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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64화

작가: 코코넛 서고
오후가 되자 연풍이 무현을 상왕부로 데려왔다.

지팡이를 짚으며 걸어 들어온 그는 키가 크지 않았으나 걸음은 무척 느렸다.

거무스레하고 거친 얼굴에는 오랜 세월 햇볕에 그을린 흔적이 남아 있었다.

“소인 무현, 상왕과 왕비 마마께 인사 올립니다.”

연기준은 그에게 일어나라 하고 자리에 앉도록 권했다.

서인경은 자연스레 궁금해져 물었다.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

무현이 대답했다.

“소인은 올해 서른다섯입니다!”

서른다섯. 이 시대 수명으로는 이미 반평생이 지나버린 나이였다.

전생의 전반을 열셋 째 왕야를 따라 전장을 누볐다. 이제는 한쪽 다리를 잃어 평생 정상적인 삶을 살기 어렵게 되었지만 그런 희생을 감수하며 나라를 지킨 사람 앞에서 서인경의 마음속에는 진심 어린 경의가 올라왔다.

무현은 서인경이 자신을 바라보자 어쩐지 쑥스러워 당황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왕야, 왕비 마마. 오늘 소인을 부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러자 바로 서인경이 대답했다.

“옛날에 열셋 째 왕야를 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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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간을 거슬러   제1177화

    자신이 계략에 말려들었다는 걸 알면서도 부생의 얼굴에는 잠깐 스친 놀라움뿐이었다. 이내 금세 평정을 되찾은 그녀의 입가에는 냉소가 번졌다.그녀의 저 확신에 찬 태도에 서인경은 문득 무언가를 짐작해냈다.“전력을 다 끌어모았다고? 연강호가 혼자 돌아왔을 리 없지. 내 신분을 이용해서 각국의 민심을 끌어들였다는 것이냐?”서인경은 단은설이 죽기 전, 이미 자신의 신분을 이야기꾼에게 알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이후로, 이야기꾼은 그녀의 출생과 과거를 온 세상에 퍼뜨렸다.하지만 예상했던 위험은 좀처럼 닥쳐오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서인경을 찾아온 이는 아무도 없었다.그전까지 그녀는 이곳이 워낙 은밀한 데다 연기준이 충분히 자신을 보호하고 있기 때문이라 여겼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었다. 연강호가 각국의 세력을 모으고 있었던 것이다.어쩌면 단은설이 서인경의 신분을 세상에 드러내려 했던 그 순간부터, 이미 모든 것은 준비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부생이 득의양양하게 웃음을 터뜨렸다.“그래서 뭐 어쩌라고요? 무섭죠? 백 년 전에도 저 사람들은 일불락을 짓밟았어요. 지금도 똑같이 할 수 있습니다. 여길 쑥대밭으로 만들고, 당신이랑 당신 아들을 붙잡아서 평생 가둬버릴 거예요. 그때 가서 당신은 온 세상의 공적이 될 텐데 폐하께서 과연 당신을 지켜줄까요?”부생은 연기준을 위해서라면 이미 이성을 잃은 상태였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서인경은 백 년 전의 일이, 오늘 이 작은 객잔에서 되풀이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는 늘 설산으로 돌아가 일불락을 다시 세우는 그날에나 마주할 일이라 여겼다.게다가 연강호가 그 일을 쉽게 세상에 드러낼 리 없다고도 믿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백 년을 살아온 그 괴물 역시 세상의 표적이 될 테니까.하지만 지금 보니, 그녀는 연강호를 너무 얕보았다.그를 궁지로 몰아넣으면 그는 백 년 전의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저지를 수 있는 자였다.서인경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부생은 더욱 기세를 올렸다.

  • 시간을 거슬러   제1176화

    “네 말에도 일리는 있다. 헌데 네가 말했듯, 그건 예부터 그래왔던 이야기일 뿐이지, 지금의 이야기는 아니다. 본궁은 여자들끼리 서로 다투는 짓은 좋아하지 않는다. 오직 실력으로 승부하는 걸 좋아하지. 연기준에게 정말 다른 여자가 생겼다면… 지금의 나는, 여기 앉아 있지도 않았을 거야.”부생의 입가가 순간 굳어졌다.‘여자들끼리 다툰다’는 그 말이 머릿속에서 한참을 맴돌았다.“그게 무슨 뜻입니까?”서인경은 그녀 앞에 놓인 찻잔을 가리켰다.“앉아서 차 한 잔 마시고 좀 쉬거라. 방금 소식을 전하러 다녀오느라, 꽤 힘들었을 텐데.”부생의 굳은 표정이 입가에서부터 머리끝까지 번져갔다. 온몸이 서서히 저려오는 듯했다.“무슨 소식을 말입니까?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어머, 이제 마마라고도 안 부르고 자세를 낮추지도 않는구나. 변하는 태도가 참 빨라.”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부생은 움찔했다.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는 순간, 이미 떠난 줄 알았던 봉한설이 꼬막이를 품에 안은 채 2층에서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부생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얼굴 가득 번졌다.“당신… 분명 떠난 거 아니었습니까?”왜 아직 여기 있는 거지? 게다가 대황자까지 안고서. 서인경을 배신한 주제에 어째서 여전히 그녀의 아이를 돌보고 있는 걸까?꼬막이는 입에 고구마 말랭이를 물고 있었다. 봉한설이 밖에 나갔다가 사온 간식이었다.부생의 말을 듣자, 잔뜩 침이 묻은 고구마를 입에서 꺼내며 말했다.“누님은 안 갑니다. 누님이 그러는데, 제가 있는 데에는 누님도 있을 거래요!”봉한설은 웃으며 꼬막이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우리 대황자 전하의 말이 맞습니다. 저는 평생 대황자를 떠나는 시간이 열두 시진을 넘지 않을 거예요.”요즘 꼬막이는 다른 사람이 볼을 만지는 걸 싫어했지만, 봉한설만은 예외였다.그는 입을 쭉 내밀어 봉한설의 뺨에 쪽 하고 입을 맞추며 고구마 냄새가 묻은 침 자국을 남겼다.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에 서인경조차 살짝 질투가 일

  • 시간을 거슬러   제1175화

    부생이 객잔으로 돌아왔을 때, 서인경은 이미 방을 나와 있었다.홀로 앉아 있을 뿐, 꼬막이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서인경의 안색이 썩 좋지 않았다.촌장 부인이 다가와 찻주전자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는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마마,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예로부터 황제에게 삼궁육원이 없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폐하께서 원치 않으셔도, 대신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이 고비 하나 넘기지 못하시면 앞으로 더 괴로워지실 겁니다.”서인경은 이마를 짚은 채, 답답한 듯 시선을 떨구었다.“본궁이 다른 여인을 들이는 걸 막겠다는 게 아니다. 헌데 봉한설은 안 된다. 그 아이는 본궁이 가장 믿었던 사람이다. 그런 아이가 어찌 배신을 할 수 있겠느냐?”그 목소리에는 분노와 함께, 지워지지 않은 서글픔이 묻어 있었다.문가에 서 있던 부생의 입가에 비웃음이 번졌다. 남자를 다룰 줄 모르면 남이 먼저 차지하는 걸 탓할 수 없는 법.봉한설 같은 풋내기 계집은 아무것도 아니다. 연기준이 그녀를 찾은 것도 그저 한때의 신선함 때문일 뿐.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변변한 귀비의 자리조차 얻지 못했을 리 없다. 기껏해야 몸을 데워주는 시중이나 드는 처지일 뿐이다.부생은 자신이 그녀를 ‘언니’라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체면을 세워준 것이라 여겼다. 지금의 그녀는 전에 없던 자신감에 차 있었다. 연기준이 거리를 두는 건, 서인경이 소란을 피울까 봐서일 뿐. 서인경이 연강호에게 붙잡혀 사라지기만 하면 진국의 황후 자리는 결국 자신의 것이 될 터였다.그 생각에 부생의 가슴은 억누를 수 없이 들떠올랐다. 그녀는 일부러 얌전한 척하며 서인경 곁으로 다가갔다.“마마, 폐하께서는 풍채가 뛰어나고 위엄이 넘치시니, 봉한설 같은 계집이 마음이 흔들린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폐하께서 그녀를 거두신 것도 그저 젊음에 혹해 잠깐 흥미를 느끼신 것뿐이지요. 폐후를 언급하신 적도 없으니, 마마께서는 여전히 황후이십니다. 황후는 곧 폐하 마음

  • 시간을 거슬러   제1174화

    “제가 아버지 말대로 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 화내시지 않을까요?”서인경은 아이의 표정을 보고, 그가 무엇을 혼란스러워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어쩌면 연기준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아직 이 아이에 대해 아는 것이 적다는 것을.꼬막이는 영리해야 할 때는 어딘가 어리숙하고, 어리숙해야 할 때는 또 지나치게 영리했다.연기준은 어제까지만 해도,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오늘 그는 또 떠나버렸다.서인경은 그를 탓하지 않았다. 이 일은 애초에 그녀가 강하게 요구해 만든 판이었으니까.연강호가 스스로 승기를 쥐었다고 믿어야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일불락을 다시 일으키는 것에 있어 연강호는 가장 큰 장애물이자 서인경이 반드시 넘어야 할 존재였다.백 년 전의 그 일에 대해 그녀는 반드시 천하 사람들에게 하나의 답을 내놓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설령 일불락이 다시 일어난다 해도 연강호 같은 자들이 또다시 그곳을 노릴 것이다.연강호의 불사의 비밀이 도대체 무엇인지, 서인경은 그것을 분명하게 세상에 밝혀야 했다.연기준이 사람들을 이끌고 떠나자 객잔은 순식간에 썰렁해졌다.부생은 적당한 핑계를 대고 밖으로 나섰다.촌장 부인은 그 모습을 보자마자 곧바로 대장에게 이층으로 올라가라고 시켰다.“가서, 황후 마마 방에 남은 그릇들 좀 치워 내려오거라.”대장은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네? 무슨 그릇이요? 마마께서는 아직 방 안에서 화내고 계신 거 아니었습니까? 전 부생 아가씨 따라 나가서 좀 돌아볼까 했는데요.”그러자 촌장 부인은 제 아들을 노려보았다.“가라면 갈 것이지 말이 왜 그렇게 많은 것이냐! 그리고 잘 들어라, 그 부생이랑 어울릴 생각하지 말거라. 내가 알게 되면 다리부터 부러뜨릴 것이다!”이 집안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그 부생이라는 계집이 절대 단순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오직 자기 아들만이 그저 순진한 처녀라고 믿고 있을 뿐이었다.멍청하기도 하지. 속는 것도 싸다.촌장 부인은 그 꼴이 못마땅해 아예 저 아들을

  • 시간을 거슬러   제1173화

    호청도 뒤따라 떠났다.촌장 일가는 당연히 서인경 곁에 남았다. 그들은 결국 서인경에게 충성을 바칠 사람들이었고 또한 연기준이 특별히 지시해 실력을 숨긴 채 서인경을 보호하도록 한 이들이기도 했다.부생은 그 자리에 서서 잠시 멍해졌다.예상하지 못했던 전개였지만 한편으로는 뜻밖의 기쁨이 스며들었다.이간질은 오래전부터 써보고 싶었던 수였다. 원래는 그저 눈엣가시 같던 봉한설 하나 치워낼 생각이었는데 서인경의 성정이 이토록 강할 줄은 몰랐다. 심지어 연기준에게까지 손을 올리다니.이제 서인경은 홀로 남은 몸. 오히려 부생에게는 손을 쓰기 더없이 좋은 때였다.다음에 할 일을 머릿속에 정리한 그녀는 곧장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때, 암위들은 이미 출발 채비를 마친 상태였다.연기준은 높은 말 위에 올라앉아 있었고 그 웅장한 체구와 옆모습의 윤곽은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그 순간, 부생은 봉한설이 왜 감히 주인의 남자를 탐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이런 남자라면 누가 욕심내지 않겠는가.그리고 머지않아 이런 남자는 그녀 부생의 것이 될 터였다.부생은 말 앞까지 다가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폐하, 봉한설 언니가 떠났습니다. 지금 황후 마마와 대황자 곁에는 시중드는 사람이 한명도 없으니 제가 남겠습니다.”연기준의 표정은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그는 눈을 살짝 내리깔았고, 부생은 그의 얼굴 절반에 남은 상처를 볼 수 있었다.그 흠집은 오히려 그의 수려한 얼굴에 또 다른 분위기를 더해주고 있었다.“좋다. 수고가 많다. 짐을 대신해 그녀를 잘 달래 보거라. 네 말에 귀를 기울인다면, 돌아왔을 때 후하게 상을 내리겠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주마.”‘무엇이든’이라는 그 한마디에 부생은 완전히 마음을 빼앗겼다.그녀는 서인경이 자신의 말을 듣게 만들 생각이 없었다.왜냐하면 그녀는 모든 것을 원했고 그중에서도 황후의 자리를 가장 원했으니까.연기준은 암위들을 이끌고 말을 몰아 떠났다. 객잔은 다시 고요해졌다. 부생은 차를 한 주전자

  • 시간을 거슬러   제1172화

    “말도 안 돼!”촌장 부인이 가장 먼저 고개를 저었다.어족의 사람들은 태생부터 수령 일족에 대한 충성을 뼛속 깊이 새기고 있었다.남자 하나쯤은 말할 것도 없고, 설령 수령이 자신의 신분을 상징하는 용두 반지를 꺼내며 주겠다고 해도 어족의 사람들은 결코 그것을 받지 않을 성정이었다.부생은 손가락을 꼬아 쥐며 낮게 입을 열었다.“정말이에요. 황후 마마께서 말씀하시는 걸 들었어요. 봉한설 언니더러 다시는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목을 베어버리겠다고요. 봉한설 언니도 방금 황후 마마께 머리를 조아리면서, 그동안의 주종의 정을 다 갚았다고 했어요.”촌장 부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어족의 사람이 수령과 남자를 두고 다툰다니.연기준이 아무리 뛰어난 인물이라 해도 그렇지, 여자가 목숨을 내걸고 쟁탈할 가치가 있는 남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백 년 전, 일불락이 멸망했던 그 참혹한 교훈이 아직도 부족하단 말인가?부생의 말은 진심이 담긴 듯 또렷했다. 대장은 그 말을 듣자마자 완전히 믿어버렸다. 그는 분노를 참지 못한 채 혀를 차며 말했다.“이 계집애가 나이는 어려 보이는데 욕심은 크군요. 다음에 만나면 제가 외삼촌으로서 제대로 가르쳐주겠습니다.”그 말에 촌장 부인이 옆눈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저 정도 머리로 무슨 외삼촌 노릇을 하겠다고. 봉한설이 그를 눈에나 두겠는지 모르겠다.하지만 촌장 부인은 한편으로 새삼 다행이라 여겼다. 예전에 지하흑시를 맡지 않은 것을 말이다.저런 아들을 두고 그 일을 맡았더라면 흑시는 이미 다 말아먹었을 터였다.호청과 연풍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 모두 이 일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다만 서인경과 봉한설이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알 수 없어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그때였다. 위층에서 갑자기 쾅 하는 소리가 울렸다.곧이어 찻주전자 하나가 이층에서 날아 내려오더니 사람들 앞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 시간을 거슬러   제397화

    한 그릇의 쓴 약이라 해도 아니 독약이라 할지라도 봉한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삼켰을 것이다. 그런 결심이 얼굴에 어려 있었기에 이번에는 서인경이 일일이 숟가락을 들어 줄 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스스로 약그릇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단숨에 쭉 들이켰다.“이렇게 시원하게 약을 마시는 아이는 처음 본다. 정말 대견하고 씩씩해.”서인경의 말에는 꾸밈이 없었다. 본디 한약은 혀끝을 절여 울컥 눈물이 나올 만큼 쓰디쓴 법. 과거 의사로 일하던 시절, 서인경은 한설 또래 아이들이 약 한 모금을 넘기지 못해 부모가 눈물겹게 달래는 장면을

  • 시간을 거슬러   제366화

    서인경이 완전히 깊은 잠에 빠진 뒤, 연기준은 방 문을 닫고 전정으로 나섰다.그때, 열댓 명의 암위들이 일렬로 서서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연기준이 나오자 그들은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렸다.“저희가 임무를 다하지 못했사옵니다. 왕야께서 벌을 내리소서.”그들은 모두 왕부를 지키는 자들이었다.아침에 출문하기 전 연기준은 이미 명백히 분부했었다.“서인경이 결코 문밖을 나가지 못하게 하거라.”그러나 그들은 단 한 사람도 막아내지 못했다.“그녀는 어떻게 나간 것이냐?”선두에 선 암위가 답했다.“왕비께서는 비수

  • 시간을 거슬러   제402화

    그 둘은 얼굴이 거의 닿을 정도로 바싹 붙어있었다.그러자 연기준의 안색이 순식간에 굳어지며 낮게 꾸짖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너희들,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느냐?”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서인경은 반사적으로 충천포를 품안에 감추었다. 간신히 눈앞에 나타난 고향의 물건인데 더 이상 연기준에게 빼앗길 수는 없었다.진방옥은 태연하게 웃으며 서재 앞으로 다가왔다.“에이, 별일도 아닌데 뭘 그렇게 심각하게 구십니까? 이건 보기 드문 물건이라 전해주려고 한 것입니다. 상왕비께서 심심타 하시기에 눈요기 삼아 가져왔을 뿐이지요.

  • 시간을 거슬러   제399화

    깊은 밤, 사방은 적막했으나 진가이는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예정임의 온몸에서 몰아치는 것은 술기운이 아니라 날 선 광풍과 분노였다. 그의 기세는 사납고 손에는 여전히 주렴과 연지의 향이 묻어 있었지만 목소리에는 조금의 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하루 종일 불안에 시달렸던 진가이였으나 막상 그가 자신 앞에 서자 오히려 마음은 가라앉았다. 이미 대비해 둔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오늘의 독약은… 진국의 폐하께서 바꿔치기한 것입니다. 숙귀비에게 서가군을 맡기려는 계책, 그 대가로 오늘의 결과는 애초에 정해져 있었던 것이지요.”예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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