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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자다가 불려 나갈 일도, 차가운 철 침대 위에서 고통받을 일도… 사람을 죽이는 일도… 피를 볼 이유도, 아플 이유도 더 이상 없는데…."
김정우가 살짝 말을 멈추다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종종 팔도 다리도 아파요."
"늙어서 그런 거야. 별 생각 마."
"… 몇 년 전에 아이들과 함께 전쟁 영화를 봤습니다. 물론 실제와는 거의 달랐지만… 저, 그걸 보고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고………."
손톱으로 손가락 마디를 후벼파며 말하는 김정우의 모습은 불안하고 불안정해 보였다.
"그 지옥 같은 일상이 그립다니….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생각이잖아요? 그런데 전 말입니다…."
피가 후두둑 떨어지자, 김정우가 고통에 인상을 살짝 쓰며 안도했다.
"하루에 2시간 자도, 리더에게 매번 혼이 나고, 형님께 놀림당하여도… 매일 피비린내를 맡아도……… 그때가 조금 더 살아있다고…… 느낍니다. 살아갈수록 더욱 더."
"김정우."
김정우가 양손으로 머리를 잡으며 고통스러워했다.
"알아요, 압니다! 하지만 솔직히 지금은 죽은 송장과 다를 바 없다고 느낍니다!"
괴로운 듯, 후벼 파여 피가 나는 손을 닦지도 못하고, 자신의 얼굴을 감싸며 말하는 김정우에게 무어라 말할 수 없었다. 김정우가 말하는 저 인생 속에는 분명 이시안도 함께인데,
그저 꿈속의 이야기를 들은 것만 같은 착각 같았다.
분명 군데군데 기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에서 '병기'는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거란 '희망'을 믿고 싸운다는 게… 참, 우스웠습니다. 실상은 그딴 게 아닌데."
이시안이 김정우에게 다가가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옷소매를 아무렇게나 찢어 김정우의 손을 칭칭 감았다. 그 솜씨는 예나 지금이나 허술해 김정우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멍하니 칭칭 감긴 손을 바라봤다.
"다음에 올 때까지 풀지 마라. 확인할 거니까. 명령이야."
"…… 그냥 풀리면?"
"처맞는 거지."
김정우가 볼을 긁적이며 벌써 풀리려고 하는 낡은 천 조각을 자신의 손으로 더욱 강하게 감았다.
"아, 누님. 참고로 그 영화에 나오는 누님은 굉장히 정의감이 넘칩니다."
"나 원래 정의감 넘치지 않았나?"
김정우가 잠시 침묵했다.
"저는… 두뇌파로 나오고, 형님이 굉장히 추남으로 나옵니다."
대충 더러워진 바닥을 발로 쓱쓱 밀던 이시안이 헛웃음을 쳤다.
"뭐? 진짜 웃기네."
"그리고 리더랑 큰형님이 죽…마고우?로 나옵니다."
"죽마고우?"
"가장 친한 친구 같은 거라고 합니다."
그 말에 이시안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 영화 순 구라 아냐?"
***
"아, 진짜!!!"
거진 2시간, 2시간 만에 어슬렁어슬렁 나타나는 이시안에 화가 났다.
박시온은 이시안때문에 움직이지도 못하고 2시간 동안 집 지키는 개처럼 꼼짝도 못 하고 있었는데.
"뭔데? 왜 그러는데?"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잖아요!"
"아."
"아~ 아!?"
"그래도 건덕지는 구해왔어. 준비해. 가자."
"……… 버, 벌써요?!"
2시간의 대가는 달았다.
"뭐어~!? 바로 갈 거야!?"
그리고 양민아는 퍽 섭섭한 표정을 했다.
"바로 못 갈 이유가 뭐 있어?"
"아쉬워서 그러지. 좀 더 놀다 가."
투정 부리자, 이시안은 김만철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김만철은 아무 말도 못하고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기시감.
그래, 그 모습에 박시온이 이곳에서 느꼈던 미묘한 기류를 이곳을 떠날 때쯤이야 눈치챘다.
"됐어, 정우하고도 이미 인사했어."
"… 그렇구나."
"오늘 저녁은 고기인데도?"
"지금 내려가야 해."
"내일 일찍 가면 되잖아."
"왜 이렇게 질척거려? 짜증 나."
이시안이 결국 짜증을 내자, 양민아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리고 이시안의 고갯짓에 박시온이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듯이 재빠르게 가방을 챙기고 나왔다.
이시안은 예나 지금이나 한번 결단했으면 무르는 법이 없었다.
아니, 물러도 까마귀 부대에는 해당 사항이 없기에 더는 말을 얹힐 수 없었다.
"김정우는 걱정하지 마."
이시안은 이해하지 못할 말을 툭 던지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렇게 떠났다.
***
두 사람이 떠난 다음 날, 아침부터 아이들의 소란에 김만철이 텃밭을 돌보다 급히 나오자 새벽같이 나온 김정우가 꾸벅 인사하며 나타났다.
"정우? 왜? 시안이네는 어제…."
"압니다."
"아…?"
"그… 혹시, 제가 할 일은 없겠… 을까요?"
김정우의 손에 이상하게 칭칭 감긴 천 조각은 어제 소매가 사라진 이시안의 옷의 천과 같았다. 그것을 눈치챈 김만철이 눈이 휘게 웃었고, 뒤늦게 나타난 양민아가 헤드락을 걸며 김정우에 매달렸다.
"당연히 있지! 자식아!"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생긴 거야?"
그 말에 김정우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것은 '병기'로서 지킬 것도 숨길 것도 많은 김정우의 버릇임을 알기에 더 캐묻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이시안을 만난 이후, 무언가 개운해 보이는 모습은 마음 한구석의 무거운 돌덩이가 빠진 느낌이었다.
"아, 대장님. 부대장님."
"어허! 이제 편하게 형, 누나라고 부르라니까."
"그게… 바다라는 곳 가보셨습니까?"
"바다?"
"그곳에는 거대한 도넛을 끼고, 물을 타고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기계가 있다고 해요."
"엉?"
"기대되네요."
김정우가 어색하지만 미소를 짓는 모습에 양민아가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괜히 팔꿈치로 멀쩡한 싹을 뽑는 김정우의 어깨를 콕콕 찔렀다.
"그럼 오늘 아침은 정우가 좋아하는 고기찜 먹을까?"
"좋은데?"
"기대하겠습니다."
"좋아, 솜씨 발휘 좀 해볼까."
양민아의 말에 아이들도 환호하며 꺄르르 웃었다.
언제나 꿈꿔왔다. 전쟁이 끝난 이후,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함께 뒤섞여 사는 삶을.
그 꿈에 들어오기 꺼렸던 소중한 아이가, 겨우 용기 내 한 발짝 들어섰다.
겨우 한 발짝이지만 그 용기가 너무 기뻐서 김만철이 흙을 닦아내는 척 눈물을 훔쳤다.
"아하하하! 맞아. 그땐 그랬지…. 봉수엽 그때 기억나? 다리만은 자르지 말아 줘. 라고 빌었잖아!!!""맞아, 맞아! 나 그래도 속도로 먹고살던 놈이었잖아! 다리만은 살려야지!"최윤수가 깔깔 웃으며 말하자, 봉수엽도 뭐가 재밌는지 손뼉을 치며 맞장구를 쳤다. 그 모습에 박시온이 뒷걸음질을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암만 생각해도 제정신으로 보이지는 않았다.그나마 제정신으로 보이는 주 학이 빨리 이시안을 데리고 이곳으로 왔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랐다.***"안용하세 국밥?"주 학이 이시안이 건넨 쪽지를 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했다.붕대를 다 감은 이시안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주 학은 고개를 끄덕이며 꽤 긍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에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조금 기대했다. "알아볼 게.""알아봐야 해?""아무리 나라도 이 넓은 지역에 있는 가게를 바로바로 떠올릴 수는 없어.""이곳에 있다는 보장은 없어.""그것도 포함해서."주 학이 꽤 믿음직한 눈빛을 하자, 이시안이 피식 웃으며 주 학의 어깨를 툭 쳤다."얼마나 기다려야 되는데?""하루나 이틀.""오."전혀 놀라지 않은 표정으로 감탄사를 뱉는 모습에 주 학이 미소 지었다."지금은 그런 정보 따위 쉽게 얻을 수 있어. 굳이 발품 뛰지 않아도.""무슨 소리?"눈을 치켜뜨며 묻는 이시
"저, 정말요?""네. 인수 씨가 안내해 줄 거예요.""최인수입니다. 잘 부탁해요."조금 내키지 않는 듯해 보였지만, 안내를 맡은 최인수가예의 바르게인사했다. 그리고 그 표정이 좋지 않은 이유는 박시온의 옆에 덩그러니자리 잡은이시안때문인 듯했다."아니, 치료 받으라니까요?!""그냥 두세요. 두 눈으로위치 파악을하지 않으면 말을 듣지 않을 테니까요.""그래."주 학은 언제부터인가 자연스럽게이시안을대변하고 있었다. 그리고이시안은그런 주 학을 유달리 편하게 대했다. 그것은 까마귀의 김정우와는 결이 조금 달랐다.그것이 이상하고 미묘했다.그래서 박시온은 짜증이 났다."일단 옷부터 살 거예요. 꿉꿉해. 새 옷 사고 싶어요.""그래.""무슨 옷 입고 싶어요?""아무거나.""아 정말! 입고 싶은 스타일 정도는 있을 거아니에요?!""없는데?"박시온이이시안에게유달리 짜증을 내며 앞서 걷는 모습에 최인수가 괜히 긴장하며 주 학을 바라봤다. 무엇을 걱정하는 건지 주 학은 예상하는 건지 그저 괜찮을 것이라 그 등을 토닥이며 두 사람 뒤를 따라가라고밀어 넣었다.최인수가 영 내키지 않는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머리를 긁적이고는 두 사람 뒤를 따라나섰다."그래그래,어때 보여?"최인수와 함께 세 사람의 실루엣이 보이지 않게 되자, 자연스럽게
박시온이 괜히 시선을 힐끗 피하며 죄 없는 스테이크를 포크로 쿡쿡 찔렀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주 학이 잘게 한숨을 쉬었다."… 그렇군요.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재건 연합에 대해서는 들은 적 없어요.""아, 거기서부터야?""그건 어떻게 보면 당연할지도 몰라요."주 학은 어색한 공기가 맴도는 이곳에서 담담하게 말했다."전쟁 당시, 적군이었거든요."그 고백에 박시온이 질겁한 표정으로 혹시나 모를 위협에 대비한 건지 포크를 칼처럼 들고 벌떡 일어서자, 최윤수가 그 모습을 보며 테이블을 쾅쾅 치며 웃기 바빴다.그 모습은 까마귀의 양민아와 비슷했지만 달랐다."아니~ 뭐 그렇다고 지금 당장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는다고~? 걱정 마. 꼬맹이.""그, 그, 그렇지만!!! 그, 그걸!!! 아, 아니 애초에! 그, 그럼 이,이시안씨는…!!!"박시온의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그것은 말로 나왔다."우리는이시안씨에게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걱정할 필요 없어요.""… 네?""쭈~ 학아!!!이시안이랑똑같이 생긴 걸 주웠다며?!"그 이유가 나오기도 전에, 시끄러운 남자 하나가 작은 남자를 대동해 벌컥 문을 열고 나타났다. 그 시끄러움에 놀란 박시온이 몸을 부르르 떨었고, 주 학이 이마를 짚으며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아파요?"
눈이 휘둥그레지며 저도 모르게 멈춘 이시안을 끌어안아 멈춘 박시온이 벌렁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킬 새도 없이 온몸이 떨린 채로 이시안의 손을 강하게 때려 총을 떨어뜨리게 했다. 이번에는 쉽사리 총을 떨어뜨린 이시안이 의아함에 눈만 깜빡이며 그 자리에 멈춰 아무 말 하지 않았다."너… 왜 여기 있어?""미쳤어요!? 살인자가 될 거야!?""뭐?"이시안은 이 상황이 그저 의아했다.그것은 주위를 둘러싼 경찰도, 사건을 벌이던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이시안은 그저 날뛰고 있는 것을 제거하려고 했을 뿐이다. 그것이 왜 잘못됐는지, 무엇이 잘못된 행동인지 인지하지 못했다. 중년의 남성은 자신에게 쏠렸던 관심을 뺏기자 분한 건지, 인질의 머리에 처박혀 있던 총구를 박시온으로 향해서는 망설임 없이 쐈다.'탕'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울린 총성에 박시온이 눈을 질끈 감았지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윽…!?"그리고 박시온이 눈을 뜨자, 이시안의 오른쪽 어깨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이, 이시안 씨!"놀랐다.병기가 피를 흘리고 있다.이시안이 피를 흘리고 있다.순간 박시온의 머리에 '똑같은 사람'이라고 말했던 김만철의 말이 스쳐 지나가며 당황스럽게 이시안을 끌어안아 자신의 옷으로 피를 감쌌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괘, 괜찮아요!?"자신은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게다가 이런 상처는, 이런 피는 처음 본다.
"으으… 배고파요."오랜 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이동했더니, 박시온이 허리와 배를 움켜잡으며 어정쩡한 자세로 결국 불편을 토했다. 그 말을 듣던 이시안이 생각 보니 마지막으로 먹었던 것이 기차 안에서의 계란 한 알이 전부였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뭐 먹을래?""아니, 이시안 씨는 뭐 먹고 싶은 거 없어요? 왜 맨날 내게만 물어봐?""난 물만 있어도 되는데."이것이 '병기'의 위엄인가?박시온이 인상을 찌푸리며 괜한 소리를 했다면 툴툴거리며 기차역에서 나서자, 처음 보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여태 왔던 도시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운동화로 화려한 패턴의 바닥을 두드리자, 딱딱한 벽돌이 탁탁 소리를 내며 깔려있었다.어찌 되었든 촌구석보다야 낫겠지.박시온이 식당을 찾기 위해 한 발짝 내딛는 순간, '탕' 소리가 하늘에서 울렸다."악!"동시에 자신의 팔을 강하게 당기는 힘에 이끌려 속절없이 이시안의 품에 묶였다."무, 뭐예요!"당황스러움에 얼굴이 새빨개진 박시온이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지만, 이시안의 팔 하나를 뿌리치지 못했다."떨어지지 마."순식간에 빈 건물 사이로 몸을 숨긴 이시안은 날이 선 목소리로, 주위를 경계하는 눈빛을 했다. 지금 이렇게 된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굳이 묻지 않아도 눈앞에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대피하는 행동은 영화에서 보았고 분명 아까 들렸던 소리는 '총성'이 틀림없었다.총성이라는 단어를 인지하자 몸의 근육이 빳빳하게 팽창되는 기분 나쁜 고통이 몸을 지배
김정우가 김만철의 앞을 막아섰다.때에 따라서 어떤 형태의 불똥이 튈지 몰랐다.아직 어린아이임에도 불구하고 병기는 봐주는것 따위는없었다. 달려드는 아이의 목덜미를 낚아채 그대로 꺾어버렸지만, 훈련받은 아이의 몸에는 폭탄이 있던 건지 고통을느낄 새도없이 몸이 뜨겁게 달아올라 그대로 터져버렸다.규모가 작기는 했지만, 어린아이의 몸이터진 거다. 온 사방으로 흩어진 진득한 피와 함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시신과, 정면에서의 화상은피한 건지칼에 관통당한 손바닥에서 칼과 함께 떨어진 시체의 팔을 보며 혀를 강하게 찼다."후…."김만철의 위치와이시안의위치 사이의거리는 꽤 멀었다.그런데도정확히 살기가 담긴이시안의눈과 마주친 김만철이 속이 뒤틀리는 느낌과 그 살의에 눌려 체면을 생각하지 못하고 토악질을 했다.그 모습에 김정우가 긴장을 늦추지 않고 김만철의 앞을 더욱 막아 감싸며이시안을바라보고 있었다."누님, 부대에 피해는 없습니다.""… 부상자 셋. 거기에서윤재가있었어. 죽었다면?"그 당시김만철은이시안을잘 몰랐다. 하지만 적어도 평소 김정우를 어떻게 대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저이시안은그 김정우에게도 살의를 내뿜고 있었다. 이 상태는 위험하다는 신호인지 김정우도 긴장한 채로 마른침을 삼키며 언제든지반격 태세를할 수 있도록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