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12화

Author: 한마음
서씨 가문은 대대로 어의에 몸담은 가문이었다. 그러나 서주행은 별종이라 출중한 의술 실력을 가졌으면서도 그것을 드러내지 않았다. 환자가 코앞에서 쓰러진다고 해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거들떠도 보지 않는 성격인데 어쩐 일인지 손기욱과는 말이 잘 통한다며 자청해서 그의 어깨를 치료해 주러 온 벗이었다.

그는 연회 다음날에 손기욱이 최음제에 중독되었다는 것을 전해들었으나, 정확히 어떤 방법으로 그것을 해소했는지는 손기욱의 입에서 듣지 못했다.

손기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날 워낙 연회에 온 사람이 많아서 조사가 어려웠어.”

서행주는 그의 안색을 살피며 농을 던졌다.

“어느 집 아씨가 자네의 용모에 반해 그런 방식을 쓴 게 아닐까? 어차피 성공하지도 못했으니 찾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겠지. 그것보다 요즘 자네를 위해 지압을 해준다는 시녀는 어딨어? 어서 불러오게.”

손기욱은 한심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자네는 말이 너무 많아. 참새처럼 시끄러워.”

마침 죽림의 시끄러운 소리에 이끌린 참새 한 마리가 담벼락에 와서 앉았다.

서주행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자네는 그 입이 밉상이야. 이러니 여태 혼인을 못했지! 난 조만간에 먼 길을 떠나야 하네. 그래서 그 시종을 불러 지압 기술을 좀 가르쳐 주려고 그런 것뿐이야.”

“인주로 가는 건가? 그 여인은 이미 시집을 갔어. 어찌하여 그런 헛수고를 하려는 건가?”

서주행도 손기욱과 마찬가지로 스물다섯이 넘도록 아직까지 독신이었다.

“누가 그 사람을 찾으러 간다고 했어?”

서주행은 부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리며 말을 끊었다.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죽림 쪽은 엄청 시끄러웠다.

다과회라고 해도 사실상 그저 술을 마시고 시를 짓거나 음악을 들으며 그림을 감상하는 놀이에 지나지 않았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죽림 안쪽에는 삼층 높이의 별채가 하나 있었는데 취옥헌이라 불렀다. 취옥헌은 무성하게 우거진 대나무숲 사이에 반쯤 가려져 있었다.

진눈개비가 휘날리는 가운데 겉보기에는 우아한 청년들이 누각 안에서 열띤 토론을 펼치고 있었다. 시녀들은 옆에서 사슴고기를 굽고 술병을 데웠다. 누군가는 창가에 기대어 눈 오는 경치를 감상하고 누군가는 손을 내밀어 대나무를 어루만지니 참으로 즐거운 분위기가 흘러넘쳤다.

술잔이 어느정도 오가자, 한량 몇몇은 취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워낙 기루의 단골손님들이라 술에 취했다는 핑계로 시중드는 시녀들을 붙잡고 이러쿵저러쿵 평을 내렸다. 한 외모 하는 시녀들은 그들의 음흉한 시선에 농락당했다.

그들 중 한명은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비웃음을 날리며 손유민에게 말했다.

“무안 후작가에는 얘네들보다 어여쁜 애들이 없어?”

“유민이 너 시종들 중에 절세미인이 있다더니 꿈에서 본 건 아니겠지? 그게 아니라면 네 안목이 이상하거나.”

그 말에 모두가 큰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 모두 손유민이 예전에 한 말들이 허풍이라고 생각했다.

손유민은 기분이 상해 불쾌한 얼굴로 어린 시녀 한 명을 불러세웠다.

“연경이는 어디서 뭘 하느냐? 당장 그 애를 불러와!”

그는 옥처럼 해맑은 연경의 얼굴을 본다면 저들도 자신을 비웃지 못할 거라고 자신했다.

‘멍청한 것들!’

어린 시녀가 허둥지둥 연경을 찾아왔을 때, 연경은 숙취해소탕을 달이고 있었다. 혹시라도 손유민이 술기운을 빌미로 자신에게 함부로 굴까 걱정되어 친히 약재로 배합한 탕약이었다.

손유민이 자신을 찾는다는 말을 듣고 연경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작은 마님께서는 내게 더 중요한 일을 맡기셨어. 마음대로 자리를 비울 순 없어.”

어린 시녀는 울상을 지으며 그녀에게 애원했다.

“연경 언니, 어서 가봐요. 언니가 안 가면 도련님께서 저를 크게 벌하실 거란 말이에요.”

연경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넌 네가 할 일을 해. 어차피 도련님께서는 네 얼굴 기억도 못하실 거야.”

하지만 어린 시녀는 전전긍긍하며 자리를 뜨지 않았다.

두 사람이 대치 중일 때, 채련이 찾아왔다.

연경은 이대로 가다가는 송지운의 귀에까지 들어갈까 두려워, 하는 수 없이 취옥헌으로 향했다.

그녀는 취옥현에 들어갈 때부터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지만 손유민은 한눈에 그녀를 알아보았다.

“연경아, 이리 와서 술을 따르거라.”

손유민과 자주 어울리던 한량들은 연경이 요물이라는 소문을 들었기에 그녀의 이름을 듣자마자 굶주린 늑대처럼 그녀를 쳐다보았다.

연경은 등에 가시가 돋힌 듯한 느낌을 억지로 참으며 사람들에게 예를 갖춘 뒤, 고개를 숙인 채, 술병을 잡으러 갔다.

그 순간 누군가의 손이 그녀의 손등 위로 내려오더니 그대로 손을 움켜쥐었다.

“유민 형님이 잘못했네. 아리따운 여인은 아껴주어야 하는 법이거늘. 뜨거운 술병에 손이라도 데이면 어쩌려고?”

전생에 연경은 이때 화들짝 놀라서 실수로 술병을 엎어 이자의 몸에 쏟아부었다.

그는 소탈한 체하며 옷을 갈아입을 필요 없다고 말했으나, 연경에게 수건을 가져다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젖은 옷을 닦아달라고 요구했었다.

하필 술을 부은 부위가 그의 허벅지였고 연경은 재빨리 자국을 닦으려다 그대로 그자의 품에 안겨버렸다. 이 짐승 같은 놈들은 그날 그녀를 노리개처럼 대하며 희롱했다.

취옥헌에서 시중드는 시녀들은 모두 송지운이 저택으로 데리고 들어온 시녀들이었기에 손유민은 아무런 눈치도 볼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문제가 생기더라도 그가 한 일이 아니니, 기껏해야 노후작과 손기욱에게 잔소리 몇 마디 듣는 걸로 끝나리라는 생각이었다.

이 한량들에게 있어서는 술에 취해 미천한 시녀 한 명 희롱한 것에 불과하니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어차피 주인들에게 매매 계약을 쓴 시녀들은 인간 축에도 끼지 못했다.

그래서 연경은 이번에는 한 방울도 흘리지 않으려고 술병을 꽉 잡았다.

그러나 그녀의 손을 움켜쥔 자는 손을 놓으려 하지 않고 손가락 끝으로 그녀의 손등을 지저분하게 어루만졌다.

연경은 역겨움에 치가 떨렸으나, 반박 한마디 하지 못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간청했다.

“소인이 나으리께 한잔 따르겠습니다.”

“술만 따르면 무슨 재미냐? 나랑 같이 한잔하자꾸나.”

말을 마친 사내는 연경의 허리를 껴안으며 자신의 술잔을 연경의 입가로 들이밀었다.

오늘 이런 장면만은 피하려고 그렇게 노력했지만 상황이 전혀 달라지지 않자, 연경은 입술을 깨물며 손유민에게 애원의 눈길을 보냈다.

전생의 흐름대로면 손유민의 통방이 되기까지 아직 한 달 좀 더 남았으니 그에게 기대를 걸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여러 놈에게 더럽혀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한 놈에게 당하는 게 마음이 편했다.

“도련님, 소인은….”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전해졌다.

“오늘 저택 안이 시끄럽다 했더니 너희들이 여기서 풍기를 흐리고 있었구나.”

연경을 껴안고 있던 사내가 급하게 손을 내렸다.

연경은 눈시울을 붉히며 갑자기 나타나준 손기욱을 바라보았다.

그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냉기를 풀풀 풍기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등장에 시끄럽게 떠들던 자들이 입을 다물며 취옥현 전체가 고요해졌다.

이 상황이 가장 불안한 자는 단연 배 시랑의 차남 배욱진이었다.

“아… 아버지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손유민은 재빨리 일어나 손기욱에게 예를 행했다.

손기욱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연경을 발견하고 손짓했다.

“이리 오거라.”

연경은 도망치듯 그의 앞으로 달려가서 예를 갖추었다.

손기욱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 자식이 방금 어느 손으로 널 만졌지?”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시녀의 생존수칙   제242화

    아진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행동거지도 대범하고 예의도 바르고 사람들이 저희를 비웃을 때 불쾌한 표정을 지으시며 따라 웃지도 않으셨어요.”연상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으리는 안목이 뛰어나신 분이니 연 이랑도 보기엔 괜찮은 분으로 보입니다.”강씨 어멈도 고개를 끄덕였다.“겉보기엔 괜찮아 보이는데 사람 마음은 시간이 지나야 안다고 한동안은 더 두고보자꾸나. 나으리께서 이렇게까지 정성을 쏟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어야 할 텐데, 지난번처럼….”노인은 말을 하다 말고 한숨을 쉬었다.한편, 금수원으로 돌아온 송지운은 방 안에 놓인 상자를 보고 불쾌한듯 오만상을 썼다.그 모습을 본 지연도 입을 삐죽였다.“대체 사람을 뭐로 보고 이딴 걸 선물이라고 가져왔을까요?”송지운도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축복이라고 하면서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이런 걸 주다니. 큰댁과 둘째 숙부네는 날 얼마나 쉽게 생각하시겠어? 나으리의 유모라고 하더니, 내 뱃속의 아이까지 무시하는 게지.”“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도련님께서 최근 밤을 새우며 열심히 글공부를 하시니 분명 장원급제할 것이고 그때가 되면 아무도 저희 금수원을 무시하지 못할 거예요!”송지운은 그제야 표정을 풀었다.“그래. 도련님께서 최근 수고가 많으시긴 하지. 숙취 해소탕은 끓였느냐? 부엌에 드실 것 좀 준비하라 하거라. 안 봐도 술만 드시고 안주도 잘 안 집으셨을 텐데….”한참 후, 손유민이 시종들의 부축을 받으며 돌아왔다.송지운은 친히 그의 얼굴을 닦아주고 지연을 시켜 숙취해소탕을 가져오게 했다. 눈을 뜬 손유민은 상자를 보자 혐오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잘 돌아오셨습니다. 이 떡은 어찌 처리할까요? 조금 드시렵니까?”송지운은 버리려다가 그래도 손유민의 의견을 물어보기로 했다.손유민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용의백부의 부마가 과거시험 볼 적에 그 댁 할머니께서 뭘 선물하셨는지 아느냐? 필중의 의미로 떡과 함께 옥붓을 선물하셨다.”송지운이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남들은 귀하게 생각할지 몰라도

  • 시녀의 생존수칙   제241화

    연경은 딱히 잘못한 게 없었다. 그러나 손기욱이 그녀를 위해 강씨 어멈을 다시 불러온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노부인은 아들이 들으면 또 사이만 멀어질 것 같아 병풍 뒤를 살피고는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강씨 어멈은 그제야 연경을 바라보며 말했다.“다들 앉으시지요.”큰댁 노부인과 둘째네 노부인은 눈을 흘기며 싸늘히 말했다.“어멈은 참 편하게 구는군. 마치 자기가 주인이라도 된 것처럼 말이야.”강씨 어멈은 말없이 그들을 힐끗 바라만 보았다.연회가 시작되자 사람들은 손유민에게 축복의 말을 전한 후, 식사를 시작했다. 남자들 상은 술잔이 오갔으나, 여자들 상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하고 이따금 젓가락이 쟁반에 부딪치는 소리만 들렸다.매번 소리가 들릴 때마다 강씨 어멈은 미간을 찌푸렸다.소리를 낸 쪽은 모두 큰댁과 둘째네 며느리들이었다. 강씨 어멈이 가장 관심을 두고 있는 연경은 오히려 누구보다 단정하고 우아하게 식사하고 있었다.결국 노부인은 중도에 수저를 내려놓았다.“난 입맛이 없어 이만 일어날 테니 천천히들 드시게.”큰댁 노부인도 그 모습을 보고 아쉬운 대로 수저를 내려놓았다.“나도 입맛이 없네.”둘째네 노부인도 조용히 수저를 내려놓았다.노부인 세 분이 나가시니 다른 여인들은 몰래 강씨 어멈을 바라보며 소근거렸다.“할머니께서 영 아니꼬운 어멈이 있다고 했는데 저 사람인가 봐요.”“노부인들이 다 나가셨는데 대체 무슨 염치로 계속 저기서 밥을 먹고 있는 거죠? 저라면 창피해서 빨리 자리를 떴을 텐데요.”“한낱 유모 따위가 무안 후작가에서 주인 행세를 하네요.”연경은 조용히 밥을 먹으며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노부인은 큰댁과 둘째네 사람들을 대놓고 귀찮아하는데도 이들은 자신들이 후작가에서 주인인양 행세하면서도 남을 비웃고 있었다. 적어도 강씨 어멈은 손기욱의 초대를 받고 오신 분이었다.듣다못한 강씨 어멈이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식사 시에는 말을 삼가해야 하는 게 예법이거늘, 자네들 중에 반 이상이 내게서 예법을 배운 사람들인데

  • 시녀의 생존수칙   제240화

    영문을 모르는 두 사람은 예의 바르게 다가가서 강씨 어멈을 맞이했다.강씨 어멈은 조용히 두 사람을 관찰하고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어멈은 6년 전에 후작부를 떠났기에 노후작 부부가 양자로 데려온 손유민과는 이번이 첫만남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손유민과 송지운 둘 다 나쁘지 않아 보였다.강씨 어멈은 노부인과 큰댁, 둘째네 부부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온 건 싸늘한 응답뿐이었다. 강씨 어멈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손유민에게 말했다.“도련님께서 이번에 과거시험을 보신다 들었습니다. 작은 마님도 회임하셨다고 하니 참으로 경사가 아닐 수 없네요. 이건 제가 준비한 선물이니 받으시고 과거시험 잘 보시고 순조로운 출산 바랍니다.”송지운은 미리 강씨 어멈에 대해 알아보았기에 노후작의 어머니인 태군께서 돌아가시며 적지 않은 유산을 물려주고 가셨고 또 궁에서 여관으로 일하며 많은 포상을 받은 것을 알고 있었다.그런 사람이 건넨 선물이니 분명 귀한 선물일 거라 생각했다.강씨 어멈과 함께 내려온 시종은 두 명, 한명은 나이 서른 된 연상이고 또 한명은 열여섯 정도 돼 보이는 아진이었다.강씨 어멈이 아진을 부르자 곳곳에서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유모라고 해도 하인인데 뭔 시녀를 따로 두고 있어?”“참 희한하기도 하네.”손기욱은 싸늘한 눈길로 큰댁과 둘째네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섬뜩한 시선이 느껴지자 여인들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상자가 열리자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이쪽으로 쏠렸다.상자 하나에는 먹음직한 찰떡이 들어 있었고 다른 하나는 갓난아기의 모양이 수놓인 작은 비단이 들어 있었다.비웃음 소리가 다시 대청에 울렸다.손유민 부부도 굳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송지운은 회임한 이후로 더 예민해진 상태였기에 너무 값싸 보이는 선물을 보고 입가에서 순식간에 미소가 사라졌다.손유민은 그나마 온화한 모습을 유지하며 시종을 시켜 상자를 받게 하고 강씨 어멈에게 감사인사까지 했다.연경은 잠시 고민하다가 아민에게 말했다.“태복님을 시켜 금수원을 감시하고 있다

  • 시녀의 생존수칙   제239화

    연경은 아직 잘 알지도 못하는 강씨 어멈에게 말대답을 하고 싶지 않았다.머리가 새하얀 것으로 보아 강씨 어멈은 노부인, 노후작보다도 연세가 많아 보였다. 이분이 무안 후작부를 떠날 시에 노후작과 노부인도 이분을 웃어른처럼 공경했다는 얘기도 들은 적 있었다.아직 적인지 아군인지 모르는 상황이니 연경은 굳이 불쾌한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아 공손히 답했다.“소첩은 평소 외출할 일이 그리 많지 않아 나으리께 따로 마차를 구비해 달라 요구한 적은 없답니다. 오늘 어멈 덕분에 두 번째로 타보는 거예요.”강씨 어멈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답했다.“알겠네. 나는 피곤하니 눈을 좀 붙여야겠군.”연경은 서란을 시켜 보따리에 싸온 방석을 꺼내게 했다.“어멈, 이걸 등에 받치고 주무시면 편하실 거예요.”강씨 어멈은 허리 굴곡에 맞추어 굴곡진 방석을 내려다보았다. 등 뒤에 대고 있으니 허리를 잘 받쳐줘서 쉬기에 안성맞춤이었다.어멈은 이 나이에 오랜 시간 마차를 타고 오다 보니 요통을 느꼈던 참이라 기분이 좋아졌다.“이건 얼마나 하는가? 공짜로 받을 수는 없네.”“값진 것은 아니니 편히 사용하세요, 어멈.”옆에 있던 서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어멈, 이건 저희 이랑께서 어멈이 멀리서 오신다는 얘기를 듣고 며칠 밤을 새워 만든 것이랍니다.”물론 연경의 언질이 있었기에 끼어든 거였다.그녀는 강씨 어멈의 성격을 파악하기 전에는 어떻게든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었다.강씨 어멈은 근엄한 얼굴로 서란을 바라보며 말했다.“웃어른들 말씀하시는데 끼어드는 것은 매우 무례한 처사이다. 평소에 네 주인과 어떻게 지내든 상관없지만 안 좋은 습관이 들면 분수를 모르고 행동하게 되는 법. 시종의 처사에 따라 주인의 체면이 사는 법이니 밖에서 네가 무례한 행동을 하면 네 주인만 곤란해지는 법이야.”싸늘한 훈계에 서란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소인, 명심하겠습니다.”연경은 강씨 어멈에게 속셈을 들키자 다급히 나서서 해명했다.“제가 평소에 잘 가르치지 못한 탓입니다. 피곤하셨

  • 시녀의 생존수칙   제238화

    그러면서 정작 손기욱 본인은 연경이 손수 만들어준 얇은 봄 옷을 입었다.꽃샘 추위가 시작될 때라 지금 입기에는 다소 얇은 옷이었다.치수는 잘 맞아서 그의 건장한 체구가 더욱 돋보였고 일부러 맞춰서 연꽃 모양의 백옥관까지 머리에 쓰니 평소보다 더 늠름하게 보였다.소박한 마차가 성문 앞에서 멈추더니 강씨 어멈은 서주행의 부축을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손기욱은 연경의 손을 잡고 마차로 다가갔다.“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어멈.”강씨 어멈은 손기욱과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고는 퉁명스럽게 말했다.“나으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멋을 부렸습니까?”옆에 있던 서주행이 웃음을 터뜨렸고 연경도 억지로 웃음을 참으며 어멈에게 인사를 올렸다.“소첩, 처음 뵙겠습니다. 어멈.”강씨 어멈은 고개를 돌리고 꽃처럼 어여쁜 소녀를 잠깐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기욱에게 말했다.“몇 년 안 본 사이에 따님이 이렇게 컸습니까? 분명 양자만 들였다고 들었습니다만?”손기욱이 부루퉁하게 대꾸했다.“어멈, 연세가 드셔서 시력도 떨어지고 가는 귀도 먹은 겁니까? 소첩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연경은 놀라서 손기욱을 바라보았다.다른 사람에게 퉁명스럽게 굴 땐 그러려니 했는데 자신을 키워준 유모에게까지 그럴 줄이야.연경의 시선을 느낀 손기욱도 그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는 일부러 곤란해하는 그녀의 얼굴 가까이로 귀를 가져가며 물었다.“나한테 할 말이라도 있느냐?”연경은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고 강씨 어멈은 놀란 눈으로 손기욱을 바라보았다.손기욱의 고집을 아는 연경은 하는 수없이 강씨 어멈이 보는 앞에서 작은 소리로 그에게 말했다.“나으리, 유모에게 너무 무례하신 것 아닌가요?”손기욱이 욕을 먹을까 걱정하는 건 아니었다. 강씨 어멈은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 중 한 명이니 그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혹여 어멈이 그의 무례함을 자신의 탓으로 생각할까 봐 걱정이었다.손기욱은 정중하게 강씨 어멈에게 말했다.“연경이가 제게 무례하다고 잔소리하는군요. 제가

  • 시녀의 생존수칙   제237화

    연경은 순간 속에 치밀었던 불만이 눈 녹듯 사라졌다.“소첩의 마음 속엔 나으리 한 명뿐입니다. 이렇게 풍채 좋으시고 현명하신 분이 제게 잘해주기까지 하시는데 제가 어찌 딴눈을 팔겠어요? 소첩, 앞으로 성심을 다해 나으리를 보필할 것입니다.”손기욱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으며 불만스럽게 물었다.“그럼 앞으로 향낭은 날 위해서만 만들거라.”연경은 송육진이 하고 있던 향낭을 떠올리고 해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소첩, 감히 나으리께 말씀드리지 못한 게 있습니다. 어쩌면 송육진이 제 남동생일 수도 있어요….”둘은 함께 걸으며 매화당에 도착할 때까지 이야기를 나눴다.손기욱은 침상에 누운 후 뭔가 이상함을 느끼며 연경을 바라보았다. 연경은 분주히 돌아치며 그를 위한 숙취 해소탕을 끓이게 하고 목욕물을 준비했다. 그는 갑자기 자신이 했던 말이 떠올라 입을 열었다.“왜 날 달래주지 않는 거지?”연경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손기욱을 보고 오늘 아침에 노부인이 했던 말을 그에게 들려주었다.“도련님이 과거시험을 치르기까지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노부인께서는 3일 후에 연회를 베풀고 장원 술상을 차린다 하더군요. 노부인께는 강씨 어멈이 오고 계신다는 얘기는 하셨습니까?”손기욱은 불만스럽게 연경에게 물었다.“이게 네가 사람을 달래주는 방식이더냐?”그는 연경이 자신에게 소홀한 것 같아서 기분이 상했다. 연경은 손수건으로 그의 얼굴을 닦아주다가 살포시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잠시 닿았다가 떨어진 짧은 입맞춤에 만족할 손기욱이 아니었다. 뭐라고 불만을 말하려는데 연경이 다가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제가 나으리를 위해 직접 지은 옷이 다 완성되었는데 몸에 맞는지 입어 보시렵니까?”잠시 후, 서란이 새 옷을 들고 안으로 들어오더니 물건만 내려놓고 조용히 물러갔다.“나으리는 무공을 하시는 분이라 움직이실 때 편하라고 소매를 좀 줄였습니다.”진청색의 비단옷이 눈앞에 펼쳐지자 손기욱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역시 이 아이는 날 마음에 두고 있었어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