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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한 이별의 끝
아득한 이별의 끝
Author: 슬이

제1장

Author: 슬이
어의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이윽고 목소리가 사시나무처럼 떨려왔다.

"태자 전하, 소신은... 도저히 못 하겠사옵니다. 연우 낭자께서는 전하와 함께 삼천 리 유배길을 버텨내시느라 이미 몸이 만신창이이옵니다. 여기서 심장의 피까지 뽑으신다면, 설령 깨어나신다 한들... 그 고통에 숨이 끊어지실 것이옵니다..."

"그만."

서제겸의 목소리가 어의의 말을 가차 없이 끊었다.

그의 눈빛은 얼음보다 차가웠다. 그 시선 하나에 방 안 공기까지 얼어붙는 듯했다.

"네가 못 하겠다면."

그가 어의의 손에서 단검을 낚아챘다.

"내가 하면 될 일이다."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칼끝이 그대로 강연우의 심장을 향해 내리꽂혔다.

"윽..."

침상 위, 다 꺼져가는 불씨 같던 여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으나 침소 안의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

울컥, 선혈이 쏟아졌다.

서제겸이 그릇을 기울여 재빨리 피를 받아냈다.

그릇이 가득 차자, 그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냉정하게 침전을 나섰다.

어의 역시 비틀거리며 그 뒤를 쫓았다.

쾅.

무거운 문이 닫히고 멀어지는 발소리가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고요해진 침상 위에서, 강연우가 천천히 눈을 떴다.

살이 찢기는 통증에 관자놀이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비명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그녀는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어 삼켰다.

'아파. 너무 아파...'

아무도 몰랐다. 그녀가 애초에 잠든 적이 없었다는 걸.

반 시진 전, 서제겸이 손수 가져온 약탕. 그 한 모금을 삼키자마자 속이 뒤틀리는 위화감이 느껴져 그녀는 몰래 다 게워냈었다.

'마비산...'

'나를 재워놓고 심장의 피를 뽑아, 모설희를 살리려 했던 거였어.'

강연우는 떨리는 손을 들어 피가 뿜어져 나오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손가락 틈새로 붉은 피가 끊임없이 배어 나와 새하얀 옷을 붉게 물들였다.

우습기 짝이 없었다.

삼 년 전, 태자 서제겸이 황제의 노여움을 사 변방으로 유배당했을 때, 조정의 대신들은 앞다투어 그를 외면했었다. 왕손귀족들 역시 그를 독사 보듯 멀리했고, 죽마고우이자 정혼녀였던 모설희조차 연좌될까 두려워 만인이 보는 앞에서 파혼을 선언했었다.

그때 그를 따라나선 건 강연우, 오직 그녀 하나였다.

집안의 반대를 뿌리치고, 삼천 리 유배길에 함께 올랐다.

산적이 칼을 휘두르면 몸으로 막아섰다. 눈보라 치는 겨울, 먹을 게 없으면 제 몫을 덜어 그에게 먹였다. 그가 고열에 시달리던 밤엔 제 손목을 그어, 그 피로 약을 지어 먹인 것도 그녀였다.

그와 함께 썩은 밥을 나눠 먹고, 짚더미 위에서 함께 잠들며, 삼천 리의 모진 풍파를 온몸으로 버텨냈다.

하지만 동궁의 자리를 되찾은 지금, 모든 것이 변해버렸다.

모설희가 궁문 앞에 꿇어앉아 눈물 몇 방울로 하소연하자, 그의 마음은 단숨에 녹아내렸다. 그리고 끝내, 강연우를 사지로 몰아넣으며 심장의 피까지 바치게 만들었다.

잠시 후, 강연우는 비틀거리며 침상에서 내려왔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칼날 위를 걷는 듯 가슴의 상처가 찢어질 것처럼 아팠지만, 그 고통도 속에서 일렁이는 아픔에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한편, 모설희의 처소는 대낮처럼 환했다.

반쯤 열린 창문 너머로 끔찍한 광경이 강연우의 눈에 들어왔다.

서제겸이 보물이라도 다루듯 조심스럽게, 강연우의 피가 담긴 그릇을 모설희의 입가로 가져가고 있었다.

"아파요..."

모설희가 눈을 감은 채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

"제겸 오라버니, 저 너무 아파요..."

순간, 서제겸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이윽고 그가 억눌린 목소리로 낮게 속삭였다.

"금방 나아질 것이다. 조금만 참거라."

피를 다 마신 모설희가 그의 품에 안겼다. 아니나 다를까 안색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곧 그녀가 부스스 눈을 뜨자마자, 애틋한 서제겸의 눈빛과 마주쳤다.

"제겸 오라버니!"

모설희가 몸을 떨며 그의 옷소매를 다급히 붙잡았다.

"절 용서해주신 건가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때는 제가 너무 나약해서, 그 고생을 견딜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후회했어요, 정말 뼈저리게 후회했다고요! 오라버니가 절 버리신다면, 전 차라리 죽어버릴래요!"

모설희가 벽으로 머리를 들이받으려는 순간, 서제겸이 그녀를 붙잡아 침상에 눕히고는 거칠게 입을 맞췄다.

다정함 따위는 없는 입맞춤이었다.

지난 삼 년간 쌓인 분노와 고통, 그리고 어찌할 수 없는 갈망이 뒤섞인, 난폭한 감정의 배설이었다.

그는 그녀를 집어삼킬 듯 탐닉했다. 마치 제 살과 뼈 안에 욱여넣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격렬한 입맞춤 끝에 그가 짓눌린 목소리로 낮게 읊조렸다.

"모설희. 내 마음을 볼모로 잡고 이렇게 방자하게 굴다니."

"내가 어찌 널 버리겠느냐. 어찌 널 원하지 않겠어. 이미 어제 아바마마께 청을 올렸다. 연우와 같은 날 동궁으로 들이겠다고. 그 아이는 태자비가 되고, 너는 측비가 될 것이다."

"측비요?"

모설희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망울로 그를 바라보았다.

"오라버니는 제게 평생 단 한 사람만을 곁에 두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연우가 나에게 바친 희생이 너무 크다. 내 손으로 그 아이를 저버릴 수는 없다. 하지만 설희야, 내 마음속 유일한 정인은 오직 너뿐이라는 것만 기억해다오."

말을 마친 서제겸이 모설희를 품에 안고, 그녀의 쇄골 위로 입술을 내리눌렀다.

그 눈빛엔, 삼 년간 눌러왔던 애증과 그리움이 한꺼번에 쏟아지고 있었다.

강연우는 얇은 휘장 너머로 뒤엉키는 두 사람의 그림자를 멍하니 응시했다.

그 순간, 가슴의 상처가 혹독하게 아려와 그녀는 결국 몸을 웅크렸다.

상처를 움켜쥔 손가락 사이로 붉은 피가 바닥에 뚝, 뚝 떨어졌다.

몸이 찢기는 고통도, 심장을 수천 개의 화살이 관통하는 이 배신감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서제겸...'

'그 아득했던 삼천 리 유배길 내내, 당신은 날 사랑한 적이 없었구나.'

'그렇다면 나도, 굳이 태자비 자리에 연연할 이유가 없지.'

십 년을 뼛속까지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지독했던 사랑을 내려놓는 데는, 단 한 순간이면 충분했다.

강연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걸어가는 회랑 위로 뚝뚝 떨어진 선혈이 핏빛 꽃처럼 처연하게 피어났다.

길을 지나던 궁인들이 피투성이가 된 그녀를 보고 경악하며 비켜섰지만, 강연우는 그것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황제의 침전을 향해 곧장 걸어갔다.

"연우 낭자?"

문을 지키던 태감이 온몸이 피로 물든 그녀를 보고 소스라쳤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소인 강연우, 폐하를 뵙고자 하옵니다. 양국의 국교가 걸린 중대사이오니 지체 없이 아뢰어 주십시오!"

곧 묵직한 문이 열렸다.

어서각 안, 무릎을 꿇고 앉은 강연우를 내려다보는 황제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연우야, 네 몰골이 어찌..."

그때, 강연우가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무겁게 고개를 숙였다.

"북적(北狄)에서 황실의 여인을 아내로 청해왔다 들었사옵니다. 소인이 자원하여 그 땅으로 시집가 화친을 도모하겠사오니, 부디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변방의 안녕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소인이어야 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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