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아침에 커튼 사이로 새어든 햇살이 벽을 타고 흘렀다.
식탁 위엔 남은 김밥과 미지근한 커피가 놓여 있었고,
그 옆에 얇은 포스트잇 하나가 덩그러니 붙어 있었다.
“일찍 나가요. 점심은 알아서 드세요. - 시아”
짧은 메모. 도윤은 그걸 읽고 괜히 웃음이 났다.
서툰 배려, 무표정한 얼굴과는 다르게 ‘챙김’이 있었다.
“알아서 드세요… 이거, 나 걱정한 건가?”
그는 시아의 빈 자리를 보며 혼잣말을 했고, 책상에 앉아 피규어를 바라보았다.
루시아, 무표정한 여자 전사. 왠지 모르게 시아와 겹쳐 보였다.
“아니지. 걘 더… 무섭고, 더 외로워 보여.”
도윤은 한참 동안 앉아 있다가, 문득 핸드폰을 들어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그리고… 고마워요. 밥 챙겨준 거.]
답장은 없었다. 시아는, 항상 그랬다.
말없이 왔다가, 말없이 사라졌다.
감정을 남기지 않고...
그런데 그 무덤 같은 침묵이 이제 조금 외롭게 느껴졌다.
시아는 오래된 시장 골목을 걷고 있었다.
팔짱을 낀 채, 주변을 살폈다.
사람들. 칼국수 냄새. 비닐 장갑을 낀 손들.
삶이 이글거리는 공간.
그 틈에 그녀는 혼자였다. 아무도 그녀를 모른다.
그 누구도 그녀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모른다.
“정육점은 저기네.”
그녀는 고개를 돌려 한 가게를 바라봤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뭐 드릴까요, 아가씨?”
정육점 사장은 인상이 순했다.
하지만 시아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을 죽인다면 칼은 어디서 쥐어야 깔끔하게 들어갈까.
목을 노릴까, 복부를 찌를까.
아니면 칼이 아닌 도구가 더 효과적일까.
그녀는 스스로에게 충격을 받았다.
이 남자는 아무 죄가 없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 죽이고 싶다.
그 욕망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그 사실에 무섭도록 차분해졌다.
“…삼겹살이요. 600g만 주세요.”
도윤은 회사에서 집중이 되지 않았다.
화면 속 캐릭터는 움직이지만, 그의 머릿속엔 온통 시아의 얼굴이 떠다녔다.
“강한 여자는 대부분 이미 무너져 있거든요.”
그 말이 계속 머리를 때렸다.
‘시아는 무너진 사람인가?’
그렇다면 그는 왜 자꾸만 그녀가 신경 쓰일까?
걱정인가, 호기심인가,
아니면 시작돼선 안 되는 감정인가?
서울 강력 4팀 사무실.
진혁은 CCTV 영상 두 편을 나란히 틀어놓고 있었다.
한 편은 사건 당일 골목. 다른 한 편은 근처 편의점.
모두 모노톤처럼 흐릿했지만, 그 안에 누군가가 있었다.
흰 운동화. 짧은 머리.
길게 늘어진 베이지색 트렌치코트.
그리고, 조화.
“정지. 확대.”
조화였다. 그녀가 들고 있던 작은 장바구니 안,
붉은 장미 한 송이. 천 조화.
다섯 건의 사건에서 발견된 것과 동일한 디자인.
진혁의 눈빛이 좁아졌다.
“찾았다. 넌 실수했어.”
그 시각, 백시아는 도윤의 아파트로 돌아오고 있었다.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거울 속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다.
그리고, 무표정했다. 하지만
도윤이 보면 기뻐하겠지.
그 생각이 이상하게 마음을 건드렸다.
기뻐하겠지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이 누군가를 위한 무언가를 한다는 것.
그건 살아 있을 때만 가능한 감정이었다.
“……나, 이상해지고 있어.”
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집 안엔 도윤이 있었다.
그는 문을 열자마자 그녀에게서 장바구니를 받았다.
“많이 무거웠을 텐데… 고생했어요.”
시아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처음으로 말했다.
“…밥 해줄게요. 오늘은 내가… 하고 싶어서.”
도윤은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엔 정말 조금 감정이 묻어 있었다.
그날 밤. 그들은 나란히 식탁에 앉아 고기를 구웠다.
말없이 음식을 나눴고, 도윤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시아 씨는… 이상하게 외롭지 않아 보여요. 사실은 되게 외로워 보이는데.”
시아는 젓가락을 멈췄다.
“…그 말 다시 해봐요.”
“……정말 외로운 사람은 누군가랑 같이 있어도 늘 혼자 같잖아요.
그런데 시아 씨는… 지금은 혼자가 아니니까.”
그 말은 시아의 가슴 한가운데로 쑥, 하고 박혔다.
그리고 그녀는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래요. 이상하게… 오늘은 혼자 아닌 것 같네요.”
그녀는 처음으로 진심처럼 말했다.
도윤은 그 말에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 미소를, 시아는 무서워졌다.
'이 사람… 나를 정말로 좋아하게 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그 시각, 진혁은 사진 한 장을 출력해 들고 있었다.
붉은 장미 조화를 든 여자. 흐릿하지만 분명히 보이는 얼굴.
그 얼굴이 그는 믿기 어려웠다.
며칠 전, 그가 우연히 지나치듯 본 그 날카로운 눈빛의 여자.
“너였어?”
사냥은 시작되었고, 이제 그녀는 더 이상 완벽하지 않았다.
밤이었다. 거실 불이 꺼진 채 주방 쪽 조명만이 희미하게 켜져 있었다.
시아는 싱크대 앞에 서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아무 행동 없이. 물컵을 들고 한참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물을 따랐다.
그녀의 손등엔 오늘 마트에서 얻은 작은 상처가 있었다.
칼에 베인 듯한 자국.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엔 미묘한 미소가 서려 있었다.
“피가 나네… 살아 있다는 증거인가.”
피가 따뜻하게 흐를 때, 그녀는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꼈다.
죽이지 않아도, 죽지 않아도 이 고요한 집 안에서 자신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그것은 기이하고 낯선 안정감이었다.
그리고 그 안정감은 그녀에겐 무엇보다 위험했다.
도윤은 방에서 조용히 문을 열었다.
낮은 불빛 속에 백시아가 서 있는 걸 봤다.
“잠 안 와요?”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한참 만에 고개만 끄덕였다.
“…그냥, 생각 좀 하느라요.”
“무슨 생각이요?”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조용히 컵을 내려놓고는 고개를 들었다.
“도윤 씨는요. 누굴 죽이고 싶었던 적, 있어요?”
도윤은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냥. 아무 이유 없이 미운 사람. 얼굴만 봐도 짜증 나는 사람.
숨 쉬는 것도 싫은 사람. 그런 사람 없어요?”
도윤은 한참 말이 없었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릴 땐… 그런 감정이 무서울 정도였어요. 내가 무슨 괴물이 된 것 같아서.”
“그래서요? 어떻게 했는데요?”
“참았어요. 그냥…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니까.”
시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은 어둡고 깊었다.
“참을 수 없는 사람도 있어요. 시간이 지나도 더 선명해지는 얼굴들.
그런 사람은… 그냥, 사라졌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한 뒤,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그런 사람 하나쯤 있죠, 누구나.”
그 말에 도윤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다만 그녀의 슬픈 눈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서울. 강력 4팀.
진혁은 사진과 영상들을 탁자 위에 펼쳐놓고 있었다.
한 여자의 실루엣. 흐릿한 얼굴. 그리고, 장미.
“이건… 개인적인 메시지야.”
그는 중얼이며 손가락으로 사진을 짚었다.
“장미는 의미다. 누군가에게 보내는 시그널.
그리고 그걸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녀뿐.”
동료 형사가 물었다.
“이 여자를 찾을 수 있을까요?”
“찾아야지. 아니면… 또 누군가는 죽어.”
진혁의 눈빛은 어두웠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 이상한 집착이 서려 있었다.
'그 여자를 처음 봤을 때, 이상하게 낯설지가 않았어.
그 눈빛… 그건, 내가 놓쳤던 시체들 위에 있던 감정.'
그는 핸드폰을 열었다.
그리고 다시 그 장면을 반복해봤다.
마트 앞, 장미 조화를 든 여자.
정면은 아니었지만, 그 실루엣은 기억 속 누군가와 겹쳐 보였다.
“…그 여자. 다시 보면 알아볼 수 있어.”
시아는 잠들지 못했다.
소파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었다.
도윤은 그녀가 자는 줄 알고 불을 꺼두었지만, 그녀는 그림자처럼 깨어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상자가 들려 있었다.
그 속엔 사진 한 장.
아주 오래된 그리고, 찢겨진 채로 접혀 있던 사진.
사진 속의 남자. 그는 그녀의 과거였다.
그 남자의 목에 피가 묻어 있었다.
그리고 그 피는 그녀가 처음으로 흘린 피였다.
“…처음이었지. 죽이고 나서… 후련했던 건.”
그녀는 사진을 천천히 불 위에 올렸다.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종이가 타들어갔고, 사진 속 그 남자는 조용히 사라졌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귓가에 맴돌았다.
“넌 아무도 사랑하지 마. 넌 그런 거, 하면 안 돼.”
시아는 눈을 감았다.
그러곤, 천천히 속삭였다.
“늦었어. 나, 사랑이 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어.”
“얼굴이 많이 변했네.”서늘한 어둠이 눌러 앉은 창고 안, 조진혁은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눈빛은 식었고, 손끝은 담배 하나 없이 허공을 말아 쥐고 있었다.그의 눈에 비친 백시아는, 더는 예전의 여자가 아니었다.혹은… 그는 단 한 번도 그녀를 제대로 본 적 없었는지도 몰랐다.시아는 조용히 문을 닫고 안으로 걸어들어왔다.그녀의 발끝은 조용했지만, 마음은 거세게 울고 있었다.“이제야… 내 앞에 제대로 서네.”진혁은 한참을 응시하더니,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작은 USB였다.“여기, 네가 남긴 조각들이 있어.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고… 그 남자, 이도윤에 대한 것도.”시아의 손이 멈칫했다.그 이름이 스쳐간 순간, 숨이 걸렸다.“도윤이는 상관없어.”“정말?”조진혁은 조용히 웃었다.그 웃음은 냉소와 안타까움 사이 어딘가에 있었다.“널 처음 쫓기 시작했을 때, 그 남자… 단순한 방패막일 줄 알았어. 근데 말이야. 그 남자, 지금 널 진심으로 사랑해.”시아는 잠시 시선을 내렸다.그 말이… 숨이 막히게 무거웠다.하지만 더 무거운 건 그 사랑이 자신에게 너무 과분하다는 자각이었다.“도윤이한테… 아무 짓도 하지 마. 부탁이야.”“그 부탁을 들을 이유가 있을까?”진혁은 고개를 기울였다.말투는 무심했지만, 눈빛만큼은 흔들리고 있었다.“내가 널 놓아주는 순간, 수사도, 내 커리어도, 그리고… 내 자신도 무너져.”시아는 조용히 다가가 그의 앞에 섰다.두 사람 사이의 거리, 예전엔 익숙했던 그 거리에서 이제는 낯설 만큼 다른 감정이 어지러이 맴돌았다.“그럼… 날 데려가.”시아는 입을 열며, 두 눈을 똑바로 들이밀었다.“내가 끝내야 해. 내가 만든 죄, 내가 끌고 간 길, 내가… 끝내야 후회가 덜할 것 같아.”진혁은 그 눈빛을 피하지 못했다.한참을 그렇게 마주보던 그는, 이윽고 몸을 돌렸다.“…네가 정한 마지막이라면, 그 끝은 내가 보증하지.”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그 순간, 조용히 한 줄 눈물이 턱선을
적재장에 조용히 퍼지는 총성의 여운.핏방울이 빗물에 섞여 천천히 콘크리트를 타고 흐른다.조진혁은 권총을 쥔 채 무표정하게 쓰러진 남자를 바라봤다.그의 어깨엔 총알이 깊게 박혀 있었고, 의식은 흐릿해져 있었다.“움직이지 마. 구조 요청할 거니까.”그가 낮게 말하자 남자는 이를 악물며 중얼거렸다.“…너… 그녀가 누군지… 몰라…”진혁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그가 찾던 실루엣이, 적재장 뒷문 쪽으로 사라지고 있었다.검은 셔츠 자락, 빗속에 흔들리는 젖은 머리카락,그리고 그 뒤를 따라붙는 이도윤의 그림자.숨을 고르며, 조진혁은 총을 내렸다.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방금 자신이 쏜 총탄이 살인을 막은 건지, 아니면 도망을 도운 건지,그는 아직도 확신이 들지 않았다.“……백시아.”그녀의 이름을 처음으로 입 밖에 냈다.그 이름이, 그의 입술을 타고 무겁게 떨어졌다.이름 하나에 담긴 수많은 단서들.연쇄 살인, 붉은 장미, 사라진 기록들,그리고 지금 이 눈앞의 여자가 그 모든 퍼즐을 완성시키고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조진혁이 마지막으로 본 그녀의 눈은 분명 죄책감이 아니라… 슬픔이었다.한참을 달린 후, 버려진 컨테이너 속에서 둘은 숨을 돌렸다.도윤은 무릎을 꿇고 앉아 바닥에 손을 짚은 채 거친 숨을 토해냈다.시아는 한 손으로 그의 등을 다독이며, 조용히 말했다.“고마워요. 안 다쳐서.”“…저 사람… 조진혁 형사예요.”도윤이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우리 첫 만남 때도… 병원 근처에 나타났던 사람. 그때부터 날 지켜보고 있었어요.”시아는 눈을 감았다.그리고 깊게, 아주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언젠가는… 이럴 줄 알았어요. 그 사람, 끝까지 나를 따라올 거라고.”도윤은 시아를 바라봤다.비에 젖은 눈동자 속, 흔들리는 눈빛.그는 처음으로 그녀의 손을 조용히 감싸쥐며 말했다.“그 사람도 알아요. 당신이 누군지.”시아의 눈썹이 꿈틀였다.하지만 도윤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그리고도, 그 사
도윤의 SUV는 밤을 가르듯 도로 위를 내달렸다.앞유리에 부딪히는 빗방울 소리가 쉴 새 없이 퍼부었다.와이퍼가 바삐 움직였지만 시야는 흐릿했고, 마음은 더 흐려졌다.운전대를 쥔 도윤의 손끝은 젖은 것처럼 차갑고 단단했다.백시아는 조수석에서 말없이 그를 지켜보다가, 이제는 뭔가를 말해야 할 때라는 듯 입을 열었다.“한참 전이야. 처음 날 노리기 시작한 건.”도윤은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조용히 물었다.“그 남자… 조직이랑 연관 있어요?”시아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내가 예전… 잠깐 발을 담갔던 조직. 거기서 중요한 인물을… 없앴어.그 뒤로 날 추적하던 놈들이 있었고, 대부분은 정리했는데… 한 놈이 끝까지 살아남았던 거야.”그녀의 눈빛이 거칠어졌다.“그게… 방금 그 남자야.”도윤은 이를 악물며 운전대를 더 세게 쥐었다.“왜 말 안 했어요. 이런 위험이 있다는 거…”“말했으면 같이 가겠다고 했을 거잖아.”시아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당신은 자꾸 나를 감싸려 해. 하지만 그게 더 위험할 수 있다는 걸 몰라.”그 말에 도윤은 브레이크를 밟았다.차가 어두운 국도 옆, 작은 휴게소 앞에 멈춰 섰다.“내가 얼마나 당신을 생각하는지, 당신은 정말 모르겠어요?”도윤은 그녀를 바라보며 목소리를 낮췄다.“내가 선택했어요. 당신의 그림자까지 안고 가겠다고.”시아는 그의 눈을 마주보지 못했다.손끝이 떨리고, 마음이 요동쳤다.“…왜 하필 나야. 이렇게 엉망인 사람인데.”“엉망인 건 나도 마찬가지예요. 당신을 보고 나서야… 내가 살아 있다는 걸 느꼈어요.”말끝에 고요가 내려앉았다.빗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를 채웠고, 백시아는 문득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오랜만에, 아주 오래된 시간 뒤에 터져 나오는 것 같은 미소였다.그 순간.“쾅!”차량 뒷유리가 산산조각이 났다. 총성이었다.도윤은 재빨리 시아를 눌러 엎드리게 하고,몸을 숙인 채 문을 열고 밖으로 빠져나갔다.“시아 씨! 이리로!”그녀도 이미 권총을 손에 쥐고
창밖으로 밤비가 내리기 시작했다.도윤의 집 작은 거실에 앉아,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테이블 위, 뜨거운 차가 김을 피우고 있었지만, 누구도 손을 대지 않았다.시아는 무릎을 끌어안은 채 구석에 앉아 있었다.커튼 사이로 스며든 어둠이 그녀의 얼굴에 겹겹이 그림자를 씌웠고, 도윤은 조용히 그 맞은편에 앉아 눈을 떼지 못했다.“…그날도, 비가 왔어.”시아가 조용히 말했다.“처음 사람을 죽인 날. 그리고, 당신을 만난 날도.오늘까지… 비가 오는 날은 늘 나한테 뭔가를 가져가.”그녀는 천천히 눈을 들었다.도윤은 그 시선을 마주했다.“내가 제일 무서운 게 뭔 줄 알아요?”“…아니요.”“당신이 나를 포기하는 거야.”그 말에, 도윤의 손이 천천히 움찔했다.“난 내가 한 일들을… 절대 잊을 수 없어.사람들이 내 이름을 들으면, 경멸하거나 혐오할 거야. 그런데도…”시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어갔다.“당신만큼은… 나를 사람으로 대해줬잖아.처음부터 끝까지, 날 여자라고 불러준 유일한 사람이었어.”도윤의 눈이 붉어졌다.“그래서 무서워. 그게 언젠가 깨질까 봐.내가 만든 이 가짜 세계에서, 당신도 결국 날 떠날까 봐.”그는 조용히 다가가 그녀의 옆에 앉았다.“사람은 누구나 도망치고 싶을 때가 있어요. 나도 그랬고. 하지만…”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밖에서는 천둥이 멀리서 울리고 있었다.“백시아 씨. 당신은 지금까지 혼자 견뎌온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나랑 같이 견뎌봐요.”시아는 그 말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같이?”“같이 무서워하고, 같이 아파하고, 같이… 끝을 봐요. 혼자 두지 않을게요.”시아는 가만히 도윤을 바라보다, 조용히 그의 손등 위에 손을 얹었다.“…정말, 후회 안 할 거예요?”“이미 하고 있어요. 당신을 이렇게 늦게 알아봤다는 걸.”그 순간, 시아의 눈에서 천천히 눈물이 떨어졌다.말 없이 흘러내리는 그것은, 그동안 쌓였던 죄책감과, 두려움과,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의 잔해들이었다.그리고 그 눈물 위로
“너 아직도 착각하더라? 사람 하나만 죽이면 끝날 줄 알았지.”그는 천천히, 한 손으로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총이 아니었다. 작은 사진 한 장.그 사진 속엔 시아가 피를 묻힌 얼굴로 어딘가를 응시하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눈을 감는다.“…그걸 어디서…”“널 지켜보고 있었다면 믿겠어?”도윤이 그녀 앞으로 나선다.“지금 뭐하는 겁니까.”“당신, 아무것도 몰라. 이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그림자의 말에 도윤은 밀려드는 불안을 느꼈지만 눈빛만큼은 흐트러지지 않았다.“알아. 알고도 옆에 있어.”그 순간, 그림자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린다.“…그럼 당신도 공범이겠군.”시아가 도윤의 팔을 붙잡았다.“가지마.”“괜찮아.”도윤이 조용히 속삭인다."지켜줄게."어둠은 짙어졌고, 끝났다고 믿었던 과거가다시 그들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지켜줄게."도윤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떨림이 없진 않았다. 시아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긴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그녀의 숨은 점점 더 가늘어졌다.그림자는 도윤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거리감은 단 몇 발자국."도윤 씨, 비켜요."시아가 조용히 말했다.하지만 도윤은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두 팔로 그녀를 감싸듯 섰다."이 사람 누구야. 이름이라도 말해.""그냥… 지나가야 했던 사람 중 하나야. 내가 지나쳤어야 했던."도윤은 잠시 시선을 떨어뜨렸다가, 다시 그림자를 바라봤다."사진, 그거 어디서 났죠.""당신, 이 여자가 어떤 짓을 했는지 알고도 옆에 있는 건가?""그걸 당신이 왜 묻죠. 경찰도 아닌데."그림자의 입꼬리가 천천히 비틀렸다."넌 아직 이 여자 몰라. 널 데리고 어디까지 떨어질지 몰라."시아가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표정은 말할 수 없이 단단해져 있었다."그만해."그림자는 정지된 듯 그녀를 바라보다가, 낮게 웃었다."넌 아직도 너 자신이 뭘 만들었는지 모르지. 나 같은 놈이 생긴 이유, 너야."그녀의 눈동자가
폐가 안쪽, 시간이 잠시 멈춘 듯 고요했다.도윤의 발소리는 고요한 공기 속에서 너무 크게 울렸다.조진혁과 백시아,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그에게로 향했다.그 순간, 서늘한 긴장이 방 안을 감쌌다.“…도윤.”시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그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익숙하면서도 낯설 만큼 조심스러웠다.도윤은 미동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그 눈엔 믿기지 않는 마음, 감정의 파편들, 그리고…서서히 무너져내리는 어떤 확신이 담겨 있었다.“말해줘.”그의 목소리는 낮고, 떨림 없이 담담했다.그게 더 아프게 다가왔다.“저 사람이랑… 이 집이랑… 그리고… 그 USB. 다 뭐야?”시아는 눈을 피했다.진혁이 눈치를 채고, 조용히 뒤로 한 발 물러섰다.하지만 도윤은 그의 존재를 무시한 채, 그녀에게서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너… 나랑 같이 살면서, 한 번도 솔직했던 적 없지?”그 말에 백시아의 어깨가 움찔했다.그녀는 무언가를 삼키듯 입술을 꾹 다물었다.“처음엔 그냥,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했어. 근데… 같이 살다 보니까, 너한테서 도망치고 싶지가 않았어.”도윤은 고개를 떨궜다.“근데 이제 보니까… 도망친 건 나였네. 너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나.”시아의 눈가에 조용히 눈물이 고였다.그녀는 손끝으로 USB를 쥔 채, 불안하게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그 USB엔… 내가 살면서 숨긴 것들이 있어. 처음부터 널 속였고, 거짓말로… 네 옆에 있었어.”“왜?”도윤의 질문은 짧았지만, 그 안엔 수천 개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왜 그랬는데.”그녀는 한참을 망설이다, 마침내 답했다.“살고 싶었거든.”그 말은 고백 같기도, 변명 같기도 했다.“살고 싶었는데, 그 방법을 몰랐어. 그러다가… 너를 만났어.”“…….”“그래서 미안했어. 네가 자꾸 다정할수록 네가 자꾸 나를 걱정할수록, 숨고 싶었어.”시아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근데 나, 이제 안 숨을래. 도망도 안 칠 거야. 네가 원하면… 이제 다 말할게.”순간, 조진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