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창밖에서 희미하게 스며드는 가로등 불빛이 백시아의 침실 벽을 타고 내려왔다.그녀는 등을 돌린 채 이불을 끌어안고 누워 있었지만, 눈은 감기지 않았다.심장은 요란하게 뛰고 있었고, 귓가에 자꾸만 도윤의 목소리가 맴돌았다.‘같이 혼란스러워요, 우리.’그 말이… 그저 따뜻해서 무서웠다.혼란이란 건 늘 그녀 혼자의 몫이었는데.그것마저 나눠주겠다는 사람 앞에서 백시아는 쉽게 무너지려 하고 있었다.새벽 세 시. 그녀는 결국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차가운 공기가 방 안으로 밀려들었고,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그때였다.문득,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아파트 맞은편 골목 어귀. 가로등 밑 어둠 속에 실루엣 하나가 잠깐 스쳤다.‘…설마.’그녀는 단숨에 창문을 닫고 커튼을 내렸다.가슴이 벌떡 뛰었다.누군가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 직감은, 늘 틀리지 않았다.시아는 곧장 침대 밑에서 작은 금속 상자를 꺼냈다.그 안엔 버리지 못했던 것들. 도망치는 삶 속에서유일하게 지니고 다녔던 ‘필요한 무기’들이 있었다.칼. 현금. 그리고, 과거의 흔적들. 그녀는 칼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뚜껑을 닫았다.“안 돼… 이번엔 그렇게 하지 마.”다음 날 아침. 도윤이 커피 두 잔을 들고 백시아 집 앞을 찾았다.문을 두드리자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녀가 나왔다.눈 밑은 다크서클이 내려앉아 있었고, 그녀는 커튼 틈 사이로 밖을 두리번거렸다.“…무슨 일 있었어요?”도윤의 물음에 시아는 고개를 젓고는 그를 안으로 들였다.거실로 들어선 도윤이 묻는다.“진짜 괜찮아요?”“…아니요.”그녀는 조용히, 허탈하게 웃었다.“이상하죠? 나 같은 사람이 지금은 이 평범한 하루가 무서워요.”도윤은 그녀 옆에 앉았다.시아는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입을 열었다.“도윤 씨… 내가 또 사라지면 어쩌려고 그래요?”“…안 사라질 거잖아요.”“만약, 정말로 어쩔 수 없이 그런 상황이 되면요?”도윤은 시아의 손을 잡았다.그녀의 손끝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
시아는 오늘도 어김없이 도서관으로 향했다.책을 정리하고, 조용한 구석에 앉아 신문을 훑고, 점심이면 따뜻한 국물이 있는 식당에 들른다.그녀의 하루는 조용하고 단조로웠고, 그 단조로움이야말로 그녀가 선택한 가장 안전한 삶의 방식이었다.'더 이상 누구의 감정을 휘두르지도, 휘둘리지도 않는 삶.누군가를 속이지도, 속이지 않아도 되는 하루.하지만 그날따라 등 뒤에서 느껴지는 낯익은 기척이 자꾸 신경을 거슬렀다.계속해서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시선은 뜨겁고, 조심스러우며, 무언가를 삼키는 듯했다.시아는 일부러 그 방향을 외면했다.고개를 돌리면, 혹시 정말 그가 서 있을까봐.그를 다시 보면 자신이 먼저 무너질까봐.도윤은 다가서지 않았다.그저 멀리서, 그녀가 웃는 모습, 창밖을 바라보는 모습,작은 일에도 눈을 감고 숨을 고르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그녀가 살아 있고, 아프지 않고,스스로의 이름으로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했다.하지만…그녀가 어느 날, 혼자 벤치에 앉아 잠깐 고개를 떨군 순간.그 짧은 동작 하나가 도윤의 심장을 쥐어짜듯 조였다.'아직도… 그녀는 아프구나.'그제야 도윤은 이런 방식의 사랑은 그녀에게도, 자신에게도 결코 온전한 구원이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다음 날.시아는 작은 꽃집 앞에서 멈췄다.무심히 진열된 화분들 사이, 붉은 장미 한 송이가 눈에 띄었다.‘아, 그때…’그녀의 가슴속 어딘가가 먹먹하게 쿵 내려앉았다.자신의 과거를 상징하던 그 꽃.그녀가 잊으려 했던 모든 시간을 하나의 색으로 응축한 듯한 강렬한 붉은색.그런데 그 옆에 놓인 작은 쪽지가 그녀의 시선을 멈추게 했다.'나는 여전히 널 사랑해. 지금의 너를, 있는 그대로.'그 문장은 그의 것이었다.시아는 손끝을 떨며 쪽지를 주워 들었다.그 순간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그녀에게 닿았다.“…백시아.”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그곳에, 그가 서
그날 저녁. 시아는 조용히 캐리어에 짐을 싸고 있었다.소리 하나 없이 옷을 개고, 서랍을 열어 정리한 작은 물건들을 넣었다.무심히 던져진 인형 하나, 도윤이 생일이라며 사다 준 머플러 하나,함께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 그 모든 것이 짐이 아닌 기억이었다.거실로 나오자, 도윤이 마주 앉아 있었다.“…도망치는 거야?”시아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지켜주고 싶어서 그래.”“누가 누구를?”“내가 널.”“…넌 지금 나한테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말 하고 있는 거 알아?”“도윤아…”“네가 그런 말 하면 난 너를 포기할 수가 없어지잖아.”그는 무너지기 직전의 얼굴로 시아를 바라봤다.한 번도 그렇게 간절하게, 누군가를 바라본 적 없다는 듯.“사람들이 뭐라든, 네가 어떤 과거를 가졌든,지금의 너는… 나랑 함께 웃고, 밥 먹고, 같은 이불 속에서 잠든 사람이야.”“…그래서 더 무서운 거야. 네가 나를 그렇게 기억하게 되는 게.”시아의 목소리는 떨렸다.“언젠가… 너도 날 미워하게 될까 봐. 그게 더 끔찍해.”도윤은 그녀에게 다가가 손끝으로 백시아의 눈가를 어루만졌다.“…난 널 미워할 수 없어.”“왜?”“사랑하니까. 넌 나한테, 처음으로 내가 누군가에게 의미 있다는 걸 느끼게 해준 사람이니까.”시아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다, 결국 조용히 눈을 감았다.“…그러면 나한테도 마지막으로 의미 있는 사람이 되어줘.”“무슨 뜻이야.”“나… 잠깐만 사라질 거야. 영영은 아니야.”도윤의 손이 멈췄다.“잠깐이면… 돌아오는 거지?”시아는 대답하지 않았다.그저 조용히, 도윤의 손등 위에 입을 맞췄다.며칠 뒤. 도윤은 조진혁에게 전화를 걸었다.“형. 그냥… 그 사람 놓아줄 수 있어?”'놓아주는 게, 그 사람을 더 아프게 하는 거일 수도 있어.'“그래도… 기다릴게. 언젠가, 그녀가 돌아오면 그땐 말 안 할 거야. 그녀가 말하지 않아도그녀 안에 뭐가 있는지, 내가 다 알 것 같으니까.”진혁은 아무 말 없이 그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잠
시아는 그날 밤, 혼자 조용히 일어났다.잠든 도윤의 손을 조심스레 떼고 부엌으로 나가 가장자리까지 깨끗이 닦인 유리잔에 물을 따랐다.컵을 들고 창가에 선 그녀의 뒷모습이 문득 투명하게 느껴졌다.‘다시, 이럴 수는 없어.’사람이란, 자꾸만 과거를 미화하거나, 아예 지워버리려 드는 존재다.하지만 백시아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지워지는 과거는 없다는 걸.남겨지는 건 죄책감이 아니라 몸에 새겨지는 감각이라는 걸.그녀는 휴대폰을 켰다.기록을 뒤지고, 다시 켜고, 끄고, 익숙한 번호 하나를 망설임 끝에 눌렀다.“여보세요.”낮은 목소리. 조진혁이었다.“…나야.”“…시아 씨?”“혹시… 지금 나 좀 볼 수 있어요?”잠시 침묵. 그리고 곧, 조진혁은 묻지도 않았다.“어디로 갈까요.”한밤중. 도시 외곽의 조용한 카페.불은 꺼져 있었지만 진혁은 조용히 문을 열어 백시아를 안으로 들였다.“이런 데서 일하던 적이 있었어요.사건 때문에 숨어 지낼 때, 여기 사장님이 도와주셨거든요.”시아는 말없이 앉았다.그리고 천천히,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나, 기억이 하나 떠올랐어요.”“기억?”“내가 처음… 사람을 죽였을 때.”진혁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그때, 내 손에 쥐고 있던 건 칼이 아니라… 나비핀 하나였어요.”그녀는 허공을 바라보았다.정말 먼, 아주 오래된 장면을 꺼내듯.“계부였어요. 나를 팔려고 했던 사람. 도망치던 날, 그 사람이 내 목덜미를 잡고벽에 내리쳤는데… 정신이 돌아왔을 땐, 그 사람 목에 그 핀이 박혀 있었어요.”“…시아 씨…”“내가 찔렀는지도 몰라요. 기억이 없었으니까. 근데… 그때부터였어요. 이상하게, 숨이 트이기 시작한 건.”그녀는 고개를 떨궜다.“그런데 도윤이랑 있으면, 그 숨이 다시 막혀요.”“왜요?”“행복해지니까. 행복해지면, 잃을 게 생기잖아요.”진혁은 그 말을 듣고 오래 숨을 삼켰다.“…도망치지 마요.”“…”“내가 붙잡을게요.”시아가 고개를 들었다.“진심이에요?”“항상
“이번엔 끝내러 왔어.”시아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단했다.그 안엔 과거의 그림자가 아니라 지금의 자신이 있었다.이강식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끝이라… 네가 무슨 수로?”그는 천천히 한 발 내디뎠다.그에 맞춰 백시아도 움직였다.더는 피하지 않는 거리, 마지막 경계선 위에 두 사람의 발끝이 섰다.“…내가 끝내. 내가 시작했으니까.”“아니지, 시아야.”그는 조용히 중얼이며 허리춤에서 뭔가를 꺼냈다.“넌 늘 누군가의 시작일 뿐이었지. 끝내는 건, 나 같은 놈들이 하는 거야.”백시아는 망설임 없이 총을 꺼내 그의 이마를 겨눴다.“…더는 아무도 죽이지 못하게 할 거야.”이강식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그리고 그 순간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시아!”창고 안으로 도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단번에 백시아의 얼굴이 흔들렸다.“도윤…?”그녀는 본능적으로 총을 내렸다.그 짧은 찰나, 이강식의 손이 허공을 가르며 움직였다.찰나의 위협. 도윤이 달려들며 백시아를 감쌌고, 두 사람은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탕! 총성이 울렸다.창고 안은 순간 정적에 휩싸였다.시아는 떨리는 손으로 도윤을 감싸 안았다.“괜찮아? 어디 다쳤어?”“아니… 넌?”“…난 괜찮아.”하지만 시아의 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도윤의 얼굴을 더듬었다.“왜 왔어… 왜…”그는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그런 눈으로 나 떠나려고? 그게 네가 나한테 줄 마지막이었어?”“…….”“넌 날 속이더라도, 이렇게 위험한 데서 혼자 끝내려고 하지 말았어야지.”도윤의 손이 시아의 뺨을 감쌌다.그녀의 눈에서 울지도 못한 눈물이 고였다.“난 이제, 널 지키고 싶어서가 아니라”그는 잠시 멈췄다.“널 함께 살아가고 싶어서 쫓아온 거야.”그 순간, 창고 문이 또 한 번 열렸다.조진혁이었다.총을 든 채 주변 상황을 파악하며 단숨에 세 사람 사이로 뛰어들었다.“무기 내려. 이강식.”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도윤 씨, 백시아. 지금부터는 내가 처리합
그날 밤, 시아는 도윤의 병실 문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다.열지 못한 문, 그 너머에 누운 사람.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던 그 존재가 이제는 그녀가 지켜야 할 이유가 되어버렸다.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 도윤은 벽 쪽으로 등을 돌린 채 잠들어 있었다.작은 숨소리, 고르고 편안한 숨결.시아는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 천천히 그의 옆에 앉았다.그녀의 손끝이 그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너무… 고맙다.”시아는 속삭이듯 말했다.“내가 다시 살아보자고 마음먹게 만든 게… 네가 처음이야.”조심스레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춘 그녀는더 이상 흔들리지 않으려는 듯 입술을 꾹 다물고 병실을 나섰다.병원을 나선 시아는 곧장 한 낡은 건물로 향했다.낯선 골목, 오래된 철제 문.주변을 살핀 그녀는 무표정하게 손을 뻗어 벨을 눌렀다.“누구야.”문 너머에서 탁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오래된 친구야. 잠깐 얘기 좀 하자.”잠시의 정적 후, 문이 열렸다.안쪽엔 퀭한 눈으로 백시아를 바라보는 중년 남자가 있었다.과거 조직에서 정보를 팔던 인물, 백시아에게 빚이 있는 자였다.“그 이름… 이강식. 지금 어디서 움직이는지 말해.”시아의 말투는 단호했고, 표정에는 타협이 없었다.“…….”“알아낸 대로만 말해. 나 지금 웃을 기분 아니니까.”남자는 눈을 내리깔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며칠 전… 부산 쪽에서 연락받았어. 그 새끼 살아있었고… 거기서 몇 명 끌고 움직이고 있었어. 근데”“뭐?”“백시아, 널 찾고 있었어. 가짜 이름으로 숨은 여자. 그 여자가 살아있다고.”시아는 숨을 들이켰다.차갑게 식은 심장이 한 번 더 내려앉는 듯했다.“…또 시작이네.”남자는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근데 이번엔, 그때랑 달라. 지금 그놈, 완전히 미쳐 있어. 정상이 아냐. 네가 먼저 움직이지 않으면…”시아는 조용히 그의 말을 끊었다.“알아서 해.”“…뭘?”“그 새끼 있는 곳, 추적해. 내일 아침까지 알려줘.”“백시아,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