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결혼을 앞두고 있었지만 강루인은 쉬지 않고 평소와 다름없이 정상적으로 업무를 이어갔다.그날도 막 접대를 마치고 나오던 길에 우연히 주승우와 마주쳤다.몇 년 만에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익숙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딘가 낯선 느낌이 들었다.주씨 가문 둘째 집안에 일이 생긴 탓인지, 지금의 주승우는 예전처럼 거침없고 제멋대로인 모습이 한층 옅어진 채 훨씬 성숙하고 차분해진 분위기를 풍겼다.주씨 가문 큰 집안과 둘째 집안 사이의 원한에 대해 강루인은 조금도 관심이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그녀는 주승우라는 사람에게도 딱히 원한은 없었다.오히려 과거 주씨 가문에 있을 때 그는 강루인에게 잘해주었던 사람에 속했다.“오랜만이네요.”강루인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주승우가 웃으며 말했다.“오랜만은 아니죠. 할아버지 생신 연회 때도 봤었잖아요.”그 말을 들은 강루인은 잠시 멈칫했다.그녀는 그날의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주승우는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좋아 보이네요. 그동안 잘 지내셨나 봐요.”강루인은 오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듯 편하게 말했다.“네. 잘 지내고 있어요. 승우 씨는요?”주승우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저야 뭐. 늘 여전하죠.”강루인이 담담하게 말했다.“결혼했다는 얘기는 들었어요. 미처 축하한다는 말도 못 했네요.”주승우는 곧바로 받아쳤다.“고마워요.”강루인이 문득 물었다.“그러고 보니 가윤이는 어때요? 요즘은 뭐 하고 지내요?”그녀의 말에 주승우는 표정을 잠시 굳히더니 어딘가 어리둥절한 기색과 설명하기 어려운 미묘한 감정이 스쳤다.강루인은 그의 갑작스러운 변화를 이해하지 못했다.주승우는 그녀에게 다시 질문할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해외로 나갔어요. 집에도 연락을 별로 안 해서 자세한 상황은 저도 잘 몰라요.”주가윤에 대해서 더는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지 않은 듯한 태도였다.주승우는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결혼식 올린다는 얘기를 들었어요.”강루인의 생각도 자연스럽게 그의 화제로 끌려갔다.
“영도야, 인제 그만 정신 차리고 현실을 받아들여. 강루인 씨 할머니가 돌아가신 그 순간부터 너희 두 사람은 이미 서로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 거야. 앞으로도 계속 평행선을 달릴 뿐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거야.”주영도가 강루인에게 보였던 냉정함은 잠시 제쳐두더라도 두 사람의 목숨이 걸린 일만으로도 그들에게 더 이상 미래가 없다는 사실은 분명했다.두 사람의 소중한 목숨이 결국 주영도의 손에서 간접적으로 희생된 셈이었다.아무리 마음이 넓은 사람이라 해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모든 것을 덮어두고 다시 함께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주영도는 또다시 침묵에 잠겼다.최지호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는 더 이상 끝까지 따지고 들고 싶지도 않았다.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자신을 스스로 속이는 것뿐이었다.그래야만 조금이라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이다.“결혼식은 어디서 해?”최지호는 대답 대신 경계 어린 눈빛으로 되물었다.“또 뭐 하려고?”괜히 또 무슨 사고라도 치지 말라는 뜻이었다.주영도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아무것도 안 해.”그는 그저 가서 한번 보고 싶을 뿐이었다.하지만 최지호는 끝까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아무것도 안 할 거라면 굳이 묻지도 마. 그리고 나한테 물어봐도 소용없어. 나도 모르니까.”최지호의 말에 주영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려 했다.그럼에도 최지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말했다.“영도야, 이제 그만 잊어. 강루인 씨가 어렵게 되찾은 행복을 방해하지 말고 이제는 좋은 사람으로 살아.”그의 말에 주영도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도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자리를 떠났다.그는 강루인을 잊을 수 없었다.지금의 강루인은 이미 주영도의 뼛속 깊이 새겨져 있었기에 잊으려면 살을 도려내고 뼈를 깎아내는 듯한 고통을 견뎌야 할 터였다.사실 그는 잊고 싶지도 않았다.주영도를 배웅한 최지호는 고개를 숙여 품에서 옹알거리는 아들을 바라보며 신신당부했다
주영도가 최지호에게 술 한잔하자고 연락했지만 그는 단칼에 거절했다.“안 가. 나 아들 돌봐야 해.”“애 엄마가 있잖아.”이번만큼은 최지호도 주영도에게 숨기지 않고 상황을 처음부터 끝까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주영도가 강루인에게 버림받은 것에 비하면 그는 자신이 쫓겨난 일 정도는 충분히 견딜 만하다고 생각했다.최지호의 말이 끝나자 전화기 너머로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그는 통화가 끊긴 줄 알고 다시 휴대전화를 내려다보았다.하지만 여전히 통화 중이었다.“할 말 없으면 끊을게.”주영도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너 지금 어디서 지내?”최지호가 주소를 알려주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주영도는 최지호가 있는 곳으로 찾아왔다.다소 초췌해진 주영도의 얼굴을 바라보던 최지호는 피식 웃으며 비꼬듯 말했다.“여기에 구연정은 없는데. 왜 이렇게 폐인 같은 얼굴을 하고 온 거야?”구연정은 유일하게 그를 걱정해 줄 사람이었다.주영도는 그의 비아냥을 무시한 채 신발을 갈아 신고 안으로 들어갔다.이곳은 최지호가 예전에 살던 집이라 주영도 역시 익숙했다.그는 망설임 없이 곧장 술장으로 향했다.술장 앞에 선 주영도는 텅 빈 선반을 바라보며 물었다.“술은?”최지호는 담담하게 말했다.“다 줘버렸어. 지율이가 집에서는 술 마시지 말라고 해서.”그 말투에는 은근히 자랑스러워하는 기색이 묻어났다.“그걸 왜 진작 말 안 했어?”술이 없는 줄 알았다면 주영도가 올 때 미리 챙겨왔을 터였다.최지호는 태연하게 받아쳤다.“네가 묻지도 않았잖아.”주영도가 사람을 시켜 술을 가져오라고 하려 하자 최지호가 그의 손을 붙잡아 말렸다.“그만 마셔. 네 몸 상태가 어떤지는 너도 잘 알잖아. 젊은 나이에 이대로 죽고 싶은 거냐?”주영도가 위출혈로 병원에 갔었다는 이야기는 최지호 역시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하루 종일 몸을 함부로 혹사하는 걸 보니 그는 아직도 자신이 젊은 줄 아는 모양
노윤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루인이 그의 말을 끊었다.“노 비서님. 제가 예전의 정을 생각해서 험한 말은 하지 않을게요. 하지만 너무 제멋대로 생각하지 마세요. 노 비서님은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시는 것 같아서요.”“그 사람이 꿈속에서 이름을 부른 여자가 한두 명이 아니잖아요. 순서를 따져도 제 차례까지 올 리가 없는데요. 저한테 전화할 시간에 차라리 구연정 씨에게 연락하세요. 그분이 그쪽 대표님을 돌보는 건 저보다 훨씬 더 잘할 테니까요.”말을 끝낸 강루인은 노윤환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통화 종료음에 노윤환은 말없이 한숨을 내쉬었다.그는 이제 자신이 할 만큼 다 했다고 생각했다.결과가 이렇게 된 건 결국 주영도가 과거 강루인에게 너무 깊은 상처를 남겼기 때문이었다.“누구야?”강루인이 막 전화를 끊은 순간 지수현이 나타났다.그녀는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말했다.“노윤환. 주영도 비서야.”지수현은 그 말을 듣자마자 미간을 미세하게 찌푸렸다.“그 사람이 왜 너한테 연락한 거야?”강루인은 노윤환이 전화를 걸어온 이유를 간단명료하게 설명했다.“설마 주씨 가문이 파산해서 도우미 하나 고용할 돈도 없는 건가? 그래서 이제 너한테 손을 내미는 거야?”지수현은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부하나 대표나 분수를 모르는 건 똑같네. 차라리 그냥 일찍 죽지.’“화내지 마. 내가 허락한 것도 아니잖아.”강루인은 손가락으로 잔뜩 찌푸려진 그의 미간을 부드럽게 눌러주며 말했다.지수현은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이었다.“네가 감히 허락하기만 해봐. 내가 정말...”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루인이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네가 정말 뭐?”지수현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이내 말을 이었다.“죽도록 키스해버릴 거야!”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곧바로 강루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지수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누군가는 극한의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고 또 누군가는 고통 속에 잠긴 채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고 있었다.지수현은 전자에 속했고 주영도는 후자에 속했다.노윤환은 만취한 주영도를 부축해 차에 태웠다.애초에 억지로 마실 필요도 없는 술이었다.그런데도 주영도는 권하는 대로 한 번도 거절하지 않고 모조리 받아 마셨고 결국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해버렸다.노윤환은 그런 그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돌아가는 길 내내 그는 주영도의 상태를 살폈다.주영도가 이 정도로 술에 취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그렇다면 대체 언제부터였을지 노윤환은 잠시 기억을 되짚어보았다.아마 강루인이 결혼식을 올린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부터였던 것 같았다.이미 결혼한 지 4년이나 되었고 인제 와서 결혼식을 올리는 것뿐이었다.대체 뭐가 그렇게 받아들이기 힘든 건지 노윤환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차 세워.”차 뒷자리에서 주영도의 고통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노윤환은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차를 길가에 세웠다.주영도는 곧바로 차 문을 열고 내리더니 가로등 기둥을 붙잡은 채 그대로 토하기 시작했다.노윤환은 곁은 지키며 기다렸다가 그가 구토를 어느 정도 멈추자 생수 한 병을 꺼내 건네주었다.하지만 주영도는 물병을 받아 들지도 않았다.술에 너무 취한 탓인지 그는 비틀거리더니 그대로 앞으로 쓰러졌다.노윤환은 깜짝 놀라 서둘러 그를 부축했다.가로등 아래 드러난 주영도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입술 역시 마찬가지였다.“대표님!”그는 의식을 잃은 듯 몸에 힘이 풀렸고 그대로 아래로 미끄러졌다.노윤환은 급히 주영도를 부축해 차에 태운 뒤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의식을 완전히 잃은 상태였고 곧바로 응급실로 옮겨졌다.의사는 주영도의 상태를 확인하자마자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찼다.“사람 위가 무슨 술병인 줄 알아요? 넣고 싶은 만큼 넣으면 다 들어가는 줄 알아요? 이렇게 계속 마시면 사람이 죽어요. 다음부터는 여기로 데려오지도
주영도는 순간 움찔하더니 다급하게 부인하며 변명했다.“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내가 잘못했어. 루인아, 내가 정말 잘못했어.”강루인은 담담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주영도, 난 이제 너를 미워하지도 않아.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으니까. 내 마음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만 담을 수 있어. 그 외의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까지 마음에 둘 여유는 없어.”그녀는 말을 이어가며 힘을 주어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던 그의 팔을 하나씩 떼어냈다.주영도의 살을 파고들 정도로 손가락에 강한 힘을 줬지만 강루인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어차피 아픈 사람은 자신이 아니었으니까.“여보...”주영도가 놓지 말아 달라고 애원했지만 그의 바람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강루인은 그를 남겨둔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망설임 없이 차에서 내렸다.주영도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떠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만약 강루인이 한 번이라도 고개를 돌렸다면 그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하지만 이제 그런 것들은 그녀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주영도의 눈물은 강루인에게 그저 악마의 눈물과 다를 바 없었고 결코 진심으로 느껴지지 않았다.그녀는 이미 환한 얼굴로 돌아와 미소를 지으며 선생님의 손에서 지은우를 받아 안았다.지은우는 입만 열었다 하면 달콤한 말부터 쏟아냈다.“엄마, 저 보고 싶었어요? 저는 오늘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어요. 하루 종일 엄마 생각만 했더니 가슴이 아플 정도였어요.”강루인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억지가 아닌 진심에서 우러난 따뜻한 웃음이었다.“꼬맹이가 못하는 말이 없어. 어린 나이에 가슴이 왜 아파. 누가 그런 말을 가르쳐준 거야?”지은우는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진짜예요. 못 믿겠으면 엄마가 직접 만져봐요.”아이는 강루인의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 위에 올려놓더니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말했다.“뛰고 있죠? 엄마를 위해 뛰고 있는 거예요.”강루인은 결국 참지 못하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능글맞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