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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아내 대행: Chapter 1 - Chapter 10

10 Chapters

1. 붉은 장미는 피 대신 웃었다

지독하게 습한 밤이었다.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공기는 젖은 수건처럼 눅눅했고,도로는 피와 기름, 거짓말로 반짝였다.시아는 그를 죽이기 위해 웃고 있었다.붉은 립스틱을 천천히 바르며, 거울 속 자신의 눈빛을 확인했다."정말로 안 보고 싶었는데."남자는 마지막까지 그녀의 이름을 몰랐다.그건 늘 그랬다. 사랑이라 착각한 남자들의 입에서 그녀는 한 번도 누구였던 적이 없었다.욕망, 환상, 우월감 그 안에서 그녀는 언제나 타인으로 소비됐다.그러니 죽일 이유는 충분했다. 아니, 오히려 늦은 편이었다.그는 알코올에 절어 있었고, 침대는 전보다 훨씬 더럽고, 욕망은 훨씬 뚱뚱해져 있었다.시아는 그의 목을 꺾었다. 정확하게, 빠르게, 소리 없이.그녀는 죽은 남자의 가슴 위에 늘 그러했듯 붉은 장미 한 송이를 조용히 올려놓았다.조화였다. 시들지 않는 장미. 피처럼 번지지 않는..."잘 자요, 쓰레기."그녀는 뒷문을 열고 나가려다, 문득 멈췄다. 뭔가 이상했다.현관 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무거운 구두. 여러 사람. 무전기 소리.‘…누가 올 리가 없는데.’그녀는 숨을 들이켰다.도어락 비밀번호를 입력할 새도 없이 문 너머에서 누군가 외쳤다.“경찰입니다! 당장 문 여세요!”심장이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아니, 그녀의 귓가에서 터졌다.'왜. 왜 지금. 왜 오늘.'시아는 창문을 열고 몸을 던졌다.이층. 충분히 견딜 수 있는 높이였다.무릎이 깨졌고, 손목이 비틀렸다.하지만 뛸 수는 있었다.그녀는 뒷골목을 타고 달렸다.운동화 밑창이 벗겨지고, 발바닥이 피로 번졌다.뒤에서 경찰이 외쳤다."여기서 멈춰! 움직이면 쏜다!"'거짓말... 죽이고 싶으면 죽여.'그녀는 웃음이 터질 뻔했지만, 숨이 더 급했다.숨었다. 기어들었다.낮은 환풍구, 쓰레기통 뒤, 폐간판 아래그녀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처음으로 '죽고 싶지 않다.'는 감정을 느꼈다.'지금 죽으면 너무 비참하잖아.''이렇게...이대로...마무리할 수는 없어그때였다.그녀의 시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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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밤의 그림자는 안에서 열린다

그날 밤, 도윤은 일찍 퇴근했다.정말로 퇴근하자마자 고기를 사 들고 왔다.삼겹살과 목살, 쌈채소, 김치까지. 정성이라기보단 단순한 사람의 성실함이었다.“고기 구울까요?”도윤이 물었고, 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들은 테이블 대신 거실 탁자에 불판을 올리고 작은 연기 속에 서로 마주 앉았다.고기가 익는 소리, 기름 튀는 냄새,김치가 타기 직전의 탄향.모든 것이 이상하게 집 같았다.시아는 고기를 집어 입에 넣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입에 안 맞나요?”도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니요. 괜찮아요. 딱 사람 사는 맛이 나네요.”그 대답은 어느새 도윤을 웃게 만들었다.“무슨 말이에요, 그건?”“그냥. 이런 식사는 살아있는 사람들이 하는 거잖아요.”“…당신도 살아있어요.”“그래요, 지금은 아직은.”도윤은 그 말의 끝에 무언가를 느꼈지만, 입을 닫았다.밤이 깊었다.도윤은 방으로 들어갔고, 시아는 소파에 앉아 가만히 무릎을 끌어안고 있었다.손톱 끝이 하얗게 말라 있었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그리고, 손톱을 뜯었다. 피가 살짝 맺혔다.아프지 않았다. 아픔은 이미 오래전에 고장 나 있었다.그때, 문득 옆방에서 도윤의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그녀는 그 소리에 깜짝 놀라듯 몸을 움찔했다.'이 집엔… 사람 소리가 난다.'처음이었다.어느 집에 들어가 자는 소리를 들은 건.보통은 그녀가 나올 땐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그녀는 이불도 덮지 않고 바닥에 누웠다.두 눈을 뜬 채 천장을 바라봤다.손가락 사이에 남은 피의 점이 말라가고 있었다.그리고, 기억이 들이닥쳤다.“너는 입 다물고 있어. 이 말 누구한테 했다고 생각해봐. 너 그때처럼 또"계부의 목소리였다.지금은 죽은 하지만 그녀 안에서 매일 밤 살아나는 남자.“가족끼리 그런 거야. 아빠가 널 사랑하니까… 가만히 있으면 되는 거야. 윤아…”숨이 막혔다. 그녀는 이불 밖으로 기어나와 욕실로 향했다.세수를 했다.찬물로 얼굴이 얼얼할 만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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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지켜주고 싶은 살인마

도윤의 일상은 매일 똑같았다.아침에 일어나고, 출근하고, 코딩하고, 회의하고, 퇴근하고, 집에 와서 게임을 했다.그게 전부였다.아무도 그를 기다리지 않았고, 아무도 그의 안부를 묻지 않았다.그런데 지금, 집엔 사람이 있었다.그것도, 백시아라는 기이한 여자가.그녀는 요리를 헸고, 청소도 했다.대화는 짧았지만, 대답은 정확했다.“청소기 돌려도 돼요?”“괜찮아요.”“이불 빨래는 내가 할게요.”“도와드릴까요?”“아니요. 내가 사는 공간이니까, 내가 해야죠.”말은 정상이었지만, 표정은 없었다.기계처럼 정리된 말투. 그러나 거기엔 감정이 없었다.그럼에도 도윤은 이상하게 편했다.누군가 집에 있는 게,말을 걸어주는 사람이 있는 게 이상하리만치 좋았다.시아는 혼자 있을 때마다 게임 캐릭터 피규어를 바라보곤 했다.“얘 이름이 뭐예요?”처음으로 그녀가 먼저 질문했다.손엔 도윤의 피규어가 들려 있었다.“걔는 루시아. 제 게임에 나오는 캐릭터예요.”“왜 이런 거 모아요?”“그냥… 예쁘잖아요.”“……여자가 칼 들고 싸우는 게 예뻐요?”“강한데, 슬픈 얼굴이니까요. 왠지 지켜주고 싶어져요.”그 말을 들은 시아는 피식, 웃었다.그러곤 피규어를 유리장 안에 다시 조심스레 넣었다.“그런 건 그냥 바라만 봐요. 지키려 들면… 다쳐요.”“…네?”“강한 여자는 대부분 이미 무너져 있거든요.”도윤은 그 말이 계속 마음에 남았다.무너진 사람. 지켜주고 싶어질 만큼 위험한 사람.그게 지금 자신의 집에 있는 백시아 같았다.그날 밤, 시아는 혼자 베란다에 나갔다.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그저 서 있었다.무표정한 얼굴로, 고요하게 어둠을 마주했다.그러곤 아주 천천히, 주머니에서 작은 무언가를 꺼냈다.접이식 칼. 작고 날카로운 날.빛에 반짝이는 금속의 차가운 곡선.시아는 손가락에 칼끝을 올렸다.얕게 눌렀다. 피가 나지는 않았다.단지 그 충동이 아직 살아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안 없어졌네.”그녀는 칼을 접어 다시 주머니에 넣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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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누군가가 나를 본다

아침에 커튼 사이로 새어든 햇살이 벽을 타고 흘렀다.식탁 위엔 남은 김밥과 미지근한 커피가 놓여 있었고,그 옆에 얇은 포스트잇 하나가 덩그러니 붙어 있었다.“일찍 나가요. 점심은 알아서 드세요. - 시아”짧은 메모. 도윤은 그걸 읽고 괜히 웃음이 났다.서툰 배려, 무표정한 얼굴과는 다르게 ‘챙김’이 있었다.“알아서 드세요… 이거, 나 걱정한 건가?”그는 시아의 빈 자리를 보며 혼잣말을 했고, 책상에 앉아 피규어를 바라보았다.루시아, 무표정한 여자 전사. 왠지 모르게 시아와 겹쳐 보였다.“아니지. 걘 더… 무섭고, 더 외로워 보여.”도윤은 한참 동안 앉아 있다가, 문득 핸드폰을 들어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조심히 다녀오세요. 그리고… 고마워요. 밥 챙겨준 거.]답장은 없었다. 시아는, 항상 그랬다.말없이 왔다가, 말없이 사라졌다.감정을 남기지 않고...그런데 그 무덤 같은 침묵이 이제 조금 외롭게 느껴졌다.시아는 오래된 시장 골목을 걷고 있었다.팔짱을 낀 채, 주변을 살폈다.사람들. 칼국수 냄새. 비닐 장갑을 낀 손들.삶이 이글거리는 공간.그 틈에 그녀는 혼자였다. 아무도 그녀를 모른다.그 누구도 그녀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모른다.“정육점은 저기네.”그녀는 고개를 돌려 한 가게를 바라봤다.그리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뭐 드릴까요, 아가씨?”정육점 사장은 인상이 순했다.하지만 시아는 속으로 생각했다.이 사람을 죽인다면 칼은 어디서 쥐어야 깔끔하게 들어갈까.목을 노릴까, 복부를 찌를까.아니면 칼이 아닌 도구가 더 효과적일까.그녀는 스스로에게 충격을 받았다.이 남자는 아무 죄가 없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 죽이고 싶다.그 욕망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그녀는 그 사실에 무섭도록 차분해졌다.“…삼겹살이요. 600g만 주세요.”도윤은 회사에서 집중이 되지 않았다.화면 속 캐릭터는 움직이지만, 그의 머릿속엔 온통 시아의 얼굴이 떠다녔다.“강한 여자는 대부분 이미 무너져 있거든요.”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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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녀 안의 불씨

조용했다. 아침인데, 기이하게 조용했다.이도윤은 평소보다 일찍 깼다.빛은 여전히 커튼 뒤에 숨어 있었고, 시아의 방문은 닫혀 있었다.그는 문 앞에 잠시 서 있었다.노크를 할까 망설이다, 그냥 조용히 주방으로 향했다.싱크대에 컵 두 개가 놓여 있었다.하나는 씻은 흔적이 없었다.그녀가 새벽까지 깨어 있었던 것이다.'무슨 생각을 하면서 밤을 지새웠을까.'도윤은 조용히 커피를 내렸다.한 잔은 자신의 것. 그리고 다른 한 잔은 시아의 컵.그녀는 아직도 자기만의 어둠 속에 갇혀 있었다.그러나 그 어둠이 이제는 그에게도 익숙해지고 있었다.시아는 방 안에서 창밖을 보고 있었다.도시의 소음이 희미하게 올라왔고,창문에 맺힌 습기 너머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다.'다들… 얼마나 멀쩡한 척하며 살고 있을까.'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그러나 그중 누군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자신을 바라보며 커피를 내리고 있을 것이다.그게 이도윤이라는 남자였다.그는 너무 맑았다.너무 순해서, 그를 보고 있으면 자신이 더럽고 더럽다는 걸 끝없이 자각하게 된다.‘이대로… 내가 이 사람 옆에 있어도 될까.’시아는 손끝으로 창문을 문질렀다.자신의 손가락 자국이 습기 위로 선명하게 남았다.그 흔적처럼, 그녀의 과거도 점점 세상에 드러나고 있었다.서울 경찰청. 강력 4팀 회의실. 진혁은 칠판 앞에 섰다.그의 손엔 오래된 수사기록이 들려 있었다.“이건… 다섯 번째 피해자가 아니라, 첫 번째 피해자와 관련이 있습니다.”그는 자료를 꺼내 들었다.2009년. 한 중년 남성. 의문의 질식사.당시 사건은 자살로 종결됐다.그러나“이 사건 현장에도 조화가 있었습니다.붉은 장미, 똑같은 조화. 보고서에는 우연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그게 우연일 리가 없죠.”동료 형사가 물었다.“피해자는 누굽니까?”“이름은 백근수. 딸이 하나 있었어요. 17세. 이름은 백시아.”순간, 회의실의 공기가 식었다.“지금 우리가 쫓고 있는 용의자와 이름이 같습니다.”“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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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전과의 고령

창밖으로 빗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7월의 여름비는 뜨겁고, 질척였다.백시아는 창문에 손을 대고 있었고,그 손끝에서 천천히, 무언가가 안쪽으로 흘러들어오는 듯했다.도윤은 뒤에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녀의 어깨가 오늘은 유난히 좁아 보였다.그 말없이 흔들리는 등 너머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비 오는 날은… 좋았어요.”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시끄러워서. 내 안에 있는 목소리를 가릴 수 있으니까.”“그 목소리… 지금도 들려요?”백시아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가끔. 아주 조용할 때, 나를 부르죠. 다시 돌아오라고. 예전처럼, 그날처럼…”그녀의 음성은 담담했지만, 그 안에 무언가가 깨진 채 섞여 있었다.도윤은 조심스레 그녀에게 다가갔다.팔을 뻗을까, 망설이다가 그녀의 옆에 가만히 섰다.“돌아오지 마요.”그녀는 고개를 살짝 돌려 그를 바라봤다.“지금 이 순간, 여긴 당신이 있어야 할 곳이에요.”시아는 그의 눈을 보았다.그 눈은 겁 없이 그녀를 향해 있었고, 그것이 그녀를 더 두렵게 했다.“나, 너무 많이 망가졌어요. 당신이 감당할 수 있는 사람 아니에요.”“그건 내가 판단해요.”도윤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작게 웃었다.“나는… 감당하고 싶어요. 그게 당신이라면.”그녀는 눈을 감았다.고요히, 조용히. 그리고 아주 작게 속삭였다.“…이도윤 씨는, 이상한 사람이에요.”그 말은 거절이 아니었다.그녀는 자신 안에서 무너지고 있었다.조용하고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그 시각, 진혁은 경찰서에서 낡은 서류 하나를 펼치고 있었다.2009년. 사망자: 백근수.사망원인: 질식사.처리: 자살로 종결.진혁은 눈썹을 찌푸렸다.현장 사진엔 분명히 붉은 조화 한 송이가 놓여 있었다.당시엔 아무 의미 없는 장식이라 여겼다.그러나 지금, 그건 서늘한 시그니처였다.“첫 번째야… 분명히.”그는 중얼였다.“이게 시작이었어. 그리고 그녀는…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지.”그는 다음 서류를 펼쳤다.고등학교 상담 기록.백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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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첫 번째 밤

시아는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이도윤의 손을 놓지 않은 채,등을 돌려 누운 채, 눈만 뜬 채.도윤의 체온은 따뜻했다.숨결은 규칙적이었고, 무언가를 믿는 사람처럼 평온했다.그런 도윤을 보며 시아는 더욱 불안해졌다.‘내가 이런 걸 가질 수 있는 사람인가.’그녀는 알고 있었다.이건 잠시의 꿈이라는 것을.이도윤은 결국, 자신의 어둠을 마주하게 될 거라는 것을.그리고 그 순간, 모든 게 부서질 거라는 것도.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하지만 눈꺼풀 뒤에서 떠오른 것은 이도윤의 얼굴이 아니라, 그날 밤이었다.2009년 여름. 덥고, 끈적한 밤.어린 시아는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창틀을 붙잡은 손은 떨렸고, 몸은 멍투성이였다.거실에선 계부가 술에 취해 비틀거리고 있었다.욕설이 섞인 텔레비전 소리가 귀를 때렸다.그녀는 조용히 주방으로 갔다. 칼을 꺼냈다. 작은 과도였다.떨리는 손. 그러나 표정은 무표정이었다.그날, 그녀는 처음으로 살인을 했다.칼을 든 손으로, 자신을 짓밟던 괴물을 찔렀고 붉은 피는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그 피 위에, 그녀는 쓰러졌고, 웃지도 울지도 않은 채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그때의 눈. 그때의 침묵. 그때의 냄새. 아직도 잊히지 않았다.“시아 씨?”도윤의 목소리에 시아는 돌아왔다.“…네?”“무슨 꿈 꿨어요? 갑자기 숨이 거칠어서…”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그냥… 과거 생각이 좀 났어요.”도윤은 잠결에도 그녀의 손을 다시 잡았다.“지금은 괜찮아요. 여긴… 아무도 없어요.”그 말이 그녀를 더욱 무너뜨렸다.‘여긴 아무도 없어… 그건 나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야.’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그러나 심장은 더욱 빠르게 뛰고 있었다.한편, 경찰서.진혁은 백시아의 첫 살인을 재조사 중이었다.당시 사건은 자살로 종결되었지만, 현장 기록에서 수상한 점은 수두룩했다.그 중 하나. 거실 테이블 위, 장미 한 송이.붉은 조화.당시 경찰은 그저 집 안 장식이라 판단했지만 진혁은 알고 있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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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피의 기억

시아는 악몽 속에 있었다.꿈 속의 거리는 낯익었다.도망치듯 달리던 그 길, 어두운 골목 끝에… 피에 젖은 구두가 떨어져 있었다.그녀의 발끝엔 끈적이는 무언가가 묻어 있었고,검붉은 액체가 한 방울, 두 방울,또각또각 그녀가 걷는 자리에 선홍의 점이 새겨졌다.그리고,그 피 위에 누군가 쓰러져 있었다.“그만… 그만해, 시아야…”어디선가, 낮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백시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어둠 속, 도윤이 피를 흘리며 웃고 있었다.그의 손엔 그녀가 감쌌던 칼이 들려 있었다.“내가, 네가 가진 걸 대신 짊어져줄게. 그러니까 이제 그만… 혼자 울지 마.”그 말은 꿈이었지만, 현실보다 더 깊게 심장을 찔렀다.시아는 그 순간,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도윤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옆에서 몸을 웅크린 시아가 억눌린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시아 씨… 괜찮아요? 악몽 꿨어요?”그녀는 대답하지 못했다.숨이 목울대까지 차올라서 심장은 벌써 수백 미터를 달려온 것처럼 뛰고 있었다.“물 가져올게요.”그가 자리를 뜨려 하자, 시아가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그 손은 너무도 차가웠다.“…가지 마요.”그녀는 속삭이듯 말했다.도윤은 멈췄다.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른 뒤,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꿈에서, 당신이 피를 흘렸어요. 내가… 그 피 위에 서 있었어요.”도윤은 그 말을 들은 순간,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꼭 안았다.그녀의 등은 말라 있었지만, 어딘가 젖은 감촉이 느껴졌다.감정이, 그녀의 피부 안쪽에서 새어나오는 것 같았다.“나는 괜찮아요. 피도 안 흘릴 거고, 어디 안 가요.”“…그렇게 단정하지 마요. 난 그런 보장이 없는 사람이에요.”그녀는 조용히 그러나 분명한 절망을 담아 말했다.그 시각 진혁은 또 다른 인물을 만나고 있었다.작은 시골 병원. 노인 환자를 돌보고 있는 여의사 한 명.이름은 윤명숙. 과거 시아가 한동안 맡겨졌던 그룹홈의 보육사였다.진혁은 사진을 내밀었다.“이 아이, 기억하시죠?”그녀는 사진을 보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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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그림자 위에 그림자

사진은 낱장으로 흔들리고 있었다.백시아는 손끝을 다쳐도 느끼지 못할 만큼 의식이 멀어져 있었다.사진 속, 자신의 표정은 익숙했다.그녀는 웃고 있었고, 누군가의 품에 기대 있었다.그리고, 그 웃음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존재가,이제야 자신을 향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언제부터…”그녀는 낮게 중얼였다.그 순간 등 뒤에서 창문이 흔들렸고, 바람이 몰아쳤다.봉투 안에는 또 하나의 종이가 있었다.검은색 볼펜으로 적힌 다섯 글자.“기억하지?”그 말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었다.협박이었다. 그리고 선언이었다.밤이 되어서야 도윤이 돌아왔다.지친 얼굴,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현관을 열자 거실에서 앉아 있는 백시아와 눈이 마주쳤다.“돌아왔어요.”“…응.”그녀의 대답은 짧았다.그러나 그의 눈엔 보였다.그녀의 눈빛이 평소와 달랐다는 걸.그는 가방을 내려놓고 소파 맞은편에 앉았다.잠시 정적이 흘렀고, 그는 먼저 말을 꺼냈다.“시아 씨. 오늘 무슨 일 있었어요?”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아무 일도.”“거짓말.”그의 대답은 단호했다.그 말에, 시아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오늘, 어떤 남자가 와서 말했어요. 당신에 대해 진짜로 아는 게 뭐냐고.”백시아는 눈을 들었다.“뭐라고 대답했어요?”“내가 아는 건 당신이 내 옆에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게 전부라는 것.”그녀는 눈을 감았다.그 순간, 모든 말이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나… 언젠가 당신을 해칠지도 몰라요.”“그래도, 나는 듣고 싶어요.”“…뭐를요.”“당신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왜 그렇게 외롭게, 자신을 숨기고 있는지.”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마치 말하면 끝날 것처럼.모든 것이 무너질 것처럼.하지만 도윤의 눈동자는 조용했다.재촉하지 않았고, 비난하지도 않았다.“계부가 있었어요. 엄마가 재혼하면서 데려온 사람.”시아의 목소리는 마치 아주 오래된 테이프처럼 거칠고 느렸다.“그 사람은… 나를 사람으로 대하지 않았어요.쓰레기처럼 다뤘고, 장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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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손을 내민 바보의 용기

같은 시각. 도윤의 회사.신작 발표를 마친 개발팀은 잠깐의 휴식 시간에 접어들고 있었다.도윤은 책상 앞에 앉아 오늘 아침 백시아가 건넨 커피를 떠올렸다.“당신 오늘 조금 웃었어요.”“내가요?”“응. 눈꼬리가 조금 올라갔었어요.”도윤은 그 말이 온종일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그때였다. 모니터에 알림창이 떴다.동료인 재민이 개발 서버 테스트를 하던 도중,시아의 이름이 출력된 로그를 실수로 눌러버린 것이다.도윤은 깜짝 놀라 창을 닫으려다,파일 제목에 눈이 멈췄다.[전과 조회 기록 백00]그는 그대로 굳어버렸다.그리고, 그 기록을 본 재민이 뒤에서 어색하게 웃었다.“어… 이거, 테스트하다 잘못 들어간 거야.형 여자친구 이름이랑 똑같아서 깜짝 놀랐네.”도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속으로는 심장이 무너지는 듯 뛰고 있었다.그녀의 전과. 그녀가 말하지 않았던 과거.‘…내가 생각한 것보다,훨씬 더 깊은 데서 온 사람일지도 몰라.’그러나 그는 마우스를 움직여 로그를 닫았다.보지 않았다. 알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그녀가 자신의 입으로 말하길 기다리기로 한 것이다.‘그녀가 나를 믿게 될 그 순간까지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그날 밤. 시아는 조용히 칼을 꺼내 들었다.그건 오래전에 감춰두었던 첫 살인 때 사용했던 칼은 아니었지만그녀에게 유일하게 자신이라 부를 수 있는 물건이었다.부엌의 형광등 아래에서 칼날은 희미하게 빛났고, 그녀의 눈빛은 다시 차가워졌다.“내가 누군지 알고 다가오는 거라면 감당할 준비는 하고 와야지.”그녀는 거울 앞에 섰다.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눈동자는 흐르지 않는 눈물로 가득했고, 입술은 말라 있었다.“나는 백시아. 그리고, 연쇄 살인마.”거울 속의 그녀가 살짝 웃었다.그날 밤, 백시아는 침대맡 스탠드도 켜지 않은 채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도윤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곁에서 느릿한 숨소리가 귓가를 스쳤지만 그녀는 그 숨결에 의지하지 못했다. 침묵. 그녀가 살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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