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시아는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도윤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등을 돌려 누운 채, 눈만 뜬 채.
도윤의 체온은 따뜻했다.
숨결은 규칙적이었고, 무언가를 믿는 사람처럼 평온했다.
그런 도윤을 보며 시아는 더욱 불안해졌다.
‘내가 이런 걸 가질 수 있는 사람인가.’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건 잠시의 꿈이라는 것을.
이도윤은 결국, 자신의 어둠을 마주하게 될 거라는 것을.
그리고 그 순간, 모든 게 부서질 거라는 것도.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하지만 눈꺼풀 뒤에서 떠오른 것은 이도윤의 얼굴이 아니라, 그날 밤이었다.
2009년 여름. 덥고, 끈적한 밤.
어린 시아는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창틀을 붙잡은 손은 떨렸고, 몸은 멍투성이였다.
거실에선 계부가 술에 취해 비틀거리고 있었다.
욕설이 섞인 텔레비전 소리가 귀를 때렸다.
그녀는 조용히 주방으로 갔다.
칼을 꺼냈다. 작은 과도였다.
떨리는 손. 그러나 표정은 무표정이었다.
그날, 그녀는 처음으로 살인을 했다.
칼을 든 손으로, 자신을 짓밟던 괴물을 찔렀고 붉은 피는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 피 위에, 그녀는 쓰러졌고, 웃지도 울지도 않은 채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그때의 눈. 그때의 침묵. 그때의 냄새. 아직도 잊히지 않았다.
“시아 씨?”
도윤의 목소리에 시아는 돌아왔다.
“…네?”
“무슨 꿈 꿨어요? 갑자기 숨이 거칠어서…”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냥… 과거 생각이 좀 났어요.”
도윤은 잠결에도 그녀의 손을 다시 잡았다.
“지금은 괜찮아요. 여긴… 아무도 없어요.”
그 말이 그녀를 더욱 무너뜨렸다.
‘여긴 아무도 없어… 그건 나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야.’
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나 심장은 더욱 빠르게 뛰고 있었다.
한편, 경찰서.
진혁은 백시아의 첫 살인을 재조사 중이었다.
당시 사건은 자살로 종결되었지만, 현장 기록에서 수상한 점은 수두룩했다.
그 중 하나. 거실 테이블 위, 장미 한 송이.
붉은 조화.
당시 경찰은 그저 집 안 장식이라 판단했지만 진혁은 알고 있었다.
“그게 시작이었어. 붉은 장미는 그 여자의 서명이야.”
그는 부하에게 말했다.
“과거 계부 사건. 유족은 없어.
하지만… 그 이후, 그녀는 4건의 유사 사망사건 인근에서 목격돼.”
“모두 남성. 비슷한 나이대. 그리고, 모두 시체 근처에 조화.”
진혁은 서류를 덮었다.
“이건 우연이 아니야. 그녀는 살인을 멈춘 적 없어. 다만, 이번엔 감정을 가졌을 뿐이지.”
“그 감정이 끝나는 순간 그녀는 다시, 칼을 들 거야.”
다음 날 아침. 시아는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
눈 밑이 부었다.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그러나, 도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웃으면 웃고, 조용하면 조용히 곁에 있었다.
“시아 씨.”
“네?”
“오늘… 집에 같이 있어요.”
그 말에 시아는 의외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일은요?”
“연차 냈어요. 그냥… 오늘 하루 당신 옆에 있고 싶어서.”
그녀는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이 사람… 왜 이러지.”
“왜 나한테… 이렇게 다정해.”
그녀는 점점 무서워졌다.
누군가가 그녀에게 이렇게까지 손을 내민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시아는 오후 내내 불안했다.
이유 없이, 몸 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차분하게 내리던 빗줄기가 끊긴 자리엔 무겁고 눅진한 공기가 남아 방 안을 눌렀다.
도윤은 거실 소파에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그가 점심도 만들었다.
계란말이, 된장찌개, 그리고 스팸구이.
너무 평범하고 따뜻한 식탁.
하지만, 그 식탁 앞에 선 시아는 어딘가 무서운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와서 앉아요. 배고프죠?”
그의 목소리는 변함없이 다정했다.
그 다정함이, 그녀의 목줄을 죄는 것 같았다.
그녀는 조심스레 자리에 앉았다.
숟가락을 들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까지 안 해줘도 돼요.”
도윤은 웃었다.
“하고 싶으니까 하는 거예요.”
“왜요?”
그 질문엔 잠시 정적이 흘렀다.
도윤은 진지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누군지 뭘 숨기고 있는지 다 몰라도 상관없어요.
나는 그냥 지금 이 순간의 당신이 좋아요.”
그 말은 시아의 심장을 너무 세게 때렸다.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떨궜다.
숟가락을 입에 넣었지만,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음식보다, 그의 말이 더 뜨거웠다.
그날 저녁. 갑작스레 초인종이 울렸다.
시아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도어뷰를 확인했다.
익숙한 얼굴. 지우고 싶었던, 기억 속 하나의 파편.
“오랜만이네. 아직도 그 칼 숨기고 다녀?”
그 남자는 웃고 있었다.
그 미소 안에, 그녀가 견뎌온 시간을 조롱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시아는 현관 손잡이를 움켜쥐며, 손끝을 흰빛으로 질리게 했다.
“여기까지 왜 왔어요.”
“너 소문났더라. 경찰이 널 다시 뒤지고 있다던데?
설마 진짜 사랑 같은 거 하면서 살고 있는 건 아니지?”
그녀의 숨이 가빠졌다. 가슴이 조여왔다.
그 남자의 목소리는 그녀가 묻어둔 시체처럼 다시 파내진 과거였다.
“난 그냥, 네가 얼마나 오래 버티나 궁금해서 온 거야.”
그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다.
그러나 마지막 한 마디를 남겼다.
“참고로… 그 남자 괜찮아 보이더라.”
문이 닫혔고, 시아는 문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의 두 손은 떨리고 있었다.
숨을 내쉴 수 없을 만큼,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다시… 돌아오려는 거야?’
‘그 안에 있던 내가…’
그날 밤, 시아는 몰래 집을 나섰다.
도윤은 깊은 잠에 들어 있었고,
그녀는 조용히 옷장을 열어 하얀 셔츠 안에 숨겨 두었던 작은 칼 하나를 꺼냈다.
길지 않은 칼날. 하지만 그녀의 심장을 향한 유일한 방패였다.
그녀는 한참 동안 그 칼을 손에 들고 있었다.
손끝이 따뜻해질 때까지.
그리고는 천천히, 칼날을 다시 감쌌다.
‘이도윤은 내 칼에 닿게 하지 않아야 해.’
‘설령… 내가 다시 누군가를 죽이게 되더라도.’
그녀는 그렇게, 다시 조용히 집으로 돌아왔다.
집 안은 조용했다.
그녀가 문을 닫는 소리에 도윤이 몸을 뒤척였다.
“시아 씨…?”
그는 일어난 채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잠시 멈췄다가, 천천히 말했다.
“…밤산책 좀 다녀왔어요. 잠이 안 와서.”
도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조심히 다녀온거죠? 요즘 뉴스 보면, 밤길 무섭잖아요.”
“응.”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눈빛은 복잡하게 어지러웠다.
그가 다정하게 이불을 넘기며 말했다.
“와요. 이불 안은 따뜻해요.”
그녀는 말없이 침대에 들어가 누웠다.
그리고, 그의 팔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 순간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나는… 당신을 죽이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어.’
'그게… 내 사랑의 방식이야.'
도윤은 조용히 문을 닫았다.현관의 잠금장치가 덜컥, 소리를 내며 닫히는 소음이 낯설게 들렸다.집 안은 고요했다. 너무 고요했다.마치 이 공간이 애초에 두 사람의 삶을 품었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시아가 떠난 자리. 그녀의 신발이 사라졌고, 화장대 위에 늘 가지런히 놓여 있던 립스틱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욕실 선반에 걸려 있던 칫솔도 없었다.심지어 세탁기에 돌려놓은 속옷조차 말끔하게 사라져 있었다.“……정말, 다 가져갔네.”도윤은 멍하니 거실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그녀의 체취는 아직 집안 곳곳에 남아 있었다.시트에 남은 은은한 향수 냄새,냉장고 안에 덩그러니 남은 그녀가 사다 놓은 맥주 두 캔,테이블 구석에 놓인, 그녀가 메모하다 마른 포스트잇 한 장.그는 손끝으로 그것을 집어들었다.글씨는 없었다. 단 한 줄도 쓰이지 않은 노란색 메모지.그녀는 아무 말 없이 떠났다.이별이란 단어조차 남기지 않은 채.시간이 흐를수록, 도윤은 점점 자신의 감정이 무뎌지는 걸 느꼈다.슬픔도, 분노도, 허무함도 하나로 뭉개진 채,그저… 그녀가 남긴 공백만이 그의 시간을 갉아먹고 있었다.회사는 이미 휴직계를 냈다.출근할 수 없었다. 아니, 출근해도 버틸 수가 없었다.그녀가 앉았던 식탁 자리에 불 꺼진 채로 앉아하루 종일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다가, 결국 폰 화면을 내려놓았다.그는 컴퓨터를 켰다.이상하게도, 그가 마주한 모니터 화면이 이 세상과 연결되는 유일한 출구처럼 느껴졌다.‘너를 기억해야겠다.’‘그렇지 않으면, 나는 끝없이 무너질 것 같으니까.’그날 밤, 도윤은 한 줄씩 코딩을 시작했다.초라한 비주얼 노벨 형식의 미니 게임.게임 속의 주인공은 이름 없는 여자였고,그녀는 아무 말 없이 어느 날 그의 삶에 들어왔다가 또 조용히 떠났다.그녀가 했던 말, 웃었던 얼굴, 화냈던 목소리.그 모든 기억을 대사로, 스프라이트로, 배경 이미지로 옮겨 담았다.“그쪽도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었을 텐데?”“1년만 딱. 진짜 결혼은 아니니까.
서울 시립병원 중환자실.흰 커튼 너머, 폐소독기의 알람이 조용히 울렸다 꺼졌다.의사와 간호사 몇 명이 분주하게 움직였지만 그 누구도 다급하지 않았다.이미 알고 있는 싸움의 끝이었기에.백시아. 호흡기와 링거에 의지해 겨우 생명을 붙잡고 있는 그녀의 상태는‘회복 불가’.의학적으로 더는 시도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고 의사는 조용히 말했다.그 곁에, 도윤이 앉아 있었다.하루 전까지 그를 감시하던 경찰은 모두 물러났다.그는 참고인에서 ‘무관한 일반인’으로 변경되었고, 어떠한 진술도, 증언도 거부했다.“그 여자를 압니까?”조진혁의 물음에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그저 고개를 천천히 저었을 뿐이었다.“그 사람… 모릅니다.”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도윤은 하루도 빠짐없이 그녀 곁을 지켰다.밥도 거의 먹지 않았고, 잠도 들지 못한 채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았다.한 번이라도. 정말 한 번만이라도. 그녀가 눈을 뜨고,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길 바라며“시아야…”“이름이었구나. 처음으로 네가 말해줬던…”“나는 아직도 그날 생각해. 그 황당했던 첫 키스. 그리고, ‘로또 맞았다 생각하라던’ 그 말.”“넌 나한테 재앙이었어. 그런데 왜 이렇게도 그리운 거야.”그는 이마를 침대에 붙인 채 조용히 울었다.그로부터 며칠 후, 진혁은 권재석의 사망 이후 경찰 내부 인사에 대한 수사 결과를 정리했다.“강력 4팀장 박주한, 서울서부서 강력계 이윤석, 경기남부 정보계 신영우 모두 권재석의 라인에 있었던 인물들입니다.”그는 자료를 언론에 공개했다.대가성 수사 조작, 사망자 수 조작, 피의자 고문.그리고 마지막으로 '백시아’라는 이름은 한 줄만 언급되었다.[모든 기록은 소거되었으며, 그녀의 존재는 사라졌음.]그날 저녁, 진혁은 경찰서 자신의 사무실 책상 서랍에서 작은 메모 하나를 발견했다.그 종이는 누군가의 손때가 잔뜩 묻어 있었고, 다 적지도 못한 글자들이 삐뚤게 흘러내리고 있었다.[나는 괴물이에요. 그게 끝까지 변하지 않는다면 내가 맨 마지
새벽 4시 10분.철문이 두 번 열리고, 경비 조명이 천천히 꺼졌다.백시아는 수갑과 족쇄를 찬 채, 검은색 호송복을 입고 교도소 밖으로 걸어나왔다.숨이 흰 안개처럼 입 밖으로 터졌다.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그녀의 걸음은 흔들리지 않았다.주차장엔 군용 트럭에 개조한 호송 차량이 기다리고 있었다.조수석 쪽 문이 열리고 검은 재킷을 입은 남자가 내렸다.처음 보는 인물. 하지만… 시선을 마주한 순간, 백시아는 알아차렸다.“조직이 보낸 놈이네.”남자는 대꾸 없이 뒷문을 열어 시아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말하지 마. 어차피 넌 오늘 이송되지 않아.”문이 닫히고 엔진이 켜졌다.하지만 차는 정문으로 가지 않았다.5분. 10분.방향이 달랐다.위치는 남쪽이어야 했지만, 차는 서쪽 외곽도로로 빠지고 있었다.백시아는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여 수갑의 연결고리를 비틀었다.몇 주간 준비해온 작업.징벌동 안에서 손톱 틈으로 감춰 들여온 얇은 와이어.그녀는 미세하게 철사를 회전시켜 고리를 푼 뒤, 손을 묶은 채 정좌했다.숨이 천천히 빨라졌다.“이 차 안에서 죽을 수도 있겠군.”“하지만 적어도 누굴 죽이기 위해 나가는 건 아니야.”그 시각, 도윤은 눈을 가린 채 철제 의자에 묶여 있었다.재석은 탁자에 앉아 작은 나무상자를 하나 꺼냈다.상자 안엔 여섯 개의 지문이 찍힌 카드.그리고 마지막 하나가 비어 있었다.“이제 너 하나만 남았어.”“이걸로 금융 거래도 되고, 신분 세탁도 돼.이 여섯 명 모두 내 밑에서 움직이다 필요 없어져서 죽인 놈들이지.”그는 마지막 지문칸을 톡톡 두드렸다.“이 칸엔 백시아가 들어올 거였어.”“하지만, 네가 바뀌었지.”도윤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얼굴은 푸르고, 입술은 터 있었지만 눈동자만은 살아 있었다.“당신은 끝이 없는 사람 같네요.”“사람을 고르고, 이용하고, 망가뜨리고, 그러고도 아무 일 없단 듯 숨 쉬죠.”“하지만 그 여자는, 그 망가짐 속에서 어떻게든 사람답게 살아보려 했어요.”“그게 제가 그녀를
서울중앙지법 사무국.경수 변호사는 묘한 웃음을 띠며 서류 한 장을 넘겼다.“사형 일정 재검토 신청서입니다.단, 피고인 측 변호인 사임 이후 공식적인 변론 없이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건 이례적이지만 배경은 충분하죠.”그의 책상 위엔 두꺼운 서류철.그 안엔 정리된 피고인 백시아의 정신 감정 결과와 5건의 살인사건, 그리고 그녀가 저지른 범행 장면을 연상시키는 자극적인 스틸 컷들이 담겨 있었다.이 모든 걸 정리해 넘긴 사람,권재석.그는 백시아의 사형 집행을 앞당기기 위해 로비와 여론전을 동시다발적으로 벌이고 있었다.그의 이유는 간단했다.“감정이 생기면, 괴물도 사람이 돼버리거든.”“그 전에 죽여야 돼. 진짜 괴물이 되기 전에.”그 시각, 교도소.시아는 이령과의 약속대로 자신의 최초 살인에 대한 정보를 정리해 넘겼다.다섯 건의 공식적인 범행 외에 언급조차 되지 않았던 여섯 번째,혹은 첫 번째로 불러야 할 그 사건.“열여섯. 계부였어.”“한 번도 말한 적 없었지. 그 누구에게도.”이령은 묵묵히 들었다.“경찰한테 넘기면, 무죄를 주장할 근거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시아는 입꼬리를 비틀며 웃었다.“난 무죄가 아니야. 그 인간을 죽인 것도, 그 이후 다섯 놈을 죽인 것도 내가 선택한 거였으니까.”“그냥, 이제 내가 쥐고 있는 칼자루가 누굴 향하고 있는지만 명확하게 보여주려는 거야.”도윤은 그날, 자신의 책상 위에 경고성 사진 한 장이 놓인 걸 발견했다.사진 속엔 시아가 수감복을 입고 걷고 있는 모습,교도소 담장 바깥에서 몰래 찍은 저해상도 사진.“누구지… 누가 이걸…”진혁은 이 사실을 접하자마자 경찰 내부를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우리 안에도… 조직과 손잡은 놈이 있어.”“그리고 너, 이제부터는 진짜 조심해야 해. 백시아가 가진 정보가 조직의 숨통을 쥐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그 여자를 살리는 것도 죽이는 것도 다 너에게 달려 있어.”그날 밤, 시아는 교도소 창살 너머로 달을 올려다봤다.눈 아래 붉게 그은 멍
시아는 독방에서 나오자마자 의도적으로 화장실 청소 자원을 자처했다.감시의 사각지대를 알기 위해, 교도소 내부 구조를 손끝으로 다시 체득하기 위해서였다.그녀의 눈은 좁은 복도 하나,CCTV 한 대의 방향, 교도관의 순찰 시간표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5분. 사각. 그때, 움직일 수 있어.”다음 날 새벽. 시아는 의도적으로 빨래를 들고 금지된 통로 앞을 지나쳤다.예상대로 문신녀가 다시 나타났다.“안에서 뭐 할 수 있다고 생각해?”시아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내가 뭘 할 수 있는지, 너도 잘 알잖아.”“너, 아직 그 눈빛 있구나. 사람 죽이던 때 그 표정.”“아직 안 죽였잖아. 그게 중요한 거야.”그녀는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조직 놈들이 날 이 안에 묶어두려는 이유, 안 봐도 뻔하지.”“그 남자 때문이야. 도윤.”문신녀의 얼굴이 굳었다.“그 사람 건드리면… 나도 다 끝장이야.”“그러니까. 덫을 치려면 제대로 쳐. 나한테 설렁설렁 다가왔다간, 반쯤 물려 죽을 수도 있으니까.”도윤은 경찰서 회의실에서 조진혁과 함께 USB의 파일을 다시 정리하고 있었다.“재석은 최근 몇 년간 대포폰을 최소 3개 이상 썼어요.거점은 경기 남부에 있고, 추적하려면 내부 협조가 필요해요.”진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팀장이 정보를 내려줬는데… 뭔가 이상해.”“뭐가요?”“우리가 알아낸 정보보다, 저쪽에서 먼저 알고 있었던 것 같아.”“정보가 새고 있다는 말씀이신가요?”“누군가, 경찰 내부에서 무화 잔당과 손잡고 있어.”그 순간. 진혁의 폰에 알림 하나가 떴다.[익명 제보: 경찰청 내부자 명단_추정]파일을 열자 5명의 실명이 적혀 있었다.그중 한 명 도윤이 익히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이 사람, 저희 회사 보안 팀장이랑 같이 술 마셨던 사람입니다.”“……우리보다 한발 빠르단 얘기네.”진혁은 이를 악물었다.“당장 보호조치 들어가야겠어. 당신도 혼자 다니지 마요. 절대로.”그날 밤. 도윤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형광펜으로
도윤은 퇴근길이 점점 불편해지고 있었다.늘 지나던 골목, 익숙했던 담벼락, 언제나 조용하던 아파트 복도.그 모든 것들이 어느 순간부터 그를 감시하는 ‘누군가’를 품고 있는 듯했다.그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현관문을 두 번 확인했고, 창문마다 커튼을 내렸다.그리고 거실 중앙에 놓인, 그녀가 남기고 간 붉은 장미를 한참 동안 응시했다.“누구지. 왜 지금 와서…”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시아의 과거는 단지 '연쇄살인' 네 글자로 정의될 수 없는 무언가였다는 걸.그녀가 죽이려 했던 남자들. 그 이름들과 연관된 조직들.그는 그들이 아직 끝내지 않았다는 걸 감각적으로 알고 있었다.다음 날 아침. 회사 메일함을 열자 익명의 파일이 하나 도착해 있었다.보낸 이는 없었다. 제목도 없이, 첨부파일 하나만.그는 주저하다 마우스를 클릭했다.그 순간 화면이 암전되더니 도윤의 얼굴이 클로즈업된 사진이 떴다.출처를 알 수 없는 CCTV 캡처.그가 피규어 가게에 들어가는 장면,병원에서 나온 장면,그리고 무심코 장미 조화를 닦는 모습까지.그의 손끝이 얼어붙었다.“……미친.”그는 전율을 느꼈다.자신이 '관찰되고 있다'는 느낌이 단순한 감정이 아닌, 현실이라는 사실로 다가왔다.한편, 백시아는 교도소 식당에서 어제 마주쳤던 여자와 다시 마주쳤다.그녀는 밥을 먹지도 않고 구석에 앉아있었다.시아는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갔다.“무화 쪽이죠?”그녀는 놀라지도 않고 말했다.“무화는 없어졌다고 생각했겠지.”“하지만 조직은 사라지지 않아. 흐름만 바뀌었을 뿐이야.”“이제는, 당신 때문에 깨진 판을 다시 짜려 해.”“그리고 그 열쇠가 밖에 있는 그 남자야.”백시아의 표정이 무너졌다.“그 사람은 아무 상관없어.”“아니. 그 사람이 '당신의 감정'을 흔든 시점부터, 상관이 없는 사람이 아니게 된 거야.”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리고 백시아의 어깨를 스치며 나지막이 속삭였다.“도윤 이도윤. 맞지?”그 이름 하나에 백시아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