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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붉은 장미 아래

작가: 데이지
last update 게시일: 2026-05-05 12:32:08

창밖으로 밤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도윤의 집 작은 거실에 앉아,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테이블 위, 뜨거운 차가 김을 피우고 있었지만, 누구도 손을 대지 않았다.

시아는 무릎을 끌어안은 채 구석에 앉아 있었다.

커튼 사이로 스며든 어둠이 그녀의 얼굴에 겹겹이 그림자를 씌웠고,

도윤은 조용히 그 맞은편에 앉아 눈을 떼지 못했다.

“…그날도, 비가 왔어.”

시아가 조용히 말했다.

“처음 사람을 죽인 날. 그리고, 당신을 만난 날도.

오늘까지… 비가 오는 날은 늘 나한테 뭔가를 가져가.”

그녀는 천천히 눈을 들었다.

도윤은 그 시선을 마주했다.

“내가 제일 무서운 게 뭔 줄 알아요?”

“…아니요.”

“당신이 나를 포기하는 거야.”

그 말에, 도윤의 손이 천천히 움찔했다.

“난 내가 한 일들을… 절대 잊을 수 없어.

사람들이 내 이름을 들으면, 경멸하거나 혐오할 거야. 그런데도…”

시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어갔다.

“당신만큼은… 나를 사람으로 대해줬잖아.

처음부터 끝까지, 날 여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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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굴이 많이 변했네.”서늘한 어둠이 눌러 앉은 창고 안, 조진혁은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눈빛은 식었고, 손끝은 담배 하나 없이 허공을 말아 쥐고 있었다.그의 눈에 비친 백시아는, 더는 예전의 여자가 아니었다.혹은… 그는 단 한 번도 그녀를 제대로 본 적 없었는지도 몰랐다.시아는 조용히 문을 닫고 안으로 걸어들어왔다.그녀의 발끝은 조용했지만, 마음은 거세게 울고 있었다.“이제야… 내 앞에 제대로 서네.”진혁은 한참을 응시하더니,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작은 USB였다.“여기, 네가 남긴 조각들이 있어.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고… 그 남자, 이도윤에 대한 것도.”시아의 손이 멈칫했다.그 이름이 스쳐간 순간, 숨이 걸렸다.“도윤이는 상관없어.”“정말?”조진혁은 조용히 웃었다.그 웃음은 냉소와 안타까움 사이 어딘가에 있었다.“널 처음 쫓기 시작했을 때, 그 남자… 단순한 방패막일 줄 알았어. 근데 말이야. 그 남자, 지금 널 진심으로 사랑해.”시아는 잠시 시선을 내렸다.그 말이… 숨이 막히게 무거웠다.하지만 더 무거운 건 그 사랑이 자신에게 너무 과분하다는 자각이었다.“도윤이한테… 아무 짓도 하지 마. 부탁이야.”“그 부탁을 들을 이유가 있을까?”진혁은 고개를 기울였다.말투는 무심했지만, 눈빛만큼은 흔들리고 있었다.“내가 널 놓아주는 순간, 수사도, 내 커리어도, 그리고… 내 자신도 무너져.”시아는 조용히 다가가 그의 앞에 섰다.두 사람 사이의 거리, 예전엔 익숙했던 그 거리에서 이제는 낯설 만큼 다른 감정이 어지러이 맴돌았다.“그럼… 날 데려가.”시아는 입을 열며, 두 눈을 똑바로 들이밀었다.“내가 끝내야 해. 내가 만든 죄, 내가 끌고 간 길, 내가… 끝내야 후회가 덜할 것 같아.”진혁은 그 눈빛을 피하지 못했다.한참을 그렇게 마주보던 그는, 이윽고 몸을 돌렸다.“…네가 정한 마지막이라면, 그 끝은 내가 보증하지.”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그 순간, 조용히 한 줄 눈물이 턱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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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내 대행   87. 비 내리는 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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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밖으로 밤비가 내리기 시작했다.도윤의 집 작은 거실에 앉아,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테이블 위, 뜨거운 차가 김을 피우고 있었지만, 누구도 손을 대지 않았다.시아는 무릎을 끌어안은 채 구석에 앉아 있었다.커튼 사이로 스며든 어둠이 그녀의 얼굴에 겹겹이 그림자를 씌웠고, 도윤은 조용히 그 맞은편에 앉아 눈을 떼지 못했다.“…그날도, 비가 왔어.”시아가 조용히 말했다.“처음 사람을 죽인 날. 그리고, 당신을 만난 날도.오늘까지… 비가 오는 날은 늘 나한테 뭔가를 가져가.”그녀는 천천히 눈을 들었다.도윤은 그 시선을 마주했다.“내가 제일 무서운 게 뭔 줄 알아요?”“…아니요.”“당신이 나를 포기하는 거야.”그 말에, 도윤의 손이 천천히 움찔했다.“난 내가 한 일들을… 절대 잊을 수 없어.사람들이 내 이름을 들으면, 경멸하거나 혐오할 거야. 그런데도…”시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어갔다.“당신만큼은… 나를 사람으로 대해줬잖아.처음부터 끝까지, 날 여자라고 불러준 유일한 사람이었어.”도윤의 눈이 붉어졌다.“그래서 무서워. 그게 언젠가 깨질까 봐.내가 만든 이 가짜 세계에서, 당신도 결국 날 떠날까 봐.”그는 조용히 다가가 그녀의 옆에 앉았다.“사람은 누구나 도망치고 싶을 때가 있어요. 나도 그랬고. 하지만…”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밖에서는 천둥이 멀리서 울리고 있었다.“백시아 씨. 당신은 지금까지 혼자 견뎌온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나랑 같이 견뎌봐요.”시아는 그 말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같이?”“같이 무서워하고, 같이 아파하고, 같이… 끝을 봐요. 혼자 두지 않을게요.”시아는 가만히 도윤을 바라보다, 조용히 그의 손등 위에 손을 얹었다.“…정말, 후회 안 할 거예요?”“이미 하고 있어요. 당신을 이렇게 늦게 알아봤다는 걸.”그 순간, 시아의 눈에서 천천히 눈물이 떨어졌다.말 없이 흘러내리는 그것은, 그동안 쌓였던 죄책감과, 두려움과,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의 잔해들이었다.그리고 그 눈물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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