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청혼서라는 말에 아티니스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일면식 없는 대공가에서 결혼을 제안하다니. 게다가 시골 영지에 틀어박혀 살아온 자신을 어떻게 알고 보낸 건지 아티니스는 의아했다.
“설마… 예전에 황실 파티에서 우리 아티를 본 건 아닐까요?”
백작부인이 조심스레 말했다.
“시골 영지 영애인 제게 누가 관심을 보였겠어요… 저도 관심 없었고요.”
“무슨 소리야. 우리 아티의 아름다움은 태어날 때부터였단다. 세상을 밝혀주는 따스한 아침 햇살 같은 주홍색 머리카락에, 릴리스를 쏙 빼닮은 아메랄드를 담고 있는 두 눈동자. 그 무도회에서 모두 다 충분히 반하고도 남았지.”
글라디 백작은 딸을 자랑하는 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전 아빠랑 평생 같이 살고 싶어요. 결혼은 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 그래. 당연히 아빠랑 평생 같이 살아야지.”
아티니스와 백작은 서로를 꼭 껴안았다.
“에휴…또 시작이네.”
똑 닮은 두 사람이 평생 함께하겠다고 또다시 다짐하며 꼭 껴안는 모습을 보며, 백작부인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이러다가 당신 정말 아티랑 손잡고 100년을 함께 살지도 모르겠어요.”
“그럼 나야 좋지.”
부인의 말에 오히려 좋다는 백작을 보며 백작부인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티, 정말 그날 뭐 이상한 일은 없었니?"
“음… 정말 아무 일도 없었는데요….”
아티니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설마 그때 그 꼬마가 대공자는… 아니겠지?’
그때, 아빠의 손에 들려 있던 편지 뒷부분이 아티니스의 눈에 들어왔다. 작은 글씨로 쓰인 문구였다.
“아빠, 그 편지… 제가 잠깐만 봐도 될까요?”
“음? 그래, 여기.”
아티니스는 편지를 받아 뒷면을 살펴보았다. 그녀의 표정이 점차 굳어졌다.
그녀가 황급히 고개를 들며 말했다.
“엄마, 아빠. 제가 직접 포르투릭스 공작가에 가서 얘기를 나눠볼게요.”
“뭐라고?”
“무슨 일이니, 아티?”
백작과 백작부인은 놀라 물었다.
“가서 깔끔하게, 정중히 거절하고 올게요. 그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럼 전 준비하러 갈게요!”
“아, 아티?!!”
편지를 꼭 쥔 채, 아티니스는 방을 빠르게 나섰다.
편지 뒷면, 작게 적힌 그 한 줄.
「거절 시, 비밀 유지 취소」
그 한 줄 때문에 지금 그녀는 포르투릭스 공작가 저택 앞에 서 있다.
***
[현재 - 포르투릭스 공작 저택]
“와… 진짜 크다…”
입이 절로 벌어질 만큼 웅장한 저택이었다.
정원 하나만 해도 작은 숲을 통째로 옮겨다 놓은 듯했고, 끝도 보이지 않는 회랑과 웅장한 벽돌 구조물이 위압감을 더했다.
미리 편지를 보내 두었기에 멀리 떨어진 게이트부터 출입은 수월했다.
하지만 막상 저택 앞에 도착해 마차에서 내리자, 온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용인들은 고개를 숙인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지만 그들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사용인들은 고개를 숙인 채 움직이지 않았지만, 눈빛에는 단순한 궁금증을 넘어선 신기함과 낯섦이 묻어 있었다.
“정말 저분이야? 그… ‘아티’?”
“도련님이 첫눈에 반하셨다는 바로 그분?”
“세상에! 도련님이 여성분께 관심을 보이실 줄이야…”
그 수근거림과 시선이 그녀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지만, 아티니스는 속으로 깊게 한숨을 삼켰다.
“크흠.”
그때 맨 앞에 서 있던 집사가 크게 기침을 가다듬었다. 그 소리에 수근거림과 시선이 한 번에 사라졌다.
“세레스니타 아가씨, 어서 오십시오. 지금 막 대공자님께 전해 드렸으니 금방 오실 예정입니다. 우선, 응접실로 모시겠습니다.”
단정히 빗어 넘긴 머리칼, 매끈하게 다린 제복, 그리고 오랜 세월이 묻어나는 은은한 눈웃음을 지으며 포르투릭스가의 집사가 말했다.
그의 깔끔하고도 다정한 응대는 어색한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덜어 주었다.
그는 오랫동안 숙련된 동작으로 아티니스와 리리를 맞이하며, 차분하게 응접실로 발걸음을 이끌었다.
“세레스니타 아가씨를 맞이할 준비가 부족했습니다. 곧 시녀가 차를 가져올 겁니다. 도련님도 곧 오실 겁니다.”
집사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괜찮아요. 저희가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 모양이에요. 차는 괜찮습니다. 금방 갈 거거든요.”
금방 간다는 뜻밖의 말에 집사는 잠시 놀란 듯하더니 이내 다시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잠시 뒤, 문 바깥에서 낯익지만 이전보다 훨씬 낮고 단단해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 문이 벌컥 열리며 대공자가 들어왔다.
“오랜만이야, 아티니스 영애. 내 청혼서는 마음에 들었나 보네? 이렇게 직접 찾아오다니.”
능글맞으면서도 다정하고 예의까지 갖춘 말투로 그가 말했다.
그는 성큼성큼 아티니스가 앉아 있는 자리까지 다가왔다.
“포르투릭스 대공자…님…어?”
아티니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려다 순간 멈칫했다.
삼 년 만에 마주한 그는 훌쩍 성장해 있었다.
기억 속 그 소년은 어느새 어른이 되어 있었다.
일어나 마주한 높이는 그의 얼굴이 아니라 넓은 가슴팍이었다.
하지만 세이런의 얼굴을 보고 있자 웃음은 금세 사라졌다.정말로 방법을 몰라 찾아온 얼굴이었다.이사벨라는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했다.‘세이런, 그 세레스니타 백작 영애를 진심으로 좋아하는구나.’말수가 적고 냉정하기로 유명한 세이런이었다. 언제나 혼자서 일을 해결하며, 남에게 도움을 구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그런 사람이 겨우 한 사람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몰라 자신을 찾아왔다.그것만으로도 어떤 고백보다 그의 마음이 선명하게 느껴졌다.“음…..”이사벨라는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말했다.“일단 세이런은 연애라는 감정 자체를 거의 모르잖아요.”세이런의 눈썹이 꿈틀했다.“거의가 아니라 아예 모른다고 하려던 건 아니지?
이사벨라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세이런의 모습을 긍정으로 받아들이고 팔짱을 끼며 말했다.“이름은 알아요?”잠시 침묵하던 세이런이 입을 열었다.“아티…”“아티요? 들어본 적 없는 것 같은데.”“.... 애칭인 것 같더군.”이사벨라가 눈을 깜빡였다.“잠깐만요. 그럼 본명도 모르고, 어느 가문의 영애인지도 모르는 거예요?”“지금 찾고 있어.”“그걸 어떻게 찾아요?”이사벨라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얼굴은 제대로 기억하고 있어요?”세이런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황태자 책봉식에 다녀온 그날 이후로, 세이런이 이상해졌다.처음에는 이사벨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가 며칠쯤 멍하니 있는 것이야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왜냐하면 세이런은 원래 말이 없고 표정도 없는 사람이었다.하지만 그게 평범한 일이 아니라는 걸 며칠이 지나서야 알았다.세이런이 직접 마리카이드 후작가에 찾아왔다.그것도 데런을 보러 온 것이 아니라, 이사벨라를 만나기 위해.“세이런? 지금 오라버니는 저택에 안 계시는데요.”“알아. 데런 보러 온 거 아니야.”늘 차갑던 세이런이 오늘은 이상했다. 이사벨라는 그 눈빛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챘다.“무슨 일 있어요?”“... 미안해. 약혼은 없던 일로 하자.”“... 네?”
“만약 내가 다른 머리색으로 태어났다면… 어머니도 나도 지금까지 살아남지 못했을 거야”세이런은 숨을 삼켰다.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충격이 밀려왔다. 황태자라는 자리 아래에 이런 이야기가 있을 줄은 몰랐다. 이건 황실의 극비밀이었다.“그때, 네가 내 방에 왔을 때. 어머니를 만나고 오는 길이었어.”“왜 몰래 만나는데?”“... 어머니가 나를 데리고 도망가려다 들켰거든. 그래서 황제가 어머니를 아무도 없는 탑에 가뒀어… 그리고 아무도 만나지 못하게 해. 그래서 몰래 어머니를 만나러 가.”세이런은 황태자면서도 그런 어두운 배경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세이런은 꾹 다문 입을 열어 약속했다.“비밀 지켜줄게.”세이런은 클라루스를 바라보며 강하게 흔들림 없이 말했다.
연무장에서의 대련 이후로 클라루스는 세이런을 마주칠 수 없었다.하루 머물기로 했는데 만찬도 대공과 단둘이 해야 했고, 대공은 세이런의 사정에 대해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그 모든 상황이 클라루스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하기에 충분했다.‘뭔가 숨기고 있어.’그 확신이 들자, 그는 결국 그날 저녁 아무도 모르게 세이런의 방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조용한 복도를 지나 세이런의 문 앞에 선 그는 조심스럽게 노크했다.“세이런. 나야, 클라루스.”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마치 방 안에 아무도 없는 듯했다.그러나 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 틈 사이로 창백한 얼굴의 세이런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마에는 식지 않은 열기가 느껴졌다.“야, 너… 괜찮아?”클라루스는 그를 보고 놀랐다.“조용히 해.”
제국에서 돌아온 지 몇 주도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 예상치 못한 손님이 포르투릭스 대공가에 나타났다.“왜 오셨죠?”세이런은 무심하게 말했다. 그의 말투엔 귀찮음이 잔뜩 묻어 있었다.억지로 손님맞이를 하고 있다는 게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표정이었다.그가 서재에서 읽고 있던 책을 덮어두고 나와 맞이해야 했던 손님은 다름 아닌 클라루스였다.“네가 놀러 와도 된다고 했잖아.”당당하게 웃으며 클라루스는 같이 놀 기대에 찬 눈으로 말했다. 세이런은 잠시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정말… 금방 놀러 오셨네요.”말투에는 어이가 없다는 기색이 고스란히 묻어났다.“왜? 오늘은 바빠?”“네... 아뇨.”세이런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어서오세요.”
“왜 이렇게까지 하시죠?”아티니스의 목소리에는 불편함과 억눌린 분노가 섞여 있었다.세이런은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차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잠시 생각에 잠긴 뒤 조용히 입을 열었다.“나는 그 이유를 알아. 그리고 도와줄 수 있어.”“그 말도... 병약하다는 것도, 전부 거짓말이죠?”아티니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전 오늘 거절하러 온 거예요. 그리고 비밀을 지켜준다고 한 말… 끝까지 지켜주세요. 전 그걸 확인하러 온 거예요.”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등을 돌렸다.이곳에 더 머무르는 것은 위험하다고 느껴졌다.알아
생각지도 못한 큰 키에 아티니스는 고개를 살짝 들어야만 했다. 그의 가슴팍 너머로 올라간 시선 끝에서 마주한 것은 여전히 보석처럼 빛나는 짙은 자주빛 눈동자였다.‘여전히 잘생겼네… 잘생… 기면 안 되는데. 거절해야돼!’그와 시선이 딱 마주치자, 아티니스는 순간 목적을 까먹을 뻔했다.당황한 그녀는 뒷걸음치며 거리를 두었다.“청, 청혼서가 마음에 들긴요. 협박이나 마찬가지였잖아요!”말을 하려다 목소리가 꼬이고, 톤도 이상해졌다.“대공자의 청혼서를 협박이라니. 너무한걸.”당황한 그녀와 달리, 그는 장난기 어린 미소로 되물
둘은 물에 흠뻑 젖은 채 서로를 바라봤다. 아티니스는 다시 넘어지지 않게 두 손으로 몸을 지탱하며 그 소년을 내려다보았고, 소년은 팔꿈치로 몸을 일으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은 잠시 동안 서로에게서 눈을 때지 못했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눈빛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ㅁ… 뭘 봐.”정적을 깨는 차가운 말투였다. 그 말에 아티니스는 눈을 깜빡였다. 잠시나마 그에게서 느꼈던 환상이 살짝 깨지는 듯했지만 그의 얼굴은 쉽게 그 환상을 깨지 못했다. 그의 목소리 또한 그랬다. “옷 다 젖어 버렸네
부드럽게 스며드는 햇살과 달리, 아티니스 세레스니타의 표정은 흐린 하늘처럼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말없이 긴 숨을 내쉬며 그녀는 마치 잘못을 저지르고 혼나러 가는 아이처럼 무거운 발걸음으로 마차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아티… 정말 혼자 가야겠니? 엄마가 같이 가 준다니까….”아티니스 뒤를 따라 나온 릴리스 백작부인의 애타는 목소리에 이어,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던 글라디 백작도 걱정 어린 눈으로 딸을 바라보았다. 나란히 선 두 사람은 도무지 딸을 혼자밖에 내보낼 마음의 준비가 안 된 모양이었다.‘3년전부터 외출은 허락해 주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