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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Author: 구취
신승우는 소파를 짚고 있던 몸을 일으키며 구석에 웅크린 한서윤을 차가운 눈빛으로 훑고는 휴대폰을 집어 들어 화면을 밀어 전화를 받았다.

상대방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었으나 그의 목소리는 더없이 다정했다.

“몸부터 잘 추스르는 게 최우선이야. 다른 건 사람 시켜서 진혁이랑 연락해.”

그녀 앞에서는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지극히 온화하고 인내심 넘치는 말투였다.

말을 마친 신승우는 전화를 끊고 옆에 던져두었던 안경을 챙겼다. 그러고는 한서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정장 재킷을 집어 들었다.

“강율희한테 가는 거예요?”

한서윤의 두 눈이 빨갛게 충혈되었다.

신승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답했다.

“네가 상관할 바 아냐.”

아픈 다리를 부여잡고 일어난 한서윤은 흐트러짐 하나 없는 말끔한 차림의 그와 초라한 자신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것을 느끼며 마음이 끝도 없이 가라앉았다.

“신승우!”

그녀는 비틀거리며 달려가 그의 허리를 뒤에서 껴안았다.

그를 놓칠까 봐 온 힘을 쥐어짜는 바람에 온몸의 뼈마디가 비명을 질렀다.

서랍 속의 이혼 서류, 강율희의 귀환, 그리고 도저히 붙잡을 수 없는 신승우의 마음까지...

이제는 매듭을 지어야 할 때였다.

한서윤은 고통스럽게 두 눈을 감으면서도 포기하지 못하는 자신을 비웃었다.

“그땐 선택의 여지 없이 나와 결혼했었지만 이제는 당신의 진짜 진심을 알고 싶어요.”

마디가 뚜렷한 손가락으로 안경을 든 채, 남자는 차가운 눈길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번엔 또 무슨 수작이야?”

“그래요, 내 수작이라고 쳐요.”

한서윤은 감고 있던 팔을 천천히 풀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티 없이 맑은 눈동자로 신승우를 응시하며 한 자 한 자 내뱉었다.

“만약 그때 할머니께서 그룹 지분을 담보로 내걸지 않으셨더라도 나랑 결혼했을까요?”

사실 이 질문은 애초에 물을 필요조차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도무지 미련을 버릴 수 없었다. 이것이 그녀가 입을 열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고 오늘 밤 신승우가 어떤 대답을 하든 두 번 다시 이 얘기를 꺼내지 않을 작정이었다.

신승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한서윤을 훑어보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눈에는 조금의 웃음기도 닿지 않은 채였다.

“그게 중요해?”

‘하아!’

남자의 먹물처럼 짙고 어두운 눈동자가 그녀를 옭아매듯 응시하며 한 걸음 다가왔다.

“과거의 너는 그 어떤 조건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랑 결혼하겠다고 고집을 피웠었지. 그런데 이제 와서 이런 소리를 꺼내는 저의가 뭐야?”

안경이라는 가림막이 사라진 그의 두 눈은 본연의 잔혹한 빛을 가감 없이 뿜어내고 있었다.

해일처럼 덮쳐오는 압박감과 뼛속까지 스미는 한기에 한서윤은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남자는 도망칠 틈을 주지 않고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듯 움켜쥐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두 눈을 응시하더니 이내 시선을 옮겨 방금 전 자신의 키스로 붉게 달아오른 입술로 향했다. 그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자 따뜻한 숨결이 그녀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내 진짜 속마음이 알고 싶어? 네가 감당하지 못할 텐데.”

허리를 틀어쥐었던 압박감이 순식간에 빠져나가자 한서윤의 왼쪽 다리는 더 이상 체중을 버티지 못한 채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남자가 떠난 자리를 응시하는 그녀의 어깨가 하염없이 떨렸다.

신씨 가문의 본가 대문 앞에는 검은색 세단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전신에서 서늘한 기운을 뿜어내는 남자가 차에 올라타더니, 느슨해진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던졌다.

뒷좌석에 긴 다리를 뻗고 비스듬히 기댄 그의 실루엣은 압도적인 위압감을 풍겼다.

분명 히터가 돌아가고 있었음에도, 그가 발을 들이는 순간 차 안의 공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을 듯 차갑게 가라앉았다.

비서 윤진혁은 룸미러를 통해 그의 눈치를 살피다 서둘러 시선을 거두며 시동을 걸었다.

“대표님, 방금 강율희 씨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남동생이 폭행 교사 혐의로 작게 문제를 일으킨 모양입니다.”

“누굴 쳤는데?”

“공연히 오지랖을 부린 사람이라더군요. 크게 다치진 않았고 가벼운 찰과상 정도라지만, 경찰 쪽에서 이미 강씨 가문까지 수사망을 좁힌 탓에 율희 씨의 근심이 큽니다.”

윤진혁이 사실대로 보고했다.

신승우가 담배에 불을 붙이자 붉은 불꽃이 그의 살짝 솟아오른 눈썹뼈를 훑고 지나갔다.

“가서 손 좀 써둬.”

...

신승우가 어젯밤 본가를 떠났다는 소식이 김혜정의 귀에 들어간 것은 다음 날 이른 아침이었다.

식탁에 마주 앉은 김혜정은 한서윤을 위로할 말을 고르고 있었지만, 한서윤은 도리어 생긋 웃으며 그녀의 앞접시에 만두를 덜어주었다.

“할머니, 우리 밥 맛있게 먹어요. 우울한 얘기는 밥맛만 떨어뜨리잖아요.”

어젯밤 신승우가 강율희의 전화 한 통에 불려 나간 후, 한서윤은 신혼방이 아닌 과거 자신이 머물던 방으로 돌아가 잠자리에 들었다.

신승우의 방과 벽 하나를 맞댄 곳이었다.

과거의 그녀는 툭하면 신승우의 방을 기웃거리곤 했지만 그는 그런 그녀를 몹시 성가셔하면서도 오랜 세월 단 한 번도 방을 옮기지 않았다.

김혜정과 아침 식사를 마친 한서윤은 본가를 떠날 채비를 했다.

다리의 상처 탓에 손수 운전대를 잡기 어려웠으므로 집사에게 배차를 지시해 둔 터였다.

차량을 기다리며 그녀는 핸드백에서 부기 완화용 연고를 꺼내 들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침실 문밖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물건이었다.

묵원의 저택에서 가정부가 그녀에게 준 것과 동일한 제품이었건만, 누가 그곳에 두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마당 곁을 지나던 그녀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이층 높이로 자라난 백목련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청운시의 백목련은 4월이나 되어야 비로소 꽃을 피운다. 지금은 시린 12월, 앙상한 가지만이 덩그러니 남아 겨울의 끝을 견디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처음 신씨 가문에 발을 들였던 날을 떠올렸다. 마침 목련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무렵이었다.

그때 그녀는 일곱 살, 신승우는 열두 살이었다.

햇살이 참 좋았던 그날, 신승우는 목련 나무 아래 서서 가정부가 그녀를 소개하는 말을 듣고는 무심하게 흘끔 쳐다보며 딱 한 마디를 던졌다.

“귀찮게만 굴지 마.”

“형수님도 참 여유로우시네. 제 발등에 불이 떨어진 마당에 잎 하나 없는 앙상한 나무나 구경하고 계실 틈이 다 있고.”

등 뒤에서 서늘한 조롱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봐도 뻔했다. 신승우의 사촌 동생이자 신씨 집안 차남의 자식인 신남훈이었다.

신남훈은 평소에도 신승우와 앙숙이었기에, 한서윤은 굳이 상대하고 싶지 않아 곧장 발길을 돌리려 했다.

“아유...”

신남훈이 긴 다리로 성큼 다가와 팔을 뻗어 그녀의 앞길을 막아섰다. 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

“신승우가 강율희를 어디에 지내게 했는지 궁금하지 않아?”

한서윤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걸음을 멈춘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남자는 입꼬리를 올리더니 여유로운 걸음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여 그녀를 내려다보며 눈썹을 치켜떴다.

“그래도 명색이 3년을 같이 산 부부인데, 우리 형님도 참 매정하지...”

한서윤은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그의 말을 싹둑 잘랐다.

“나랑 신승우가 어떻든 그건 우리 부부 문제니 네가 상관할 바 아니야. 남의 일에 오지랖 부릴 시간 있으면, 어떻게 해야 그룹 내에서 자기 자리나 제대로 꿰찰 수 있을지 연구나 하시지.”

그 말은 신남훈의 정곡을 제대로 찔렀다. 순식간에 얼굴이 흙빛으로 변한 그는 한서윤의 팔을 확 낚아채며 비아냥거렸다.

“부부? 그건 네 혼자만의 착각이겠지. 신승우가 단 한 번이라도 널 아내로 취급한 적이나 있어?”

사람들 앞에서 뺨이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한서윤의 얼굴에 낭패감이 스쳤고 심장 한구석이 욱신거렸다.

신승우가 그녀를 아내로 인정한 적이 없다는 건 신씨 가문 사람이라면 위아래 할 것 없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 사람이 날 아내로 취급하든 말든, 내가 네 형수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형수 몸에 한 번만 더 함부로 손댔다간 그땐 당장 사람을 부를 테니, 처신 똑바로 해!”

한서윤은 그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쳤다.

과연 신남훈도 본가 저택 안에서까지 난동을 부릴 배짱은 없었다.

그녀의 경고에 그는 앙상한 나뭇가지 아래 서서 음침한 눈초리로 그녀를 흘겨보며 말했다.

“네가 모든 걸 알게 되는 날, 대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참 기대되네.”

한서윤은 그를 무시하고 차에 올라탄 뒤, 욱신거리는 왼쪽 다리를 매만졌다.

“사모님, 방송국으로 모실까요?”

운전기사가 공손하게 물었다. 평일이었기에 기사는 한서윤이 며칠 휴가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네.”

아직 마무리하지 못한 인터뷰 원고가 하나 남아있었다. 마침 마음이 어지러워 갈피를 잡지 못하던 차에, 차라리 일에 매진하는 편이 복잡한 생각을 떨쳐내기에 좋을 것 같았다.

한서윤은 방송국 보도국을 대표하는 수석 기자로, 주로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드러내는 고발 취재를 전담해 왔다. 악덕 기업의 비리를 파헤치는 것은 물론, 불법 영업소의 실태를 끈질기게 추적하여 수많은 비행 청소년들을 수렁에서 건져내기도 했다.

그녀가 보도국에 도착하자마자 서준영이 그녀를 호출했다.

서준영은 사무실 문을 닫고 한서윤을 먼저 자리에 앉힌 뒤,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서윤의 진지하고 의아한 눈빛과 마주친 그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한서윤, 너한테 해줄 말이 있어. 널 폭행한 놈들 배후가 밝혀졌는데, 그게 좀...”

“배경이 대단한가 보죠?”

한서윤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기자를 건드릴 엄두를 내는 자들은 멍청하거나 뒷배가 든든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서준영은 물을 한 잔 따라 그녀 앞 탁자에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백방으로 알아봤는데, 폭행을 사주한 놈이 신승우 전 여자친구의 남동생이래. 신승우가 그놈을 덮어주면서 널 때린 남자 세 명까지 전부 풀려났어. 경찰서 쪽에 신씨 가문 사람이 있어서...”

그 이후로 서준영이 무어라 말을 이었지만, 한서윤의 귓가에는 단 한 마디도 가닿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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