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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8화

Author: 코코넛 서고
서인경의 입술이 가볍게 포개졌다. 부드러운 온기가 몇 초 머물다 익숙한 숨결과 함께 이내 떨어졌다. 서인경은 조금 아쉬운 마음으로 숨을 고르는데 귓가에 낮고 다정한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넌 짐이 아니다. 내가 천 리 밖에 있어도 가장 놓지 못하는 사람이지.”

서인경은 연기준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그 순간, 그 말 한마디에 마음 깊숙한 곳이 따뜻해졌다. 마치 천 년 묵은 눈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심장 안에서 눈사태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녀는 힘껏 연기준을 벽으로 밀어붙이고 몸을 뒤집어 그를 눌렀다.

“당신 역시 제가 놓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문제를 해결 못해도 괜찮습니다. 푸른 산만 남아 있으면 땔감은 다시 생기니까요. 저는 그저 당신이 살아 있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

연기준은 망설임 없이 대답하며 다시 한번 그녀의 입술을 깊게 물었다. 익숙한 숨결들이 서로 얽혀들며 천천히 섞였고 서인경은 키스에 취해 정신이 흐릿해졌다.

불씨처럼 뜨거운 순간이었지만 하필 지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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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간을 거슬러   제910화

    연기준은 돌아서서 태황태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태황태후께서 남 탓으로 돌리는 재주는 예나 지금이나 따라올 자가 없군요.”연기준의 말투는 서슴없었고 태황태후의 얼굴은 순식간에 굳어졌다.“태황태후께서 끝까지 그녀가 무슨 말을 했다고 믿으신다면 본왕은 돌아가 직접 물어보겠습니다. 제가 모르는 어떤 진실을 알고 있기에 그토록 본왕에게 들킬까 두려워하시는지 말입니다. 어차피 태황태후께서 아무것도 말씀해 주실 생각이 없다면 본왕이 더 머물러 드릴 필요도 없겠지요. 양심전에서는 지금쯤 폐하께서 태황태후를 기다리며 조손지정을 연출하고 계실 텐데 더는 방해하지 않겠습니다.”연기준의 말에는 묘한 뉘앙스가 담겨 있었고, 태황태후의 심장은 알 수 없는 불안으로 쿵 내려앉았다.“그 말이 무슨 뜻이냐? 설마 황제의 병이 너와 관련된 일이란 말이냐?”“정말 본왕이 관련되어 있었다면 태황태후께서는 다시는 폐하를 뵙지 못했을 겁니다.”태황태후의 침전에서 연기준은 거침이 없었다. 들어올 때나 나갈 때, 마치 자기 집을 드나드는 것처럼 자유로웠다.태황태후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처음으로 깨달았다. 이 아이는 더 이상 자신의 손안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 어릴 적 거두어 들였을 때는 자신의 권력을 보태 줄 도구에 불과했는데 지금 이 도구는 하는 일마다 그녀의 뜻을 거스르고 있었다.그때 마침 밖에서 돌아온 유모가 연기준과 스쳐 지나갔다. 익숙한 옆얼굴을 보는 순간, 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잠시 후, 유모는 비틀거리듯 침전으로 뛰어 들어왔다.“태황태후 마마, 방금 그 사람… 상왕 아니었습니까?”태황태후의 얼굴은 깊이 가라앉았다.“사람을 붙여 상왕을 따라붙게 하거라. 그가 무슨 수작을 벌이는지 끝까지 지켜보도록 해.”“예!”유모는 급히 명을 내린 뒤, 태황태후 곁으로 다가왔다.“양심전에서 전갈이 왔습니다. 폐하의 상태가 매우 위중하답니다.”수많은 황제들의 죽음을 겪어온 태황태후였지만 이번만큼은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조정 안에 있는 우리

  • 시간을 거슬러   제909화

    “태황태후 마마, 폐하… 폐하께서 위독하십니다.”툭!찻잔이 발치에서 굴러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어서, 어서 나를 양심전으로 모셔라.”태황태후가 급히 몸을 일으키는 순간 검은 그림자 하나가 번개처럼 실내로 스며들었다. 검은 옷에 얼굴을 가린 자의 눈빛은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눈을 보는 순간, 태황태후는 그대로 굳어버렸다.“누구냐! 호위하라! 자객이다!”외침과 동시에 내시 하나가 정면에서 일격을 맞고 그대로 쓰러졌다. 의식을 잃은 채, 말조차 하지 못했다. 내시가 쓰러지는 모습을 본 태황태후는 오히려 이상하리만치 침착해졌다. 몇 걸음 앞으로 다가가 눈앞의 사내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연기준… 역시 너였구나. 나는 알고 있었단다. 네가 그렇게 쉽게 죽을 리 없다는 걸.”연기준은 천천히 검은 천을 벗어 던졌다. 태황태후에게 너무도 익숙한 얼굴이 드러났다.“제가 살아 있음을 알고도 왜 폐하를 부추겨 상왕부를 다시 세우셨습니까? 새로운 상왕부를 손에 넣기 위해 제가 정말 죽기를 바라신 건 아닙니까?”태황태후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아니다, 준아. 너는 오해하고 있다. 유가영이 말하지 않았느냐? 회임한 아이가 네 아이라고. 그게 아니었다면 내가 어찌 그렇게 마음 아파했겠느냐? 너의 혈육을 밖에 떠돌게 둘 수는 없었다.”연기준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정말 그 이유뿐이었습니까? 유가영이 다루기 쉬웠기에 폐하와 손잡고 제 집과 부인과 아이를 모조리 없애고 손에 쥘 수 있는 꼭두각시 하나만 남기신 건 아니고요?”태황태후는 완강히 부인했다.“그럴 리가 있느냐! 내가 아무리 서인경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해도 그 아이는 분명 황실의 핏줄이다. 내가 어찌 제 증손을 해칠 만큼 잔인하겠느냐?”연기준은 비웃듯 웃었다.“자기 친아들에게도 손을 대신 분이 증손이 뭐 그리 대수입니까?”태황태후의 얼굴이 순식간에 핏기 없이 질렸다.“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게냐! 밖의 헛소문에 휘둘려 나를 의심하는 것이냐?”설명할수록 연기준의 표정은

  • 시간을 거슬러   제908화

    서인경의 입술이 가볍게 포개졌다. 부드러운 온기가 몇 초 머물다 익숙한 숨결과 함께 이내 떨어졌다. 서인경은 조금 아쉬운 마음으로 숨을 고르는데 귓가에 낮고 다정한 목소리가 스며들었다.“넌 짐이 아니다. 내가 천 리 밖에 있어도 가장 놓지 못하는 사람이지.”서인경은 연기준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그 순간, 그 말 한마디에 마음 깊숙한 곳이 따뜻해졌다. 마치 천 년 묵은 눈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심장 안에서 눈사태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녀는 힘껏 연기준을 벽으로 밀어붙이고 몸을 뒤집어 그를 눌렀다.“당신 역시 제가 놓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문제를 해결 못해도 괜찮습니다. 푸른 산만 남아 있으면 땔감은 다시 생기니까요. 저는 그저 당신이 살아 있기만 하면 됩니다.”“그래.”연기준은 망설임 없이 대답하며 다시 한번 그녀의 입술을 깊게 물었다. 익숙한 숨결들이 서로 얽혀들며 천천히 섞였고 서인경은 키스에 취해 정신이 흐릿해졌다.불씨처럼 뜨거운 순간이었지만 하필 지금은 가장 위험한 시기였다. 연기준은 서둘러 떠나야 했기에 서인경의 숨결에 흔들려 심장이 터질 듯했지만 결국 스스로를 다잡아 그녀를 놓아 주었다.두 사람은 말없이 깊게 서로를 바라봤다. 연기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몸을 돌려 떠났다. 한 마디라도 더 했다간 정말 떠나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연기준이 떠난 뒤, 서인경은 그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다는 집념 하나로 그 자리에 가만히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그저 손 놓고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안상재와 흔귀인이 남겨둔 식함을 정리해 그 안에 태를 안정시키는 귀한 약초 두 뿌리를 넣고 다시 봉한 뒤 원래 있던 구멍에 되돌려 두었다.한 시진쯤 지나자 풀숲이 다시 흔들렸다. 잠시 후, 사방이 고요해지자 서인경은 다가가 확인해 보았다. 식함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쪽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 그녀가 펼쳐 보니 큼지막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황제 위독. 모든 황자, 전각에 모여 효를 다하라.’서인경은 쪽지를 손안

  • 시간을 거슬러   제907화

    그녀가 오래도록 기다려 온 전란이 마침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연기준은 암선에게 일찍이 말해 둔 적이 있었다.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자신을 찾지 말라고, 정말 급한 일이 생기면 자신이 먼저 방법을 써서 연락하겠다고.그런데 아직 밤도 되기 전, 갑자기 뜰 안에서 앵무새 울음소리가 울렸다. 뒤이어 검은 그림자가 담장을 넘겨 날아오르더니 순식간에 그의 앞에 내려앉았다.그는 무릎을 꿇고 아뢰었다.“왕야, 폐하께서는 아직 왕야께서 살아 계신다고 의심하고 있습니다. 이미 전 경성을 봉쇄하고 수색에 들어갔습니다. 폐하께서는 진작부터 대비를 해두었기에 상황이 왕야께 불리해질까 염려됩니다. 부디 즉시 궁을 떠나십시오. 저희 형제들이 목숨 걸고 길을 열겠습니다.”서인경은 손에 들고 있던 식함을 떨어뜨리며 곧장 일어섰다.“뭔가 알아챈 것이냐?”연기준은 눈짓으로 그녀를 진정시키고 손을 들어 호위에게 일어서라 했다.“진방옥에게서 답은 왔느냐?”그는 고개를 저었다.“진 공자는 경성을 떠난 뒷자취가 묘연합니다. 성 밖의 군대도 아직 아무런 움직임이 없습니다.”연기준은 입궁하기 전, 성 밖 병력을 움직일 수 있는 패를 진방옥에게 맡겼었다. 그가 외곽에서 군을 이끌고 대기하며 지원해 주기를 바랐지만 지금까지 아무 소식도 없다는 건 그쪽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었다.연기준의 명령 없이는 누구도 그 군대를 움직일 수 없었다.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낮게 말했다.“자시가 지나도 본왕에게서 신호가 없으면 모두 원래 자리로 철수하거라. 목숨을 지키고 적당한 시기를 기다려야 한다.”“그럼 왕야는요? 이곳에 계시면 너무 위험합니다. 언제 들킬지 모릅니다.”연기준은 손을 내저었다.“본왕은 스스로 나갈 길이 있다. 너희는 본왕을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하거라. 흔적을 남기지 말고 누가 묻거든 바로 선을 그어라. 필요하다면 본왕을 적으로 취급해도 된다.”호위는 잠시 멈칫했다. 이 상황에서도 연기준은 여전히 그들 같은 하수인의 목숨을 먼저 걱정하고 있었다.서인경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

  • 시간을 거슬러   제906화

    서왕비는 말을 여기까지 하고는 담담히 자리에서 일어섰다.“지금의 서왕은 권력도, 세력도 없지만 대신 한 몸 편히 사는 삶을 얻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가 원하던 삶이지만 마마께서는 아마 이해하지 못하실 겁니다. 아까 마마께서 제게 물으셨지요. 도대체 무엇을 아직 붙들고 계시느냐고. 마마의 집착이 무엇인지는, 사실 저는 궁금하지도 않고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다만 한마디만 드리고 싶습니다. 사람은 인생 반쯤 살고 나면 자기 것이 아닌 것 때문에 마음을 소모해서는 안 됩니다. 두 나라가 수십 년 동안 평화를 유지하고 백성들이 전쟁을 겪지 않고 살아온 데에는 분명 마마의 공로도 큽니다. 헌데 더 큰 이유는 진국이 점점 강성해졌기 때문입니다. 반면 요동은 최근 삼 대에 걸쳐 현명한 군주가 한 명도 없었습니다. 마마께서 시집가지 않았다면 요동은 진작 열강에게 갈기갈기 나뉘었을 겁니다. 스스로를 지키기도 버거운데 어찌 남을 침략할 여력이 있었겠습니까? 진국의 황제는 본래 확장 욕심이 없는 분이고 늘 남이 나를 범하지 않으면 나도 남을 범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지요. 요동은 그저 운이 좋았던 겁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마마께서는 굳이 시집갈 필요도 없었을 거예요. 예전의 열셋 째 왕야든, 이후의 상왕이든, 요동을 평정하는 일쯤은 어렵지도 않았을 테니까요.”금수 대장공주는 스스로를 여중호걸이라 여겼고 야심과 책략에서도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지금, 눈앞의 이 여자에게서 처음으로 자신에 버금가는 기세를 느꼈다.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또 한 번 누군가에게 밀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한 번 졌던 사람이었으니까.금수 대장공주가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서왕비, 그 말이 무슨 뜻이냐? 지금 네 말, 요동과 진국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의도가 있는 게 아니냐?”서왕비는 고개를 저었다.“저는 그런 말 한 적 없습니다. 마마께서 제게 씌우신 이 죄목, 저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저는 그저 마마께 신중히 생각해 보시라는 말씀을 드

  • 시간을 거슬러   제905화

    봉인해 두었던 옛 기억을 떠올리자 그녀의 상처는 마치 다시 한 번 찢기는 듯 아려왔다.서왕과 수십 년을 함께 살아오며 그의 입에서 다른 여자의 이름을 들은 것은 그날 단 한 번뿐이었다. 그러나 그 한 번이 평생 잊지 못할 정도로 강력했다.그렇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질까? 결국 두 사람은 풍파를 함께 넘기며 평생을 살아오지 않았던가?서왕은 그녀의 말이면 무엇이든 따랐고 아이들은 그녀를 공경하고 효도했다. 그 모든 것이 그날 밤의 불공정을 이미 오래전에 상쇄해 버렸다.서왕비는 속 좁은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세상을 꽤 넓게 보는 사람이었다. 자신은 신분으로 보나 집안으로 보나 명백히 고가(高嫁)였다. 왕실의 칙혼으로 평생 올려다보던 사람에게 시집을 간 것이다. 그러니 모든 것이 뜻대로 흘러갈 리 없다는 것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당시 그녀는 남편이 후궁을 들일 각오까지 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혼인은 일생일부라는 뜻밖의 결말을 안겨 주었다.그래서 그녀는 참았다. 신혼 첫날 밤, 남편이 다른 여자의 이름을 불렀어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길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은 금수 대장공주가 서왕에게 품고 있던 원망을 어느 정도나마 누그러뜨려 주었다.아, 그의 마음속에는 아직도 내가 있었구나.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는 여자라도 감정이라는 건 이렇게 사소한 단맛 하나에 쉽게 만족해 버리는 법이다.금수 대장공주는 몸에 돋쳐 있던 가시 절반을 거두었고 태도 또한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서왕비, 너도 분명 궁금하겠지. 본궁이 오늘 굳이 너를 따로 불러낸 이유가 무엇인지. 이제는 각자 가정을 꾸린 지 오래인데, 세상 누구나 우리 사이엔 더는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할 텐데, 본궁은 도대체 무엇을 아직 붙들고 있는지 말이다.”서왕비는 여전히 침착했다. 금수 대장공주의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에도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아마도 마마께서는 얻지 못한 남자를 하필이면 저 같은 요리병의 딸이 얻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리시는 게 아닐까요?”금수 대장공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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