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MELDEN화야와 학식을 먹자마자 버스에 오른 경신은 어느새 MH 엔터테인먼트 근처 정류장에 도달했다.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걱정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무슨 낯짝으로 거길 다시 들어가나. 누구에게 먼저 말을 걸어야 할까. 애초에 잡상인 취급을 받으며 문전박대당하면 어쩌나.경신의 머릿속은 이미 복잡한 경우의 수로 가득 찼다. 규련에게 부탁해 한 다리 건너 알아볼까도 생각했지만, 바쁜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아가들아, 엄마가 온 게 정답 맞겠지? 이미 도착해 놓고 물어봐서 미안. 하지만 내가 저지른 실수는 내가 직접 만회해야 하니까.’경신은 잠시 정류장 의자에 앉아 추위가 가신 3월의 봄 풍경을 무심하게 눈에 담았다. 과거의 자신이 수없이 겪어본 계절이었고, 익숙한 풍경이었다. 하지만 배 속의 아가들과 함께 맞이하는 매 순간은 하루하루가 기적처럼 행복했다.‘과거의 외롭고 슬펐던 기억들이 거름이 되어 지금 내 행복을 키워낸 거야. 그리고 이제 난 혼자가 아니지.’경신은 소중하게 제 배를 문질러 보았다. 이래저래 충격적인 사건들의 연속이라 아가들에게 미안함이 컸지만, 지금 누리는 이 평화가 더없이 소중했다. 예전에는 늘 타인에게서 행복을 구걸하듯 살았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조금 여유를 되찾은 경신은 상황별 행동 지침을 머릿속으로 정리해 보았다. 그런데 묘했다.‘오늘, 뭔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이유 없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하지만 피할 수는 없었다. 한 번은 마주해야 할 일이었고, 태하가 그곳에 있다면 고맙다는 인사는 반드시 전하고 싶었다.경신은 불끈 쥐고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건물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오늘은 여학생들도 보이지 않고 주변이 한산했다. 그리고 그때, 익숙한 검은색 독일제 명품 SUV가 시야에 들어왔다.“아! 있다, 저 차!”저 곳에 주차된 차라
화려한 조명과 진한 향수 냄새가 엉킨 S방송국 JW소속사 위주로 쓰는 전용 대기실.서정민은 제 위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는 어린 후배의 어깨를 슬며시 끌어안았다. 살결이 마찰하며 나는 은밀하고 축축한 소리가 단단히 닫힌 대기실 문 안쪽에 야릇하게 울려 퍼졌다.“선배님······ 진짜 미칠 것 같아요. 존경합니다.” “하흣, 말만 잘하지······.”입가에서는 매끄럽고 아찔한 신음이 흘러나왔지만, 정민의 눈빛은 냉정할 만큼 서늘했다.키스 한번도 안 하면서도 절정에 달해 번들거리는 남자의 표정을 마주하기 싫어 그녀는 유연하게 고개를 돌려버렸다.“뒤에서 해줘.” “네, 선배님. 원하는 대로요.”사내의 거친 숨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히고, 등 뒤에서 밀려드는 저돌적인 자극이 척추를 따라 찌릿하게 내달렸다.어린 남자의 거친 패기를 즐기는 것은 정민에게 그저 팽팽하게 당겨진 일상의 지루함을 터뜨리는 가벼운 취미 생활에 불과했다.엎드린 그녀의 시선이 대기실 벽면에 걸린 모니터로 향했다. 화면 속에는 막 사전 녹화를 마친 초특급 신인 그룹 ‘에스트렐라’의 무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압도적인 비주얼, 거친 짐승 같은 피지컬, 완벽한 성량까지. 단숨에 가요계를 씹어 삼킨 사내들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정민의 허리를 굳건히 잡고 속도를 올리던 후배가 그녀의 시선을 따라 모니터를 바라보며 헐떡였다.“······너, 에스트렐라랑 친해?”정민이 아래에서 밀려드는 쾌감에 입술을 잘근 깨물며 낮게 묻자, 후배는 허탈한 한숨을 섞어 쓰게 웃었다.“아니요······ 같이 데뷔했지만 솔직히 넘사벽이라. 이제는 그냥 우러러볼 뿐이죠.” “너희도 꽤 대단하잖아.” “저희는 소속사 빨로 버티는 중이죠. 듣기로는 저 에스트렐라 멤버들, 집안까지 전부 엄친
처음 쓰러졌을 때, 규련은 ‘건물주님’의 도움으로 그녀를 무사히 입원시켰다고 했다.퇴원하는 날, 앞마당을 점령했던 멋들어진 검은색 독일제 명품 SUV 역시 그 정체 모를 건물주님의 선의였다.그 모든 호의의 배후가 태하라는 남자였다니. 경신은 차분하게 침대에 걸터앉아 화야를 빤히 바라보았다.“표정 보니 이미 눈치채셨네요. 맞아요, 보살님.”“그럼 나 퇴원할 때 탔던 그 어마어마한 차도 혹시······.”“네. 보살님 쓰러지셨을 때 보살님을 직접 안고 병원까지 데려다준 것도 그 사람이에요.”탄식이 절로 흘러나오는 순간이었다.직접 안고 병원까지?악연만큼이나 무서운 게 인연이라더니, 어쩌면 이토록 우연이 겹치고 겹칠 수 있을까.“아, 어떻게 난 태하 씨에게 그런 신세를······.”처음 본다는 뻔뻔한 소리나 늘어놓고,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는 남자에게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 없이 도망칠 궁리만 했다니.경신은 수치심에 얼굴이 화끈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그날 태하 씨가 얼마나 애틋하게 구셨다고요. 공주님처럼 귀하게 대하셨어요. 보살님이랑 사이 안 좋다고 신신당부해서 그동안 입이 근질거려 죽는 줄 알았다고요.”“허, 헐······. 나 지금 제대로 들은 거 맞니? 태하 씨가 나를 고, 고, 공주님처럼?”“대박 멋졌다니까요. 완전 영화 한편 찍었죠.&rd
벌써 3월 4주 차 금요일이었다.S대 학생생활관 한편, 여학생 기숙사의 아침은 오늘도 여지없었다. 2월 말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져 온 이 어수선한 풍경은 이제 완벽한 일상이 되어버렸다.“보살님! 제발 그만 좀 하세요!” “아, 나 정말 미치겠어!”오늘도 경신은 격렬한 이불킥에 여념이 없었다. 죄 없는 이불에 화풀이하는 경신을 향해 화야가 따끔한 일침을 날리며 아침을 열었다.“임산부가 아침부터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계속되는 모닝 이불킥은 폐 건강에 해롭다고요. 먼지 날리잖아요!” “미안해, 화야. 근데 정말 미칠 것 같아. 나 어떡하면 좋니?” “뭘 어떡해요. 그냥 MH 엔터에 가서 두고 온 물건들 찾아오면 끝날 일인데!”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악수까지 하면서 ‘바이 바이’ 하고 쿨하게 돌아섰는데······ 이제 와서 다시 가라고? 그 민망함은 온전히 내 몫이잖아. 그냥 새로 살까? 아님 없는 대로 살까?” “그 말만 벌써 일주일째거든요? 지겹지도 않아요? 가서 찾아오는 게 정답이에요!”경신도 알고 있었다. 화야는 언제나 옳다는 것을.지난주, 소강당에서 쓰러지며 안경을 두고 온 것은 물론 핸드폰까지 떨어뜨린 게 분명했다.다시 사면 그만이겠지만, 멀쩡한 돈을 길바닥에 버릴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 핸드폰엔 고작 한 달 남짓이지만 그녀의 새로운 인생사가 오롯이 담겨 있었다. 저장된 인연들의 이름과 연락처를 포기하기엔 기회비용이 너무 컸다.하지만 문제는 그곳을 다시 제 발로 찾아가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인연을 끊으려 작정했는데, 물건 때문에 다시 엮이러 가다니.“그냥 다녀오세요.” “휴······ 화야.” “사실, 가고 싶잖아요?”화야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 경신은 할 말을 잃었다. 사실 그날,
태하는 들뜬 마음을 갈무리하고 VIP 관계자석으로 돌아왔다. 사람 좋은 마호와 MH 엔터테인먼트의 유일한 아티스트인 에스트렐라 멤버들은, 평소 AI처럼 무미건조하던 태하의 희귀한 반응을 두고 수군거리기 바빴다.“태하 님, 그 여학생 몸은 괜찮은 겁니까?” “어.” “진짜 성격 화통하던데, 생일 파티 때 초대하신 그 과외 선생님 맞죠?” “그래.”시온과 도국의 질문까지는 건성으로 대답했는데, 정기범은 날이 서 있었다.“그 여자랑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여학생, 선생님, 그리고 '그 여자'. 모든 화살표가 한 인물을 가리키고 있었다. 태하는 팔짱을 낀 채, 조금 전까지 경신이 서 있던 빈자리를 묵묵히 응시했다.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절대 다가오지 말라고 했는데, 기억을 잃고 먼저 나타난 그녀였다.좋은 사람을 만나라는 당부. 요즘은 나쁜 남자가 대세라는 엉뚱한 궤변.이어 그의 입가에 희미하지만 매혹적인 미소가 번졌다. 어떻게 그녀를 공략해야 할지 선명한 이정표가 보였다. 하늘이 준 기회를 놓칠 만큼 어리석은 남자가 아니었으니까.“잘해 보려고.”그렇게 팔짱을 끼고 선전포고를 하듯 정기범에게로 시선을 보냈다. 예전부터 거슬렸는데. 여전히 정기범은 수컷의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우와, 상남자.” “남자는 직진이죠.” “태하 님, 순정파군요. 하하!”휙, 태하가 고개를 돌려 수다 삼매경에 빠진 멤버들에게 따가운 눈빛을 보냈다. 자신과 경신에 대해 가볍게 떠드는 꼴을 단 한마디도 들어줄 요량이 없었다.“다들, 조용히 해.”서늘한 경고 한마디면 충분했다. 소강당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고, 오디션은 무거운 긴장감 속에 이어졌다.태하는 다시 곱씹어 보았다. 경신이 한 말을 말이다.“Hombre malo(나쁜 남자)······. 그거 해줘야겠네.”경신의 목소리를 되새기던 태하의 입술 사이로 낮은 혼잣말이 슬그머니 새어 나왔다. *** 경신은 회사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도망치듯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기숙사에 도착할 때까지의 기
경신이 너무 진지하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바람에 대기실 분위기는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하지만 도윤은 그 정적을 비웃듯 다시 경신에게 다가와, 만개한 노란 국화꽃처럼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런······ 예쁜아, 우와. 감동인데? 나 방금 눈물 날 뻔했잖아. 그래, 고마워.”오늘 경신은 도윤의 낯선 민낯을 보긴 했지만, 그나마 남아있던 좋았던 기억조차 얼룩질까 두려워 더는 과거를 들추지 않기로 했다. 그를 폄하하는 것도 멈추기로 했다. 온 힘을 다해 그를 사랑했던 과거의 자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으니까.그때, 눈치 없는 현수가 다시 다가와 경신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독설을 내뱉었다.“너, 볼일 끝났으면 어서 꺼져. 시시한 너 따위를 상대할 정도로 여기 사람들 한가하지 않거든? 설마 관심 끌어보려고 아픈 척 연기한 건 아니지?”아, 저 어여쁜 입술에 칼날이라도 달린 걸까. 사람 심장을 콕콕 쑤셔대는 말을 어쩜 저리도 찰지게 할까. 아마 태하나 도윤이 경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게 못견디게 거슬렸던 모양이다. 경신은 아가들에게 ‘똥이 무서워 피하는 게 아니라 더러워 피한다!’는 진리를 보여주기 위해 현수의 귓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현수 씨, 내가 시시하다면서 왜 그렇게 신경을 써요? 원래 세상은 내 맘 같지 않은 거에요. 자꾸 그렇게 심술부리면 얼굴 더 못생겨져요.”여자들만의 서늘한 기 싸움 끝에 승자는 역시나 경신이었다.“야! 너 뭐라고?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현수가 다시 발끈하며 달려들려던 찰나, 쾅ㅡ! 태하가 과격하게 일어서며 의자가 뒤로 넘어가는 굉음을 냈다.“아, 시끄럽게.”의자 하나로 상황을 평정한 태하는 나른하면서도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좌중을 훑었다. 그 시선이 어찌나 서늘한지 경신의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그가 다정할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순식간에 증발해버린 순간이었다.“아, 놀라라. 태하 씨, 젊어서 그런가 힘이 넘치시네?”“자자! 나도 피곤하고 지쳤다. 오디션 마무리해야 하니까 다들 돌아가!”얼른 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