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창밖으로 빗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7월의 여름비는 뜨겁고, 질척였다.
백시아는 창문에 손을 대고 있었고,
그 손끝에서 천천히, 무언가가 안쪽으로 흘러들어오는 듯했다.
도윤은 뒤에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어깨가 오늘은 유난히 좁아 보였다.
그 말없이 흔들리는 등 너머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비 오는 날은… 좋았어요.”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시끄러워서. 내 안에 있는 목소리를 가릴 수 있으니까.”
“그 목소리… 지금도 들려요?”
백시아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가끔. 아주 조용할 때, 나를 부르죠. 다시 돌아오라고. 예전처럼, 그날처럼…”
그녀의 음성은 담담했지만, 그 안에 무언가가 깨진 채 섞여 있었다.
도윤은 조심스레 그녀에게 다가갔다.
팔을 뻗을까, 망설이다가 그녀의 옆에 가만히 섰다.
“돌아오지 마요.”
그녀는 고개를 살짝 돌려 그를 바라봤다.
“지금 이 순간, 여긴 당신이 있어야 할 곳이에요.”
시아는 그의 눈을 보았다.
그 눈은 겁 없이 그녀를 향해 있었고, 그것이 그녀를 더 두렵게 했다.
“나, 너무 많이 망가졌어요. 당신이 감당할 수 있는 사람 아니에요.”
“그건 내가 판단해요.”
도윤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작게 웃었다.
“나는… 감당하고 싶어요. 그게 당신이라면.”
그녀는 눈을 감았다.
고요히, 조용히. 그리고 아주 작게 속삭였다.
“…이도윤 씨는, 이상한 사람이에요.”
그 말은 거절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 안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조용하고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그 시각, 진혁은 경찰서에서 낡은 서류 하나를 펼치고 있었다.
2009년. 사망자: 백근수.
사망원인: 질식사.
처리: 자살로 종결.
진혁은 눈썹을 찌푸렸다.
현장 사진엔 분명히 붉은 조화 한 송이가 놓여 있었다.
당시엔 아무 의미 없는 장식이라 여겼다.
그러나 지금, 그건 서늘한 시그니처였다.
“첫 번째야… 분명히.”
그는 중얼였다.
“이게 시작이었어. 그리고 그녀는…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지.”
그는 다음 서류를 펼쳤다.
고등학교 상담 기록.
백시아, 17세.
담임 기록: ‘가정폭력 의심. 아이 눈빛이 자꾸 무뎌진다.’
그리고 교내 일기장 사본. 거기엔 단 한 줄.
‘죽이고 싶다. 단 한 번만이라도.’
진혁은 의자에 기대어 천장을 바라봤다.
이제 퍼즐이 거의 맞춰졌다.
“계부. 학대. 첫 살인. 그 후,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여자.”
“이도윤. 그 남자가 유일한 변수다.”
도윤은 밤늦게 피규어 진열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는 손끝으로 먼지를 닦아내며 그동안 해보지 않았던 고민을 했다.
'내가 이 사람을 정말로 사랑하게 된 걸까.'
그녀는 아름다웠다.
위험했고, 가끔 무서웠다.
하지만, 어느 날, 그녀가 그를 보고 웃었고,
그 순간부터 그는 매일 그 웃음을 보고 싶어졌다.
그게 사랑이라면, 그는 이미 헤어날 수 없는 늪에 빠져 있었다.
그는 자신의 피규어 중 하나를 꺼내 시아가 쓰는 책상 위에 살며시 올려두었다.
귀여운 고양이 캐릭터였다.
그녀는 이런 걸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웃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자신이 아닌 사람처럼 느껴질 수 있도록 매일 조금씩 애써주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그 피규어를 발견했다.
책상 위, 작은 인형 하나.
그건 너무도 생뚱맞은 존재였다.
그녀의 삶엔 없었던 것. 귀여움. 선의. 누군가의 다정함.
시아는 천천히 그 인형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아주 오래도록 바라봤다.
“…이상한 사람이야, 정말.”
그녀는 조용히 웃었고, 그 웃음 끝에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비가 쏟아졌다.
유리창을 때리는 빗소리는 무언가를 가리고 또 무언가를 말해주려는 듯 무심하게 이어졌다.
시아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앉아 무릎을 끌어안은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밖은 회색이었다. 모든 색이 묻혀버린 풍경.
그 안에서 그녀는 자신이 ‘투명한 존재’가 된 듯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이 비,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네…”
혼잣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이 허공에 닿자 그녀는 스스로 놀랐다.
감정이 담긴 말이었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고양이 인형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귀엽게 웃고 있는 고양이의 눈.
“…웃지 마.”
시아는 속삭였다.
그러나 곧 시선을 피하지 못한 채 그 인형을 손에 들고 조심스레 쓰다듬기 시작했다.
거실에선 라면 물이 끓고 있었다.
도윤은 앞치마를 두른 채 달걀을 하나 깨트리며 허밍을 흥얼거렸다.
그는 달걀을 국물 위에 풀어 놓으며 말했다.
“시아 씨, 라면 좋아하죠? 근데 전 달걀 두 개는 무조건 넣어요. 좀… 진득하게.”
그는 혼잣말이었지만,
그녀가 방 안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침묵이 덜 외로웠다.
몇 분 뒤, 시아가 조용히 방에서 나왔다.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잠옷 바람 그대로였다.
그러나 그 어떤 날보다도 사람 같았다.
도윤이 고개를 들고 웃었다.
“오셨네요. 딱 라면 타이밍이에요.”
시아는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아, 그리고… 오늘 비 맞으니까 조심해요. 뉴스에선 또 뭐… 낙뢰 어쩌고 하더라고요.”
그의 다정함은 참 별것 아니었지만,
백시아의 마음은 그 별것 아닌 것들에 조용히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젓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라면을 한 젓가락 후루룩 넘겼다.
“맛있어요.”
그 말에 도윤은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쵸? 제가 라면은 좀 합니다.”
그녀는 천천히 웃었다. 기분이 좋았다.
너무 좋아서 불안했다.
그 시각. 서울 한복판. 한 카페 창가 자리.
진혁은 이도윤 앞에 앉아 있었다.
갑작스러운 전화, 그리고 더 갑작스러운 만남 제안이었다.
도윤은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
“저… 경찰관님이라고 하셨죠? 어떤 일로…”
진혁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도윤 씨가 범인인 건 아니니까.”
그 농담처럼 던져진 말에 도윤은 잠깐 웃었다가,
그 의미를 곱씹고 굳은 표정을 지었다.
“그럼… 무슨 용건이시죠?”
“혹시… 최근에 같이 사는 분 계시죠?”
그 질문에 도윤의 표정이 변했다.
긴장과 경계심이 눈동자에 스쳤다.
“…그건 사생활이라…”
“그렇죠. 물론 사생활입니다. 다만, 그분에 대해서… 아주 오래된 사건과 연관이 있을 수도 있어서요.”
진혁은 사진 한 장을 꺼냈다.
10년 전, 장례식장에서 굳은 얼굴로 앉아 있는 어린 백시아.
“이 아이… 어디서 본 적 있지 않으세요?”
도윤은 사진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어요. 시아 씨와는… 몇 달 전에 우연히 알게 됐거든요.”
진혁은 그 표정을 유심히 읽었다.
거짓을 감추려는 느낌은 없었다.
하지만, 진실도 아니었다.
그는 천천히 일어섰다.
“혹시 그분이 과거를 말하지 않더라도,
혹은… 당신에게 다가오지 말라고 해도 포기하지 마세요.”
그 말에 도윤은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녀를 지키고 싶으면.”
그 한 마디를 남기고, 진혁은 천천히 자리를 떠났다.
늦은 밤. 도윤은 집으로 돌아왔다.
백시아는 침대에 앉아 있었다.
창문은 열려 있었고, 빗물 냄새가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도윤은 아무 말 없이 그녀 옆에 앉았다.
“누가 찾아왔어요?”
그녀는 먼저 말했다.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경찰이었어요. 시아 씨 과거 얘기를… 조금.”
백시아는 눈을 감았다.
“네? 뭐라 그랬어요?”
“모른다고 했어요. 그리고, 그 사람이 뭐라 해도 난 당신 믿는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그녀는 입술을 달싹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시아 씨. 난 당신이 어떤 사람이든 지금 내 옆에 있는 그 모습이면 돼요.”
도윤은 그녀의 손을 살짝 잡았다.
그녀는 그 손을 놓지 않았다.
“얼굴이 많이 변했네.”서늘한 어둠이 눌러 앉은 창고 안, 조진혁은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눈빛은 식었고, 손끝은 담배 하나 없이 허공을 말아 쥐고 있었다.그의 눈에 비친 백시아는, 더는 예전의 여자가 아니었다.혹은… 그는 단 한 번도 그녀를 제대로 본 적 없었는지도 몰랐다.시아는 조용히 문을 닫고 안으로 걸어들어왔다.그녀의 발끝은 조용했지만, 마음은 거세게 울고 있었다.“이제야… 내 앞에 제대로 서네.”진혁은 한참을 응시하더니,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작은 USB였다.“여기, 네가 남긴 조각들이 있어.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고… 그 남자, 이도윤에 대한 것도.”시아의 손이 멈칫했다.그 이름이 스쳐간 순간, 숨이 걸렸다.“도윤이는 상관없어.”“정말?”조진혁은 조용히 웃었다.그 웃음은 냉소와 안타까움 사이 어딘가에 있었다.“널 처음 쫓기 시작했을 때, 그 남자… 단순한 방패막일 줄 알았어. 근데 말이야. 그 남자, 지금 널 진심으로 사랑해.”시아는 잠시 시선을 내렸다.그 말이… 숨이 막히게 무거웠다.하지만 더 무거운 건 그 사랑이 자신에게 너무 과분하다는 자각이었다.“도윤이한테… 아무 짓도 하지 마. 부탁이야.”“그 부탁을 들을 이유가 있을까?”진혁은 고개를 기울였다.말투는 무심했지만, 눈빛만큼은 흔들리고 있었다.“내가 널 놓아주는 순간, 수사도, 내 커리어도, 그리고… 내 자신도 무너져.”시아는 조용히 다가가 그의 앞에 섰다.두 사람 사이의 거리, 예전엔 익숙했던 그 거리에서 이제는 낯설 만큼 다른 감정이 어지러이 맴돌았다.“그럼… 날 데려가.”시아는 입을 열며, 두 눈을 똑바로 들이밀었다.“내가 끝내야 해. 내가 만든 죄, 내가 끌고 간 길, 내가… 끝내야 후회가 덜할 것 같아.”진혁은 그 눈빛을 피하지 못했다.한참을 그렇게 마주보던 그는, 이윽고 몸을 돌렸다.“…네가 정한 마지막이라면, 그 끝은 내가 보증하지.”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그 순간, 조용히 한 줄 눈물이 턱선을
적재장에 조용히 퍼지는 총성의 여운.핏방울이 빗물에 섞여 천천히 콘크리트를 타고 흐른다.조진혁은 권총을 쥔 채 무표정하게 쓰러진 남자를 바라봤다.그의 어깨엔 총알이 깊게 박혀 있었고, 의식은 흐릿해져 있었다.“움직이지 마. 구조 요청할 거니까.”그가 낮게 말하자 남자는 이를 악물며 중얼거렸다.“…너… 그녀가 누군지… 몰라…”진혁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그가 찾던 실루엣이, 적재장 뒷문 쪽으로 사라지고 있었다.검은 셔츠 자락, 빗속에 흔들리는 젖은 머리카락,그리고 그 뒤를 따라붙는 이도윤의 그림자.숨을 고르며, 조진혁은 총을 내렸다.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방금 자신이 쏜 총탄이 살인을 막은 건지, 아니면 도망을 도운 건지,그는 아직도 확신이 들지 않았다.“……백시아.”그녀의 이름을 처음으로 입 밖에 냈다.그 이름이, 그의 입술을 타고 무겁게 떨어졌다.이름 하나에 담긴 수많은 단서들.연쇄 살인, 붉은 장미, 사라진 기록들,그리고 지금 이 눈앞의 여자가 그 모든 퍼즐을 완성시키고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조진혁이 마지막으로 본 그녀의 눈은 분명 죄책감이 아니라… 슬픔이었다.한참을 달린 후, 버려진 컨테이너 속에서 둘은 숨을 돌렸다.도윤은 무릎을 꿇고 앉아 바닥에 손을 짚은 채 거친 숨을 토해냈다.시아는 한 손으로 그의 등을 다독이며, 조용히 말했다.“고마워요. 안 다쳐서.”“…저 사람… 조진혁 형사예요.”도윤이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우리 첫 만남 때도… 병원 근처에 나타났던 사람. 그때부터 날 지켜보고 있었어요.”시아는 눈을 감았다.그리고 깊게, 아주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언젠가는… 이럴 줄 알았어요. 그 사람, 끝까지 나를 따라올 거라고.”도윤은 시아를 바라봤다.비에 젖은 눈동자 속, 흔들리는 눈빛.그는 처음으로 그녀의 손을 조용히 감싸쥐며 말했다.“그 사람도 알아요. 당신이 누군지.”시아의 눈썹이 꿈틀였다.하지만 도윤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그리고도, 그 사
도윤의 SUV는 밤을 가르듯 도로 위를 내달렸다.앞유리에 부딪히는 빗방울 소리가 쉴 새 없이 퍼부었다.와이퍼가 바삐 움직였지만 시야는 흐릿했고, 마음은 더 흐려졌다.운전대를 쥔 도윤의 손끝은 젖은 것처럼 차갑고 단단했다.백시아는 조수석에서 말없이 그를 지켜보다가, 이제는 뭔가를 말해야 할 때라는 듯 입을 열었다.“한참 전이야. 처음 날 노리기 시작한 건.”도윤은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조용히 물었다.“그 남자… 조직이랑 연관 있어요?”시아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내가 예전… 잠깐 발을 담갔던 조직. 거기서 중요한 인물을… 없앴어.그 뒤로 날 추적하던 놈들이 있었고, 대부분은 정리했는데… 한 놈이 끝까지 살아남았던 거야.”그녀의 눈빛이 거칠어졌다.“그게… 방금 그 남자야.”도윤은 이를 악물며 운전대를 더 세게 쥐었다.“왜 말 안 했어요. 이런 위험이 있다는 거…”“말했으면 같이 가겠다고 했을 거잖아.”시아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당신은 자꾸 나를 감싸려 해. 하지만 그게 더 위험할 수 있다는 걸 몰라.”그 말에 도윤은 브레이크를 밟았다.차가 어두운 국도 옆, 작은 휴게소 앞에 멈춰 섰다.“내가 얼마나 당신을 생각하는지, 당신은 정말 모르겠어요?”도윤은 그녀를 바라보며 목소리를 낮췄다.“내가 선택했어요. 당신의 그림자까지 안고 가겠다고.”시아는 그의 눈을 마주보지 못했다.손끝이 떨리고, 마음이 요동쳤다.“…왜 하필 나야. 이렇게 엉망인 사람인데.”“엉망인 건 나도 마찬가지예요. 당신을 보고 나서야… 내가 살아 있다는 걸 느꼈어요.”말끝에 고요가 내려앉았다.빗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를 채웠고, 백시아는 문득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오랜만에, 아주 오래된 시간 뒤에 터져 나오는 것 같은 미소였다.그 순간.“쾅!”차량 뒷유리가 산산조각이 났다. 총성이었다.도윤은 재빨리 시아를 눌러 엎드리게 하고,몸을 숙인 채 문을 열고 밖으로 빠져나갔다.“시아 씨! 이리로!”그녀도 이미 권총을 손에 쥐고
창밖으로 밤비가 내리기 시작했다.도윤의 집 작은 거실에 앉아,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테이블 위, 뜨거운 차가 김을 피우고 있었지만, 누구도 손을 대지 않았다.시아는 무릎을 끌어안은 채 구석에 앉아 있었다.커튼 사이로 스며든 어둠이 그녀의 얼굴에 겹겹이 그림자를 씌웠고, 도윤은 조용히 그 맞은편에 앉아 눈을 떼지 못했다.“…그날도, 비가 왔어.”시아가 조용히 말했다.“처음 사람을 죽인 날. 그리고, 당신을 만난 날도.오늘까지… 비가 오는 날은 늘 나한테 뭔가를 가져가.”그녀는 천천히 눈을 들었다.도윤은 그 시선을 마주했다.“내가 제일 무서운 게 뭔 줄 알아요?”“…아니요.”“당신이 나를 포기하는 거야.”그 말에, 도윤의 손이 천천히 움찔했다.“난 내가 한 일들을… 절대 잊을 수 없어.사람들이 내 이름을 들으면, 경멸하거나 혐오할 거야. 그런데도…”시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어갔다.“당신만큼은… 나를 사람으로 대해줬잖아.처음부터 끝까지, 날 여자라고 불러준 유일한 사람이었어.”도윤의 눈이 붉어졌다.“그래서 무서워. 그게 언젠가 깨질까 봐.내가 만든 이 가짜 세계에서, 당신도 결국 날 떠날까 봐.”그는 조용히 다가가 그녀의 옆에 앉았다.“사람은 누구나 도망치고 싶을 때가 있어요. 나도 그랬고. 하지만…”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밖에서는 천둥이 멀리서 울리고 있었다.“백시아 씨. 당신은 지금까지 혼자 견뎌온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나랑 같이 견뎌봐요.”시아는 그 말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같이?”“같이 무서워하고, 같이 아파하고, 같이… 끝을 봐요. 혼자 두지 않을게요.”시아는 가만히 도윤을 바라보다, 조용히 그의 손등 위에 손을 얹었다.“…정말, 후회 안 할 거예요?”“이미 하고 있어요. 당신을 이렇게 늦게 알아봤다는 걸.”그 순간, 시아의 눈에서 천천히 눈물이 떨어졌다.말 없이 흘러내리는 그것은, 그동안 쌓였던 죄책감과, 두려움과,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의 잔해들이었다.그리고 그 눈물 위로
“너 아직도 착각하더라? 사람 하나만 죽이면 끝날 줄 알았지.”그는 천천히, 한 손으로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총이 아니었다. 작은 사진 한 장.그 사진 속엔 시아가 피를 묻힌 얼굴로 어딘가를 응시하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눈을 감는다.“…그걸 어디서…”“널 지켜보고 있었다면 믿겠어?”도윤이 그녀 앞으로 나선다.“지금 뭐하는 겁니까.”“당신, 아무것도 몰라. 이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그림자의 말에 도윤은 밀려드는 불안을 느꼈지만 눈빛만큼은 흐트러지지 않았다.“알아. 알고도 옆에 있어.”그 순간, 그림자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린다.“…그럼 당신도 공범이겠군.”시아가 도윤의 팔을 붙잡았다.“가지마.”“괜찮아.”도윤이 조용히 속삭인다."지켜줄게."어둠은 짙어졌고, 끝났다고 믿었던 과거가다시 그들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지켜줄게."도윤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떨림이 없진 않았다. 시아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긴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그녀의 숨은 점점 더 가늘어졌다.그림자는 도윤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거리감은 단 몇 발자국."도윤 씨, 비켜요."시아가 조용히 말했다.하지만 도윤은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두 팔로 그녀를 감싸듯 섰다."이 사람 누구야. 이름이라도 말해.""그냥… 지나가야 했던 사람 중 하나야. 내가 지나쳤어야 했던."도윤은 잠시 시선을 떨어뜨렸다가, 다시 그림자를 바라봤다."사진, 그거 어디서 났죠.""당신, 이 여자가 어떤 짓을 했는지 알고도 옆에 있는 건가?""그걸 당신이 왜 묻죠. 경찰도 아닌데."그림자의 입꼬리가 천천히 비틀렸다."넌 아직 이 여자 몰라. 널 데리고 어디까지 떨어질지 몰라."시아가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표정은 말할 수 없이 단단해져 있었다."그만해."그림자는 정지된 듯 그녀를 바라보다가, 낮게 웃었다."넌 아직도 너 자신이 뭘 만들었는지 모르지. 나 같은 놈이 생긴 이유, 너야."그녀의 눈동자가
폐가 안쪽, 시간이 잠시 멈춘 듯 고요했다.도윤의 발소리는 고요한 공기 속에서 너무 크게 울렸다.조진혁과 백시아,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그에게로 향했다.그 순간, 서늘한 긴장이 방 안을 감쌌다.“…도윤.”시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그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익숙하면서도 낯설 만큼 조심스러웠다.도윤은 미동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그 눈엔 믿기지 않는 마음, 감정의 파편들, 그리고…서서히 무너져내리는 어떤 확신이 담겨 있었다.“말해줘.”그의 목소리는 낮고, 떨림 없이 담담했다.그게 더 아프게 다가왔다.“저 사람이랑… 이 집이랑… 그리고… 그 USB. 다 뭐야?”시아는 눈을 피했다.진혁이 눈치를 채고, 조용히 뒤로 한 발 물러섰다.하지만 도윤은 그의 존재를 무시한 채, 그녀에게서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너… 나랑 같이 살면서, 한 번도 솔직했던 적 없지?”그 말에 백시아의 어깨가 움찔했다.그녀는 무언가를 삼키듯 입술을 꾹 다물었다.“처음엔 그냥,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했어. 근데… 같이 살다 보니까, 너한테서 도망치고 싶지가 않았어.”도윤은 고개를 떨궜다.“근데 이제 보니까… 도망친 건 나였네. 너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나.”시아의 눈가에 조용히 눈물이 고였다.그녀는 손끝으로 USB를 쥔 채, 불안하게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그 USB엔… 내가 살면서 숨긴 것들이 있어. 처음부터 널 속였고, 거짓말로… 네 옆에 있었어.”“왜?”도윤의 질문은 짧았지만, 그 안엔 수천 개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왜 그랬는데.”그녀는 한참을 망설이다, 마침내 답했다.“살고 싶었거든.”그 말은 고백 같기도, 변명 같기도 했다.“살고 싶었는데, 그 방법을 몰랐어. 그러다가… 너를 만났어.”“…….”“그래서 미안했어. 네가 자꾸 다정할수록 네가 자꾸 나를 걱정할수록, 숨고 싶었어.”시아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근데 나, 이제 안 숨을래. 도망도 안 칠 거야. 네가 원하면… 이제 다 말할게.”순간, 조진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