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창밖으로 빗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7월의 여름비는 뜨겁고, 질척였다.
백시아는 창문에 손을 대고 있었고,
그 손끝에서 천천히, 무언가가 안쪽으로 흘러들어오는 듯했다.
도윤은 뒤에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어깨가 오늘은 유난히 좁아 보였다.
그 말없이 흔들리는 등 너머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비 오는 날은… 좋았어요.”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시끄러워서. 내 안에 있는 목소리를 가릴 수 있으니까.”
“그 목소리… 지금도 들려요?”
백시아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가끔. 아주 조용할 때, 나를 부르죠. 다시 돌아오라고. 예전처럼, 그날처럼…”
그녀의 음성은 담담했지만, 그 안에 무언가가 깨진 채 섞여 있었다.
도윤은 조심스레 그녀에게 다가갔다.
팔을 뻗을까, 망설이다가 그녀의 옆에 가만히 섰다.
“돌아오지 마요.”
그녀는 고개를 살짝 돌려 그를 바라봤다.
“지금 이 순간, 여긴 당신이 있어야 할 곳이에요.”
시아는 그의 눈을 보았다.
그 눈은 겁 없이 그녀를 향해 있었고, 그것이 그녀를 더 두렵게 했다.
“나, 너무 많이 망가졌어요. 당신이 감당할 수 있는 사람 아니에요.”
“그건 내가 판단해요.”
도윤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작게 웃었다.
“나는… 감당하고 싶어요. 그게 당신이라면.”
그녀는 눈을 감았다.
고요히, 조용히. 그리고 아주 작게 속삭였다.
“…이도윤 씨는, 이상한 사람이에요.”
그 말은 거절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 안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조용하고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그 시각, 진혁은 경찰서에서 낡은 서류 하나를 펼치고 있었다.
2009년. 사망자: 백근수.
사망원인: 질식사.
처리: 자살로 종결.
진혁은 눈썹을 찌푸렸다.
현장 사진엔 분명히 붉은 조화 한 송이가 놓여 있었다.
당시엔 아무 의미 없는 장식이라 여겼다.
그러나 지금, 그건 서늘한 시그니처였다.
“첫 번째야… 분명히.”
그는 중얼였다.
“이게 시작이었어. 그리고 그녀는…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지.”
그는 다음 서류를 펼쳤다.
고등학교 상담 기록.
백시아, 17세.
담임 기록: ‘가정폭력 의심. 아이 눈빛이 자꾸 무뎌진다.’
그리고 교내 일기장 사본. 거기엔 단 한 줄.
‘죽이고 싶다. 단 한 번만이라도.’
진혁은 의자에 기대어 천장을 바라봤다.
이제 퍼즐이 거의 맞춰졌다.
“계부. 학대. 첫 살인. 그 후,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여자.”
“이도윤. 그 남자가 유일한 변수다.”
도윤은 밤늦게 피규어 진열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는 손끝으로 먼지를 닦아내며 그동안 해보지 않았던 고민을 했다.
'내가 이 사람을 정말로 사랑하게 된 걸까.'
그녀는 아름다웠다.
위험했고, 가끔 무서웠다.
하지만, 어느 날, 그녀가 그를 보고 웃었고,
그 순간부터 그는 매일 그 웃음을 보고 싶어졌다.
그게 사랑이라면, 그는 이미 헤어날 수 없는 늪에 빠져 있었다.
그는 자신의 피규어 중 하나를 꺼내 시아가 쓰는 책상 위에 살며시 올려두었다.
귀여운 고양이 캐릭터였다.
그녀는 이런 걸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웃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자신이 아닌 사람처럼 느껴질 수 있도록 매일 조금씩 애써주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그 피규어를 발견했다.
책상 위, 작은 인형 하나.
그건 너무도 생뚱맞은 존재였다.
그녀의 삶엔 없었던 것. 귀여움. 선의. 누군가의 다정함.
시아는 천천히 그 인형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아주 오래도록 바라봤다.
“…이상한 사람이야, 정말.”
그녀는 조용히 웃었고, 그 웃음 끝에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비가 쏟아졌다.
유리창을 때리는 빗소리는 무언가를 가리고 또 무언가를 말해주려는 듯 무심하게 이어졌다.
시아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앉아 무릎을 끌어안은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밖은 회색이었다. 모든 색이 묻혀버린 풍경.
그 안에서 그녀는 자신이 ‘투명한 존재’가 된 듯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이 비,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네…”
혼잣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이 허공에 닿자 그녀는 스스로 놀랐다.
감정이 담긴 말이었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고양이 인형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귀엽게 웃고 있는 고양이의 눈.
“…웃지 마.”
시아는 속삭였다.
그러나 곧 시선을 피하지 못한 채 그 인형을 손에 들고 조심스레 쓰다듬기 시작했다.
거실에선 라면 물이 끓고 있었다.
도윤은 앞치마를 두른 채 달걀을 하나 깨트리며 허밍을 흥얼거렸다.
그는 달걀을 국물 위에 풀어 놓으며 말했다.
“시아 씨, 라면 좋아하죠? 근데 전 달걀 두 개는 무조건 넣어요. 좀… 진득하게.”
그는 혼잣말이었지만,
그녀가 방 안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침묵이 덜 외로웠다.
몇 분 뒤, 시아가 조용히 방에서 나왔다.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잠옷 바람 그대로였다.
그러나 그 어떤 날보다도 사람 같았다.
도윤이 고개를 들고 웃었다.
“오셨네요. 딱 라면 타이밍이에요.”
시아는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아, 그리고… 오늘 비 맞으니까 조심해요. 뉴스에선 또 뭐… 낙뢰 어쩌고 하더라고요.”
그의 다정함은 참 별것 아니었지만,
백시아의 마음은 그 별것 아닌 것들에 조용히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젓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라면을 한 젓가락 후루룩 넘겼다.
“맛있어요.”
그 말에 도윤은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쵸? 제가 라면은 좀 합니다.”
그녀는 천천히 웃었다. 기분이 좋았다.
너무 좋아서 불안했다.
그 시각. 서울 한복판. 한 카페 창가 자리.
진혁은 이도윤 앞에 앉아 있었다.
갑작스러운 전화, 그리고 더 갑작스러운 만남 제안이었다.
도윤은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
“저… 경찰관님이라고 하셨죠? 어떤 일로…”
진혁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도윤 씨가 범인인 건 아니니까.”
그 농담처럼 던져진 말에 도윤은 잠깐 웃었다가,
그 의미를 곱씹고 굳은 표정을 지었다.
“그럼… 무슨 용건이시죠?”
“혹시… 최근에 같이 사는 분 계시죠?”
그 질문에 도윤의 표정이 변했다.
긴장과 경계심이 눈동자에 스쳤다.
“…그건 사생활이라…”
“그렇죠. 물론 사생활입니다. 다만, 그분에 대해서… 아주 오래된 사건과 연관이 있을 수도 있어서요.”
진혁은 사진 한 장을 꺼냈다.
10년 전, 장례식장에서 굳은 얼굴로 앉아 있는 어린 백시아.
“이 아이… 어디서 본 적 있지 않으세요?”
도윤은 사진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어요. 시아 씨와는… 몇 달 전에 우연히 알게 됐거든요.”
진혁은 그 표정을 유심히 읽었다.
거짓을 감추려는 느낌은 없었다.
하지만, 진실도 아니었다.
그는 천천히 일어섰다.
“혹시 그분이 과거를 말하지 않더라도,
혹은… 당신에게 다가오지 말라고 해도 포기하지 마세요.”
그 말에 도윤은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녀를 지키고 싶으면.”
그 한 마디를 남기고, 진혁은 천천히 자리를 떠났다.
늦은 밤. 도윤은 집으로 돌아왔다.
백시아는 침대에 앉아 있었다.
창문은 열려 있었고, 빗물 냄새가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도윤은 아무 말 없이 그녀 옆에 앉았다.
“누가 찾아왔어요?”
그녀는 먼저 말했다.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경찰이었어요. 시아 씨 과거 얘기를… 조금.”
백시아는 눈을 감았다.
“네? 뭐라 그랬어요?”
“모른다고 했어요. 그리고, 그 사람이 뭐라 해도 난 당신 믿는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그녀는 입술을 달싹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시아 씨. 난 당신이 어떤 사람이든 지금 내 옆에 있는 그 모습이면 돼요.”
도윤은 그녀의 손을 살짝 잡았다.
그녀는 그 손을 놓지 않았다.
“그럼… 나도 여기 있어요. 기다릴게요.”도윤이 마지막으로 남긴 그 문장은 채팅방 위에 조용히 떠 있었고,그날 이후로도 그는 매일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로그인했다.그리고 사흘 뒤, 마침내 채팅창 위에 다시 깜빡이는 문구가 떴다.[상대방이 입력 중입니다...]한 줄. 두 줄. 그리고 잠시 멈춤.도윤은 숨도 쉬지 못하고 그 문장을 기다렸다.화면 위, 단어들이 한 글자씩 타닥타닥 올라왔다.“오래 기다렸죠?”단 세 글자. 그런데 그 안에, 너무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익숙했다.시아의 말투, 문장의 길이, 끝에 붙이지 않는 마침표. 모든 게 그녀 같았다.그러나 동시에, 낯설었다.그는 조심스럽게 다시 타자를 쳤다.“시아예요?”잠시의 정적. 그리고 이어진 대답.“...맞아요. 하지만 지금은 그 이름으로 살지 않아요.”“왜 돌아왔어요?”“그냥… 당신이 아직 거기 있나 보고 싶었어요.”도윤은 목이 말랐다.손바닥엔 식은 땀이 들러붙었고, 심장은 말도 안 되게 뛰고 있었다.“만날 수 있을까요?”이번엔 대답이 바로 오지 않았다.입력 중이라는 표시만 몇 번 깜빡이다가, 이내 꺼졌다.그 순간 그는 직감했다.화면 너머에서, 누군가가…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그리고 그 망설임은 백시아 특유의 것이 아니었다.몇 시간 뒤, 도윤은 채팅방 서버 로그를 추적했다.그리고 예상과 달리 IP는 예상보다 복잡하게 세탁되어 있었다.그건 백시아가 쓸 법한 흔적이 아니었다.너무 프로페셔널했고, 누군가 의도적으로 그녀를 연기하고 있다는 느낌이 짙게 들었다.도윤은 노트를 펼쳐 이전까지 자신이 정리했던 모든 계정, 로그인 기록, 접속 시간대, 메모의 필체, 사진의 프레임을 다시 검토했다.모든 퍼즐 조각은 하나의 진실을 향해 가고 있었다.‘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존재가… 진짜 그녀일 리가 없다.’그날 밤, 도윤은 단 하나의 질문을 남겼다.“5월 5일. 그날 우리가 했던 약속, 기억해요?”그건 시아만이 알 수 있는 대답이었다.단순한 날짜나
도윤은 새벽이 다 가기 전에 집을 나섰다.커피를 마시지도 못했고, 양말도 짝이 맞지 않았다.손엔 폰 하나만 들려 있었다.목적지는 단 하나였다.‘서울 종로구 모처’그녀의 마지막 접속이 찍힌 위치.IP가 허술하게 남긴 흔적 하나로 도윤은 그 좌표를 좁혔다.실제로 그가 갈 수 있는 건 좁디좁은 반경 수백 미터 정도였지만,그걸로 충분했다.그 정도 거리만 있어도, 그는 백 번이고 걸을 수 있었다.해가 막 떠오르던 시각,그는 오래된 한옥이 점점 사라져가는 동네의 골목 끝에 서 있었다.햇살은 건물 사이로 낡은 간판들을 어루만지고 있었다.‘대림문방구’, ‘순대국밥’, ‘세탁소’모두 20년은 되어 보이는 간판들.도윤은 그런 가게들 사이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그의 눈은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뒷모습의 잔상, 그녀의 향기, 혹은 그가 만든 게임에 나왔던 배경과 닮은 벽지 무늬.무언가 하나만이라도 그녀와 닮았다면 멈춰 서서 오래 바라봤다.그리고 그 순간 그는 발견했다.‘사진 속 풍경.’그녀가 프로필 이미지로 등록했던, 흐릿한 사진 속 골목. 기울어진 벽, 녹슨 철문, 빨간 소화전.그 모든 게 지금 눈앞에 그대로였다.그는 마치 숨이라도 멎을 것처럼 천천히 다가갔다.골목 끝에 오래된 벤치가 있었고, 그 벤치 위에… 무언가가 놓여 있었다.작은 종이컵. 절반쯤 식은 듯한 커피.그리고 컵 옆에, 누군가의 손글씨가 적힌 메모지 하나.‘잘 있죠?’흔들리는 손으로 도윤은 종이컵을 들었다.아직 따뜻했다.그는 주변을 재빨리 둘러봤다.사람 그림자도, 발자국도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분명 방금 전까지 누군가 이곳에 있었던 것이다.그녀였을까. 진짜로. 바로 이 자리에서, 그는 그녀의 체온을 느낀 것이다.그날 밤, 도윤은 그 종이 메모를 자신의 방 벽에 붙여두었다.창가 쪽, 햇살이 가장 먼저 닿는 위치.매일 아침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보이는 자리.그 글씨를, 도윤은 수백 번쯤 읽었다.‘잘 있죠?’짧은 문장이었다.그런데 그 안에는 수백 가
도윤은 조용히 문을 닫았다.현관의 잠금장치가 덜컥, 소리를 내며 닫히는 소음이 낯설게 들렸다.집 안은 고요했다. 너무 고요했다.마치 이 공간이 애초에 두 사람의 삶을 품었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시아가 떠난 자리. 그녀의 신발이 사라졌고, 화장대 위에 늘 가지런히 놓여 있던 립스틱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욕실 선반에 걸려 있던 칫솔도 없었다.심지어 세탁기에 돌려놓은 속옷조차 말끔하게 사라져 있었다.“……정말, 다 가져갔네.”도윤은 멍하니 거실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그녀의 체취는 아직 집안 곳곳에 남아 있었다.시트에 남은 은은한 향수 냄새,냉장고 안에 덩그러니 남은 그녀가 사다 놓은 맥주 두 캔,테이블 구석에 놓인, 그녀가 메모하다 마른 포스트잇 한 장.그는 손끝으로 그것을 집어들었다.글씨는 없었다. 단 한 줄도 쓰이지 않은 노란색 메모지.그녀는 아무 말 없이 떠났다.이별이란 단어조차 남기지 않은 채.시간이 흐를수록, 도윤은 점점 자신의 감정이 무뎌지는 걸 느꼈다.슬픔도, 분노도, 허무함도 하나로 뭉개진 채,그저… 그녀가 남긴 공백만이 그의 시간을 갉아먹고 있었다.회사는 이미 휴직계를 냈다.출근할 수 없었다. 아니, 출근해도 버틸 수가 없었다.그녀가 앉았던 식탁 자리에 불 꺼진 채로 앉아하루 종일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다가, 결국 폰 화면을 내려놓았다.그는 컴퓨터를 켰다.이상하게도, 그가 마주한 모니터 화면이 이 세상과 연결되는 유일한 출구처럼 느껴졌다.‘너를 기억해야겠다.’‘그렇지 않으면, 나는 끝없이 무너질 것 같으니까.’그날 밤, 도윤은 한 줄씩 코딩을 시작했다.초라한 비주얼 노벨 형식의 미니 게임.게임 속의 주인공은 이름 없는 여자였고,그녀는 아무 말 없이 어느 날 그의 삶에 들어왔다가 또 조용히 떠났다.그녀가 했던 말, 웃었던 얼굴, 화냈던 목소리.그 모든 기억을 대사로, 스프라이트로, 배경 이미지로 옮겨 담았다.“그쪽도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었을 텐데?”“1년만 딱. 진짜 결혼은 아니니까.
서울 시립병원 중환자실.흰 커튼 너머, 폐소독기의 알람이 조용히 울렸다 꺼졌다.의사와 간호사 몇 명이 분주하게 움직였지만 그 누구도 다급하지 않았다.이미 알고 있는 싸움의 끝이었기에.백시아. 호흡기와 링거에 의지해 겨우 생명을 붙잡고 있는 그녀의 상태는‘회복 불가’.의학적으로 더는 시도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고 의사는 조용히 말했다.그 곁에, 도윤이 앉아 있었다.하루 전까지 그를 감시하던 경찰은 모두 물러났다.그는 참고인에서 ‘무관한 일반인’으로 변경되었고, 어떠한 진술도, 증언도 거부했다.“그 여자를 압니까?”조진혁의 물음에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그저 고개를 천천히 저었을 뿐이었다.“그 사람… 모릅니다.”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도윤은 하루도 빠짐없이 그녀 곁을 지켰다.밥도 거의 먹지 않았고, 잠도 들지 못한 채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았다.한 번이라도. 정말 한 번만이라도. 그녀가 눈을 뜨고,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길 바라며“시아야…”“이름이었구나. 처음으로 네가 말해줬던…”“나는 아직도 그날 생각해. 그 황당했던 첫 키스. 그리고, ‘로또 맞았다 생각하라던’ 그 말.”“넌 나한테 재앙이었어. 그런데 왜 이렇게도 그리운 거야.”그는 이마를 침대에 붙인 채 조용히 울었다.그로부터 며칠 후, 진혁은 권재석의 사망 이후 경찰 내부 인사에 대한 수사 결과를 정리했다.“강력 4팀장 박주한, 서울서부서 강력계 이윤석, 경기남부 정보계 신영우 모두 권재석의 라인에 있었던 인물들입니다.”그는 자료를 언론에 공개했다.대가성 수사 조작, 사망자 수 조작, 피의자 고문.그리고 마지막으로 '백시아’라는 이름은 한 줄만 언급되었다.[모든 기록은 소거되었으며, 그녀의 존재는 사라졌음.]그날 저녁, 진혁은 경찰서 자신의 사무실 책상 서랍에서 작은 메모 하나를 발견했다.그 종이는 누군가의 손때가 잔뜩 묻어 있었고, 다 적지도 못한 글자들이 삐뚤게 흘러내리고 있었다.[나는 괴물이에요. 그게 끝까지 변하지 않는다면 내가 맨 마지
새벽 4시 10분.철문이 두 번 열리고, 경비 조명이 천천히 꺼졌다.백시아는 수갑과 족쇄를 찬 채, 검은색 호송복을 입고 교도소 밖으로 걸어나왔다.숨이 흰 안개처럼 입 밖으로 터졌다.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그녀의 걸음은 흔들리지 않았다.주차장엔 군용 트럭에 개조한 호송 차량이 기다리고 있었다.조수석 쪽 문이 열리고 검은 재킷을 입은 남자가 내렸다.처음 보는 인물. 하지만… 시선을 마주한 순간, 백시아는 알아차렸다.“조직이 보낸 놈이네.”남자는 대꾸 없이 뒷문을 열어 시아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말하지 마. 어차피 넌 오늘 이송되지 않아.”문이 닫히고 엔진이 켜졌다.하지만 차는 정문으로 가지 않았다.5분. 10분.방향이 달랐다.위치는 남쪽이어야 했지만, 차는 서쪽 외곽도로로 빠지고 있었다.백시아는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여 수갑의 연결고리를 비틀었다.몇 주간 준비해온 작업.징벌동 안에서 손톱 틈으로 감춰 들여온 얇은 와이어.그녀는 미세하게 철사를 회전시켜 고리를 푼 뒤, 손을 묶은 채 정좌했다.숨이 천천히 빨라졌다.“이 차 안에서 죽을 수도 있겠군.”“하지만 적어도 누굴 죽이기 위해 나가는 건 아니야.”그 시각, 도윤은 눈을 가린 채 철제 의자에 묶여 있었다.재석은 탁자에 앉아 작은 나무상자를 하나 꺼냈다.상자 안엔 여섯 개의 지문이 찍힌 카드.그리고 마지막 하나가 비어 있었다.“이제 너 하나만 남았어.”“이걸로 금융 거래도 되고, 신분 세탁도 돼.이 여섯 명 모두 내 밑에서 움직이다 필요 없어져서 죽인 놈들이지.”그는 마지막 지문칸을 톡톡 두드렸다.“이 칸엔 백시아가 들어올 거였어.”“하지만, 네가 바뀌었지.”도윤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얼굴은 푸르고, 입술은 터 있었지만 눈동자만은 살아 있었다.“당신은 끝이 없는 사람 같네요.”“사람을 고르고, 이용하고, 망가뜨리고, 그러고도 아무 일 없단 듯 숨 쉬죠.”“하지만 그 여자는, 그 망가짐 속에서 어떻게든 사람답게 살아보려 했어요.”“그게 제가 그녀를
서울중앙지법 사무국.경수 변호사는 묘한 웃음을 띠며 서류 한 장을 넘겼다.“사형 일정 재검토 신청서입니다.단, 피고인 측 변호인 사임 이후 공식적인 변론 없이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건 이례적이지만 배경은 충분하죠.”그의 책상 위엔 두꺼운 서류철.그 안엔 정리된 피고인 백시아의 정신 감정 결과와 5건의 살인사건, 그리고 그녀가 저지른 범행 장면을 연상시키는 자극적인 스틸 컷들이 담겨 있었다.이 모든 걸 정리해 넘긴 사람,권재석.그는 백시아의 사형 집행을 앞당기기 위해 로비와 여론전을 동시다발적으로 벌이고 있었다.그의 이유는 간단했다.“감정이 생기면, 괴물도 사람이 돼버리거든.”“그 전에 죽여야 돼. 진짜 괴물이 되기 전에.”그 시각, 교도소.시아는 이령과의 약속대로 자신의 최초 살인에 대한 정보를 정리해 넘겼다.다섯 건의 공식적인 범행 외에 언급조차 되지 않았던 여섯 번째,혹은 첫 번째로 불러야 할 그 사건.“열여섯. 계부였어.”“한 번도 말한 적 없었지. 그 누구에게도.”이령은 묵묵히 들었다.“경찰한테 넘기면, 무죄를 주장할 근거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시아는 입꼬리를 비틀며 웃었다.“난 무죄가 아니야. 그 인간을 죽인 것도, 그 이후 다섯 놈을 죽인 것도 내가 선택한 거였으니까.”“그냥, 이제 내가 쥐고 있는 칼자루가 누굴 향하고 있는지만 명확하게 보여주려는 거야.”도윤은 그날, 자신의 책상 위에 경고성 사진 한 장이 놓인 걸 발견했다.사진 속엔 시아가 수감복을 입고 걷고 있는 모습,교도소 담장 바깥에서 몰래 찍은 저해상도 사진.“누구지… 누가 이걸…”진혁은 이 사실을 접하자마자 경찰 내부를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우리 안에도… 조직과 손잡은 놈이 있어.”“그리고 너, 이제부터는 진짜 조심해야 해. 백시아가 가진 정보가 조직의 숨통을 쥐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그 여자를 살리는 것도 죽이는 것도 다 너에게 달려 있어.”그날 밤, 시아는 교도소 창살 너머로 달을 올려다봤다.눈 아래 붉게 그은 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