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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악녀, 청혼을 받다

Penulis: Jino
last update Tanggal publikasi: 2026-10-17 12:11:40

악녀 수칙: 좋은 일 앞에서는 괜히 도망가지 않는다.

나는 먹구름의 고삐를 받아 들고 성 꼭대기를 다시 봤다.

“몇 시에요?”

“저녁 먹고.”

“거기까지 올라가서 또 경주하자고 하시는 건 아니죠?”

레녹스가 내 손에 감긴 고삐를 풀어 줬다. 먹구름이 갑자기 고개를 들면 손가락이 조일 만큼 감겨 있었다.

“말은 두고 와라.”

“그럼 제가 불리한데요.”

“이길 필요 없다.”

고삐가 손바닥에 느슨하게 놓였다. 레녹스는 마지막으로 내 손가락을 살피고 놓았다.

나는 탑을 올려다보다가 물었다.

“따뜻하게 입고 가면 돼요?”

“그래. 바람이 분다.”

“알았어요.”

먹구름이 내 소매를 물었다. 당근이 남았다는 걸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소매를 빼내고 주머니를 뒤졌다. 레녹스는 먹구름이 당근을 다 먹을 때까지 옆에 서 있었다.

“먼저 들어가셔도 되는데요.”

“같이 가겠다.”

“마구간 안까지요?”

레녹스가 먹구름을 봤다.

“싫어하나.”

검은 주둥이가 레녹스의 빈손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손님이 빈손으로 왔다고 좀 아쉬운가 봐요.”

레녹스가 주머니로 손을 가져갔다. 나는 그 손등을 가볍게 눌렀다.

“오늘은 충분히 먹었어요.”

손이 순순히 내려갔다.

먹구름만 몹시 불만스러웠다.

◐

3월 23일, 나는 저녁 식사를 평소보다 빨리 끝냈다.

그렇다고 접시를 비우지도 않고 일어난 건 아니었다. 북부 요리사는 남은 음식을 보면 어디가 아픈지부터 물었다. 괜히 걱정을 살 필요는 없었다.

문제는 옆자리에 앉은 데릭이었다.

내가 수저를 내려놓자 데릭도 얼른 내려놓았다.

“다 먹었어?”

“응.”

“배부르냐?”

“그걸 왜 물어?”

“그냥.”

데릭의 접시에는 감자가 남아 있었다. 나는 접시를 가리켰다.

“오빠는 더 먹어. 훈련하고 왔다며.”

“나도 배부르다.”

맞은편의 한나가 물잔을 두 손으로 잡았다. 잔을 들지도 않고 입술만 꾹 누르고 있었다.

오웬은 그 옆에서 빵을 뜯었다. 이미 다 먹은 빵을 다시 뜯을 수는 없어서, 손끝에는 작은 부스러기만 남았다.

나는 셋을 차례로 봤다.

“뭐 있어요?”

오웬의 손이 멈췄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까부터 제가 일어나기만 기다리는 것 같아서요.”

데릭이 남은 감자를 입에 넣었다. 한나는 물을 마셨다. 오웬은 빵 부스러기를 접시에 내려놓았다.

대답 대신 식탁이 바빠졌다.

레녹스가 내 의자 옆에 섰다.

“가자.”

“이 사람들 왜 이래요?”

“곧 알 거다.”

그 말에 오웬이 고개를 숙였다.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대공이 설명을 맡아 주니 살았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르는 척하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다만 오늘은 내가 잘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한나가 얼른 따라 일어나 의자 등에 걸어 둔 망토를 가져왔다.

“아가씨, 이걸로 입으세요.”

“그건 두꺼운 건데.”

“위에는 추워요.”

한나는 망토를 내 어깨에 걸치고 목 아래의 잠금쇠를 채웠다. 손끝으로 주름까지 폈다.

레녹스가 옆에서 기다렸다.

한나는 옷깃을 한 번 더 만지다가 물러났다. 이상하게도 내 얼굴은 보지 않았다.

“한나.”

“네, 아가씨.”

“내가 계단 올라가다 망토 밟으면 다 네 탓이다.”

그제야 한나가 웃었다.

“길이는 괜찮아요. 제가 확인했어요.”

나는 웃는 얼굴을 보고 복도로 나갔다. 레녹스가 바로 옆으로 따라왔다.

◐

탑으로 가는 복도는 조용했다.

창문 밖은 벌써 어두웠다. 안쪽에 켜 둔 불이 유리에 비쳤고, 그 너머로 눈 덮인 지붕이 보였다.

레녹스는 계단 앞에서 잠깐 멈췄다.

“손.”

나는 오른손을 내밀었다.

레녹스가 내 손을 잡으려다가 장갑부터 봤다.

“안 꼈나.”

“안에서는 안 끼잖아요.”

“위에서는 껴라.”

나는 주머니에 넣어 둔 장갑을 꺼냈다. 오른손부터 끼우려는데 손목 부분이 안으로 말려 있었다.

레녹스가 장갑 끝을 잡아 펴 줬다.

나는 손가락을 넣고 손목까지 당겼다. 왼손도 끼우고 나서 다시 손을 내밀었다.

“됐어요.”

레녹스가 잡았다.

계단은 둘이 나란히 걷기에는 좁았다. 나는 한 계단 먼저 올라갔고, 레녹스는 뒤에서 손을 놓지 않았다.

조금 걷다가 내가 돌아봤다.

“앞에서 안내 안 하세요?”

“길은 하나다.”

“제가 잘못 들어갈 곳도 없네요.”

“그래.”

나는 위로 이어진 계단을 봤다. 안내가 아니라 그냥 같이 올라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다음 계단을 밟자 망토 끝이 발목에 닿았다. 한나가 길이를 잘 맞춰 둬서 밟히지는 않았다.

레녹스는 내가 멈출 때마다 같이 멈췄다.

창문이 있는 자리에서 바람 소리가 들렸다. 나는 창틀 안쪽에 낀 눈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도 눈이 들어오네요.”

“바람이 센 날에는.”

“맨 위는 더 춥겠어요.”

“춥다면 내려와도 된다.”

“아직 올라가지도 않았는데요.”

레녹스가 내 손을 조금 고쳐 잡았다. 장갑 안에서 손가락이 펴졌다.

“알아.”

나는 계단을 더 올라갔다.

누가 나를 부른다고 꼭 갈 필요는 없었다. 오늘은 가고 싶었다. 잡은 손을 내가 먼저 당겼다.

◐

탑 꼭대기의 문은 두꺼웠다.

레녹스가 내 옆으로 올라와 문고리를 잡았다. 문이 열리자 찬바람이 옷깃 사이로 들어왔다.

나는 턱을 조금 내렸다.

바닥에는 눈이 없었다. 계단에서 이어지는 길도, 낮은 벽 안쪽도 깨끗하게 쓸려 있었다. 벽 가까이에 의자 하나가 놓였고 그 위에는 접은 담요가 있었다.

“준비 많이 하셨네요.”

“미끄러우면 안 되니까.”

레녹스는 문을 끝까지 닫지 않았다. 걸쇠를 걸어 바람에 닫히지 않게 하고 내 옆으로 왔다.

아래에서는 성의 창문마다 불이 켜져 있었다.

조금 더 멀리 보니 마구간 앞에도 불빛이 있었다. 먹구름이 있는 쪽이었다. 나는 그걸 먼저 확인하고 고개를 들었다.

북쪽 하늘에 빛 띠가 흐르고 있었다.

성에 처음 들어온 날보다 넓었다. 옅은 초록빛이 천천히 길어지다가 한쪽 끝부터 접혔다.

나는 벽 앞에 섰다.

돌 위에 손을 올리려는데 레녹스가 내 손 아래에 장갑 낀 손을 먼저 받쳤다.

“차갑다.”

“제 장갑도 두꺼워요.”

레녹스는 손을 거뒀다. 대신 의자 위의 담요를 가져왔다.

“망토도 입었어요.”

“무릎에 둘러라.”

“계속 서 있을 건데요.”

레녹스가 담요를 든 채 멈췄다.

나는 조금 웃고 손을 내밀었다.

“일단 주세요. 추워지면 쓸게요.”

담요가 내 팔에 얹혔다. 레녹스는 빈손으로 내 망토의 옷깃을 조금 세웠다.

하늘을 보는 동안에도 옆에서 자꾸 움직였다. 바람이 어느 쪽에서 오는지 살피고, 내가 벽에 너무 가까이 서면 같이 한 걸음 다가왔다.

“레녹스.”

“왜.”

“저 안 날아가요.”

레녹스가 내 발을 봤다. 두 발 다 바닥에 잘 붙어 있었다.

“알아.”

“그럼 하늘 좀 봐요. 저기 밝아졌어요.”

나는 빛 띠가 접힌 쪽을 가리켰다.

레녹스가 고개를 들었다. 나도 다시 하늘을 봤다.

그렇게 잠깐 나란히 서 있었다. 팔에 얹힌 담요 끝이 바람에 흔들렸다. 레녹스가 그 끝만 잡아 줬다.

◐

먼저 입을 연 건 나였다.

“오늘 여기로 오라고 한 이유가 저거예요?”

레녹스가 하늘에서 시선을 내렸다.

“그것도 있다.”

“또 있는데요?”

“그래.”

나는 팔에 걸친 담요를 접었다. 괜히 끝을 두 번 맞췄다. 레녹스가 담요를 받아 의자 위에 놓았다.

돌아선 손에는 작은 상자가 들려 있었다.

나는 상자를 봤다가 레녹스를 봤다.

당근을 꺼낼 때보다 오래 걸렸다. 각설탕도 저렇게 꺼내지는 않았다.

입을 열려는데 목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망토의 잠금쇠를 손끝으로 한 번 눌렀다.

레녹스는 내 앞에 섰다.

“비올라.”

“네.”

상자 뚜껑이 열렸다.

안에는 은반지가 있었다.

크고 요란한 보석은 없었다. 가운데에 작은 무늬가 새겨졌고, 테두리는 오래 쓴 물건답게 매끄러웠다.

레녹스가 반지를 꺼냈다.

큰 손가락 사이에 놓이니 작아 보였다. 나는 반지를 보려고 반걸음 가까이 갔다.

“발트하임에 대대로 내려온 반지다.”

“많이 오래된 거예요?”

“그래.”

“그래서 그렇게 자꾸 확인하셨구나.”

레녹스가 내 얼굴을 봤다.

나는 반지가 아니라 빈 상자를 가리켰다.

“아까 식탁에서도 주머니 만지셨잖아요.”

“봤나.”

“옆에 계셨으니까요.”

레녹스의 엄지가 상자 가장자리를 눌렀다.

아는 척을 더 하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 나는 상자를 보기 전까지 확신하지 못했다. 보고 나서도 바로 손을 내밀지는 못했다.

나는 장갑 낀 왼손을 오른손으로 감쌌다.

“손은 언제 맞추셨어요?”

“오웬이 한나에게 물었다.”

“그래서 오늘 한나가 제 얼굴을 안 봤네요.”

“말하고 싶었을 거다.”

“잘 참았어요.”

내 말끝이 조금 빨라졌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레녹스는 상자를 의자 위에 내려놓았다. 반지는 그대로 손에 들고 있었다.

“춥나.”

“아니요.”

정말로 춥지는 않았다. 바람은 얼굴에 닿았지만, 손끝이 자꾸 장갑 안에서 움직였다.

레녹스는 반지를 내 쪽으로 조금 내밀었다.

“너에게 주고 싶다.”

나는 은빛 테두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처음 발코니에서 만났을 때도 저 손이 가까이 있었다. 그때는 귀를 만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지금은 왜 빈손 하나를 내 앞에 내미는 데 이렇게 오래 걸리는지가 이상했다.

나는 왼손의 장갑 끝을 잡았다.

◐

장갑은 금방 벗겨지지 않았다.

손가락 부분이 조금 붙어 있었다. 나는 끝을 당기다가 멈추고 손목부터 느슨하게 풀었다.

레녹스는 기다렸다.

도와주려고 손을 뻗지도, 빨리 벗으라고 하지도 않았다. 그걸 보니 오히려 내 손이 더 바빠졌다.

“잠깐만요.”

“그래.”

“장갑이 말을 안 들어요.”

레녹스의 입가가 움직였다.

나는 겨우 장갑을 벗겨 오른손에 쥐었다. 맨손에 바람이 닿았다.

레녹스가 빈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위에 왼손을 올렸다.

손바닥이 따뜻했다. 오른손으로 쥔 장갑의 손가락 부분이 아래로 축 늘어졌다.

레녹스는 내 손을 잡고 말했다.

“네가 가는 곳마다 따라가겠다. 평생.”

나는 손가락을 조금 굽혔다.

먹구름을 타고 나가면 옆에서 말을 몰았다. 도서관에 가면 맞은편에 앉았고, 마구간에 가면 각설탕을 꺼냈다.

나는 레녹스의 얼굴을 봤다.

“제가 가끔 혼자 있고 싶다고 해도요?”

“기다리겠다.”

“가라고 하면요?”

“간다.”

“그런데 다음 날 또 오실 거죠?”

“와도 되는지 묻고.”

나는 입술을 눌렀다. 웃음을 참으려다가 잘되지 않았다.

레녹스의 손가락이 내 손 아래에서 조금 움직였다. 잡아당기지는 않았다.

“네가 하고 싶은 걸 같이 보고 싶다.”

“말 경주만 계속 보실 수도 있는데요.”

“좋다.”

“지실 수도 있어요.”

“어제 졌다.”

“다음에도요.”

“그건 해 봐야 안다.”

그 대답이 좋아서 나는 잡힌 손을 조금 더 앞으로 내밀었다.

레녹스는 반지를 내 손 가까이 가져왔다. 아직 끼우지는 않았다.

“나와 결혼해 주겠나.”

계단 쪽에서 아주 작은 소리가 났다.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였다.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지금 저쪽을 보면 한나가 얼마나 애를 쓰며 입을 다물고 있는지 알게 될 것 같았다. 오웬도 아마 비슷할 테고, 데릭은 남은 감자를 후회하고 있을지 몰랐다.

나는 눈앞의 사람만 봤다.

“저 악녀인데요?”

레녹스가 바로 대답했다.

“알아.”

처음 들었을 때와 같은 말이었다.

이번에는 뒤에 더 묻고 싶은 말이 없었다.

나는 오른손에 쥔 장갑을 망토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 레녹스의 손등에 빈손을 얹었다.

“네.”

◐

문 아래에서 숨이 터지는 소리가 났다.

곧이어 데릭의 목소리가 들렸다.

“됐다고?”

“도련님, 조용히 좀 하세요!”

한나가 낮게 말하려고 애썼지만 이미 늦었다.

오웬이 기침을 했다. 그 바로 뒤에서 요리사가 웃었다.

나는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문틈 아래로 사람 그림자가 겹쳐 있었다. 계단 끝에서 넷이 한꺼번에 올라오려다 멈춘 모양이었다.

“다 들려요.”

내 말에 잠깐 조용해졌다.

그러다가 한나가 먼저 얼굴을 내밀었다. 눈가가 빨갰다.

“축하드려요, 아가씨.”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데릭이 뒤에서 손뼉을 쳤다.

오웬도 더는 참지 않았다.

“축하드립니다, 전하. 영애!”

요리사는 오웬의 팔을 잡고 계단을 올라왔다. 손에 작은 천 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넷의 목소리가 좁은 문 앞에서 한꺼번에 커졌다. 나는 레녹스의 손을 잡은 채 웃었다.

“언제부터 있었어요?”

“잠깐 전입니다.”

오웬이 대답했다.

레녹스가 왼쪽 귀 가까이 손을 올리려다가 멈췄다.

오웬이 얼른 말을 고쳤다.

“두 분께서 올라오신 다음부터입니다.”

“계속 계셨네요.”

“예.”

요리사가 오웬의 팔을 가볍게 쳤다.

“기쁜 날에도 꼭 말을 줄이려고 해요.”

나는 그 말을 듣고 더 웃었다.

요리사가 천 주머니를 열었다. 안에는 설탕을 얇게 묻힌 작은 과자가 있었다.

“식탁에 두려고 했는데, 부관님이 여기서 드리는 게 좋겠다고 해서요.”

“추운데 기다리셨잖아요. 내려가서 같이 먹어요.”

“그럼 차도 준비할게요.”

레녹스가 과자를 봤다.

나는 그 시선을 보고 요리사에게 말했다.

“레녹스 것은 두 개 남겨 주세요.”

“그렇게 적게요?”

요리사가 아주 진지하게 물었다.

레녹스가 나를 봤다. 나는 웃느라 대답을 조금 늦게 했다.

“그럼 더 남겨 주세요. 오늘은 좋은 날이니까.”

한나가 또 눈가를 눌렀다.

데릭은 내 왼손을 보고 뒤늦게 손뼉을 멈췄다.

“아직 반지도 안 꼈잖아.”

넷이 한꺼번에 조용해졌다.

오웬이 요리사를 데리고 문 안쪽으로 물러났다. 한나는 데릭의 소매를 잡았다.

“아래에 있을게요, 아가씨.”

데릭은 마지막까지 내 손을 한 번 더 보고 내려갔다.

이번에는 계단에서 발소리가 제대로 멀어졌다. 숨죽일 필요가 없어진 사람들이라 그런지 걸음도 가벼웠다.

◐

나는 문에서 시선을 돌렸다.

레녹스는 여전히 반지를 들고 있었다. 내 왼손도 놓지 않은 채였다.

“많이 기다리셨네요.”

“괜찮다.”

“내려가면 다들 또 박수 칠 것 같아요.”

“그럴 거다.”

“오웬은 벌써 준비한 얼굴이었어요.”

레녹스가 짧게 웃었다.

나는 왼손을 들어 반지 가까이 가져갔다.

“제가 끼워 볼래요.”

레녹스는 반지를 내 오른손에 놓았다. 그러고 맨손인 왼손을 받쳐 줬다.

나는 은반지를 손가락 끝에 댔다.

생각보다 차갑지 않았다. 레녹스가 계속 쥐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조금씩 밀어 넣자 손가락 마디를 지나 알맞게 멈췄다.

나는 손을 펴 봤다. 다시 오므렸다. 반지는 빠지지도, 손가락을 조이지도 않았다.

“맞아요.”

레녹스가 내 손을 들어 살폈다.

은빛 테두리에 하늘의 빛이 조금 닿았다. 나는 반지의 작은 무늬를 엄지로 쓸었다.

계단 아래에서 한나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데릭은 벌써 과자를 달라고 했다. 오웬이 차부터 기다리라고 말하자 요리사가 과자 주머니를 가져가는 소리가 났다.

나는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레녹스가 내 손을 놓으려 했다. 장갑을 다시 끼라는 뜻이었다.

“잠깐만요.”

나는 잡힌 손을 그대로 두고 반지를 한 번 더 봤다.

차가워지기 전에 장갑을 껴야 했다. 내려가서는 따뜻한 차를 마시고, 저 사람들의 축하도 받아야 했다.

손가락을 움직이자 반지가 함께 움직였다.

나는 레녹스의 손을 잡고 계단 쪽으로 한 걸음 갔다. 옆에서도 바로 발소리가 났다.

오늘 새로 정한 수칙은 길지 않았다.

『따라오는 사람은 굳이 쫓지 않는다.』

(76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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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녀 수칙: 우는 사람에게는 빗을 맡기지 않는다.한나는 빗을 받아 들고 한 걸음 물러났다.“아직 아가씨 머리를 다 못 빗었는데요.”“네 눈부터 닦아.”“안 울었어요.”나는 한나를 봤다.한나도 나를 보다가 얼른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렀다.“조금만요.”“조금 울어도 울긴 운 거야.”빗을 들고 돌아올 때부터 코끝이 빨갰다. 면사포 상자를 닫다가 눈을 훔치는 것도 봤다. 내가 거울만 보고 있는 줄 알았나 보다.한나는 내 뒤로 와서 풀린 머리카락을 모았다.“정말 조금만 더 하면 돼요. 이쪽이 아직 엉켜서요.”“그럼 그것만 풀고 앉아.”나는 빗을 돌려줬다.한나는 머리 끝부터 조심스럽게 빗었다. 익숙한 손이었다. 잡아당기지도 않았고, 엉킨 곳을 억지로 내리지도 않았다.문제는 빗질이 자꾸 멈춘다는 데 있었다.거울 속 한나가 입술을 꾹 누르고 있었다.“아프세요?”“아니.”“그러면 조금 더…….”말끝이 작아졌다.한나의 손이 내 머리 뒤에서 멈췄다.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손을 뒤로 내밀었다.“빗.”한나는 이번에는 순순히 건넸다.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나를 의자에 앉혔다. 한나가 벌떡 일어나려 해서 어깨에 손을 얹었다.“내가 앉으라고 했지, 벌 받으라고 했니?”“아가씨가 제 머리를 빗어 주시면 이상하잖아요.”“머리카락은 네 게 더 얌전해.”한나의 머리핀을 뺐다. 단단히 말아 올린 머리가 목 아래로 풀렸다. 한나는 두 손으로 무릎을 덮고 거울을 쳐다봤다.“왜 우는데?”“내일 결혼하시니까요.”“그건 알아.”“좋아서요.”나는 빗을 머리 끝에 댔다.“그런데 왜 사람 장례 치르는 얼굴이야.”한나가 웃다가 코를 훌쩍였다. 웃기는 데 성공했다고 보기엔 소리가 축축했다.손수건을 건네자 한나는 두 손으로 받았다.“아가씨가 북부로 가셔도 저를 데려가 주신다고 하셨는데, 자꾸 여기서 마지막으로 머리를 빗어 드리는 것 같아서요.”“내일도 빗어 줘야지.”“네.”“모레도.”한나가 손수건 아래로 고개를 끄덕였다.“북부에서도. 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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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녀 수칙: 남이 정한 색을 입지 않는다.“데려갈 거예요.”내 대답에 베른이 먹구름의 고삐를 고쳐 잡았다.“그럼 꽃 장식에 익숙해지게 해 둬야겠습니다.”먹구름은 제 결혼식이라도 되는 줄 아는지 턱을 높이 들었다. 나는 검은 목을 두드렸다.“꽃은 먹는 게 아니야.”먹구름이 내 손바닥을 뒤졌다. 아무것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레녹스 쪽으로 코를 돌렸다.“그쪽도 없대.”레녹스가 빈 주머니를 뒤집어 보였다. 먹구름은 기어이 주머니 끝까지 냄새를 맡았다. 사람 말을 믿지 않는 건 좋은데, 너무 철저했다.베른이 고삐를 당겨 검은 코를 떼어 놓았다.“옷을 물지 않는 연습도 해야겠네요.”“그건 꼭 해 주세요. 제 치마는 길어질 테니까.”레녹스가 나를 봤다.“정했나.”“아직요. 색부터 고르려고요.”“같이 가지.”“드레스 고르는 데도요?”“그래.”베른은 먹구름을 보고, 레녹스를 보고, 다시 고삐를 잡았다.“둘 다 아가씨가 가는 데 가고 싶은 모양입니다.”먹구름이 콧김을 뿜었다. 레녹스는 부정하지 않았다.나는 극장 계단을 내려가며 내밀어진 손을 잡았다.◐3월 30일, 드레스 가게의 창에는 하얀 옷이 걸려 있었다.치마를 풍성하게 벌리고 소매에는 고운 자수를 놓았다. 허리에 묶인 띠도 하얬다. 흠잡을 곳 없이 예쁜 옷이었다.내가 입고 싶은 옷은 아니었다.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주인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한나는 내 망토를 받아 들었고, 레녹스는 문을 닫고 곧장 따라 들어왔다.주인의 시선이 레녹스에게서 멈췄다.“대공 전하께서도 함께 고르시나요?”“구경만 해요.”내가 먼저 대답했다.레녹스는 내 옆에 섰다.“필요하면 돕겠다.”“단추 잠그는 건 한나가 해 줘요.”“그럼 기다리지.”주인은 창가의 넓은 의자를 권했다. 레녹스가 앉으려다 내 쪽을 봤다.나는 가게 안쪽의 거울을 가리켰다.“저는 저기 있을 거예요.”레녹스는 의자를 조금 옮겼다. 거울이 잘 보이는 자리였다.한나가 내 망토를 접다가 웃었다.“전하, 제가 옷을 가리면

  • 악녀가 되기로 했는데 남주가 따라왔다   77화. 악녀, 수도로 돌아가다

    악녀 수칙: 마음에 드는 날은 내 것으로 삼는다.계단을 내려가기 전에 레녹스가 내 장갑을 주워 들었다.나는 왼손을 내밀었다. 반지를 낀 채 장갑을 끼우려니 손가락 끝이 자꾸 안쪽에 걸렸다.“빼고 낄까.”“싫어요. 방금 꼈는데.”레녹스는 장갑 입구를 넓혀 줬다. 나는 손가락을 천천히 밀어 넣었다. 은반지가 천 아래로 가려졌다.괜히 손등을 한 번 쓸었다.“내려가면 벗으면 되지.”“알아요.”“계속 만지길래.”나는 손을 내렸다가 다시 레녹스의 손을 잡았다.“이건 만져도 되잖아요.”“그래.”계단 아래에서 데릭이 우리를 올려다봤다.“차 식는다!”한나가 바로 데릭의 옆구리를 눌렀다. 오웬은 찻잔을 들고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요리사는 접시 가운데에 과자를 더 쌓았다.나는 마지막 계단을 내려갔다.레녹스도 손을 잡은 채 따라 내려왔다. 빈 의자는 바로 옆에 있었는데, 오웬이 굳이 두 의자를 조금 더 붙였다.“너무 가까운데요.”내 말에 오웬이 의자를 도로 밀려 했다.나는 먼저 앉았다.“옮기라는 말은 안 했어요.”오웬이 손을 거뒀다. 데릭은 차를 마시다 웃었고, 한나는 결국 손수건을 꺼냈다.레녹스가 내 앞에 과자 접시를 놓았다.나는 장갑을 벗고 은반지를 드러냈다. 모두의 시선이 한꺼번에 내 손에 붙었다.“차 식는다며.”데릭에게 말하자 그제야 다들 찻잔을 들었다.◐3월 28일, 수도로 들어가는 길은 북부보다 훨씬 질었다.바퀴가 물기 섞인 흙을 밟을 때마다 마차가 조금씩 기울었다. 나는 창밖의 길을 보다가 무릎 위에 올린 편지를 다시 펼쳤다. 어제 묵은 곳까지 달려온 수도의 전령이 건넨 편지였다.왕의 허락은 짧았다.『레녹스 발트하임 대공과 비올레타 에버린 영애의 혼인을 허락한다. 왕궁 정원을 예식 장소로 내주겠다.』끝에 찍힌 왕의 인장이 종이를 접어도 조금 튀어나왔다.그 밑에는 아버지의 편지가 있었다.왕궁 정원을 쓸 수 있다는 말보다 그쪽이 더 뜻밖이었다.『4월 1일은 어떠냐. 준비는 해 두겠다. 네가 싫다면 다른 날로

  • 악녀가 되기로 했는데 남주가 따라왔다   76화. 악녀, 청혼을 받다

    악녀 수칙: 좋은 일 앞에서는 괜히 도망가지 않는다.나는 먹구름의 고삐를 받아 들고 성 꼭대기를 다시 봤다.“몇 시에요?”“저녁 먹고.”“거기까지 올라가서 또 경주하자고 하시는 건 아니죠?”레녹스가 내 손에 감긴 고삐를 풀어 줬다. 먹구름이 갑자기 고개를 들면 손가락이 조일 만큼 감겨 있었다.“말은 두고 와라.”“그럼 제가 불리한데요.”“이길 필요 없다.”고삐가 손바닥에 느슨하게 놓였다. 레녹스는 마지막으로 내 손가락을 살피고 놓았다.나는 탑을 올려다보다가 물었다.“따뜻하게 입고 가면 돼요?”“그래. 바람이 분다.”“알았어요.”먹구름이 내 소매를 물었다. 당근이 남았다는 걸 기억하는 모양이었다.나는 소매를 빼내고 주머니를 뒤졌다. 레녹스는 먹구름이 당근을 다 먹을 때까지 옆에 서 있었다.“먼저 들어가셔도 되는데요.”“같이 가겠다.”“마구간 안까지요?”레녹스가 먹구름을 봤다.“싫어하나.”검은 주둥이가 레녹스의 빈손을 한 번 더 확인했다.“손님이 빈손으로 왔다고 좀 아쉬운가 봐요.”레녹스가 주머니로 손을 가져갔다. 나는 그 손등을 가볍게 눌렀다.“오늘은 충분히 먹었어요.”손이 순순히 내려갔다.먹구름만 몹시 불만스러웠다.◐3월 23일, 나는 저녁 식사를 평소보다 빨리 끝냈다.그렇다고 접시를 비우지도 않고 일어난 건 아니었다. 북부 요리사는 남은 음식을 보면 어디가 아픈지부터 물었다. 괜히 걱정을 살 필요는 없었다.문제는 옆자리에 앉은 데릭이었다.내가 수저를 내려놓자 데릭도 얼른 내려놓았다.“다 먹었어?”“응.”“배부르냐?”“그걸 왜 물어?”“그냥.”데릭의 접시에는 감자가 남아 있었다. 나는 접시를 가리켰다.“오빠는 더 먹어. 훈련하고 왔다며.”“나도 배부르다.”맞은편의 한나가 물잔을 두 손으로 잡았다. 잔을 들지도 않고 입술만 꾹 누르고 있었다.오웬은 그 옆에서 빵을 뜯었다. 이미 다 먹은 빵을 다시 뜯을 수는 없어서, 손끝에는 작은 부스러기만 남았다.나는 셋을 차례로 봤다.“뭐 있어요?

  • 악녀가 되기로 했는데 남주가 따라왔다   75화. 악녀, 먹구름과 달리다

    악녀 수칙: 이겼으면 받고 싶은 것을 직접 고른다.나는 계단 앞에서 발을 멈췄다.오웬의 질문 뒤로 잠깐 조용해졌다. 집무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고, 조금 뒤에는 발소리도 들렸다.나는 손수건을 주머니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영애.”오웬이 복도 끝에서 나를 불렀다. 아까 들고 있던 서류는 없었다.“길을 물으러 오신 것 아니었습니까?”“맞아요. 먹구름이 달릴 만한 곳이 있나 해서요.”오웬은 내 얼굴을 보고 집무실 쪽을 한번 돌아봤다.“남쪽 들판에 길이 있습니다. 눈을 걷어 둔 곳인데, 상태를 다시 살펴보겠습니다.”“고마워요.”“전하께서도 같이 가실 겁니다.”“제가 같이 가자고 안 했는데요.”오웬이 입을 다물었다.나는 웃고 계단을 내려갔다. 내 뒤에서 오웬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길을 물었더니 동행부터 정해지는 성이었다.◐3월 22일 아침, 먹구름은 내가 들고 온 안장보다 주머니를 먼저 봤다.주둥이가 망토 옆을 꾹 눌렀다.“당근은 이쪽 아니야.”먹구름이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치가 빨랐다. 처음 샀을 때부터 사람 말도 이만큼 잘 들었으면 베른의 허리가 덜 아팠을 텐데.나는 잘라 온 당근을 손바닥에 올렸다. 먹구름이 입술로 조심스럽게 집어 갔다.“오늘은 좀 달릴 거야.”남은 당근을 달라는 듯 고개가 더 내려왔다.“알았어. 준비부터 하고.”마구간 문이 열렸다. 찬바람을 따라 레녹스가 들어왔다. 두꺼운 망토 아래에 승마용 장갑을 끼고 있었다.“오셨네요.”“네가 간다기에.”“오웬이 벌써 동행을 정해 줬어요.”레녹스는 내 옆에 멈춰 섰다.“싫으면 여기 있겠다.”먹구름이 내 어깨 너머로 코를 뻗었다. 레녹스는 주머니에서 각설탕을 꺼냈다. 기다렸다는 듯 검은 주둥이가 손바닥으로 향했다.나는 먹구름의 목을 가볍게 쳤다.“넌 좋겠지.”“너는.”레녹스는 각설탕을 먹이는 동안에도 나를 봤다.“저도 같이 가고 싶어요.”“그럼 간다.”정하기 쉬웠다. 대공을 데리고 들판에 나가면서 결재할 종이도, 납득시킬 사람도 없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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