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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심판의 자리에서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4-04 10:33:54

서울중앙지방법원, 제5형사법정.

무겁고 낮은 천장 아래, 회색빛의 긴 벤치가 줄지어 놓여 있었다.

백시아는 그 법정 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정확히는, 피고인석. 손목엔 여전히 수갑이 채워져 있었고,

그녀의 양옆엔 구속을 담당한 교도관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법정 뒷편. 가장 구석진 방청석. 그곳엔 도윤이 앉아 있었다.

흰 셔츠에, 아직도 흉터 자국이 남은 왼쪽 가슴을 감싼 채.

그는 숨소리조차 죽이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재판장은 조용히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

“피고인은 연쇄살인 혐의, 살인미수 혐의, 불법체류자 고용,

공공장소에서의 무단 침입 등 다수의 중범죄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피고인의 진술에 따라 사안의 성격은 판단을 달리할 수 있습니다.”

“피고인, 본인의 입으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백시아는 마이크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법정 안의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의 목소리로 ‘백시아’라는 이름을 꺼냈다.

“제 이름은 백시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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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의 고함은 점점 커졌다.행인의 시선이 하나둘 몰렸다.시아는 숨이 막히는 듯했다.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도윤이 끝까지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정말 그만하세요. 당신이 보고 있는 사람은 당신이 상상하는 괴물이 아니에요.”“그럼 뭐예요? 피해자예요? 사랑스러운 여자예요?”그 순간 백시아가 말했다.“…맞아요. 괴물 맞아요.”모든 소음이 멎었다.시아는 고개를 들고 여자를 바라봤다.“나, 그렇게 살아왔어요. 죽이고, 도망치고, 거짓으로 숨 쉬면서.”“…그걸 자랑이라도 하겠다는 거예요?”“아니요. 이제… 그 죄를 안고 살겠다는 거예요.”그녀는 이도윤의 손을 바라봤다.그리고, 꽉 잡았다.“도망치지 않을 거예요. 그게 나니까.”주변이 다시 웅성이기 시작했다.핸드폰으로 그녀를 찍는 이도 있었다.하지만 시아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눈을 피하지도, 고개를 숙이지도 않았다.그날 밤. 시아는 아무 말 없이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도윤이 라면을 끓이다 말고 조용히 말했다.“오늘… 괜찮았어요?”“모르겠어.”“…후회돼요?”“아니. 다만… 조금 무서워.”“뭐가요?”“…당신까지 잃게 될까 봐.”도윤은 손을 뻗어 그녀의 손 위에 얹었다.“난 당신이 두렵다고 말하는 그 용기가 제일 용감하다고 생각해요.”시아는 잠시 멈춰 있더니, 천천히 그의 손을 감쌌다.“…우리, 계속 이렇게 살 수 있을까?”“살아요. 아무리 오래 걸려도. 당신이 스스로를 용서할 때까지.”눈이 내렸다. 서울의 겨울은 빠르게 찾아왔고,눈발은 조용히 백시아의 머리 위를 덮었다.그녀는 마트 옆 골목길 벤치에 앉아 있었다.누군가와의 약속은 없었다.그저, 익숙하지 않은 고요를 들이마시고 싶었을 뿐이다.주머니 안에서 울리는 진동. 이도윤이었다.[밖이에요? 추워요. 어디예요? 데리러 갈까요?]그는 언제나 그녀를 먼저 걱정했다.그 점이 그녀를 약하게도, 강하게도 만들었다.시아는 짧게 답장을 보냈다.[조금만 있다가 갈게요. 괜찮아.]그 순간, 누군가가 옆에 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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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내 대행   36. 무너지지 않기 위해

    “이도윤 씨, 기억… 믿는 편이십니까?”“갑자기 무슨”“기억은, 가장 잘 조작되는 기록입니다. 특히 당신 같은 사람에겐요.”“…뭐라고?”다른 한 명이 뒤에서 속삭였다.“대학 시절, 2009년 3월 18일. 기억하시나요? 당신 그날 한 명 죽였습니다.”도윤의 눈이 단숨에 흔들렸다.“…그건, 사고였어요.”“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정황상, 당신이 떠났고, 그는 죽었어요.그 기록, 지금 우리가 갖고 있답니다.”“…협박이네요.”“아니요. 거래죠. 당신이 지금 사이트에서 손을 떼면, 그날 일은 묻겠습니다.”도윤은 말없이 그들을 바라보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어차피 다 알고 있었어요. 그가 그걸 이용하려 할 줄.”그는 재킷 주머니에서 녹음기를 꺼냈다.“기록은 기억보다 오래 남거든요.”남자들은 당황했고, 도윤은 재빨리 걸음을 돌려 빠져나갔다.시아는 돌아온 도윤을 보며 얼굴이 굳었다.“괜찮아요?”“…문혁이, 내 과거를 알고 있어요.”“뭔데요.”“예전에… 한 명을, 죽게 놔뒀어요. 사고였지만… 난 도망쳤어요.”시아는 그의 손을 잡았다.“…도망쳤지만, 기억하잖아요. 그리고, 지우지 않았잖아요.”도윤은 작게 떨며 그녀를 안았다.“당신이, 내 앞에 있어서 다행이에요.”시아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나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도윤 씨가 있어서, 내가 더 이상 괴물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노트북 화면 위로 문혁의 얼굴이 떴다.그는 마치 오래된 친구에게 안부를 묻듯, 무표정하게 웃고 있었다.“이도윤 씨, 당신이 만든 사이트… 꽤 흥미롭더군요.한 번 보고 나니까, 옛날 생각도 나고 말이죠.”도윤은 묵묵히 화면을 바라보았다.시아는 그의 옆에서 숨을 삼킨 채 서 있었다.문혁은 말을 이었다.“2009년 3월 18일. 당신은 신입생 환영회에서한 남학생을 데리고 나갔고… 그 후로 그는 돌아오지 않았죠. 기억 안 납니까?”“…그건 사고였어요.”“그렇겠죠. 하지만 증거라는 건, 사람들이 어떻게 기억하느냐에 따라 뜻이 바뀌기도 하

  • 아내 대행   35. 도망이 아닌 후퇴

    사무실이 붕괴되듯 어수선했다.서버 장치가 과열로 부르르 떨렸고, 도윤은 백업된 USB를 쥔 채 그녀의 손을 끌었다.“뛰어요, 지금!”백시아는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문혁이 다시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녀는 달렸다.목덜미로 느껴지는 시선,그리고 문혁이 던진 마지막 한마디가 균열처럼 남았다.“기억은… 언제나 돌아오지.”그들은 서울 외곽, 도윤의 지인에게 빌린 작은 오피스텔에 몸을 숨겼다.작은 방 안, 서로 숨소리만이 가늘게 들릴 뿐이었다.도윤이 USB를 꽉 쥐고 말했다.“이 안엔, 그 사람의 운영 네트워크가 전부 담겨 있어요.명단, 자금 흐름, 사진, 영상, 그리고 당신과 관련된 기록까지.”시아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전부… 다 폭로해버릴 수 있어요?”“쉽지 않겠지만, 하나씩, 정확하게 퍼뜨릴 수 있어요.”“그럼, 이제부터 우리가 쫓는 거야?”“…맞아요. 이건 도망이 아니라 반격이에요.”며칠 후, 도윤은 인터넷의 깊은 어둠 속에서 최문혁의 주요 계좌를 추적하기 시작했다.그는 몰래 자산을 이전해 해외 거점으로 돈을 세탁하고 있었고,그 모든 움직임은 조용히 기억을 조작하는 기술과 관련된 인물들에게 연결돼 있었다.“이걸 보세요. 이 이름들…이 사람들, 전부 당신이 겪었던 장소들에서 일했던 사람들이에요.”“…한 명도, 기억 안 나.”“그럴 리 없어요. 당신이 잊게 만든 거예요. 아니면, 일부러 기억하지 않기로 했거나.”백시아는 말없이 모니터를 바라봤다.화면에 떠 있는 얼굴들 중 일부는 그녀가 어렴풋이 꿈에서 본 듯한,익숙하지만 손이 닿지 않던 얼굴이었다.“나는… 그 사람들에게 어떤 존재였던 거야.”도윤은 조심스럽게 말했다.“아마… 당신은 증인일지도 몰라요. 문혁이 감추고 싶었던 실체를 유일하게 기억하고 있는 사람.”시아의 눈이 떨렸다.“그래서 날 지우고 싶었던 거구나…”“…이젠 못 그래요.”도윤은 USB를 집어 들며 말했다.“이 안의 진실은, 당신이 누구였든 당신을 더럽힐 수 없어요.”그날 밤

  • 아내 대행   34. 내 기억은 나의 것

    도윤은 노트북 화면을 가리키며 말했다.“여기. 이 GPS 기록 이 건물 근처에서 최근에 갱신됐어.”“그럼, 그가 여전히 이 주변에 있다는 말이야.”시아는 손끝으로 지도 위 점을 짚었다.“이 위치… 이 사람, 또 다른 사무실이 있어.”“어떻게 알아요?”“…예전에 데려갔던 적이 있어. 한 번… 내가 도망치다 붙잡혔을 때.”도윤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기 전에, 하나만 물을게요.”“뭔데요?”“그 사람을… 죽일 생각이에요?”시아는 오래도록 침묵했다.그리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아니요. 이번엔 내가 증명할 거예요.내가 괴물이 아니라는 걸. 그 사람처럼 되지 않겠다는 걸.”서울 서북부, 외곽 도로를 빠져나온 끝자락.한때 소규모 벤처 기업들의 사무실이 밀집해 있던 낡은 건물 단지가 있었다.현재는 대부분 공실이었지만, 그중 하나 4층, 창문에 검은 블라인드가 처진 사무실이 백시아가 기억하던 그 장소였다.그녀는 입술을 물고 섰다.“여기야. 처음 날 데려갔던 곳. 처음… 기억을 바꿔놓은 곳.”“기억을 바꿨다고요?”“…그 사람은 내게 늘 말했다. 있는 그대로 믿지 말라고.그리고… 내가 본 것들을 왜곡해서 다시 주입했어. 처음엔 나도 진짜 내가 누군지 몰랐어.”도윤은 그녀의 옆에서 숨을 삼켰다.그녀가 지금까지 짊어져야 했던 시간들은 단순히 고통이나 폭력만이 아니라정체성 자체를 흔드는, 끔찍한 불신의 총합이었다.건물 안은 적막했다.낡은 카펫, 벗겨진 벽지. 그리고 무엇보다, 너무 익숙한 냄새.“이 냄새… 기억나요. 세제와 피 냄새가 섞인…이상하게 멀미나는 향기.”시아는 복도를 따라 조심스럽게 걸었다.그녀의 눈이 어둠 속에서 섬광처럼 번득였다.도윤은 그녀 뒤를 따르며 미리 준비한 USB 해킹 장치를 손에 들고 있었다.“이 문 안쪽에 기록 서버가 있을 거예요.”시아는 고개를 끄덕였고, 둘은 숨죽인 채 도어락 패널을 뜯어냈다.“비밀번호는 1209.”“생일이에요?”“…내 첫 번째 살인의 날.”도윤은 숨을 고르며

  • 아내 대행   8. 피의 기억

    시아는 악몽 속에 있었다.꿈 속의 거리는 낯익었다.도망치듯 달리던 그 길, 어두운 골목 끝에… 피에 젖은 구두가 떨어져 있었다.그녀의 발끝엔 끈적이는 무언가가 묻어 있었고,검붉은 액체가 한 방울, 두 방울,또각또각 그녀가 걷는 자리에 선홍의 점이 새겨졌다.그리고,그 피 위에 누군가 쓰러져 있었다.“그만… 그만해, 시아야…”어디선가, 낮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백시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어둠 속, 도윤이 피를 흘리며 웃고 있었다.그의 손엔 그녀가 감쌌던 칼이 들려 있었다.“내가, 네가 가진 걸 대신 짊어

  • 아내 대행   32. 유리창에 비친 과거

    “…도윤 씨.”“응.”“정말로… 다 괜찮을까요?”“당신이 괜찮다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내가 계속 옆에 있을게요.”“…고마워요. 이 말은 언젠가, 내가 더 크게 갚을게요.”“지금처럼, 이렇게만 있어줘도 충분해요.”도윤은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그리고 그렇게, 오랜 시간 엇갈린 마음과 마음이 비로소 하나의 온기를 나눴다.이른 아침이었다. 바닷바람이 유난히 잔잔했고,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은 따뜻했다.도윤은 먼저 깨어 있었고, 백시아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잠든 얼굴은 무방비했고, 오래 숨어 지내며 조심

  • 아내 대행   31. 다시, 너의 그림자 앞에서

    기차가 멈춘 건 오후 세 시 무렵이었다.창밖엔 조용한 바다와, 늘어진 횟집 간판,그리고 비현실적으로 고요한 골목들이 이어지고 있었다.도윤은 스쳐 가는 마을의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 작게 숨을 내쉬었다.“여기에… 진짜 있는 걸까.”손에 쥔 쪽지는 이미 구겨지고 있었다.윤태섭이 준 그것엔 단 하나의 주소가 적혀 있었고,마치 오래된 편지처럼 더 이상 그 안에서 새로운 정보를 주지는 않았다.그럼에도 그는 왔다.왜냐면 그곳은 그녀의 마지막 ‘의지’가 닿은 곳이었으니까.버스도 다니지 않는 바닷가 마을.도윤은 트렁크가방도 없

  • 아내 대행   30. 방패에서 진심으로

    “시아를… 지키는 사람입니다.”“…지킨다고요? 누굴?”“백시아요. 당신이 지금 그렇게 애타게 찾고 있는, 그 사람.”도윤은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남자는 미소도, 적대감도 없이 마치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태연했다.“그녀가 도윤 씨에게 돌아가길 원했다면 지금쯤 당신 앞에 있었겠죠.”“…그럼 지금은?”“숨고 싶어 했어요. 살아 있으면서도, 살아 있지 않게.”“그럼 당신은 지금 그녀를 감금이라도 하고 있다는 건가요?”남자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나는 단지, 그녀가 스스로를 지키게 해준 것뿐입니다.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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