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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Author: 슬이
강연우가 의식을 되찾았을 때, 눈앞은 온통 흐릿했다.

눈을 깜빡여봐도 시야를 짓누른 핏빛 안개 탓에 마치 두꺼운 비단 장막을 쳐놓은 듯 사방이 아른거렸다.

그녀가 깨어난 걸 확인한 청음이 침상가로 단숨에 엎어졌다. 숨이 턱 끝까지 막히도록 오열하는 목소리가 처소에 울려퍼졌다.

"아가씨! 드디어 깨어나셨군요! 어의 말로는… 한 뼘만 더 깊었어도 아가씨의 눈이 완전히…!"

뒷말은 잇지 못했으나 강연우는 직감할 수 있었다.

하마터면 실명할 뻔했다는 것을.

그녀는 천천히 손을 들어 눈가를 감싼 희디흰 붕대를 짚었다. 그러다 문득, 실소를 터뜨렸다.

"청음아, 울지 마라."

"아가씨, 아프지 않으십니까?"

청음의 눈물이 강연우의 손등 위로 사정없이 후드득 떨어졌다.

"차라리 아프시면 소리 내어 우십시오. 제발 참지 마시고…"

강연우는 침상 천장에 수놓인 원앙을 멍하니 응시했다. 의식을 잃기 직전의 그 잔인한 잔상이 뇌리를 스쳤다.

서제겸이 검을 뽑아 거문고를 내리쳤고, 쪼개진 오동나무 파편이 그녀의 눈을 꿰뚫었다. 그리고 그는,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은 채 모설희를 품에 안고 쏜살같이 멀어졌다.

심장이 난도질당한 듯 아려왔으나 이상하게도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이윽고 그녀가 나직이 읊조렸다.

"운다 한들, 나를 가엾게 여겨줄 이가 누구겠느냐."

청음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혼절할 듯 서럽게 울어대던 바로 그 순간.

처소의 육중한 문이 거칠게 열리며 서제겸이 성큼 걸어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본 청음은 차마 이성을 유지하지 못했다.

그녀는 맹렬하게 서제겸의 발치로 기어가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쿵, 쿵...

소리가 날 때마다 핏방울이 배어 나왔다.

"태자 전하! 제발 저희 아가씨를 한 번만 가엾게 여겨주십시오!"

"과거 전하를 따라 그 험한 유배길을 자처하셨을 때, 아가씨께서는 상서 어른과 부인께 무려 아흔아홉 대의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채찍이 내리칠 때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피가 튀었습니다!"

"상서 어른께서는 지금까지도 아가씨와 의절하시고, 평생 얼굴도 보지 않겠다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 아가씨에겐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전하 한 분뿐이란 말입니다!"

서제겸은 그 자리에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가 침상에 누운 강연우를 응시했다. 붕대에 덮인 눈이 떠 있는지 감겨 있는지조차 알 수 없을 만큼 그녀는 미동도 없었다. 핏기가 완전히 가신 입술은 서늘한 백지보다 더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의 머릿속으로 유배길의 어느 비바람 치던 밤이 벼락처럼 스쳤다.

온몸이 타들어 가는 고열 속에서도 강연우는 마지막 남은 마른 옷가지를 그의 어깨에 덮어주곤 했었다.

그때 왜 이 지옥 같은 길을 따라왔느냐 물었을 때, 그녀는 하얗게 질린 입술로 그리도 환하게 웃었었다.

'전하께서 여기 계시니까요.'

그녀가 자신을 따르기 전, 집안에서 무려 아흔아홉 대의 태형을 견뎌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순간, 서제겸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서둘러 침상가로 다가가 강연우의 얼음장 같은 손을 다급히 감싸 쥐었다.

"연우야, 난 정말... 거문고 파편이 네 눈을 찌를 줄은 몰랐다."

목소리가 물기 없이 쩍쩍 갈라졌다.

"그땐 그저 그 배 속의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순간 실언했음을 깨달은 서제겸이 허둥지둥 말을 바꿨다.

"내 말은, 그 아이가 살아있어야 쓸모가 있다는 뜻이다."

강연우는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 서린 황망한 균열을 고요히 바라보았다.

참으로 가소로운 노릇이었다. 서제겸의 거짓말은 이제 앞뒤조차 맞지 않았다.

"앞으로는 절대로, 네게 이런 상처를 주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가 손을 들어 강연우의 창백한 뺨을 쓸어내리며 맹세하듯 읊조렸다.

"조정의 공무도 며칠간 미뤄두었으니 오직 너 한 사람만을 보살피겠다."

이어진 나날 동안, 서제겸은 그간의 죄책감을 전부 씻어내려는 듯 애를 썼다.

공물로 올라온 남해의 귀한 명주 중 가장 영롱하게 빛나는 진주들만 골라 불을 밝히는 등을 만들어 그녀의 머리맡에 두었다.

"이러면 밤이 되어도 네 처소가 어둡지 않을 터이니."

탕약의 쓴맛에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면, 귀한 다과 속에 약환을 교묘히 숨겨 어린아이 달래듯 제 손으로 직접 먹여주기까지 했다.

"마지막 한 알이다. 착하지, 어서 삼키려무나."

그 와중에 모설희의 시녀가 눈물을 흘리며 서제겸을 찾은 게 무려 세 차례였으나, 그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내쳤었다. 심지어 처리해야 할 상소문까지 강연우의 처소로 모조리 들고 와 그녀의 곁을 지켰다.

그러나 강연우의 심장은 이미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황량한 눈밭이 되어 있었다.

그 어떤 다정함이 쏟아져도, 단 한 줄기의 온기조차 피어오르지 않았으니.

그녀는 그저 기괴할 정도의 침묵 속에서 묵묵히 혼례복을 수놓을 뿐이었다. 바늘귀가 천을 뚫고 지나갈 때마다 마치 제 심장에 박힌 고통을 한 땀 한 땀 기워 넣는 듯했다.

서제겸이 그녀의 등 뒤에서 안아 오며 귀밑볼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나직하게 웃었다.

"매일같이 혼례복만 쥐고 있다니. 이리도 빨리 나의 아내가 되고 싶어 안달이 난 게냐?"

강연우의 손끝이 미세하게 멈추었다.

이내 그녀가 평온하게 대꾸했다.

"예, 참으로 안달이 났습니다."

'전하의 곁을 떠나갈 그날이, 그리도 기다려집니다.'

이 혼례복의 마지막 자수가 완성되는 날.

그날은 그녀가 이 동궁을, 그리고 서제겸을 철저히 떠나는 날이 될 터였다.

그날 저녁, 수라를 드는 서제겸의 안색은 눈에 띄게 산만했다.

처소 밖에서 모설희의 시녀가 또다시 청을 올리며 처량하게 울어대고 있는 탓이었다.

강연우는 들고 있던 젓가락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전하, 그만 가보십시오."

"가지 않을 것이다."

서제겸은 급히 새우 하나를 정성스레 발라 그녀의 밥그릇 위에 얹어주었다.

"지난날 내 너를 세심히 살피지 못했다. 모설희에게는 그저 복수하는 것뿐이야. 그 배 속의 아이만 취하면 그만이니 무릇 내가 머물 곳은 오직 네 곁뿐이다."

강연우는 밥그릇에 덩그러니 놓인 새우를 그저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곁을 지키겠다 속삭이면서도 정작 그녀가 새우를 먹으면 온몸에 발진이 일어난다는 사실조차 저 사내는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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