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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화. 어제의 여운

Author: popona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4 21:07:03

중간고사 뒷풀이를 하고 돌아온 다음 날 아침. 창문 너머로 서늘한 가을 햇살이 비쳐 들고 있었지만, 순정의 머릿속은 온통 지난밤의 잔상들로 어지러웠다.

어두운 노래방 안에서 들려오던 도경의 묵직한 노랫소리, 순정의 귓가에 낮게 파고들며 밖으로 나가자던 이현의 나른한 목소리, 그리고 좁은 소파 위에서 나란히 앉았을 때 어깨에 고스란히 전해지던 두 사람의 단단한 체온까지.

어젯밤 일어났던 사소한 순간들이 잔상처럼 끊임없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평소라면 그냥 흔한 동생들의 장난이나 무뚝뚝한 남사친의 행동으로 넘겼을 일들이었다.

하지만 가디건 소매가 잡혔던 감촉이나, 조명 아래서 제 얼굴을 한참이나 담아두던 두 남자의 깊은 눈빛은 아무리 애를 써도 머릿속에서 쉽게 휘발되지 않았다.

'아휴, 임순정. 미쳤냐? 애들이랑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래, 술을…….'

순정은 괜히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고 나와 손바닥으로 화끈거리는 볼을 찰싹 때렸다.

지난 3개월 동안 하숙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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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후 3시 정각. 하숙집 대문 앞으로 나가자, 약속 시간에 단 1분도 늦지 않고 도착한 민우가 서 있었다.평소의 편안한 맨투맨 차림 대신, 깃이 깔끔하게 정돈된 셔츠 위에 가벼운 니트를 레이어드한 차림이었다."순정아, 왔어?"민우는 순정을 보자마자 코끝에 걸린 안경테를 고쳐 쓰며 인사를 건냈다.매일 보는 식구인데도 밖에서 만나니 왠지 어색한 기분에 순정은 손가락으로 볼을 긁적이며 피식 웃었다."응. 민우야, 어디로 가는데? 학교 앞 맛집이라도 가는 거야?""아니, 여기서 버스 타고 세 정거장만 가면 나오는 데야. 가자."민우는 자연스럽게 길 차도 쪽으로 자리를 바꾸어 서며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약 10분 뒤, 버스에서 내린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주택가 골목 안쪽에 아늑하게 자리 잡은 베이커리 카페였다.유리창 너머로 감성적인 노란 조명이 흐르고, 문을 열자마자 고소하고 달콤한 버터 향과 갓 볶아낸 원두의 쌉싸름한 향기가 코끝을 가득 채웠다.쇼케이스 안에는 갖가지 형태의 노릇노릇한 빵들과 아기자기한 디저트들이 보석처럼 진열되어 있었다."와... 여기 진짜 예쁘다. 이런 골목에 이런 데가 있었어?"순정이 감탄을 터뜨리며 눈을 반짝이자, 옆에 서 있던 민우의 입꼬리가 뿌듯함으로 슬며시 올라갔다.민우는 주머니에서 조그만 메모장을 꺼내 들더니, 안경 너머의 또렷한 눈동자로 쇼케이스와 메모장을 번갈아 비교하며 읊조렸다."여기가 원래 원두 배전 방식으로 유명한 데인데, 빵도 당일 생산해서 유기농 밀가루만 쓴대. 블로그 후기랑 커뮤니티 평점이 제일 높더라고. 특히 이 집은 소금빵이랑 크림 브륄레 타르트가 시그니처인데……."민우가 조곤조곤 읊어 내려가는 정보의 양과 깊이에 순정은 입을 턱 벌렸다.단순한 맛집 검색 수준이 아니었다. 시그니처 메뉴의 재료 성분부터 후기 비교 분석까지 마치 논문 요약본처럼 정돈되어 있었다."야...너 이거 찾아보느라 공부 못 한 거 아니지?"순정이 황당하면서도 기가 차서 묻자, 민우는 헛기침을 살짝 '

  • 아줌마의 오지랖으로 하숙집을 구원함   98화. 어제의 여운

    중간고사 뒷풀이를 하고 돌아온 다음 날 아침. 창문 너머로 서늘한 가을 햇살이 비쳐 들고 있었지만, 순정의 머릿속은 온통 지난밤의 잔상들로 어지러웠다. 어두운 노래방 안에서 들려오던 도경의 묵직한 노랫소리, 순정의 귓가에 낮게 파고들며 밖으로 나가자던 이현의 나른한 목소리, 그리고 좁은 소파 위에서 나란히 앉았을 때 어깨에 고스란히 전해지던 두 사람의 단단한 체온까지. 어젯밤 일어났던 사소한 순간들이 잔상처럼 끊임없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평소라면 그냥 흔한 동생들의 장난이나 무뚝뚝한 남사친의 행동으로 넘겼을 일들이었다. 하지만 가디건 소매가 잡혔던 감촉이나, 조명 아래서 제 얼굴을 한참이나 담아두던 두 남자의 깊은 눈빛은 아무리 애를 써도 머릿속에서 쉽게 휘발되지 않았다. '아휴, 임순정. 미쳤냐? 애들이랑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래, 술을…….' 순정은 괜히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고 나와 손바닥으로 화끈거리는 볼을 찰싹 때렸다. 지난 3개월 동안 하숙집에서 함께 지내며 모두를 그저 편한 친구나 식구처럼만 여겨왔는데, 어제 이후로 이상하게 그들의 시선이나 행동 하나하나를 예전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넘기기가 어려워지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특별한 감정이 있다고 스스로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다. 다만, 예전처럼 그들을 무조건 편한 동생이나 친구로만 대하기가 한결 어색해진 것만은 분명했다. 말 한마디를 내뱉을 때도, 행동 하나를 할 때도 이상하게 시선이 신경 쓰였다. 무심하게 그어 두었던 선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음을 순정 스스로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순정이 거실 테이블 위를 닦으며 혼자 한숨을 푹 쉬고 있을 때였다. 2층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차분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방에서 나온 민우가 순정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편안한 맨투맨 차림의 민우는 평소처럼 단정하고 진지한 얼굴이었지만, 순정과 눈이 마주치자 눈빛에 살짝 수줍은 기색이 스쳤다. 그는 코끝까지 내려온 안경테를 긴 손가락으로 슬쩍 치켜올리며, 순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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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래방 7호실의 시끌북적했던 열기를 뒤로하고 나오자, 알싸하고 차가운 밤공기가 단숨에 볼 끝을 스쳤다. 술기운에 서늘한 밤바람이 더해지니, 거리를 걷는 내내 가슴 한구석이 묘하게 몽글몽글해졌다. “아우, 밖으로 나오니까 갑자기 왜 이렇게 춥냐……” 외투없이 셔츠 한장만 입은 민우가 으슬으슬한지 몸을 움츠리며 긴 팔을 싹싹 비벼대자, 옆에서 걸어가던 체대생 태성이가 기다렸다는 듯 훤칠한 덤치로 민우의 어깨를 거의 감싸 안다시피 덥석 끌어안았다. “아 형! 체대생의 뜨거운 체온을 느끼면서 가시죠! 춥긴 뭐가 춥습니까!” “야, 윤태성! 이거 안 치워? 숨 막혀, 이 무거운 놈아!” “에이, 형은 몸 약해서 감기 걸리면 안됩니다! 가자, 헛둘 헛둘!” 민우가 질색하며 태성이의 굵은 팔통을 쳐냈지만, 태성이는 껄껄 웃으며 민우를 반쯤 들다시피 감싸 안고는 골목 앞쪽으로 신나게 먼저 걸어 나가 버렸다. 두 사람의 훈훈하고 시끄러운 티격태격이 밤거리의 어색함을 단숨에 유쾌하게 풀어주었다. 자연스럽게 조금 뒤처지게 된 순정은 도경과 이현 사이에 끼어 걸었다. 아까 좁은 소파 안에서 느껴졌던 답답한 밀착감은 시원한 밤바람에 날아갔지만, 대신 두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은근하고 따뜻한 체온이 걷는 내내 양쪽 어깨 너머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좁은 골목길을 지나던 그때, 뒤에서 붕 하는 오토바이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순정이 미처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왼쪽에 서 있던 도경의 탄탄한 팔통이 순정의 어깨를 말없이 툭 끌어당겨 도로 안쪽으로 넣어주었다. 도경은 무심한 얼굴로 차도 쪽으로 자리를 옮겨 서며 덤덤하게 한마디를 던졌다. “차 온다. 안쪽으로 걸어.” “어…… 고마워.” “멍 때리지 말고. 술 들어갔으면 앞이나 잘 봐.” 말은 투박하지만 자연스럽게 몸에 밴 도경 특유의 챙김에 순정의 마음 한구석이 간질거렸다. 그 순간, 순정의 오른쪽에서 걷던 이현이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피식 웃었다. 이현은 도경을 슬쩍 눈여겨보더니, 순정의 어깨 너머로 도

  • 아줌마의 오지랖으로 하숙집을 구원함   96화. 여기서는 신곡

    반주의 마지막 선율이 은은하게 스러지자마자, 소파 한구석에서 기회를 노리던 태성이가 기다렸다는 듯 마이크를 빼앗아 들며 소리쳤다. “아! 맞다! 오늘 순정이 누나만 한 곡도 안 불렀잖아요!” 태성이의 호탕한 고함에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은밀한 정적이 단숨에 깨졌다. 순정의 오른쪽 옆자리에 앉아 있던 이현 역시, 잡고 있던 순정이의 손목을 자연스럽게 놓아주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게, 누나 노래도 듣고싶다.” 이현의 능청스러운 부추김과 태성이의 집요한 성화가 교차하자, 순정은 손에 쥐인 차가운 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이현의 귓속말과 손끝이 남긴 잔여 진동 때문에 볼이 유난히 화끈거렸다. “아, 진짜 왜 그래…… 나 노래 진짜 못 부른단 말이야! 진짜라니까!” “에이, 순정 누나 빼기 없기! 체대생의 자존심을 걸고 누나 노래 듣기 전엔 절대 이 방 문 못 나갑니다!” 태성이가 리모컨을 순정이의 손에 억지로 쥐여주며 배시시 웃어 보였다. 태성이의 집요한 성화와 옆에서 나른한 눈빛으로 자신을 압박해 오는 이현의 시선에 못 이겨, 순정은 결국 볼이 빨개진 채 리모컨의 숫자 버튼을 꾹꾹 눌렀다. 수줍게 번호를 입력하고 예약 버튼을 누르자, 어두운 방 안에는 잔잔하고 서정적인 발라드 반주가 흐르기 시작했다. 화면 위로 아련한 가사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어…… 나 진짜 못 부르니까 놀리지 마라. 웃으면 진짜 때릴 거야.” 순정이 마이크를 두 손으로 꼭 쥐고 쑥스러운 듯 헛기침을 살짝 했다. 첫 구절을 떼자 시끌벅적하던 방 안이 또다시 거짓말처럼 정적에 휩싸였다. 순정이의 목소리는 화려한 기교나 테크닉은 없었지만, 특유의 맑고 정직한 미성이 담백하게 얹혀 나왔다. '전생에서 정말 오랫동안 좋아하던 애창곡이었는데…… 여기선 아직도 신곡이네.' 마이크를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차분하게 노랫말을 이어가는 동안, 순정의 가슴 한구석이 묘하게 몽글몽글해졌다. 지나온 시간과 회

  • 아줌마의 오지랖으로 하숙집을 구원함   95화. 엇갈리는 시선들

    태성의 곡이 끝나자, 7호실 안에는 반주가 뚝 끊긴 특유의 조용한 적막이 밀물처럼 내려앉았다.태성이 테이블 위의 음료수를 벌컥벌컥 들이켰고, 화면 상단에는 다음 예약곡이 없어 반짝이는 대기 문구만이 외롭게 껌벅이고 있었다.노래방 특유의 알록달록한 미등 조명이 차분하게 가라앉은 방 안을 천천히 순환하며 어두운 소파 구석구석을 몽환적으로 물들였다.소파 안쪽 구석에서는 벽에 머리를 푹 기댄 민우가 안경이 살짝 비뚤어진 줄도 모르고 세상 모르게 자고 있었다.도경은 그런 민우에게 자신의 외투를 덮어주었다.태성이가 마이크를 테이블 위에 둔탁한 소리와 함께 툭 올려놓으며 소파에 털썩 기댔을 때, 옆에 앉은 순정이 이현의 소매 끝을 살짝 잡으며 입을 열었다.“너 작업할 때 매일 틀어놓는 노래 있잖아. 그 노래 진짜 좋던데, 그거 불러라.”순정의 뜻밖의 제안에 이현의 긴 눈매가 둥그렇게 호선을 그리며 미소를 머금었다.이현은 기분 좋다는 듯 픽 웃으며 순정이의 시선을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은 채 테이블 위의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누나 내 작업용 음악까지 기억하고 있었어요? 영광인데.”이현의 길쭉한 손가락이 리모컨 버튼을 익숙하게 눌러 내려갔다.잠시 후, 어두운 방 안으로 감성적이고 세련된 R&B 스타일의 팝 반주가 은은하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온 이현의 보컬은 단순히 '듣기 좋은 수준'이 아니었다. 가라앉으면서도 묘한 울림을 주는 허스키한 미성이 첫 마디부터 방 안의 공기를 압도했다.순정은 이현에게서 전혀 예상치 못한 압도적인 음악적 재능을 확인하고는 입을 살짝 벌린 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이현은 노래를 부르는 내내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순정은 바라보며 짓는 미소는 가사 하나하나를 순정에게 건네는 은밀하고 완벽한 고백처럼 만들어 버렸다.맞은편에서 캔맥주를 들고 있던 도경의 눈빛이 그 꼴을 보며 살짝 가라앉았다.도경의 커다란 손마디에 슬쩍 힘이 들어갔고, 그의 깊은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이현과 순정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

  • 아줌마의 오지랖으로 하숙집을 구원함   94화. 이쪽으로 조금만 붙어요

    1차 치맥집의 허물없는 열기를 뒤로하고 밖으로 나오자, 가을 밤의 서늘하고 알싸한 공기가 볼 끝을 스쳤다.술기운에 달아오른 뺨에 시원한 밤바람이 더해지자 가슴속이 묘하게 몽글몽글해졌다.사거리 모퉁이에 위치한 지하 노래방으로 내려가는 계단에는 밤공기와 섞인 약간의 알코올 기운과 특유의 반짝이는 조명 빛이 훈훈하게 번져 있었다."손님, 지금 큰 방은 다 나가고 좀 좁은 방밖에 안 남았는데 괜찮으세요?"카운터 직원의 말대로 안내받아 들어간 7호실은 다섯 명이 들어서기엔 확연히 아담하고 아늑한 크기였다.키가 훌쩍 큰 하숙집 남자들의 커다란 덩치가 한꺼번에 밀려들자 금세 방 안의 밀도가 빽빽해졌다.가장 먼저 흥을 주체하지 못한 막내 태성이 다이빙하듯 소파 제일 안쪽 구석으로 훌쩍 뛰어들었고, 술이 취해 멍해진 민우가 그 옆으로 터덜터덜 따라 들어와 앉았다.두 장정이 소파 중앙 안쪽 상석을 큼직하게 차지해 버리는 바람에, 안 그래도 좁은 소파 공간이 순식간에 꽉 들어찼다. 뒤따라 들어오던 순정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태성의 등짝을 살짝 찰싹 때렸다."야, 윤태성 너 너무 커다래! 너 때문에 더 좁잖아!""최대한 구겨져 볼게요! 얼른 앉으세요!"태성이가 배시시 웃으며 너스레를 떠는 바람에, 순정은 남은 소파 끄트머리 자리에 얼떨결에 먼저 앉게 되었다.“너 너무 밀린 거 아니냐?”순정이 자리를 고쳐 잡기도 전에, 왼쪽에서 묵직하고 따뜻한 체온과 함께 도경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과제로 사흘 밤을 새운 데다 술기운까지 올라와 도경의 긴장되었던 어깨 힘이 느슨하게 풀어져 있었지만, 그 커다란 골격이 주는 은근한 존재감은 좁은 소파 안에서 단숨에 순정의 왼쪽 감각을 채워버렸다.그리고 곧이어 오른쪽 공간으로 매끄럽고 유연한 동작의 이현이 슬며시 자리를 붙여 앉았다.“누나, 좁죠. 이쪽으로 조금만 붙어요.”이현이 나른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순정의 어깨 쪽으로 자리를 바짝 당겨앉았다.결국 순정은 소파 위에서 왼쪽의 도경과 오른쪽의 이현 사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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