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5화

Author: 비담
그들이 사실을 왜곡해도 강루인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약자를 괴롭히는 사람들에게 논리적인 사고를 기대하는 건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일이었으니까.

“살려줘...”

연못에 빠진 남학생이 수영을 할 줄 몰라 버둥거리고 있었다.

연못가에 있는 귀티 나는 소년 소녀들은 아무도 구하러 뛰어들지 않았고 오히려 명령하듯 말했다.

“빨리 가서 구하지 않고 뭐 해요? 그쪽이 밀어버리는 걸 우리가 다 봤어요. 찬우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진씨 가문에서 절대 그쪽을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강루인은 물속에서 발버둥 치는 남학생을 보다가 결국 움직였다.

마지막 한마디가 그녀에게 큰 압박감을 주었다. 만약 이 학생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들의 증언에 따라 미성년자 살인범이 될 수도 있었다.

그들은 법 따위 안중에도 없는 녀석들이라 정말로 그렇게 할 수 있었다.

만약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좋게 넘어가든, 결백을 증명하든, 아니면 사과하든 결국 버려지는 건 그녀일 것이다.

주영도는 ‘살인범’인 아내를 원하지 않을 테니까.

강루인은 그들의 뒤에 있는 권력을 감당할 능력이 없었다.

그녀의 시선이 주초원에게 향했다. 주초원은 재미있다는 듯 그녀가 괴롭힘당하는 과정을 즐기고 있었다.

강루인은 가방을 연못가에 놓고 신발을 벗은 뒤 남학생을 구하러 물 안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번에도 학생들의 악랄함을 과소평가하고 말았다. 구조를 기다리고 있던 남학생이 갑자기 미꾸라지처럼 날렵하게 움직이더니 그녀를 물속으로 끌어내렸다.

순간 방심한 강루인은 물을 크게 마시고 말았다.

“켁켁...”

남학생의 얼굴에 비열한 미소가 번졌다.

강루인은 헤엄쳐 올라가는 남학생을 보며 스스로를 비웃었다.

‘나도 참 어리석었지. 왜 쟤가 정말 수영을 못 할 거라고 믿었을까?’

그녀가 책임을 져야 하는지는 둘째치고 정말로 사람이 죽는다면 학생들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강루인이 물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그들은 아직 마음껏 즐기지 못한 듯 돌멩이를 집어 그녀에게 던지기 시작했다.

튀어 오르는 물방울이 그녀의 눈을 가려 제대로 나갈 수가 없었다.

“초원아, 너희 집 도우미는 에르메스 가방을 들고 다녀? 혹시 훔친 거 아니야?”

주초원의 예쁜 얼굴에 혐오감이 나타나더니 강루인이 바닥에 놓아둔 가방을 발로 걷어차 연못에 빠뜨렸다.

그녀는 차라리 강루인이 훔친 것이길 바랐다. 그러면 경찰에 신고해서 잡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 가방은 모두 주영도의 돈으로 산 것이었다.

거머리처럼 주씨 가문의 피를 빨아먹는 명목상의 새언니를 주초원은 무척이나 경멸했다.

‘오빠가 사고만 당하지 않았어도 네까짓 게 내 새언니가 될 수 있었을 것 같아?’

“짝퉁이야.”

가방을 말하는 건지, 강루인을 말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다. 새언니의 자격으로 학부모회에 참석하는 게 아니라 도우미였다. 도우미가 어떻게 학부모회에 올 자격이 있냐고 묻는다면 그건 주초원이 원해서였다.

강루인이 오기 싫어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들의 놀림거리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처음 주초원의 학부모회에 참석했을 때 강루인은 할머니가 생각했던 것처럼 드디어 가족으로 인정받은 줄 알고 몹시 기뻐했었다.

하지만 기다리고 있었던 건 인정이 아닌 조롱이었다. 주초원을 만나자마자 아무런 예고도 없이 물벼락을 맞았다.

그때 그 모습이 정말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강루인의 마음도 돌덩이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서 사람들 앞에서 시누이에게 망신을 당하니 너무나 괴로웠다.

이마에 갑자기 통증이 느껴졌다. 그들이 던진 돌에 맞은 것이었다.

“하하, 드디어 맞았어.”

돌을 던진 한 학생이 신이 나서 손뼉을 쳤다.

연못가에 있는 학생들을 보던 강루인은 자신뿐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이 사회가 안타까웠다.

곧 서른이 되는 그녀지만 미성년자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게다가 이런 쓰레기들이 나중에 사회에 나가면 더 많은 사람들을 괴롭힐 것이다. 부모가 돈이 많아 뒷감당을 대신 해주니 아무 걱정이 없었다.

주영도는 강루인의 진심을 짓밟았고 여동생은 강루인의 자존심을 짓밟았다. 누가 친남매 아니랄까 봐.

강루인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주영도를 버리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시누이에게 잘 보일 필요가 있겠는가?

멀리 돌아 물 밖으로 나온 강루인은 곧장 그녀에게 돌을 던진 여학생에게 다가가 두말없이 물속으로 빠뜨리고는 머리채를 잡았다. 여학생이 물을 들이켜 계속 캑캑거렸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강루인이 이렇게 간덩이가 부었을 거라 생각지 못한 학생들은 크게 놀란 눈치였다.

그녀는 주초원 일행을 쏘아보면서 말했다.

“재밌어?”

다친 상처에서 피가 흘러내려 눈에 들어간 바람에 시야를 가렸다. 얼핏 보면 악귀가 복수하러 온 듯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주초원도 이토록 흉악한 모습의 강루인을 처음 봤다. 평소에는 얌전해서 누구에게나 괴롭힘당하던 만만한 존재였는데.

“강루인, 미쳤어? 당장 그 손 놓지 못해?”

강루인이 주초원을 째려보았다.

“다 놀았어?”

주초원은 그녀 때문에 체면이 깎였다고 생각하여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우리 집에서 쫓겨나고 싶어?”

‘감히 나한테 반항해? 오빠한테 다 일러바칠 거야.’

강루인은 그제야 손을 놓고 일어섰다.

“더는 그 집에 있고 싶지 않아.”

그녀도 순간 이성을 잃고 학생에게 손을 대고 말았다.

물에 빠졌던 여학생은 연못가에 엎드린 채 계속 기침하며 숨을 헐떡였다. 친구들도 그제야 여학생을 끌어올렸다.

강루인은 주초원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둘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 나 싫어하잖아. 재간 있으면 네 오빠한테 말해서 나랑 이혼하라고 해.”

주씨 가문에서 그녀가 사라지길 가장 바라는 사람이 바로 주초원이었다.

주영도는 여동생을 매우 아꼈다. 만약 주초원이 옆에서 부추긴다면 이혼이 더 빨리 진행될지도 모른다.

강루인은 그녀가 성공하길 바랐다.

주초원이 혐오 가득한 얼굴로 가까이 다가온 강루인을 밀어냈다.

“내가 못 할 것 같아?”

강루인은 한 걸음 물러서서 도발적인 눈빛으로 말했다.

“꼭 성공해야 해. 안 그러면 널 무시할 거야.”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주초원이 남에게 무시당하는 걸 가장 싫어한다는 것을.

아직 물에 가라앉지 않은 가방을 건져 올린 강루인은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빌어먹을 녀석. 이렇게 비싼 가방을 걷어차다니. 물에 젖은 가방을 중고로 팔 수 있나?’

할머니에게 그녀가 잘 지내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오늘 일부러 이 가방을 들고 나왔다. 손해가 너무 컸기에 나중에 주영도에게 보상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멀어져가는 강루인의 뒷모습을 보며 주초원의 친구가 말했다.

“초원아, 너희 집 도우미 너무 나대는 거 아니야? 어떻게 너한테 저딴 식으로 말할 수 있어? 잘려도 괜찮다는 거야?”

오늘따라 특히 더 건방졌다. 늘 괴롭힘만 당했는데 이렇게 격렬하게 반항하는 모습은 처음 봤다.

주초원의 표정도 좋지 않았고 이를 꽉 깨물었다.

‘두고 봐, 꼭 오빠한테 일러서 혼내줄 테니까.’

주초원은 방금 강루인이 물에 빠뜨린 여학생을 보며 계략을 꾸몄다.

“슬기야, 집에 가서 엄마한테 괴롭힘당했다고 말해.”

‘슬기 엄마 만만한 사람이 아니야. 딱 기다려, 강루인. 절대 가만두지 않아.’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아이를 잃은 날, 남편은 다른 여자 촛불 앞에   제100화

    강루인이 눈앞의 해산물 죽을 밀어냈다.“육개장 먹고 싶어요.”주영도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강루인이 고마워할 거라 생각했지만 돌아온 건 찬물을 끼얹는 말이었다.그 말에 진경자의 표정도 변했다. 주영도의 눈치를 살피면서 분위기를 수습하려 했다.“사모님, 지금 육개장을 만들려면 시간이 꽤 걸려서 아침 식사로 못 드실 수 있어요.”강루인이 말했다.“괜찮아요. 기다릴 수 있어요.”진경자는 다시 주영도를 쳐다봤다. 그가 손을 흔들며 가서 하라고 하자 더 말하지 않고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주영도가 깁스한 그녀의 다리를 보며 말했다.“지금 다니는 직장 그만두고 집에서 요양이나 해. 다 나은 후에도 지금 하던 일 계속하고 싶다면 다른 자리 알아봐 줄게.”‘무슨 뜻이지? 내 주변에 이성이 나타나서 영도 씨 이미지에 안 좋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래서 나의 인간관계를 정리하려는 거고?’강루인은 어이가 없어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주영도가 말했다.“예전처럼 말 잘 들으면 주씨 가문 사모님 자리는 아무도 건드리지 못해.”주영도는 아침을 먹고 회사로 출근했다. 강루인은 여전히 식탁 앞에 꼼짝없이 앉아 있었다.주씨 가문에 시집왔을 때 박정금이 말했었다. 주영도의 남은 인생을 잘 돌보고 말을 잘 들으면 주씨 가문 사모님 자리는 누구도 넘볼 수 없다고.그녀는 영원히 주영도의 아내이자 주씨 가문의 며느리일 거라고 했다. 그때 강루인이 얼마나 좋아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정말 꿈을 이룬 것처럼 기뻤다.하지만 지금은 그때의 뜨거운 열정을 잊었다. 마음이 식어버려 더 이상 끓어오르지 않았다.한 시간 후 그녀가 먹고 싶다던 육개장이 상에 올랐다. 하지만 몇 입 먹지 않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시간이 지날수록 사람의 입맛은 변하게 된다.강루인은 뒷마당에서 햇볕을 쬐었다. 흔들의자가 흔들려 하늘의 구름도 따라 움직였다.바로 그때 갑작스러운 고양이 울음소리가 그녀의 주의를 끌었다. 소리를 따라가 보니 삐쩍 마른 얼룩 고양이였다.어찌

  • 아이를 잃은 날, 남편은 다른 여자 촛불 앞에   제99화

    ‘내가 영도 씨랑 결혼한 게 몸을 파는 거라 생각하는 거야? 대체 날 뭐로 보는 거지? 술집 아가씨?’강루인이 이를 악물었고 마음이 산산이 조각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눈물이 차올랐지만 눈을 크게 뜨고 억지로 참았다.“나 후회해.”주영도와 결혼한 걸 후회했다.그녀를 사랑하지 않아도 되지만 이렇게 그녀의 마음을 짓밟아서는 안 되었다.그동안 강루인은 헛된 기대를 했다. 정성을 다하면 그의 마음도 녹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나 그의 심장은 돌보다 더 단단했다.그녀의 눈에 선명히 드러난 절망을 본 주영도는 잠시 멈칫했다.강루인이 같은 말을 반복했다.“나 후회해.”주영도는 그 후회가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대신 갑자기 그녀를 덮쳤다.반응이 느린 강루인은 옷이 벗겨지고 나서야 그가 뭘 하려는지 깨닫고 바로 저항했다.“안 해.”주영도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 머리 위로 올리고 한쪽 다리로 그녀의 다리를 제압했다.“이혼은 꿈도 꾸지 마. 주씨 가문에 이혼은 절대 없어.”주영도가 조롱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그리고 네 아버지 말이야. 우리 가문과의 혼사를 포기할 것 같아?”말이 끝나자마자 주영도는 그녀를 침범하기 시작했다.“너 계속 아이를 원했잖아. 안 하면 아이가 어떻게 생겨?”‘지금 너무 한가해서 이런 잡생각이나 하는 거야. 아이가 생기면 얌전해지겠지.’흥분이 최고의 윤활제지만 강루인은 흥분하기는커녕 고통스럽고 괴롭기만 했다. 그 바람에 주영도도 쉽게 침입하지 못했다.한쪽은 강제로 밀어붙였고 다른 한쪽은 계속 저항했다. 이번 잠자리는 누구에게도 즐겁지 않은 시간이었다.일을 마친 후 강루인의 눈빛은 공허하기만 했고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몸의 떨림이 아직 남아있지 않았다면 주영도는 실리콘 인형과 잔 게 아닌가 의심했을 것이다.주영도는 베개를 꺼내 그녀의 허리 아래에 받쳐 엉덩이를 높였다. 이런 자세가 임신 확률을 높인다고 들었다.욕정을 풀고 난 주영도는 감정이 안정되었다. 적극적으로 뒷정리하는 그와

  • 아이를 잃은 날, 남편은 다른 여자 촛불 앞에   제98화

    비몽사몽 눈을 뜬 강루인은 지금 어디 있는지조차 전혀 알지 못했다. 그녀의 기억은 차성열이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했던 순간에서 끊겨 있었다.“선배, 집에 데려다줘서 고마워요.”강루인은 혀가 꼬여 끈적하게 말했다. 하지만 주영도의 눈에는 차성열에게 애교를 부리는 것처럼 보였다.“빨리 가요. 영도 씨가 보면 선배를 괴롭힐 거예요.”그 말에 주영도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내가 왜 그 사람을 괴롭혀?”갑작스러운 목소리에 강루인의 흐릿했던 정신이 약간 맑아졌다. 주위를 둘러보고서야 안방 침대에 누워있다는 걸 알았다.강루인은 머리가 어지러워 머리를 흔들었다.“술 냄새나니까 오늘 밤은 옆방에서 자.”정신이 흐릿한 와중에도 주영도가 술 냄새를 싫어한다는 걸 기억했다.예전에 술자리에 참석했다가 들어오면 주영도가 싫어할까 봐 항상 다른 방에서 잤다.강루인이 침대에서 내려가려던 그때 주영도가 어깨를 누르면서 다시 침대로 밀쳤다.가뜩이나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데 뒤로 넘어지면서 머리가 윙 해져 방향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몇 시간 전에야 주영도는 강루인이 고용한 대리 변호사가 누구인지 알아냈다. 바로 고원겸이었다.처음엔 고원겸이 왜 이 사건을 맡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 차성열을 떠올린 순간 바로 깨달았다.차씨 가문과 고씨 가문은 오랜 친분이 있었다.강루인의 복숭앗빛 얼굴을 내려다보며 그의 아내가 남자를 유혹할 매력이 충분하다는 걸 알았다.물기 어린 눈빛과 붉게 달아오른 볼, 살짝 벌어진 붉고 촉촉한 입술은 마치 잘 익은 복숭아 같았다. 그녀의 맛을 아는데도 여전히 질리지 않았다.주영도의 눈빛이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워졌다.‘그러니까 오늘 밤에 이런 모습으로 차성열을 유혹했던 거야?’몸을 숙여 강루인의 턱을 잡고 강제로 시선을 맞춘 후 싸늘하게 말했다.“어쩜 이렇게 상스러운 짓만 골라 해?”바로 코앞이라 강루인은 그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봤다. 강루인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내가 상스럽다고?”주영도의 목소리는 여전

  • 아이를 잃은 날, 남편은 다른 여자 촛불 앞에   제97화

    “루인아.”강루인이 멍하니 있던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차성열과 눈이 마주쳤다.“선배.”“여기서 뭐 해?”강루인이 가볍게 대답했다.“바람 쐬러 나왔어요. 선배는요? 여긴 어쩐 일이에요?”“방금 거래처를 만났어.”그러고는 그녀의 차 안을 힐끗 봤다.“아직 다 낫지도 않았는데 혼자 차 몰고 나왔어?”“액셀 밟는 발은 멀쩡해요.”강루인이 물었다.“이따 바빠요?”차성열이 되물었다.“무슨 일 있어?”“술 한잔하고 싶은데 같이 갈래요?”차성열은 분위기를 깨지 않았다.“어디로?”두 사람은 조용한 바에 갔다. 바 안의 조명이 어두워 강루인의 쓸쓸한 분위기를 감췄다.차성열은 말없이 그녀 곁에 있어 줬다.강루인이 감정을 쏟아내는 타입은 아니지만 그저 너무 외로워서 누군가 곁에 있어 주길 바랐다. 지금은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차성열은 그녀의 기분이 많이 가라앉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사실 강루인을 처음 알았을 때부터 그녀는 말이 별로 없었다. 늘 조용했고 튀는 걸 싫어했다.그럼에도 그녀에겐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강루인은 주영도와 결혼한 후에도 한결같은 모습을 보였다. 다른 재벌 사모님처럼 명품으로 온몸을 휘감는 게 아니라 여전히 소박했다.오늘도 트렌치코트 밑에 심플한 흰색 티를 입었고 아무 액세서리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사람들 속에서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지금도 바 안에서 수많은 남자들이 그녀를 쳐다보고 있다는 걸 그녀는 알지 못했다.사실 강루인은 주량이 셌다. 주영도의 밑에서 일하면서 단련된 것이었다. 그런데 고작 몇 잔 마셨을 뿐인데 벌써 취기가 오른 듯했다.차성열은 눈빛이 흐릿하고 볼이 붉어진 강루인을 보며 그만 마셔도 되겠다고 판단했다.“집에 데려다줄게.”“집?”조명이 강루인의 눈을 밝게 비췄다. 강루인이 나약한 목소리로 말했다.“난 집이 없어요.”그녀는 가정을 간절히 원했지만 아무도 그녀에게 온전한 가정을 주

  • 아이를 잃은 날, 남편은 다른 여자 촛불 앞에   제96화

    강루인은 박정금의 말이 그녀를 겨냥한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박정금의 눈에 강루인은 작은 가문 출신보다도 못한 존재였다.박정금은 주초원을 위해 강루인에게 본때를 보여주려는 의도로 그녀를 괴롭혔다.그래도 강혜미는 건드리지 않았다. 어쨌거나 남의 집 딸이었으니까. 하지만 강루인은 주씨 가문의 명실상부한 며느리였기에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부리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그녀는 조강지처 자리에 있으면서도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했다. 점심 식사 준비도 그녀가 직접 했다.허리 부상과 다리 부상까지 겹친 상태에서 고된 일을 하자 강루인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박정금은 그녀의 아픈 척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누구한테 보여주려고 그렇게 얼굴을 찌푸려? 내가 일 시켜서 불만이야?”강루인이 답했다.“아니에요.”말을 마치자마자 이마에서 식은땀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박정금이 싫은 티를 팍팍 냈다.“됐어. 됐어. 너 필요 없으니까 그냥 가.”강루인은 굳이 보지 않아도 구아정이 엄청 고소해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그녀는 아픈 몸을 이끌고 강혜미와 함께 본가를 나왔다.강혜미가 직접 괴롭힘을 당한 건 아니지만 정신적인 학대는 충분히 느꼈다. 본가를 나오자마자 참지 못하고 불평을 쏟아냈다.“어쩜 이렇게 쓸모가 없어? 너처럼 약해빠진 사람도 없을 거야.”‘정말 도우미들보다도 못해.’강루인이 말했다.“지금 내가 이러고 있는 게 누구 때문인지 잊었어?”죄책감이라는 단어는 강혜미의 사전에 존재하지 않았다. 죄책감은커녕 강루인의 무능함을 비웃었다.“우리 집안에서 널 키워줬는데 당연히 날 감싸야 하는 거 아니야? 짜증 나. 너 때문에 온 오전 시간만 낭비했어.”“혜미야.”그때 강혜미의 친구가 그녀를 데리러 왔다. 그녀는 엉덩이를 흔들며 걸어가 차에 올랐다.운전하는 친구가 백미러로 강루인을 보며 말했다.“네 언니 꽤 예쁘게 생겼네. 그러니까 주씨 가문에 시집갔지.”강혜미가 코웃음을 쳤다.“시집가면 뭐? 그래봤자

  • 아이를 잃은 날, 남편은 다른 여자 촛불 앞에   제95화

    주영도의 관심은 6월의 날씨처럼 변덕스러웠다. 조금 전까지 서리처럼 차갑다가 다음 순간엔 태양처럼 뜨거웠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정말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식사가 차려졌다. 주영도가 강루인을 안고 내려오자 진경자의 눈에 안도감이 스쳤다.식탁까지 온 이상 강루인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초원이 아직 어려. 새언니인 네가 좀 더 너그럽게 이해해.”그 말에 강루인은 젓가락질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조명이 그의 날카로운 이목구비를 부드럽게 비췄지만 강루인은 전혀 따뜻함을 느끼지 못했다. 입안의 음식도 맛이 없어졌다.다시 말해 주영도는 여동생이 잘못했음을 알고 있었다. 옳고 그름을 모르는 게 아니라 단순한 편애였다.강루인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입을 닦았다.“다 먹었어.”주영도는 거의 손도 대지 않은 음식을 보며 뭐라 하려 했다. 그런데 강루인은 이미 진경자를 불러 부축해달라고 했다.말재주가 없는 주영도의 모습에 진경자는 속이 터졌다. 주영도는 강루인이 그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는다고 여겼다.주초원은 그의 유일한 여동생이고 아직 어려 제멋대로 행동하는 건 당연했다.‘고작 액세서리 몇 개 가져간 걸 가지고 왜 이리 소란인지, 참. 가져가면 다시 사면 되는데. 내가 언제 안 사줬어? 이렇게까지 속 좁게 굴 필요가 있나?’2m짜리 침대에서 강루인과 주영도는 양 끝에 누웠다. 둘 사이의 거리가 은하수만큼 멀었다.다음 날 강루인은 안방에서 나오자마자 강혜미와 마주쳤다.어제 그 난리를 피운 후 강혜미가 보이지 않아 간 줄 알았는데 아직도 있었다.강루인은 그녀에게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박정금에게서 전화가 와 강혜미를 데려오라고 했다. 그 소리에 강혜미가 바로 거부했다.“내가 거길 왜 가? 안 가.”강루인이 덤덤하게 말했다.“어제 사람을 때릴 땐 아무것도 무서울 게 없는 것 같더니.”“그거야 언니 대신 화풀이해주려고 그런 거지, 날 위해서가 아니야.”이십 년 넘게 자매로 지냈는데 강혜미의 속내를 모를 리가 있겠는가?강루인을 위해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