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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Author: 구취
그 말에 휠체어에 앉아 있던 여자가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표정이 차갑게 굳어버린 강율희는 경직된 동작으로 고개를 들어 제 앞에 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승우 오빠, 하준이가 때린 사람이 서윤인 줄은 정말 몰랐어.”

신승우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그저 고개를 숙여 손목시계를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파티장의 음악은 언제 꺼졌는지 적막만이 감돌았고 몇 줄기 화려한 조명만이 번쩍이고 있었다. 여러 갈래의 빛이 교차하는 곳에 선 그의 표정은 짙은 그림자에 가려져 도무지 속내를 읽을 수 없었다.

강율희는 숨을 깊게 내쉬며 뒤에 선 가정부에게 손짓했다.

가정부가 휠체어를 밀어 강하준과 한서윤 곁으로 다가서자 가까워질수록 술 냄새에 섞인 비릿한 피 냄새가 훅 끼쳐왔다. 마치 질척이는 늪지대에서 피어오르는 듯한, 구역질 나는 냄새였다.

강율희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코와 입을 막으며 숨만 겨우 붙어 있는 강하준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당장 사람들을 시켜 하준이부터 병원으로 이송해.”

하지만 그녀의 말이 떨어졌음에도 한서윤은 강하준의 멱살을 쥔 손을 놓지 않았다. 절대 넘겨주지 않겠다는 기세였다.

“서윤아.”

강율희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나야.”

한서윤은 미동도 없이 입을 굳게 다문 채, 강하준의 옷깃을 틀어쥔 손에 더욱 힘을 줄 뿐이었다.

강율희의 사과가 이어졌다.

“미안해, 하준이가 건드린 사람이 너인 줄 몰랐어. 너인 줄 알았다면 내가 가만두지 않았을 텐데. 그래도 네가 이만큼 손봐줬잖아. 여기서 더 때리면 쟤 정말 죽어.”

‘하. 죽는다고?’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한서윤이 천천히 시선을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저 새끼 목숨값이 얼만데? 십억이면 돼?”

그 서늘한 눈빛 한 번에 강율희는 까닭 모를 강렬한 위압감과 조롱을 느꼈다.

그녀는 한서윤의 이 말이 아버지가 피해자 측에 제시한 보상금 십억을 겨냥한 조소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사전에 전후 사정을 명확히 살피지 못한 내 탓이야. 부디 내 낯을 보아서라도 하준이를 좀 놔주면 안 될까?”

한서윤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휠체어에 앉아 있는 온화하고 단아한 강율희를 바라보았다.

3년 만에 보았지만 그녀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굳이 변한 것을 꼽자면, 예전에 그녀를 감싸고 있던 짙은 우울함이 걷히고 손짓 하나 발짓 하나에 타고난 듯한 부드러움이 배어 있다는 것 정도였다.

아무래도 평생 못 걷게 된 자기 다리랑은 깔끔하게 타협을 끝낸 모양이었다.

한때 잘나가던 금수저에 청운시 최고의 핫플이었던 여자가 휠체어에 갇혀 평생 일어설 수 없게 됐으니, 불쌍한 인생이긴 했다.

하지만 한서윤은 자신이 강율희에게서 신승우를 빼앗았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어차피 자신이 아니었더라도, 두 다리를 잃은 강율희는 신씨 가문에 며느리로 들어갈 수 없었을 테니까.

강율희의 차지가 될 수 없다면, 자신이 그 자리를 꿰차지 못할 까닭이 무엇이란 말인가.

다만 문제는 강율희의 두 다리가 신승우의 목숨을 구하려다 망가졌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강율희에게 늘 고마움과 죄책감을 품고 있었다. 신승우를 열렬히 사랑했기에, 신승우를 살려낸 강율희는 곧 한서윤 자신을 구원한 것이나 진배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마움과 죄책감이 있다고 해서 그녀가 강율희에게 빚을 졌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녀는 강율희에게 빚진 건 없었다.

물론 그 누구한테도 빚진 것이 없었다.

“내가 왜 놔줘야 하는데? 이 새끼가 사람 풀어서 날 개 패듯이 팼을 때, 내 목숨은 눈곱만큼이라도 생각했대?”

만약 지나가던 좋은 분이 구해주지 않았다면,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끔찍한 결말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한서윤의 날 선 대답에 강율희는 숨도 제대로 못 쉬고 헐떡이는 강하준을 내려다보며 애간장을 태웠다.

하지만 한서윤의 뜻은 너무도 확고했고 강율희 역시 한서윤의 불같은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녀가 오늘 절대 강하준을 용서하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네가 하준의 목숨을 뺏어봤자 그건 그저 한순간의 통쾌함일 뿐이야. 그다음 결과는 생각해 봤어? 네 지금 일은 어쩔 건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직업이잖아. 그럴 가치가 있어?”

역시 일 이야기가 나오자 한서윤의 표정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강율희는 한서윤이 무엇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지 훤히 꿰뚫고 있었다.

세상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한때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였으니까.

하지만 한서윤은 손가락만 움찔했을 뿐, 여전히 강하준을 쥔 손을 놓지 않은 채 바닥을 적시는 그의 피를 냉담하게 내려다보았다.

강율희는 애가 탔다.

“하준이도 응당한 대가를 치렀고 너 역시 쌓인 울분을 토해냈으니, 이쯤에서 갈무리하는 게 어때. 무엇보다 너는 지금 이렇게 멀쩡하잖아?”

“멀쩡해?”

한서윤이 비웃음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내가 지금 멀쩡한 건 네 착한 동생이 날 봐줘서가 아니라, 지나가던 다정한 행인이 도와준 덕분에 겨우 빠져나왔기 때문이야. 못 믿겠으면 그날 밤 날 어떻게 할 작정이었는지 네 동생한테 직접 물어보든가.”

강율희의 시선이 바닥을 구르며 신음하는 두 사내에게 가닿았다. 그날 밤 한서윤을 팼던 놈들이었다.

강율희와 눈길이 얽히자 두 사람은 도둑이 제 발 저리듯 황급히 시선을 회피했다.

묻지 않아도 강하준의 사주가 구타 정도로 끝날 사안이 아니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강하준의 이마에서 솟구치는 출혈량이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자 강율희의 안면이 굳어졌다. 더 이상 방관할 수는 없었다.

휠체어 손잡이를 쥔 손에 돌연 힘이 들어갔고 그녀는 이를 악물며 처절하게 몸을 반쯤 움직였다.

“내가 무릎이라도 꿇고 빌면...”

그 순간, 거센 힘이 그녀의 어깨를 짓눌렀고 강율희는 흠칫 놀라 굳어버렸다.

“그만해.”

차갑고도 낮은 그 음성이 한서윤의 귓가에 박히는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선 눈사태가 일어난 듯 굉음과 함께 모든 것이 하얗게 점멸했다.

언제 다가온 것인지 곁에 선 남자를 올려다보는 강율희의 붉어진 눈시울에 희망의 빛이 서렸다. 강율희는 애써 시선을 거두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해서라도 서윤이의 화가 풀릴 수 있다면, 난 정말 괜찮아.”

“서윤아, 하준을 대신해서 내가 사과할게.”

강율희가 팔걸이를 짚은 손에 힘을 주자, 신승우는 그녀 뒤에 서 있던 가정부에게 눈짓을 보냈다.

눈치가 빠른 보모는 즉시 강율희를 부축하며 거들었다.

“율희 씨, 몸도 좋지 않으신데 이 추운 날에 무릎을 꿇으시면 큰일 나요.”

“하지만 하준이가...”

강율희는 포기하지 않고 바닥에 쓰러진 동생을 바라보며 애원했다.

“서윤아, 우리 예전 정을 생각해서라도 제발 하준이를 놓아줘. 나중에 꼭 하준이를 데리고 가서 정식으로 사과할게.”

하지만 돌아온 것은 한서윤의 서늘한 비웃음뿐이었다.

“이런 놈은 살아있는 것 자체가 죄악이야.”

피로 물든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던 신승우가 낮게 읊조렸다.

“한서윤, 그만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한서윤의 두 다리는 이미 마비되듯 저려왔고 그 감각은 심장을 관통하듯 번져 나가더니, 이내 아무런 느낌도 남지 않을 만큼 무뎌져 버렸다.

하지만 신승우의 그 짧은 한마디는 감각을 잃어가던 그녀의 가슴에 지독하고도 둔탁한 통증을 안겨주었다.

한서윤은 이를 악물더니 이내 허탈한 듯 평온하게 웃어 보였다.

이제 다 지긋지긋했다.

그녀는 강하준의 옷자락을 잡고 있던 손을 툭 던지듯 놓았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강율희가 급히 경호원들에게 소리쳤다.

“당장 병원으로 옮겨!”

이 일대의 악명 높은 망나니인 강하준은 오늘 한서윤에게 개망신을 당한 것도 모자라 죽을 고비까지 넘겼으니, 순순히 물러날 리 만무했다.

극심한 통증 때문에 정신이 든 것인지, 아니면 죽기 전 마지막 발악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흐릿한 시야 너머로 움직이는 한서윤의 실루엣을 포착한 순간 강하준의 내면에는 증오가 파도처럼 소용돌이쳤다. 그가 입을 벌리자마자 흘러내린 핏물이 입안 가득 고여 들었고 허연 치아는 금세 기괴한 핏빛으로 물들었다.

“절대... 그냥 안 둬... 내 오늘 기어코 저년을 죽여버...”

한서윤은 왼쪽 다리에 간신히 힘을 주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바닥에 널브러진 쓰레기가 여전히 입을 놀리는 소리를 듣자, 그녀는 하이힐을 신은 오른쪽 발로 놈의 손가락을 가차 없이 짓눌렀다. 그러고는 오만한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엉망이 된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술병들을 흘끗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 결정적인 순간, 신승우가 그녀의 손목을 강하게 낚아채고는 한서윤을 덮치려던 강씨 가문의 경호원들을 싸늘하게 훑어보았다.

청운시의 실권자이자 신씨 가문의 가주인 그의 눈빛에는 감정이 배제되어 있었으나 그 침묵만으로도 좌중을 압도하는 무게감이 있었다. 순간 강씨 가문의 경호원들은 겁에 질려 얼어붙었다.

거듭되는 방해에 한서윤은 참을 수 없는 허무함을 느꼈다.

“이거 놔요!”

한서윤은 신승우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어지러운 색채의 조명 속에서 증오와 슬픔이 점철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그녀는 속삭였다.

“신승우, 당신은 정말 잔인하네요.”

수표 한 장이 나풀거리며 강하준의 발치에 떨어졌다.

바로 강씨 가문에서 위로금이랍시고 보냈던 그 십억짜리 수표였다.

한서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클럽을 빠져나갔다.

“사모님...”

윤진혁이 급히 뒤를 따르며 그녀를 불렀지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차 문을 부술 듯 닫고 어둠 속으로 질주했다.

꽉 닫힌 차 안에서 몸에 밴 술 냄새와 비릿한 피 냄새가 뒤섞여 역겨운 악취를 풍겼다.

구역질이 밀려오는 것을 참으며 묵원으로 돌아온 그녀는 걸치고 있던 옷을 쓰레기통에 처박고 맨발로 욕실에 들어섰다.

하지만 쏟아지는 온수에도 한기는 가시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욕실 문이 밖에서 벌컥 열렸다.

자신의 방이었기에 문을 잠그지 않는 것이 습관이었고 이곳에서 감히 그녀의 방에 함부로 들어올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자욱한 수증기 사이로 나타난 이는,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은 얼굴을 한 신승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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