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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Autor: 비담
강루인은 박정금이 손자를 얼마나 원하는지 잘 알았지만 잠잘 때조차 감시받고 싶진 않았다.

“어머님, 여긴 회사랑 너무 멀어요. 매일 일찍 일어나면 영도 씨 잠자는 시간이 부족할 거예요.”

그녀는 아들이 박정금의 전부라는 점을 잘 이용했다. 아니나 다를까 박정금이 정말로 망설였다.

강루인을 힐끗 곁눈질하던 주영도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날 제대로 방패막이로 쓰는데?’

그녀는 주영도의 시선을 느꼈으나 조금 전의 그처럼 무시하기로 했다.

본가로 들어와 사는 건 이렇게 흐지부지되었지만 시어머니는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본가의 도우미를 두 사람의 집으로 보내려 했다.

강루인이 또다시 거절하려는데 박정금의 태도가 완강해서 그냥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아주머니, 나 배고픈데 밥 언제 먹을 수 있어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예쁜 소녀가 나타났다. 바로 주영도의 여동생 주초원이었다. 주초원이 그들을 보고 깍듯하게 인사했다.

“오빠, 새언니.”

주영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왔어?”

강루인도 미소로 답했다.

올해 16살이 된 주초원은 주씨 가문의 막내딸이자 주영도 아버지의 늦둥이 딸이었다. 어릴 적부터 집안에서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자랐다.

박정금은 도우미에게 밥상을 차리라고 일렀다.

주초원이 식탁 앞에 앉아 해맑게 웃었다.

“새언니, 금요일에 학부모회가 있는데 새언니가 와주면 안 될까요?”

그 말에 젓가락을 들었던 강루인이 멈칫했다.

주초원은 어머니를, 주영도는 아버지를 닮아 두 사람의 생김새가 많이 달랐다. 하지만 모두 아버지 주갑수의 눈매를 쏙 빼닮았다.

차갑고 감정 없는 주영도와 달리 주초원은 늘 눈웃음을 짓고 있어 상대에게 친근한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강루인은 알고 있었다. 그건 모두 꾸며낸 모습이라는 것을.

강루인이 에둘러 거절했다.

“금요일에 출근해야 해서 안 돼. 어머님께 부탁드리는 건 어때?”

주초원은 포기하지 않고 주영도를 보면서 뾰로통한 얼굴로 애교를 부렸다.

“오빤 날 제일 예뻐하잖아요. 새언니를 하루만 빌려주면 안 돼요?”

강루인의 시선도 주영도에게로 향했다. 그가 대신 거절해주길 바랐지만 역시나 헛된 기대였다.

주영도가 입을 열기도 전에 박정금이 먼저 결정해버렸다.

“초원이가 이렇게 원하는데 그냥 금요일에 회사 가지 마.”

강루인에게 하는 말이었다. 박정금은 주초원이 원하는 건 뭐든 들어줬다.

주영도는 시종일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런 사소한 일에는 전혀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말이다.

이 집에서 강루인은 여전히 아무런 발언권도 없었다. 심지어 결정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문득 음식이 맛없게 느껴졌고 넘어가질 않았다. 정말 모래를 씹는 듯한 점심 식사였다.

...

본가에서 나와 회사로 돌아가는 길, 강루인은 결국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학부모회 가고 싶지 않아.”

주영도가 말했다.

“휴가 하루 낸다고 월급 깎진 않아.”

‘내가 지금 월급을 깎을까 봐 이러는 줄 알아?’

강루인이 다시 한번 말했다.

“가고 싶지 않다고.”

그녀의 고집에 주영도는 드디어 고개를 돌리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처음도 아닌데 왜 그래?”

처음이 아니기 때문에 더 가고 싶지 않았다.

주영도가 이어 말했다.

“초원이가 널 엄청 좋아해. 그러니까 애 속상하게 하지 마.”

‘날 좋아한다고? 영도 씨 가족들만 그렇게 생각하겠지.’

가식은 사람을 속이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십 년 넘게 함께 지낸 가족이지만 강루인은 그저 외부인에 불과했다.

주초원이 강루인에게 적대심을 느낀다고 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녀가 이간질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강루인이 물었다.

“영도 씨, 내 의견은 전혀 중요하지 않지?”

‘가기 싫다는데 안 가면 안 돼?’

그녀의 반항에 주영도가 미간을 찌푸렸다.

“초원이가 널 가족이라 생각해서 학부모회에 참석해달라고 한 건데 그렇게 싫어? 새언니로서 이 정도 부탁도 못 들어줘?”

주영도는 강루인이 사리 분별을 하지 못하는 새언니인 것처럼 말했다. 그의 말에 강루인은 입꼬리를 씩 올리며 자신을 비웃었다.

“내가 거절하면 억지를 부리는 거야? 그럼 구아정이 기를 쓰고 끼어드는 건 뭔데? 파렴치하고 뻔뻔한 짓이 아니야?”

그 순간 주영도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이 일이 아정이랑 무슨 상관이라고 끌어들여? 네가 함부로 지어낸 말 때문에 한 사람의 명예를 망가뜨릴 수 있어. 너도 여자면서 그것도 몰라?”

강루인이 말했다.

“당신들은 하면서 왜 난 안 되는 건데?”

주영도가 답했다.

“한 번만 말할게. 아정이랑 나 아무 사이 아니야. 난 그냥 걔를 여동생이라 생각한다고.”

강루인이 코웃음을 쳤다.

“그 말을 영도 씨는 믿어?”

‘여동생은 개뿔. 애인이겠지.’

두 사람의 말다툼은 결국 흐지부지 끝났다.

회사로 돌아가는 길이라 신분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강루인은 중간에 먼저 내렸다.

멀어져가는 차를 보고 있자니 씁쓸함이 밀려왔다.

진짜 아내는 도둑처럼 몰래 숨어다니는데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아 마땅한 내연녀는 오히려 당당하게 활보하다니. 이런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구아정이 주영도의 비서가 됐다는 소식이 눈 깜짝할 사이에 회사 전체에 퍼져 나갔다.

모두가 구아정이 주영도의 ‘아내’이자 안주인이라고 생각했다.

강루인은 귀를 막고 외부의 소음을 차단한 채 계속 인수인계했다. 이런 골치 아픈 일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았고 빨리 이혼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어느덧 금요일이 되었다.

주초원의 학부모회에 가고 싶지 않았던 강루인은 일부러 휴대폰을 꺼버렸고 회사에도 나가지 않았다.

주영도가 유급휴가를 준다고 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곧바로 할머니를 보러 병원으로 향했다.

하지만 주초원의 끈기를 너무 과소평가했다. 강루인이 연락이 안 되자 주영도를 찾아갔고 동생 말이라면 무조건 따랐던 주영도는 강루인을 잡으러 노윤환을 병원으로 보냈다.

병실에 들어선 노윤환은 먼저 할머니에게 인사를 건넨 후 강루인을 쳐다보았다.

“사모님, 대표님께서 사모님을 학교로 모셔다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노윤환이 나타난 순간 강루인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정말 끈질긴 사람이야. 숨었는데도 찾아내다니.’

이수희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학교에는 왜 가는 건데?”

그러자 노윤환이 답했다.

“초원 아가씨의 학부모회에 참석하셔야 해서요.”

그 말에 이수희가 강루인에게 말했다.

“얼른 가서 일 봐.”

이수희는 주씨 가문 사람들이 강루인을 무시할까 봐 걱정했었는데 이제 보니 괜한 걱정인 것 같았다. 강루인을 학부모회에 보낸다는 건 강루인이 주씨 가문의 인정을 받았다는 뜻이라고 생각했다.

할머니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본 강루인은 차마 걱정을 끼칠 수가 없어 결국 노윤환을 따라나섰다.

주초원이 다니는 학교는 국제학교로 대부분 부유층 자제들이 다녔다.

사실 강루인은 주초원이 그녀를 부른 진짜 이유를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주초원이 왜 그녀에게 이토록 적대감을 보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곧 알게 되었다. 누군가를 싫어하는 데는 이유가 없었다. 약자를 괴롭히는 사람은 만만한 상대를 골라 괴롭히기 마련이고 그리고 주초원의 눈에 강루인이 바로 그 만만한 상대였다.

강루인이 연못가를 지나던 그때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눈빛이 번뜩이더니 누군가 다가온 순간 재빨리 몸을 피했다.

다행히 습격을 피했지만 그녀를 습격하려던 사람은 그리 운이 좋지 않았다. 첨벙하는 소리와 함께 연못에 빠지고 말았다.

곧이어 비명이 들렸고 사람들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이어졌다.

“왜 사람을 연못에 빠뜨려요?”

16, 17살쯤 돼 보이는 아이들이 네댓 명 정도 우르르 몰려왔다. 남학생과 여학생이 섞여 있었고 주초원도 그들과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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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이를 잃은 날, 남편은 다른 여자 촛불 앞에   제769화

    주승우 쪽의 목표는 여전히 주영도였고 그가 데려온 인력의 절반 이상이 주영도를 좇고 있었다.덕분에 강루인과 지수현을 추격하는 인원은 상대적으로 적었고 두 사람이 받는 위협도 그만큼 줄어들었다.하지만 역시 악연은 피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앞만 보고 달리던 두 사람은 결국 같은 방향으로 도주하던 주영도와 마주치고 말았다.강루인을 마주한 주영도의 눈빛은 짙은 기쁨으로 가득했다.그는 곧바로 시선을 옮겨 그녀의 몸을 위아래로 훑으며 다친 곳이 없는지 확인했다.그러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이번엔 무사해서 다행이야.”이번만큼은 주영도 때문에 강루인이 다치는 일은 없었다.당사자인 강루인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옆에 있던 지수현이 불쾌함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목소리로 냉정하게 입을 열었다.“내 아내가 다치지 않았다고 해서 네가 암 덩어리 같은 존재라는 사실이 달라지는 건 아니야. 우리 쪽으로 따라오지 말고 멀리 떨어져!”강루인을 구하기 전에 잠시 함께하기로 했던 두 사람의 동맹은 지수현의 한마디로 깔끔하게 끝나버렸다.지금 이 순간 지수현에게 주영도와 함께 움직인다는 건 그 자체로 못마땅한 일이었다.그와 엮이는 순간 위험만 커진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리고 지수현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두 사람이 마주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주승우가 보낸 사람들까지 이쪽으로 몰려들었다.상대 쪽 인원이 훨씬 많은 상황에서 불리한 쪽은 당연히 그들이었다.아니나 다를까 뒤쪽에서 들려오는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며 거칠고 소란스러워졌다.지수현은 못마땅하다는 눈빛으로 주영도를 노려보았다.마치 역병이라도 옮기는 인간을 바라보듯 혐오가 가득한 눈빛이었다.주영도는 그 눈빛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렸지만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고 대신 시선을 다시 강루인에게 돌렸다.“내가 뒤를 맡을 테니까 너희는 얼른 여기서 빠져.”주영도의 이런 희생적인 선택은 강루인에게도 예상 밖이었다.그녀에게 주영도의 냉정함과 무정함은 이미 너무 뿌리 깊게 각인되어 있었기

  • 아이를 잃은 날, 남편은 다른 여자 촛불 앞에   제76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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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이를 잃은 날, 남편은 다른 여자 촛불 앞에   제767화

    서류는 주영도 명의의 지분을 자동으로 양도하는 지분 포기각서였다.주승우는 주영도가 가진 모든 지분을 넘기고 자발적으로 주선 그룹에서 물러나게 하려는 것이었다.주영도는 서류를 바라보면서도 곧바로 서명하지 않았고 지수현 쪽 상황이 지금쯤 어떻게 돌아가고 있을지 생각하고 있었다.그의 망설임을 눈치챈 주승우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물었다.“왜? 재산을 포기하라니까 아까워?”“강루인은 참 불쌍하네. 결국 형한테는 마지막 선택지일 뿐이잖아.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그럼 그 사람의 존재도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겠지. 차라리 일찍 죽어서 편해지는 게 낫지 않겠어?”주영도는 얼굴을 굳힌 채 날카로운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주승우, 강루인은 우리 사이의 원한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이야. 대체 왜 그 사람까지 끌어들이는 거야!”주승우는 태연하게 말했다.“그럼 어쩌겠어? 형을 협박하는 데 그 사람만큼 효과적인 카드가 없는데. 그 약점을 고스란히 갖다 바친 건 형이잖아. 형이 예전처럼 강루인의 생사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면 내가 그 사람을 어떻게 하든 형한테는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았을 거잖아.”주영도는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주가윤은 예전부터 강루인을 많이 따랐어. 네가 루인에게 이런 짓을 했다는 걸 가윤이가 알게 되면 널 많이 원망할 텐데, 괜찮겠어?”그 말에 주승우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잠시 굳어졌고 눈빛 깊은 곳에도 서늘한 기색이 스쳤다.하지만 그는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담담하게 말했다.“가윤이랑 나는 달라. 가윤이 일은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고 내 일에 가윤이도 끼어들 자격이 없어.”주영도는 담담하게 말했다.“우린 다 똑같아. 결국 사랑하는 사람을 얻지 못했잖아.”그 말에 주승우의 표정은 미세하게 굳어졌다.그는 이내 주영도를 노려보며 말했다.“내가 지금 여기서 감정이나 늘어놓는 얘기 따위 들어줄 생각은 없어.”주영도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말을 이었다.“적어도 난 내 마음이 뭔지는 알아. 내가 뭘 하고

  • 아이를 잃은 날, 남편은 다른 여자 촛불 앞에   제766화

    차가 산 아래에 있는 마지막 목적지에 도착하자 주승우는 차에서 내리라고 지시했고 주영도는 그저 묵묵히 따랐다.그는 주승우가 알려준 장소에서 주소가 적힌 쪽지 한 장을 찾아냈다.이런 식으로 사람을 끌고 다니는 주승우의 수법에 진절머리가 난 지수현은 속으로 욕을 삼켰다.‘대체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사람을 개처럼 끌고 다니면서 아주 신이 났나 보네. 지시할 게 뭐가 이렇게 많아. 돈을 원하는 건지 목숨을 원하는 건지 처음부터 똑바로 말하면 될 것을 왜 굳이 이렇게까지 시간을 끄는 거야!’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쏟아낼 곳조차 없었던 지수현은 온몸의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강루인의 행방을 찾지 못한 상태였기에 그는 감정을 애써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그녀를 구해내기만 하면 지수현은 이들을 모조리 죽여버릴 생각이었다.주승우가 적어준 목적지는 차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결국 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걸어서 이동해야 했다.울창한 숲속으로 들어서자 지수현은 나뭇가지에 얼굴을 긁히거나 옷자락이 걸리는 등 온갖 수난을 겪어야만 했다.새하얀 정장은 어느새 흙과 먼지로 더럽혀졌고 얼굴에도 몇 군데 긁힌 자국이 남았다.그럴수록 지수현의 분노는 더욱 거세게 치솟았다.하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참을 수밖에 없었다.숲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주변은 더욱 적막해졌고 휴대전화마저 신호가 끊겨버렸다.휴대전화 화면을 확인한 지수현은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주승우가 일부러 그들을 외부와 차단해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계속 장소를 바꿔가며 이리저리 끌고 다닌 것 역시 그들이 미리 배치해 둔 사람들을 따돌리기 위해서였다.주영도는 냉정하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조금 있다가 넌 여기서 빠져. 그 시간 안에 강루인의 위치를 알아내. 사람을 찾으면 바로 데리고 나가.”지수현은 그를 힐끗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그걸 말이라고 해? 설마 내가 끝까지 함께 움직일 거로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 아이를 잃은 날, 남편은 다른 여자 촛불 앞에   제765화

    “어떤 납치범이 일이 끝나기도 전에 먼저 인질을 풀어주겠어요?”주승우는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그래도 우리가 예전에 쌓은 정이 있으니까 마지막까지 루인 씨의 안전만큼은 보장해 줄 수 있어요. 목숨까지 빼앗을 생각은 없거든요.”지금 이 상황에서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정이 남아 있다는 건지 강루인은 그저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그녀는 입술을 꼭 깨물더니 입을 열었다.“그 말을 믿어도 될까요?”주승우는 대답 대신 되물었다.“믿는 것 말고 다른 선택이 있나요?”그의 질문에 강루인은 말문이 막혔다.결국 그녀의 목숨은 주승우의 손에 달려 있다는 뜻이었다.강루인은 다시 물었다.“그럼 저는 언제쯤 나갈 수 있는데요?”주승우는 담담하게 대답했다.“그건 주영도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죠.”강루인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주씨 가문 사람 중 제대로 된 인간은 하나도 없었다.그들은 뿌리부터 썩어 빠진 사람들이었다.그녀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그때 주승우가 한마디 덧붙였다.“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괜한 짓을 했다가는 결국 다치는 건 루인 씨뿐이니까.”강루인은 계속 침묵을 지키더니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잠시 후 주승우는 자리를 떠났고 철문은 다시 굳게 닫혔다.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폐건물 안에 오래된 먼지와 곰팡이가 뒤섞인 듯한 냄새가 강루인의 코를 찔렀다.그녀는 주승우가 대체 주영도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생각해 보았다.하지만 강루인이 걱정하는 것은 주영도가 아니었다.그녀는 오직 자신의 안전만을 걱정할 뿐이었다.강루인은 주영도에게 버림받은 일이 한두 번도 아니었기에 더 이상 그에게 기대 같은 것을 걸지도 않았다.그녀는 주영도가 구하러 오기를 기다리느니 차라리 스스로 살아남을 방법을 찾거나 죽음을 택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 두 가지 선택지 외에도 강루인에게는 하나의 선택지가 더 있었다.바로 지수현이었다.그녀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는 분명 누구보다

  • 아이를 잃은 날, 남편은 다른 여자 촛불 앞에   제764화

    강루인이 이름을 제대로 부르기도 전에 그들은 재빨리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고 몸부림치거나 반항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그녀는 뒤통수를 얻어맞는 순간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다시 눈을 떴을 때 강루인은 자신이 어디인지조차 알 수 없는 낯선 곳에 누워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텅 빈 건물 안에는 그녀가 누워 있는 침대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벽은 여기저기 허물어져 있었고 누가 봐도 오래전에 버려진 폐건물이었다.강루인은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뒤통수를 얻어맞은 충격으로 뒷목이 욱신거리고 머리까지 어지러웠던 그녀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앉은 채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강루인은 이번에 자신을 납치한 사람이 누구인지 추측하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가 미처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납치범이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끼익!낡은 철문이 힘겹게 열리는 소리와 함께 빛을 등진 채 걸어오는 한 남자의 실루엣이 한눈에 안겨 왔다.강한 빛에 가려져 처음에는 강루인도 상대의 얼굴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하지만 그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그녀는 상대가 누구인지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주승우였다.그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강루인은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한 표정으로 바뀌었다.주승우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평범하게 대화를 나누러 온 사람처럼 태연하게 물었다.“왜 놀란 기색이 하나도 없죠? 두렵지도 않아요?”강루인은 편한 자세로 다시 벽에 등을 기대더니 이미 벌어진 일이라 어쩔 수 없다는 듯 담담한 태도로 되물었다.“제가 두렵다고 하면 보내줄 거예요?”주승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니요.”강루인은 곧바로 받아쳤다.“그럼 제가 두려워할 것도 없잖아요. 그쪽이 납치범 노릇을 하는 쾌감이나 채워주라고요?”그 말에 주승우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역시 재미있는 사람이라니까. 주영도랑 결혼한 건 아마 루인 씨 인생에서 가장 큰 실수였을 거예요. 사람 보는 눈도 정말 없었고.”강루인이 비꼬듯 말했다.“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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