 수 없다면 이곳에서 누구에게도 목숨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이운은 그 뜻을 다르게 받아들인 듯했다. 굳어 있던 입가가 아주 조금 풀렸다.
"다시는 혼자 두지 않겠다."
채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보호는 필요했다. 이 낯선 궁에서 살아남으려면 세자의 힘이 가장 단단한 방패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방패 뒤에 숨어 있기만 할 생각은 없었다.
이운의 힘을 이용하는 동안 자신의 몸을 다시 만들고, 이 궁의 사람과 규칙을 익혀야 했다.
윤서아의 가문을 무너뜨린 자가 누구인지도 알아낼 생각이었다.
이운은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다시 채원을 돌아봤다.
"네 아버지가 역모를 꾀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고 있다."
채원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 말은 윤서아를 달래기 위한 위로가 아니었다.
이운은 이미 누군가를 쫓고 있었다. 실패했어도 멈춘 것은 아니었다.
"아직 누구의 짓인지 말할 단계는 아니다. 내가 먼저 움직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증거를 없애고 다시 너를 노릴 것이다."
그가 문 쪽으로 두 걸음 옮겼다.
"그러니 몸부터 회복해라. 진실을 밝힐 때 네가 살아서 지켜봐야 하지 않겠느냐."
이운이 문을 열자 기다리던 최 상궁과 설이가 고개를 숙였다.
"마마의 치료에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바로 마련해라."
"명심하겠습니다."
이운은 마지막으로 채원을 바라본 뒤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자 설이가 침상 곁으로 돌아와 세자빈을 다시 눕히고 이부자리를 바로잡아 주었다.
늦게 온 사과가 윤서아의 죽음을 없던 일로 만들지는 못했다.
가문을 지키려 했다는 말도 아직은 이운의 주장일 뿐이었다.
'윤서아는 모든 문이 닫히자 삶을 놓았다.'
'하지만 나는 강채원이다.'
닫힌 문이 있다면 부수면 되고, 막힌 길은 뛰어넘으면 그만이었다.
이운이 쫓고 있다는 증거도 직접 확인할 것이다. 그가 진실을 말했는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까지.
믿는 것은 그다음이었다.
채원은 방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
그때 한쪽 벽 아래 놓인 서책함이 눈에 들어왔다.
뚜껑은 닫혀 있었지만 자물쇠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끊어진 부분이 등불에 번들거렸다.
누군가 억지로 연 흔적이었다.
채원이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시야가 크게 흔들렸다.
서책함을 더 살필 틈도 없었다. 눈앞이 어두워지더니 설이의 손이 급히 다가왔다.
채원은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화살이 빗나가자 박칠성이 뒤를 돌아봤다.자신을 쫓아오던 사내들 중 하나가 다시 화살을 꺼내는 모습이 보이자 다친 다리를 끌면서도 필사적으로 비탈을 올라왔다.“살려주시오! 제발 살려주시오!”이운이 고삐를 당겨 말을 세웠다.먼저 땅으로 내려선 그가 채원에게 손을 내밀었다.채원은 그 손을 잡고 내려오자마자 박칠성의 뒤를 확인했다.검을 든 사내 셋이 빠르게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조금 전 화살을 쏜 자는 뒤쪽으로 물러나 다시 활을 들었다.“박칠성을 살려야 합니다.”“알고있다.”이운이 검을 뽑았다.“둘은 뒤로 돌아가라. 나머지는 앞을 막아.”호위들이 양쪽으로 흩어졌다.박칠성은 그들 사이로 뛰어들듯 올라왔고, 검은 옷의 사내 셋은 속도를 늦추지 않은 채 따라붙었다.곧바로 검이 부딪쳤다.이운이 가장 앞에 있던 사내의 검을 받아냈다. 호위들이 나머지 둘을 막아서면서 좁은 산길이 순식간에 뒤엉켰다.채원은 한쪽으로 물러나 박칠성을 찾았다.놈은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바지 한쪽이 피로 젖어 있었다. 허벅지를 베인 모양이었다.“움직이지 마세요.”박칠성이 채원을 올려다봤다.“당신들은 누구요?”“적어도 당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은 아니에요. 그러니까 살고 싶으면 움직이지 마세요.”박칠성의 시선이 채원의 어깨 너머로 향했다.얼굴이 굳었다.채원이 바로 뒤를 돌아봤다.사내 하나가 호위를 밀어내고 이쪽으로 빠져나오고 있었다. 검을 낮게 든 채 곧장 박칠성을 향하고 있었다.역시 목적은 하나였다.박칠성의 입을 막는 것.채원이 앞으로 나섰다.사내가 박칠성에게 검을 찔러 넣으려는 순간 채원이 옆으로 몸을 틀었다.칼끝을 피하면서 사내의 소매와 팔을 함께 잡아당겼다.달려오던 힘까지 그대로 실리자 사내의 상체가 앞으로 쏠렸다.채원은 그 힘을 억지로 막지 않았다.한쪽 발로 사내의 발목을 걸고 잡았던 팔을 같은 방향으로 밀었다.사내가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손에서 검이 떨어졌다.채원은 검을 발로 차서 멀리 밀어냈다.거기까지였다.
지도 위에서 길이 둘로 갈라졌다.무기와 상자를 실은 수레는 북한산 남쪽 길로 내려오고 있었고, 박칠성은 혼자 말을 타고 서쪽 산길로 빠졌다.어느 쪽을 놓쳐도 좋지 않았다.한도겸은 동궁 안쪽의 빈방에 따로 가둬 두었다.연주와 말을 맞추지 못하도록 문도 서로 다른 곳에 두었고, 지키는 사람도 따로 붙였다.“누구도 한도겸을 만나게 하지 마라. 음식과 물을 들이는 자도 정해진 사람만 드나들게 하고.”이운이 명을 내렸다. 한도겸은 정보가 새어나간 사실은 인정했지만 누구에게 넘겼는지는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지금은 그 입을 열게 할 물증부터 찾아야 했다.“수레는 제가 맡겠습니다.”백건이 남쪽 길을 짚었다.“박칠성은 산 아래에 남겨둔 제 사람이 따라가고 있습니다. 들키지 않을 정도로만 거리를 두라고 해두었습니다.”채원이 서쪽 산길을 보았다.“더 가까이 붙지 않는 게 좋겠어요. 박칠성이 어디까지 가는지 본 다음, 멈추는 곳에서 잡아야 합니다.”이운은 대답 대신 채원을 잠시 바라봤다.전에는 남의 말이 끝날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던 여자였다.지금은 판단이 빠르고, 자신의 생각을 망설임 없이 내놓았다.큰일을 겪은 뒤 사람이 달라질 수는 있다. 이운도 그렇게 생각했다.하지만 달라진 정도가 어디까지인지, 그는 아직 판단하지 못하고 있었다.“백건은 수레를 맡아라. 나는 박칠성을 쫓겠다.”“저도 갑니다.”채원이 바로 말했다.이운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서 아래로 내려갔다.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몸이었다. 잠시 서 있기만 해도 안색이 옅어질 때가 있었다.“지금 네 몸으로 산길을 오르겠다고?”“산 아래까지는 가마를 타면 됩니다. 그다음엔 말을 빌려주세요.”이운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말을 탈 줄 아느냐?”채원은 순간 입을 다물었다.질문 자체가 이상한 건 아니었다. 문제는 이운이 윤서아를 오래 알았다는 데 있었다.자신은 자꾸 채원의 기준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그 움직임 하나하나가 윤서아를 알던 사람들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 수 있었다.
서고가 조용해진 뒤에야 채원은 책상을 짚었다.긴장이 풀리자 다리가 떨렸다.이운이 팔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채원도 거절하지 않았다.그때 동궁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잠시 후 궁문에 말을 맡기고 뛰어온 무사가 서고로 들어왔다.옷자락은 군데군데 찢어졌고, 오른쪽 뺨에는 마른 피가 묻어 있었다."찾았다."무사는 예를 갖추기도 전에 말했다.이운이 처음으로 한도겸에게서 시선을 거뒀다."증인을?""증인은 박칠성이란 놈이다. 그놈만 찾은 게 아니다."무사의 이름은 백건이었다.이운과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친구이자, 동궁 밖에서 그의 손발이 되어 움직이는 호위였다.증인을 찾느라 여러 날 도성을 비운 상태였다.백건은 채원을 본 순간 말을 멈췄다.돌아오는 길에 세자빈이 목숨을 끊었다는 소문을 들은 모양이었다."빈궁마마께서…….""살아 있다."이운이 짧게 대답했다.세자빈의 둘째 오라비인 윤재경과 오랜 벗인 백건과 이운은 윤서아와도 각별한 사이였다. 백건은 묻고 싶은 말을 삼킨 채 깊이 고개를 숙였다."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채원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 증인은 어디 있습니까?"백건의 시선이 채원에게 머물렀다.예전의 윤서아라면 오랜만에 돌아온 피 묻은 무사에게 곧바로 본론부터 묻지 않았을 것이다."북한산에 있습니다."백건은 박칠성이 머물던 여관을 알아낸 뒤 나흘 동안 뒤를 밟았다.박칠성은 낮에는 방에서 나오지 않았고, 밤마다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사람을 만났다."그동안 왜 소식을 보내지 않았지?""제가 행선지를 보고할 때마다 박칠성이 먼저 자리를 옮겼습니다.안에서 새는 곳이 있다고 생각해 나흘 동안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습니다."백건의 시선이 비어 있는 책상으로 향했다. 조금 전까지 한도겸이 앉아 있던 자리였다."이제야 이유를 알겠군요."오늘 새벽에는 낯선 사내를 따라 북한산으로 들어갔다.백건은 말을 버리고 걸어서 뒤쫓았다.산 중턱에는 숯을 굽는 곳으로 꾸민 넓은 터가 있었다.그러나 안에서 들린 것은 나무를 패
호위의 보고가 끝나자 이운은 곧장 밖으로 나가려 했다.채원이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지금 들어가면 안 됩니다.""연주가 편지를 넘기는 순간을 놓칠 수 있다.""문을 여는 순간 안에 있는 사람이 편지부터 없앨 겁니다.누가 받는지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이운의 시선이 붙잡힌 소매로 내려갔다. 채원은 그제야 손을 놓았다."서고에는 드나들 수 있는 문이 몇 개입니까?""앞문과 뒤쪽 작은 문, 두 곳이다."이운은 호위에게 뒤쪽 문을 막고, 창 아래에도 사람을 두라고 명했다.연주를 따라간 사람에게는 안에서 다른 자가 나올 때까지 움직이지 말라는 지시를 보냈다.채원도 자리에서 일어났다."너는 여기 있어라.""제가 만든 미끼입니다.""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또 나서겠다는 것이냐?""서고까지 걷는 일은 할 수 있습니다."이운이 반박하려는 순간 채원이 먼저 방문을 나섰다.다리에 힘이 완전히 돌아오지는 않았지만, 벽에 손을 대지 않고 걸을 수는 있었다.이운은 결국 채원의 걸음에 맞춰 속도를 늦췄다.앞서지도, 팔을 붙잡지도 않았다.다만 채원이 흔들릴 때마다 손을 들었다가 다시 내렸다.서고는 세자가 신하들과 공부하는 곳 뒤편에 있었다.세자가 읽는 책뿐 아니라 상소의 사본과 조사 기록도 보관하는 곳이었다.등불 하나가 닫힌 창 안에서 흔들리고 있었다.호위가 어둠 속에서 다가와 속삭였다."나인은 안으로 들어간 뒤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목소리도 들렸습니다."이운이 문으로 다가가자 채원이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은 열린 창틈 가까이에 몸을 붙였다.안에서 연주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분명 마마께서 직접 숨겨두신 곳에서 꺼냈습니다.""뒤를 밟힌 것은 아니냐?"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낮고 침착했다."아무도 보지 못했습니다.""확실하겠지."잠시 종이가 스치는 소리가 났다.채원은 창틈으로 안을 살폈다. 연주가 책상 앞에 서 있었다.그 맞은편의 남자는 등불 아래에서 봉투의 붉은 점을 확인하고 있었다.그 얼굴을 본 이
설이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저런 곳이 있는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도둑도 몰랐겠지."채원은 빈 봉투 안에 서책에서 찢은 종이를 넣었다.겉에는 윤서아 아버지가 사용하던 붉은 점 하나를 찍었다. 남은 편지에서 본 표시였다.봉투를 숨은 칸에 넣되 판을 완전히 닫지는 않았다.경대를 열어본 사람이라면 어긋난 틈을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만 남겼다.그날 저녁, 설이는 방문을 조금 열어둔 채 일부러 찻상을 정리했다.조금 전 상을 가져왔던 나인이 복도를 지나가다 걸음을 늦췄다.설이가 문밖의 그림자를 확인하고 물었다."마마, 없어진 편지에 정말 중요한 내용이 있었습니까?"채원은 목을 누르며 일부러 잠시 뜸을 들였다."아니. 중요한 것은…… 다른 곳에 있어."문밖에서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멎었다."아버지가 남긴 장부는 아직 무사해.""그 장부가 정말 아직 남아 있습니까?""응, 나만 아는 곳에 보관해 두었어"설이는 더 묻지 않고 문을 닫았다.해가 완전히 지자 이운이 보낸 호위 두 사람이 뒤뜰 담장 아래에 숨었다.최 상궁은 순찰을 핑계로 안쪽 뜰의 사람들을 물렸다.설이는 등불을 끈 뒤 바깥방으로 물러나 문 가까이에 앉았다.시간이 더디게 흘렀다.채원은 눈을 감은 채 방 안팎의 소리를 나눠 들었다.이 몸은 아직 오래 버틸 수 없었다.하루가 너무 길었고, 피로가 온 몸으로 쏟아졌다. 그래도 정신만은 놓지 않았다.한밤중이 지나자 문고리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누군가 틈으로 방 안을 살폈다.채원은 숨을 고르게 유지했다.발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침상 쪽으로 오지 않고 곧장 경대로 향했다. 서랍이 열리고, 나무판이 살짝 긁혔다.망설임이 없는 손길이었다. 봉투가 빠져나가는 소리가 났다.채원은 실눈을 뜨고 누구인지 보았다.연분홍 저고리였다. 낮에 상을 가져왔던 나인, 연주였다.채원은 곧바로 눈을 감았다.지금 붙잡으면 훔친 사람 하나만 얻을 수 있지만 이대로 보내면 편지를 받을 사람까지 찾을 수 있다.연주의 발소리가 침상 가까이
이운은 대전에서부터 채원을 따라왔다.동궁에 도착한 뒤에도 돌아가지 않고, 안쪽 문을 지키는 호위들에게 지시를 내렸다.그사이 먼저 방으로 들어온 채원은 기둥을 붙잡았다.설이가 숨을 고를 틈도 없이 달려와 팔을 받쳤다.채원은 그 손에 기대지 않고 되도록 이면 혼자 설 수 있는지 확인했다.힘보다 균형을 잡을 수 있는지부터 확인했다.오른발에 무게를 싣자 무릎이 안으로 흔들렸다.허벅지와 허리가 모두 약했다.설이가 놀라 몸을 받쳤다."마마, 방금 대전에서 돌아오셨습니다.""그러니까…… 지금 해야 해."말할 때마다 목 안쪽이 따갑게 쓸렸다. 보름 안에 증거를 찾아야 했다.몸이 회복되기만 기다리면 그 보름은 눈을 깜빡이는 사이에 지나갈 것이다.움직이지 못할 때는 머리를 쓰고, 머리를 쓰는 동안에는 몸을 만들어야 했다.이 몸으로 누군가를 걷어차면 상대보다 자신이 먼저 넘어질 터였다.무엇보다 몸을 빨리 회복해야 했다. "설이야. 삶은 닭고기를 구해줄 수 있겠니?""닭을 말씀이십니까?""기름진 부분은 빼고 살코기로. 달걀도 있으면 가져오고."설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채원을 살폈다."목이 아프셔서 죽도 제대로 못 드셨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잘게 찢으면 돼. 약만 먹는다고 힘이 생기지는 않잖아.""알겠습니다. 수랏간에 일러두겠습니다."설이가 물러나자 채원은 다시 무릎을 굽혔다.이번에는 두 번 만에 다리가 떨렸다."당장 그만두어라."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렸다.호위들에게 지시를 마친 이운이 방으로 들어왔다.그의 시선이 채원의 떨리는 다리와 기둥을 움켜쥔 손을 차례로 훑었다.이운은 서아의 몸짓이 낯설었다. 죽었다 살아난 사람 같지 않았다.이상하다고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보름을 받아낸 것도 모자라 몸까지 망가뜨릴 셈이냐?""몸이 나아질 때까지 기다리면…… 보름이 끝납니다."채원은 다시 일어서려 했지만 무릎에 힘이 풀리며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이운이 한 걸음 만에 다가와 팔을 붙잡았가 채원이 바로 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