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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Author: 구취
한서윤은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을 꽉 맞잡았고 손톱이 파고든 손바닥에서는 결국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방 안에는 소름 끼칠 정도의 정적이 흘렀다.

“한서윤, 서윤아...”

서준영이 깊게 미간을 찌푸린 채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한서윤은 마치 미동도 없는 얼음 조각처럼 서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뻣뻣하게 굳은 입술을 떼며 평소와 다름없는 기색으로 대답했다.

“말씀하세요.”

울지도 화내지도 않는 그녀의 모습에 서준영은 도리어 마음이 쓰였다. 행여나 그녀가 좁은 생각에 갇혀 스스로를 갉아먹거나, 순간의 충동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는 않을지 덜컥 겁이 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뒤에 이어질 말은 기어이 내뱉어야만 했다.

결국 선택은 오롯이 한서윤의 몫이었으니까.

그는 수표 한 장을 건넸다.

“이건 강씨 가문 쪽에서 보내온 배상금이야.”

사건을 조용히 덮자는 노골적인 제안이었다.

한서윤은 시선을 들어 수표를 확인했다.

10억이었다.

자신의 상처가 생각보다 꽤 값비싸게 책정되었다는 사실이 우스웠다.

서준영은 그녀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몇 마디 위로를 더 덧붙였다.

“알겠어요.”

한서윤은 수표를 받아 들고 지체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나섰다.

조용히 닫히는 문을 바라보며 서준영의 미간은 더욱 깊게 패였다.

예전 같았으면 당장 뒤집어엎고 끝까지 물고 늘어졌을 한서윤이 돈을 받고 이렇게 허무하게 물러난다고?

하지만 상대는 신씨 가문이 비호하는 인물이었으니 서준영이 돕고 싶어도 그의 인맥으로는 신씨 가문의 문턱조차 닿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한서윤이 정말 이렇게 포기한다면 솔직히 실망스러울 것 같았다.

애초에 그녀의 권력에 굴하지 않는 대담함과 죽기 살기로 덤비는 기개를 높이 샀기에 이토록 난도 높은 일을 맡겼던 것이었다.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들춰내는 일에는 한서윤 특유의 그 독기가 반드시 필요했으니까.

그런데 그녀가 고작 돈을 받고 순순히 물러나다니.

하지만 이 또한 한서윤 본인의 선택이었다.

어쩌면 말 못 할 사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혈혈단신으로 기댈 곳 하나 없는 어린 처지인데, 남인 그가 가타부타 말할 자격은 없었다.

한서윤은 자리에 돌아오자마자 인터뷰 원고를 정리하기 시작했고 퇴근 시간이 될 때까지 방송국을 떠나지 않았다.

다음 날도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했다.

동료들은 그녀가 겪은 일을 전해 듣고는 저마다 위로의 말을 건네며 퇴근 후 액운이라도 떨쳐내자고 회식을 제안했지만 한서윤은 정중히 거절했다.

“나라도 얼굴이 떡이 되도록 얻어맞았으면, 창피해서 회식 자리엔 못 나갔을 거야.”

소아름이 한서윤의 자리 옆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서 갓 산 커피를 든 채 입을 열었다.

길게 내려뜨린 웨이브 머리칼이 매혹적인 그녀는 한서윤의 앙숙이자, 연말 고과를 앞둔 강력한 경쟁자였다.

“얼굴이 떡이 된 적은 없으니까 걱정 마.”

한서윤은 그녀의 손에서 자연스럽게 커피를 뺏어 한 모금 마시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고마워, 마침 내가 좋아하는 맛이네. 평소에 나를 꽤나 유심히 지켜봤나 봐?”

“너 주려고 산 줄 알아? 당장 내놔!”

소아름은 펄펄 뛰며 뺏으려 들었지만, 한서윤은 여유롭게 한 모금 더 들이켜고는 살짝 혀를 내밀어 보였다.

“이미 마셔버렸는데 어쩌겠어. 메롱.”

소아름은 억지로 뺏지는 않았지만 혀를 차며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 성벽같이 두꺼운 낯짝 덕분에 그나마 얼굴이 무사했나 보네.”

쏘아붙이는 말투 뒤에 숨은 어설픈 걱정이 한서윤의 눈에는 그저 다정하고 귀엽게만 보였다.

소아름이 허리를 살랑대며 막 자리를 뜨려던 순간, 한서윤이 그녀를 불렀다.

“우리 예쁜 아름 씨, 혹시 JX 클럽 VIP 카드 있어?”

“왜 갑자기?”

한서윤 같은 압도적인 미인이 자신을 치켜세우며 친근하게 부르자, 소아름은 내심 기분이 한껏 고조된 듯 콧대를 높였다.

“필요해?”

한서윤은 눈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빌려주면 내 쌍꺼풀 어디서 했는지 알려줄게.”

소아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역시 성형한 거 맞네!”

어쩐지, 사람의 자연 쌍꺼풀이 저렇게 예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소아름은 자기 자리로 잰걸음으로 돌아가 카드 지갑에서 검은색 카드 한 장을 꺼내 한서윤에게 건넸다.

빨리 말해보라는 듯 재촉하는 눈빛이었다.

소아름에게서 VIP 카드를 받아 든 한서윤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귓가에 바짝 다가가 속삭였다.

“사실, 내 쌍꺼풀은 엄마 뱃속에서 한 거야.”

‘엄마 뱃속이라니... 그건 그냥 태어날 때부터 자연산이라는 뜻이잖아!’

소아름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지며 방방 뛰었다.

“한서윤, 감히 날 속여!”

한서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소아름 쪽을 향해 손만 팔랑팔랑 흔들어 보였다.

방송국을 나선 한서윤은 곧장 백화점으로 향해 파티에 어울리면서도 활동하기 편한 옷을 한 벌 샀다.

점원이 추천한 미니스커트 대신 허벅지의 멍을 딱 가려줄 수 있는 스키니 팬츠로 바꾸고 롱부츠를 매치했다. 여기에 공들인 메이크업까지 살짝 수정하자 시크하고 강렬한 걸크러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그러고는 차를 몰아 젊은 남녀들의 유흥가인 JX 클럽으로 향했다.

입구에 도착하자 예상대로 보안요원에게 제지당했다.

한서윤은 한 손을 핸들에 걸친 채 VIP 카드를 내밀었다.

“강하준 도련님 생일 파티에 온 건데요.”

오늘 밤은 강씨 가문 도련님인 강하준의 생일이었는데 바로 이 클럽에서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게다가 한서윤의 세련된 차림새는 누가 봐도 파티에 참석하러 온 룩이었고, 무엇보다 그녀가 내민 VIP 카드가 완벽한 프리패스 역할을 했다.

보안요원은 지체 없이 길을 터주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고막을 찢을 듯한 음악 소리가 점점 커졌다.

한서윤은 종업원의 쟁반에서 술잔을 하나 집어 들고 마시는 척하며 엉켜 있는 남녀 인파 속에서 강하준의 모습을 좇았다.

청운시 일대에서 구제 불능의 망나니로 악명 높은 강하준은 유난히 붉은 머리색 덕분에 눈에 쉽게 띄었다.

파티장에 갑자기 범접 불가한 미녀가 등장하자 단숨에 수많은 사람의 시선이 집중됐고 남자든 여자든 할 것 없이 모두가 그녀를 힐끔거렸다.

한서윤은 평소 이런 화려한 치장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한 줌에 잡힐 듯한 개미허리와 탄력 있는 애플힙을 자랑하는 완벽한 몸매, 거기에 스키니 팬츠와 롱부츠로 감싼 쭉 뻗은 다리는 시선을 강탈하기에 충분했다. 어딜 가나 지나치게 예뻐서 튀는 얼굴은 말할 것도 없었다.

오죽하면 평소 취재를 나갈 때면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려고 늘 마스크를 쓰고 다닐 정도였을까.

몇몇 남자들이 다가와 수작을 걸었지만, 한서윤은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가볍게 쳐냈다.

“죄송한데, 전 강하준 씨 초대로 온 거라서요.”

강하준의 귀빈이라는 말 한마디에 침을 흘리며 기회를 엿보던 남자들은 감히 더 다가오지 못했다.

이내 한서윤은 파티장 한가운데서 그 빨간 머리 남자를 어렵지 않게 찾아냈다.

실내 수영장 쪽이었다.

흠뻑 젖은 여자 한 명이 수영장 안으로 밀쳐졌고 강하준이 돈다발을 흩뿌리며 비열한 놀음을 부추기고 있었다.

“하하하!”

강하준이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렸다.

“힘을 그따위로 써서 어따 써먹어? 더 팍팍 안 쳐!”

“강하준.”

별안간 누군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누구야?”

강하준이 짜증스럽게 고개를 돌리는 찰나, 시야가 암전되며 둔탁한 파열음이 고막을 때렸다.

술병 파편이 사방으로 튀며 그의 머리통을 그대로 강타한 것이다.

비명이 터져 나오고 요란하던 음악 소리가 순식간에 멎었다.

현장의 분위기는 영하로 떨어진 듯 얼어붙었고 수영장에서 들리던 소란스러운 소리들도 일제히 멈췄다.

강하준의 이마를 타고 흐른 피가 뺨을 지나 수영장 물속으로 뚝뚝 떨어져 붉은 꽃처럼 번져 나갈 때까지 정적이 감돌았다.

“어떤 새끼가 죽고 싶어서!”

강하준이 욕설을 내뱉으며 앞에 있던 술병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빠르게 또 하나의 술병이 그의 정수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동시에 서늘하면서도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고? 네 상전이다, 이 새끼야!”

파티장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숨을 죽였다. 강하준이 자신의 생일 파티장에서 머리가 박살 날 줄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강하준은 비틀거리며 눈가를 가린 피를 거칠게 닦아냈고 붉게 물든 시야 너머로 지나칠 만큼 침착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발견했다.

그가 한서윤임을 알아본 순간, 강하준의 창백한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고 눈빛은 살기로 번득였다.

“좋아, 그날 그냥 죽여버렸어야 했는데 제 발로 호랑이 굴에 들어오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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