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궁문을 벗어나자마자 연화의 걸음이 저도 모르게 느려졌다.
높은 담장 안에서만 살아온 연화에게 궁 밖은 모든 것이 낯설었다.
노점마다 사람들이 북적였고, 상인들은 저마다 목청을 높였다. 갓 지은 떡 냄새가 바람을 타고 흘러왔고, 아이들은 흙먼지를 일으키며 골목을 뛰어다녔다.
연화는 자신도 모르게 두리번거렸다.
'세상에....''사람이 이렇게 많구나.'
"앞을 보며 걷거라."
무관의 말에 연화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예." 얼른 걸음을 옮겼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이번에는 엿장수가 커다란 가위를 '딱!' 하고 부딪치는 소리에 고개가 돌아갔다.
조금 더 걸어가자 작은 대야 안에서 병아리들이 삐약거리며 서로를 밀어내고 있었다. 연화의 입가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귀엽다.'"연화."
"...예."
"앞."
"...송구하옵니다."
무관은 결국 낮게 웃음을 흘렸다. "궁 밖이 처음인 티를 온몸으로 내는구나." 연화는 괜히 민망해져 걸음을 재촉했다.헌은 앞서 걸으며 그런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
잠시 후 세 사람은 과자를 파는 노점 앞을 지나쳤다. 갓 튀긴 산자에서 달콤한 꿀 냄새가 퍼졌다.
연화의 발걸음이 아주 잠깐 멈췄다.
시선도 함께 멈췄다.
하지만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걸음을 옮겼다.
헌이 그 모습을 보고 걸음을 늦췄다.
"주인장." 상인이 얼른 허리를 굽혔다. "무엇을 드릴까요?""산자 하나 주게."
상인은 종이에 곱게 싼 산자를 건넸다.헌은 아무 말 없이 그것을 연화에게 내밀었다.
"...나리?""아까부터 계속 보고 있더군."
연화는 들킨 아이처럼 눈만 깜빡였다.그렇게 티를 낸 줄은 몰랐다.
"...성은이... 아. 감사합니다 나리." 조심스레 산자를 받아 한입 베어 물자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연화의 얼굴이 금세 풀어졌다.
무관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참 단순하기도 하지." 연화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맛있는 것은 맛있는 것이었다.그러다 문득 손에 든 산자를 내려다보았다.
잠시 망설이던 연화가 헌에게 조심스레 산자를 내밀었다.
"...나리도 드시겠사옵니까." 무관의 눈이 커졌다.연화도 그제야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아." 급히 손을 거두려던 연화가 고개를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제가 먹던 것이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헌은 말없이 노점 앞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주인장.""예, 나리."
"하나 더 주게."
상인은 새 산자를 종이에 싸 건넸다.헌은 그것을 받아 한입 베어 문 뒤 담담하게 말했다.
"그건 네가 먹거라.""...예?"
"내 것은 따로 샀다."
연화는 제 손의 산자와 헌의 손에 들린 산자를 번갈아 보았다.괜히 얼굴이 조금 뜨거워졌다.
"...감사하옵니다." 무관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조용히 헛기침을 했다.연화는 그런 속도 모르고 남은 산자를 소중히 쥔 채 다시 걸음을 옮겼다.
'좋은 분이네.' 세 사람은 다시 장터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장을 둘러보던 연화는 문득 궁 안과는 다른 풍경을 보았다.
장사꾼과 손님이 실랑이를 벌이다가도 금세 웃으며 흥정을 이어 갔고, 아이는 넘어져 울다가도 사탕 하나에 금세 울음을 그쳤다.
사람 사는 곳은 궁 안이나 궁 밖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때였다.
"억울하다니까!" 거친 고함이 장터를 울렸다.사람들이 하나둘 발걸음을 멈췄다.
술 냄새를 풍기는 사내 하나가 관리를 향해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백성은 굶어 죽는데 세금만 걷으면 다냐!" 관리들도 난처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무관이 작게 말했다.
"나리, 돌아가시는 편이 낫겠습니다." 헌은 사람들 사이를 바라보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무슨 사연인지부터 들어보자." 연화는 속으로만 한숨을 삼켰다. '좋은 분인 건 알겠는데....''왜 꼭 저런 데로 가시는 걸까.'
사람들 틈으로 가까워질수록 사내의 목소리는 더욱 거칠어졌다.관리 하나가 사내를 붙잡으려 하자, 사내는 그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헌은 사내가 토해내는 말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그 얼굴을 보고 있었다.
연화는 달랐다.
그녀의 시선은 사내의 떨리는 어깨에서 팔로, 팔에서 손끝으로 내려갔다.
그 손이 천천히 옷자락 안으로 파고들었다.
연화의 표정이 서서히 굳었다.
그리고 사내의 손이 마침내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105화. 빠져나갈 곳은 없다백소화는 복례가 들어오자 자리에서 일어났다.“네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와?”복례의 몸이 움츠러들었다.연화가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사실대로 말하면 됩니다.”백소화가 연화를 노려봤다.“죄인을 데려와 거짓말을 시킨 것입니까?”“신첩은 시킨 것이 없습니다.”“저 계집은 전하의 차에 약을 넣었습니다. 목숨을 살리기 위해 무슨 말이든 할 것입니다.”복례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신첩이 아니라 소인이 잘못한 것은 맞사옵니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하지만 약병을 주신 분은 백 소용마마이옵니다.”“거짓말이다.”“제 동생이 백씨 약방에서 일한다는 사실도 알고 계셨사옵니다.”“그것은 네가 직접 말했으니 알았던 것이다.”“약병을 건네시며 동생이 평생 굶지 않게 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백소화의 입술이 굳었다.복례가 고개
연화는 대비가 내민 봉투를 받았다.안에는 아이의 이름과 머무는 곳이 적혀 있었다.복동.도성 남쪽의 작은 절에서 지내는 열 살 아이였다.“이 아이는 누구입니까?”“복례의 동생이다.”이헌의 차에 합환산을 넣었던 궁녀.복례는 백소화에게 동생을 빌미로 협박받고도 끝까지 혼자 벌인 일이라고 주장했다.“백씨 약방에서 일한다던 동생입니까?”“그래. 염색방이 발각된 날 약방에서 달아났다.”“어째서 절에 숨어 있습니까?”“백씨 가문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대비는 연화에게 작은 패를 하나 더 건넸다.“복동은 누이에게 약을 건넨 사람이 누구인지 보았다. 그 아이를 데려오면 복례에게도 다시 말할 기회를 줄 수 있을 것이다.”“금군을 보내시면 되지 않습니까?”“갑옷을 입은 사내가 나타나면 아이가 먼저 도망갈 것이다.”“신첩도 이제 궁의 사람입니다.”“그래도 아이에게 밥부터 먹일 사람은 너밖에 없을 듯하구나.”연화는 그 말을 칭찬으로 듣기로 했다.“명을 받들겠습니다.”“아무도 모르게 다녀오너라.”“그것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왜?”“신첩이 궁문을 나서면 전하께서 아실 것입니다.”연화의 예상은 맞았다.처소로 돌아오기도 전에 이헌이 보낸 내관이 기다리고 있었다.강녕전으로 오라는
연화는 여인의 소매에서 흔들리는 노리개를 바라봤다.백소화가 늘 차고 다니던 매화 모양이었다.“그 노리개는 어디에서 났습니까?”여인의 손이 멈췄다.“사람을 잘못 보셨습니다.”“사람이 아니라 노리개를 보고 있습니다.”연화가 쌀자루를 놓지 않은 채 물었다.“백 숙의마마의 물건 아닙니까?”여인이 갑자기 자루를 세게 잡아당겼다.연화가 버티자 자루의 솔기가 터졌다.하얀 쌀이 바닥으로 쏟아졌다.여인은 연화의 얼굴을 향해 무언가를 뿌렸다.푸른 염료 가루였다.연화는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그사이 여인이 품에서 칼을 꺼냈다.“강 숙의!”이헌이 숨어 있던 담장 뒤에서 뛰어나왔다.그러나 연화가 먼저 움직였다.눈을 뜨지 못한 채 쌀자루를 휘둘러 여인의 손을 쳐냈다.칼이 바닥에 떨어졌다.연화는 여인의 허리를 붙잡고 그대로 넘어뜨렸다.둘은 쏟아진 쌀 위를 굴렀다.여인이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쳤지만 연화는 팔을 놓지 않았다.“이것도 놓으면 도망갈 것 같습니다.”“눈부터 떠라!”이헌이 달려와 연화의 얼굴을 확인했다.“눈에 들어갔느냐?”“감고 있어서 괜찮습니다.”“그러면서 어떻게 사람을 잡았지?”“앞에 있었으니까요.”“안 보였잖아.”“도망가는 방향은 문밖뿐이지 않습니까.”
연화는 사내의 팔을 등 뒤로 꺾었다.“백씨 약방에서 왔습니까?”사내는 입을 다문 채 몸을 비틀었다.“대답하지 않으면 더 아픕니다.”“후궁이 사내를 바닥에 깔고 앉다니.”“도둑을 잡는 데 후궁과 궁녀가 따로 있습니까?”연화가 팔에 힘을 주자 사내가 이를 악물었다.“놓으십시오.”“싫습니다.”“놓지 않으면 후회할 것입니다.”“놓으면 도망가잖아요.”그 순간 사내의 반대편 소매에서 짧은 칼이 떨어졌다.상궁이 비명을 질렀다.사내는 칼을 움켜쥐고 연화의 다리를 향해 휘둘렀다.연화가 몸을 틀었지만 칼끝이 치맛자락을 길게 찢었다.사내는 연화의 손에서 빠져나와 문으로 달렸다.그러나 두 걸음도 가지 못했다.연화가 찢어진 치맛자락을 걷어 올린 뒤 사내의 허리를 끌어안았다.“놓으라고 했지!”“싫다고도 했습니다.”연화는 사내를 그대로 들어 올려 바닥에 메쳤다.쿵!사내의 손에서 칼이 튕겨 나갔다.연화가 다시 그의 등에 올라타 팔을 붙잡았다.“칼까지 꺼냈으니 죄가 더 커졌습니다.”“이 미친 계집이…….”“말을 나쁘게 하면 하나 더 늘어날 것 같습니다.”그때 창고 밖에서 서진우가 금군과 함께 들어왔다.“강 숙의마마.”“늦으셨습니다.”
이헌은 장부를 펼쳤다.연화가 그의 옆으로 바짝 붙어 앉았다.“여기부터 이상합니다.”“무엇이?”“쌀가루는 열 자루가 들어왔는데 소주방에는 여덟 자루만 왔습니다.”“어제 밝혀낸 일 아니냐?”“어제 것은 지난달 장부입니다. 이것은 석 달 전 것입니다.”연화가 그 앞의 장을 펼쳤다.석 달 전에도 쌀가루 두 자루와 꿀 한 항아리가 사라졌다.넉 달 전에는 참기름과 잣이 줄어 있었다.“한 번이 아니었군.”“그래서 지난 장부를 모두 가져왔습니다.”이헌이 옆에 쌓인 장부를 바라봤다.“이것을 오늘 밤 전부 보겠다는 것이냐?”“전하께서 도와주신다고 하셨지 않습니까.”“나는 다른 상을 받으러 왔다.”“밤란은 다 드셨습니다.”“그것 말고.”이헌이 연화의 허리를 끌어당겼다.연화의 손에서 붓이 기울며 장부 위에 긴 먹줄이 그어졌다.“전하 때문에 장부를 망쳤습니다.”“내가 새것으로 가져다주마.”“새 장부에는 지난 기록이 없지 않습니까.”“옮겨 적으면 된다.”“누가요?”“네가.”연화가 그를 빤히 바라봤다.“전하께서 망치셨으니 전하께서 적으셔야 합니다.”“왕에게 장부를 베끼라고 시키
다음 날 아침, 연화와 백소화는 대비전의 작은 소주방에 마주 섰다.준비된 재료는 같았다.쌀가루와 꿀, 밤, 잣, 대추, 계피, 참기름.도구도 절구와 체, 다식판 하나씩이 전부였다.대비가 두 사람에게 내린 시간은 한 시진이었다.백소화가 소매를 걷으며 말했다.“궁녀의 도움을 받을 수 없으니 지금이라도 포기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백 숙의마마께서는 다과를 직접 만들어 보셨습니까?”“어릴 때 가문의 숙수에게 배웠습니다.”“그럼 신첩보다 잘하시겠네요.”백소화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연화를 봤다.“벌써 패배를 인정하는 것입니까?”“아닙니다. 잘하신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연화는 밤이 담긴 소쿠리를 자신의 앞으로 당겼다.백소화가 고른 것은 다식이었다.쌀가루를 곱게 체에 내린 뒤 꿀을 섞고, 붉은색과 푸른색 물을 들였다.손놀림에는 막힘이 없었다.다식판에서 꽃과 나비 모양의 다식이 찍혀 나왔다.연화는 삶은 밤을 절구에 넣었다.쿵. 쿵.힘을 줄 때마다 절구가 흔들렸다.밖에서 지켜보던 상궁이 걱정스럽게 말했다.“절구가 깨지는 것은 아니겠지요?”공주가 고개를 저었다.“사람도 메치는 아이인데 절구쯤은 견뎌야지.”백소화가 연화를 흘겨봤다.“다과를 만드는 것인지 절구를 벌하는 것인지 모르겠군요.”“밤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밤이 아니라 힘을 조절하지 못하는 것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