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조용했다. 아침인데, 기이하게 조용했다.
이도윤은 평소보다 일찍 깼다.
빛은 여전히 커튼 뒤에 숨어 있었고, 시아의 방문은 닫혀 있었다.
그는 문 앞에 잠시 서 있었다.
노크를 할까 망설이다, 그냥 조용히 주방으로 향했다.
싱크대에 컵 두 개가 놓여 있었다.
하나는 씻은 흔적이 없었다.
그녀가 새벽까지 깨어 있었던 것이다.
'무슨 생각을 하면서 밤을 지새웠을까.'
도윤은 조용히 커피를 내렸다.
한 잔은 자신의 것. 그리고 다른 한 잔은 시아의 컵.
그녀는 아직도 자기만의 어둠 속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그 어둠이 이제는 그에게도 익숙해지고 있었다.
시아는 방 안에서 창밖을 보고 있었다.
도시의 소음이 희미하게 올라왔고,
창문에 맺힌 습기 너머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다.
'다들… 얼마나 멀쩡한 척하며 살고 있을까.'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중 누군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자신을 바라보며 커피를 내리고 있을 것이다.
그게 이도윤이라는 남자였다.
그는 너무 맑았다.
너무 순해서, 그를 보고 있으면 자신이 더럽고 더럽다는 걸 끝없이 자각하게 된다.
‘이대로… 내가 이 사람 옆에 있어도 될까.’
시아는 손끝으로 창문을 문질렀다.
자신의 손가락 자국이 습기 위로 선명하게 남았다.
그 흔적처럼, 그녀의 과거도 점점 세상에 드러나고 있었다.
서울 경찰청. 강력 4팀 회의실. 진혁은 칠판 앞에 섰다.
그의 손엔 오래된 수사기록이 들려 있었다.
“이건… 다섯 번째 피해자가 아니라, 첫 번째 피해자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는 자료를 꺼내 들었다.
2009년. 한 중년 남성. 의문의 질식사.
당시 사건은 자살로 종결됐다.
그러나
“이 사건 현장에도 조화가 있었습니다.
붉은 장미, 똑같은 조화. 보고서에는 우연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그게 우연일 리가 없죠.”
동료 형사가 물었다.
“피해자는 누굽니까?”
“이름은 백근수. 딸이 하나 있었어요. 17세. 이름은 백시아.”
순간, 회의실의 공기가 식었다.
“지금 우리가 쫓고 있는 용의자와 이름이 같습니다.”
“그럼… 친부를 죽였다는 겁니까?”
“계부입니다. 폭력 전과 3범. 학교에서도 딸에게 대한 학대가 의심됐던 남자죠.”
진혁은 시선을 낮췄다.
“만약, 그 첫 번째 사건이 진짜 시작이라면 우린 지금, 10년이 넘는 살인을 쫓고 있는 겁니다.”
그 시각, 시아는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
화장을 하지 않은 얼굴. 감정을 숨긴 무표정.
그러나 눈빛은 어디에도 닿지 못하는 허공을 떠돌았다.
“계부가 죽고, 난 다시 태어났다고 생각했지.”
“피를 보고 나니까… 심장이 다시 뛰더라.”
그녀는 자신의 팔목을 바라보았다.
흉터는 없었지만, 그 안쪽엔 깊게 팬 상처들이 있었다.
도윤은 그런 그녀를 모른다.
그는 너무 따뜻해서, 이런 추위는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더 무서워.”
그녀는 중얼였다.
“이 사람이 날 진짜로 사랑하게 되면… 나는 끝장이야.”
도윤은 퇴근 후, 편의점에서 작은 케이크를 하나 샀다.
무슨 기념일도 아니었다.
그냥 그녀와 함께 뭔가를 나누고 싶었다.
그는 문을 열며 말했다.
“시아 씨, 나 오늘… 좋은 꿈 꿨어요.”
시아는 고개를 들었다.
“어떤 꿈이요?”
“둘이… 평범하게 식탁에 앉아서 케이크 자르는 꿈.”
그녀는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작게 웃었다. 미소였다. 진짜 웃음.
그러나, 그 웃음이 너무 아팠다.
“…그런 꿈은 꾸지 마요. 현실에서 깨면 더 서글프니까.”
그 말에 도윤은 조용히 케이크를 내려놓았다.
“그럼… 현실에서 해요. 꿈처럼, 같이 앉아서. 그냥… 평범하게.”
백시아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의 진심이 가슴에 스며들었다.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줘서.”
그러나 그 순간, 현관 앞에 누군가 섰다.
누르지 않은 초인종. 움직이지 않는 그림자.
류진혁이었다.
그는 문 앞에서 숨을 고르며 주머니 속 사진 한 장을 꺼냈다.
백시아. 10년 전, 계부의 장례식에서 찍힌 사진.
그녀는 그때도 지금처럼, 웃지 않았다.
그리고 그 눈빛은 죽음을 품고 있었다.
“…이번엔, 절대 놓치지 않아.”
그는 조용히 문고리를 바라봤다.
* * * * *
새벽이었다.
아파트 복도는 적막했고, 문 틈으로 새어나온 조명은 마치 결계를 친 듯 고요했다.
현관 앞, 진혁은 조용히 걸음을 돌렸다.
초인종을 누르진 않았다. 지금은 관찰의 시간이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노트를 꺼냈다.
이도윤. 1988년생. 게임회사 개발자.
부모 사망. 무연고. 독거.
“혼자 사는 남자 집에, 여자가 들어갔다.”
진혁은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 여자가… 이런 구도를 선택했다는 건, 이 남자에게서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는 뜻이겠지.”
즉, 그녀는 이 남자를 도구로 여겼다.
문제는 그 남자는 이미 감정적으로 그녀에게 빠져들었다는 것.
“이 관계를 파고들어야 해.”
진혁은 고개를 들었다.
문 너머에 있는 그 여자. 백시아.
“넌… 혼자가 아니야. 이젠, 절대.”
그 시각, 백시아는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
눈두덩은 푸석했고, 입술엔 핏기조차 없었다.
손에는 칼이 들려 있었다.
주방에서 가져온 식칼. 무언가를 썰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저 무게를 느끼기 위해.
'살인은 손의 감각에서 시작돼.'
처음 계부를 죽였던 그날, 손끝이 얼마나 떨렸던가.
가슴을 찔렀을 때, 소리가 났다.
뼈를 긁는 소리. 피가 솟구치며 그녀의 얼굴에 튀었다.
그러나 그 순간 심장은 평온했다.
아무것도 아니었다.
너무 쉬워서, 끔찍했다.
“…그런데 왜…”
시아는 식칼을 내려다보며 중얼였다.
“왜, 요즘은 손끝이 떨리지?”
그녀는 무릎 위에 칼을 올려놓았다.
그 칼 위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도윤. 그 사람 때문이야.’
그는 이상하게 자꾸만 그녀를 사람처럼 느끼게 만든다.
그건, 치명적인 일이었다.
도윤은 작은 종이에 글씨를 쓰고 있었다.
[오늘 점심은 김치볶음밥 해놨어요. 전자레인지 돌려서 드세요. 잠깐 나가요. 연락 줘요 :) - 도윤]
그는 냉장고 위에 메모를 붙였다.
시아는 아직 방 안. 그녀가 깨기 전, 그는 조용히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사이, 문득 문앞에서 누군가를 본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복도엔 아무도 없었다.
“착각이겠지…”
그는 그렇게 중얼이며, 아파트를 나섰다.
그러나 그가 보지 못한 CCTV에는
그 몇 분 전 복도에 서 있던 진혁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경찰서, 강력 4팀 사무실.
“이도윤. 접촉해 보겠습니다.”
진혁은 그렇게 말했다.
“무작정 백시아를 몰아붙이는 건 지금으로선 역효과입니다.
그녀가 도윤이란 남자에게 심리적으로 안정을 느끼고 있다면
그걸 흔드는 쪽이 더 빠릅니다.”
동료가 물었다.
“그럼, 이도윤을 미끼로 쓴다는 건가요?”
“아뇨. 그는 지금… 미끼가 아니라, 열쇠예요. 백시아의 약점.”
그는 조용히 의자에 등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그 남자가 흔들리면, 그녀는 무너질겁니다.”
한편, 도윤은 퇴근 후 마트에서 작은 선물을 하나 샀다.
디자인이 예쁜 머그컵.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그녀의 컵이 깨졌기에.
작은 배려. 조심스러운 마음.
그런 사소한 감정들이 도윤에겐 큰 의미였다.
문을 열었을 때, 집 안엔 인기척이 없었다.
그는 조용히 거실을 둘러보다가 식탁 위에 놓인 칼을 보았다.
그 칼 위엔 말라붙은 물기가 있었다.
주방에 가도, 자취는 있었다.
그는 그 순간 알 수 없는 불안을 느꼈다.
“시아 씨?”
그는 조심스레 방 문을 열었다.
방 안엔 시아가 앉아 있었다.
빛 하나 없는 방 안, 그녀는 무표정으로 창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윤은 말없이 다가가 그 옆에 앉았다.
“괜찮아요?”
시아는 고개를 돌렸다.
“가끔… 나한테 감정이란 게 있는 건가 궁금해요.”
도윤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죽이고 나서도 아무 감정이 없었어요. 그게 나를 무섭게 했죠.”
그 순간, 도윤의 심장이 크게 내려앉았다.
그녀가 ‘죽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달랐다.
“…그래도 지금은 감정이 있잖아요.”
시아는 그를 바라봤다.
“불안해요. 도윤 씨가… 나 때문에 망가질까 봐.”
도윤은 작게 웃었다.
“그럼요. 나, 망가질 준비됐나 봐요.”
그 말에 시아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눈 끝에, 처음으로 눈물이 맺혔다.
여자의 고함은 점점 커졌다.행인의 시선이 하나둘 몰렸다.시아는 숨이 막히는 듯했다.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도윤이 끝까지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정말 그만하세요. 당신이 보고 있는 사람은 당신이 상상하는 괴물이 아니에요.”“그럼 뭐예요? 피해자예요? 사랑스러운 여자예요?”그 순간 백시아가 말했다.“…맞아요. 괴물 맞아요.”모든 소음이 멎었다.시아는 고개를 들고 여자를 바라봤다.“나, 그렇게 살아왔어요. 죽이고, 도망치고, 거짓으로 숨 쉬면서.”“…그걸 자랑이라도 하겠다는 거예요?”“아니요. 이제… 그 죄를 안고 살겠다는 거예요.”그녀는 이도윤의 손을 바라봤다.그리고, 꽉 잡았다.“도망치지 않을 거예요. 그게 나니까.”주변이 다시 웅성이기 시작했다.핸드폰으로 그녀를 찍는 이도 있었다.하지만 시아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눈을 피하지도, 고개를 숙이지도 않았다.그날 밤. 시아는 아무 말 없이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도윤이 라면을 끓이다 말고 조용히 말했다.“오늘… 괜찮았어요?”“모르겠어.”“…후회돼요?”“아니. 다만… 조금 무서워.”“뭐가요?”“…당신까지 잃게 될까 봐.”도윤은 손을 뻗어 그녀의 손 위에 얹었다.“난 당신이 두렵다고 말하는 그 용기가 제일 용감하다고 생각해요.”시아는 잠시 멈춰 있더니, 천천히 그의 손을 감쌌다.“…우리, 계속 이렇게 살 수 있을까?”“살아요. 아무리 오래 걸려도. 당신이 스스로를 용서할 때까지.”눈이 내렸다. 서울의 겨울은 빠르게 찾아왔고,눈발은 조용히 백시아의 머리 위를 덮었다.그녀는 마트 옆 골목길 벤치에 앉아 있었다.누군가와의 약속은 없었다.그저, 익숙하지 않은 고요를 들이마시고 싶었을 뿐이다.주머니 안에서 울리는 진동. 이도윤이었다.[밖이에요? 추워요. 어디예요? 데리러 갈까요?]그는 언제나 그녀를 먼저 걱정했다.그 점이 그녀를 약하게도, 강하게도 만들었다.시아는 짧게 답장을 보냈다.[조금만 있다가 갈게요. 괜찮아.]그 순간, 누군가가 옆에 앉
한적한 골목. 낮은 담벼락 위로 담쟁이덩굴이 뻗어 있던 오래된 단독주택.시아는 천천히 문을 밀었다.낡은 초인종은 여전히 작동했고, 몇 초 후 문이 열렸다.“누구시죠?”그녀보다 두 살 많았던 그 남자.한때 백시아가 ‘가장 오래 기억했던’ 이름 없는 남자.그는 그대로였다. 조용한 눈, 낯선 듯 선선한 말투.“…저, 혹시…”그녀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숨이 막히는 듯했다.“혹시, 저 아세요?”남자가 묻자 시아는 고개를 들었다.숨을 길게 내쉬고 말했다.“…죄송해요. 아니요. 그냥… 비슷한 사람을 봐서요.”그녀는 돌아서려 했다.하지만 남자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러 세웠다.“잠깐만요.”시아는 멈춰섰다.뒤돌아보지 못하고, 그대로 선 채로.“…혹시 백시아 씨… 맞나요?”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흔들렸다.“…기억하세요?”남자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날… 그 병원 앞에서 당신이 제 손을 잡았잖아요. 죽지 마요라고…”그녀는 눈을 감았다.그 기억 죽음보다 가까웠던 그날.폭우가 쏟아졌고, 남자의 피로 범벅이 된 손등을 자신이 붙잡고 있었던 순간.“난 기억이 안 난다고 믿었어요. 그렇게 살아왔고, 그래야만 했고…”그녀는 돌아섰다.그 남자의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근데 기억이 나요. 당신이 내 앞에서 울던 그 장면도,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내 손을 꼭 쥐고 있던 당신도.”그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그게, 내가 살아 있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네요.”“…그게, 내가 죄를 기억하는 이유예요.”두 사람 사이에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왜 왔어요?”그가 묻자, 시아는 망설이지 않았다.“당신에게 사과하러 왔어요.그리고, 당신이 날 미워해도 된다고 말하러 왔어요.”그의 표정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오히려 담담하고 단정했다.“…왜 미워해야 하죠?”“당신은 내 손으로 상처 입었으니까요.”그가 고개를 저었다.“당신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만든 상처예요. 그걸 지켜보며 아무것도 못한 제가 더 미웠어요.”“…당신이 나를 미워했
시아는 밤늦게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조용히 화장을 지우며, 어느 틈에인가 울었던 흔적을 닦아냈다.‘기억을 지우면 죄도 지워지냐고 묻던 얼굴들.그들이 내게 물었던 말들이 이젠 내 안에서 계속 되묻는다.’그녀는 깊은 숨을 내쉬고 서랍에서 오래된 휴대폰 하나를 꺼냈다.전원을 켜니 화면엔 단 하나의 번호만이 저장돼 있었다.‘001. 최문혁’한참을 들여다보다 그녀는 전화를 걸지 않았다.대신, 메시지를 남겼다."다시 만나자. 너와 나, 마지막으로."그녀는 거울 앞에 서 있었다.새벽 3시 20분. 창문은 닫혀 있었고, 방 안은 고요했다.백시아는 자신을 들여다봤다.길게 자란 머리카락, 말라붙은 입술,그리고 눈동자 어디를 봐도 ‘아내’처럼 보이진 않았다.“난 아직도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작게 중얼이다 입술을 앙다물었다.거울 너머의 여자는 과거를 기억하고 있었다.피 묻은 손, 입술에 붉은 장미를 문 채 도망치던 밤들. 숨을 죽이고, 마음을 죽이던 순간들.그 모든 시간 속에서 ‘사랑’은 늘 죽음 뒤에 있었고, 구원은 오지 않았다.그런데도 도윤은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했다.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그 사람에게서 도망쳐야 하나.”그녀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물었다.“아니면, 이번만큼은 나도 사랑을 잡아도 되는 걸까.”거실로 나왔을 때 도윤은 소파에서 자고 있었다.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있었고, 손에 쥐고 자는 건 그녀가 남긴 메모였다.‘기억을 잃은 자가 죄를 씻는 방법’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그것을 쥐고 있었는지 가슴이 아려왔다.시아는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고 그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도윤아.”잠에서 깨지 않은 채 그는 중얼였다.“…안 가… 가지 마요…”그녀는 놀란 채 멈췄고, 천천히 그의 손을 쥐었다.그의 체온이, 그녀의 손에 살짝 스며들었다.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백시아는 그에게 입을 맞췄다.아주 가볍게, 조용하게.마치 용서를 구하는 입맞춤처럼.그 다음날, 두 사람은 함께 움직였다
“이도윤 씨, 기억… 믿는 편이십니까?”“갑자기 무슨”“기억은, 가장 잘 조작되는 기록입니다. 특히 당신 같은 사람에겐요.”“…뭐라고?”다른 한 명이 뒤에서 속삭였다.“대학 시절, 2009년 3월 18일. 기억하시나요? 당신 그날 한 명 죽였습니다.”도윤의 눈이 단숨에 흔들렸다.“…그건, 사고였어요.”“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정황상, 당신이 떠났고, 그는 죽었어요.그 기록, 지금 우리가 갖고 있답니다.”“…협박이네요.”“아니요. 거래죠. 당신이 지금 사이트에서 손을 떼면, 그날 일은 묻겠습니다.”도윤은 말없이 그들을 바라보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어차피 다 알고 있었어요. 그가 그걸 이용하려 할 줄.”그는 재킷 주머니에서 녹음기를 꺼냈다.“기록은 기억보다 오래 남거든요.”남자들은 당황했고, 도윤은 재빨리 걸음을 돌려 빠져나갔다.시아는 돌아온 도윤을 보며 얼굴이 굳었다.“괜찮아요?”“…문혁이, 내 과거를 알고 있어요.”“뭔데요.”“예전에… 한 명을, 죽게 놔뒀어요. 사고였지만… 난 도망쳤어요.”시아는 그의 손을 잡았다.“…도망쳤지만, 기억하잖아요. 그리고, 지우지 않았잖아요.”도윤은 작게 떨며 그녀를 안았다.“당신이, 내 앞에 있어서 다행이에요.”시아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나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도윤 씨가 있어서, 내가 더 이상 괴물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노트북 화면 위로 문혁의 얼굴이 떴다.그는 마치 오래된 친구에게 안부를 묻듯, 무표정하게 웃고 있었다.“이도윤 씨, 당신이 만든 사이트… 꽤 흥미롭더군요.한 번 보고 나니까, 옛날 생각도 나고 말이죠.”도윤은 묵묵히 화면을 바라보았다.시아는 그의 옆에서 숨을 삼킨 채 서 있었다.문혁은 말을 이었다.“2009년 3월 18일. 당신은 신입생 환영회에서한 남학생을 데리고 나갔고… 그 후로 그는 돌아오지 않았죠. 기억 안 납니까?”“…그건 사고였어요.”“그렇겠죠. 하지만 증거라는 건, 사람들이 어떻게 기억하느냐에 따라 뜻이 바뀌기도 하
사무실이 붕괴되듯 어수선했다.서버 장치가 과열로 부르르 떨렸고, 도윤은 백업된 USB를 쥔 채 그녀의 손을 끌었다.“뛰어요, 지금!”백시아는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문혁이 다시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녀는 달렸다.목덜미로 느껴지는 시선,그리고 문혁이 던진 마지막 한마디가 균열처럼 남았다.“기억은… 언제나 돌아오지.”그들은 서울 외곽, 도윤의 지인에게 빌린 작은 오피스텔에 몸을 숨겼다.작은 방 안, 서로 숨소리만이 가늘게 들릴 뿐이었다.도윤이 USB를 꽉 쥐고 말했다.“이 안엔, 그 사람의 운영 네트워크가 전부 담겨 있어요.명단, 자금 흐름, 사진, 영상, 그리고 당신과 관련된 기록까지.”시아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전부… 다 폭로해버릴 수 있어요?”“쉽지 않겠지만, 하나씩, 정확하게 퍼뜨릴 수 있어요.”“그럼, 이제부터 우리가 쫓는 거야?”“…맞아요. 이건 도망이 아니라 반격이에요.”며칠 후, 도윤은 인터넷의 깊은 어둠 속에서 최문혁의 주요 계좌를 추적하기 시작했다.그는 몰래 자산을 이전해 해외 거점으로 돈을 세탁하고 있었고,그 모든 움직임은 조용히 기억을 조작하는 기술과 관련된 인물들에게 연결돼 있었다.“이걸 보세요. 이 이름들…이 사람들, 전부 당신이 겪었던 장소들에서 일했던 사람들이에요.”“…한 명도, 기억 안 나.”“그럴 리 없어요. 당신이 잊게 만든 거예요. 아니면, 일부러 기억하지 않기로 했거나.”백시아는 말없이 모니터를 바라봤다.화면에 떠 있는 얼굴들 중 일부는 그녀가 어렴풋이 꿈에서 본 듯한,익숙하지만 손이 닿지 않던 얼굴이었다.“나는… 그 사람들에게 어떤 존재였던 거야.”도윤은 조심스럽게 말했다.“아마… 당신은 증인일지도 몰라요. 문혁이 감추고 싶었던 실체를 유일하게 기억하고 있는 사람.”시아의 눈이 떨렸다.“그래서 날 지우고 싶었던 거구나…”“…이젠 못 그래요.”도윤은 USB를 집어 들며 말했다.“이 안의 진실은, 당신이 누구였든 당신을 더럽힐 수 없어요.”그날 밤
도윤은 노트북 화면을 가리키며 말했다.“여기. 이 GPS 기록 이 건물 근처에서 최근에 갱신됐어.”“그럼, 그가 여전히 이 주변에 있다는 말이야.”시아는 손끝으로 지도 위 점을 짚었다.“이 위치… 이 사람, 또 다른 사무실이 있어.”“어떻게 알아요?”“…예전에 데려갔던 적이 있어. 한 번… 내가 도망치다 붙잡혔을 때.”도윤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기 전에, 하나만 물을게요.”“뭔데요?”“그 사람을… 죽일 생각이에요?”시아는 오래도록 침묵했다.그리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아니요. 이번엔 내가 증명할 거예요.내가 괴물이 아니라는 걸. 그 사람처럼 되지 않겠다는 걸.”서울 서북부, 외곽 도로를 빠져나온 끝자락.한때 소규모 벤처 기업들의 사무실이 밀집해 있던 낡은 건물 단지가 있었다.현재는 대부분 공실이었지만, 그중 하나 4층, 창문에 검은 블라인드가 처진 사무실이 백시아가 기억하던 그 장소였다.그녀는 입술을 물고 섰다.“여기야. 처음 날 데려갔던 곳. 처음… 기억을 바꿔놓은 곳.”“기억을 바꿨다고요?”“…그 사람은 내게 늘 말했다. 있는 그대로 믿지 말라고.그리고… 내가 본 것들을 왜곡해서 다시 주입했어. 처음엔 나도 진짜 내가 누군지 몰랐어.”도윤은 그녀의 옆에서 숨을 삼켰다.그녀가 지금까지 짊어져야 했던 시간들은 단순히 고통이나 폭력만이 아니라정체성 자체를 흔드는, 끔찍한 불신의 총합이었다.건물 안은 적막했다.낡은 카펫, 벗겨진 벽지. 그리고 무엇보다, 너무 익숙한 냄새.“이 냄새… 기억나요. 세제와 피 냄새가 섞인…이상하게 멀미나는 향기.”시아는 복도를 따라 조심스럽게 걸었다.그녀의 눈이 어둠 속에서 섬광처럼 번득였다.도윤은 그녀 뒤를 따르며 미리 준비한 USB 해킹 장치를 손에 들고 있었다.“이 문 안쪽에 기록 서버가 있을 거예요.”시아는 고개를 끄덕였고, 둘은 숨죽인 채 도어락 패널을 뜯어냈다.“비밀번호는 1209.”“생일이에요?”“…내 첫 번째 살인의 날.”도윤은 숨을 고르며
“…도윤 씨.”“응.”“정말로… 다 괜찮을까요?”“당신이 괜찮다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내가 계속 옆에 있을게요.”“…고마워요. 이 말은 언젠가, 내가 더 크게 갚을게요.”“지금처럼, 이렇게만 있어줘도 충분해요.”도윤은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그리고 그렇게, 오랜 시간 엇갈린 마음과 마음이 비로소 하나의 온기를 나눴다.이른 아침이었다. 바닷바람이 유난히 잔잔했고,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은 따뜻했다.도윤은 먼저 깨어 있었고, 백시아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잠든 얼굴은 무방비했고, 오래 숨어 지내며 조심
기차가 멈춘 건 오후 세 시 무렵이었다.창밖엔 조용한 바다와, 늘어진 횟집 간판,그리고 비현실적으로 고요한 골목들이 이어지고 있었다.도윤은 스쳐 가는 마을의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 작게 숨을 내쉬었다.“여기에… 진짜 있는 걸까.”손에 쥔 쪽지는 이미 구겨지고 있었다.윤태섭이 준 그것엔 단 하나의 주소가 적혀 있었고,마치 오래된 편지처럼 더 이상 그 안에서 새로운 정보를 주지는 않았다.그럼에도 그는 왔다.왜냐면 그곳은 그녀의 마지막 ‘의지’가 닿은 곳이었으니까.버스도 다니지 않는 바닷가 마을.도윤은 트렁크가방도 없
“시아를… 지키는 사람입니다.”“…지킨다고요? 누굴?”“백시아요. 당신이 지금 그렇게 애타게 찾고 있는, 그 사람.”도윤은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남자는 미소도, 적대감도 없이 마치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태연했다.“그녀가 도윤 씨에게 돌아가길 원했다면 지금쯤 당신 앞에 있었겠죠.”“…그럼 지금은?”“숨고 싶어 했어요. 살아 있으면서도, 살아 있지 않게.”“그럼 당신은 지금 그녀를 감금이라도 하고 있다는 건가요?”남자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나는 단지, 그녀가 스스로를 지키게 해준 것뿐입니다.당
폐쇄된 모텔이었다.서울 외곽, 지하철에서도 두 번 갈아타야 닿을 수 있는 오래된 주택가 뒷골목. 밤이면 불도 거의 켜지지 않는,이름조차 바랜 간판 위에 페인트 자국만이 누군가의 손길을 증명하고 있었다.도윤은 허리를 숙여 간신히 닫힌 철문을 밀었다.낡은 문짝은 삐걱 소리를 내며 열렸다.그가 들고 온 건 작은 LED 손전등, 레코더에 저장된 GPS 로그 좌표, 그리고 백시아의 흔적을 기록한 노트.그는 203호 앞에 멈췄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방은 작았다. 오래된 침대와 벽걸이 거울, TV는 전원이 끊긴 지 오래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