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생각지도 못한 큰 키에 아티니스는 고개를 살짝 들어야만 했다.
그의 가슴팍 너머로 올라간 시선 끝에서 마주한 것은 여전히 보석처럼 빛나는 짙은 자주빛 눈동자였다.
‘여전히 잘생겼네… 잘생… 기면 안 되는데. 거절해야돼!’
그와 시선이 딱 마주치자, 아티니스는 순간 목적을 까먹을 뻔했다.
당황한 그녀는 뒷걸음치며 거리를 두었다.
“청, 청혼서가 마음에 들긴요. 협박이나 마찬가지였잖아요!”
말을 하려다 목소리가 꼬이고, 톤도 이상해졌다.
“대공자의 청혼서를 협박이라니. 너무한걸.”
당황한 그녀와 달리, 그는 장난기 어린 미소로 되물었다.
“그런데 반말하던 예전과 달리, 왜 격식을 차리지?”
그의 말에 아티니스는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 대공자님이란 걸 알게 된 이상, 예의는 갖춰야죠.”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일단 앉자. 그리고 영애의 하녀는 밖에서 기다리는 게 좋겠어.”
그 말에 아티니스는 리리를 힐끔 바라보았다.
리리는 그녀의 마법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이지만, 지금 대공자에게 들켰다는 사실까지는 몰랐다.
아티니스는 리리를 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리리를 방 밖으로 내보냈다.
응접실에는 오롯이 두 사람만이 남았다.
‘으… 둘만 있으려니까 더 어색해! 하지만 이건 꼭 없던 일로 만들어야 해…!’
공기까지 말라버린 듯한 긴장 속에서,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가문 이름도 모른 채, ‘아티’란 애칭 하나로 영애를 찾았어.”
“… 그걸 3년씩이나 찾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포기할 줄도 알아야죠.”
아티니스가 단호히 반박하자,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미소를 지었다.
“찾는 데 삼년이 걸린 게 아니야. 이렇게 직접 만나기까지가 삼 년 걸린 거지. 초대장도 여러 번 보냈지만, 매번 거절 아니면 무응답이었으니까. 그래서 방법을 바꿔 본 거야.”
아티니스는 초대장을 받은 기억이 없었다.
‘초대장…? 설마 엄마, 아빠가 내게 보여주지도 않고 거절하신 건가?’
세레스니타 백작부부는 과보호를 넘어 이상하게도 아티니스가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걸 두려워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초대장은 거절이지만, 청혼서는 괜찮은 거였군. 진작 보낼 걸 그랬어.”
“그게 아니에요. 오늘 거절하러 온 거예요!”
그녀가 단호히 외치자, 그는 느긋한 얼굴로 되물었다.
“왜? 포르투릭스 대공가 청혼서인데? 백작가 영애에겐 나쁘지 않은 조건일 텐데.”
“전 부귀영화 때문에 결혼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전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 거고요…. 그리고…”
아티니스는 잠깐 시선을 피했다가 단호하게 덧붙였다.
“저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좋아요.”
그녀가 굳이 나이를 따지지는 않았지만, 거절할 핑계를 만들어내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눈치 챘는지, 아니면 상관없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럼 나를 사랑하면 되겠네. 난 영애보다 나이가 많으니.”
“...... 네?”
“말했잖아, 그때. 왜 영애가 누나라는 거냐고. 내가 어릴 땐 또래보다 많이 작았을 뿐이야.”
그는 너무도 당연한 듯 말했다.
아티니스는 깜짝 놀라 입을 벌린 채 멈춰 섰다.
‘그럼… 정말 나보다 나이가 많은 거야? 어릴 땐 작았다 해도 삼 년 사이에 이렇게 사람이 변할 수도 있는 거야?’
“실망이야. 난 영애를 알아가려고 열심히 노력했는데, 영애는 나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네. 이름은 알고 있겠지?”
그녀가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그는 실망이라는 말을 흘리면서도 얼굴에는 그 어떤 실망도 보이지 않았다.
“… 좋은 의도로 제 정보를 모은 건 아니셨잖아요.”
“흐음, 내 이름도 모르는구나.”
그 말은 사실이었다.
아티니스는 올 때 내내 거절할 말만 골라 연습하느라, 그의 정보를 알아볼 생각도 못 했다.
“그럼 그것도 모르고 왔겠네.”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네?”
“결혼할 사이인데, 이름 정도는 알아야지. 세이런 포르투릭스야.”
그리고 세이런은 말을 덧붙였다.
“내가 영애를 찾은 건 ㄴ……”
잠시 말을 멈춘 그는 생각을 고치듯 말을 이어갔다.
“단순한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야.”
“... 거절하러 왔다니까요.”
아티니스가 더 단호하게 말했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이었다.
“내가 몸이 좋지 않아. 태어날 때부터. 겉으론 멀쩡해 보여도, 종종 심장이 조여와. 숨 쉬는 것도 벅찰 때가 있어. 클수록 생명의 불꽃이 조금씩 사그라드는 느낌이야.”
아티니스는 자신을 붙잡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거라 생각했지만, 그의 담담함은 오히려 진심처럼 느껴졌다.
“... 그걸 왜 저한테 말씀하시는 건데요?”
“흠… 음.... 결혼 상대를 골라야 하는데, 아무도 나 같은 병약한 사람과 결혼하려 하지 않더라고.”
“대공자라면 누구든 줄을 설 텐데요?”
그 말에 세이런은 미묘하게 웃었지만, 감정은 실리지 않았다.
“그런데 영애는 왜 거절하지?”
“왜 꼭 저여야 하죠?”
“영애는 특별하니까.”
“전 특별하지 않아요.”
“나한텐 특별해.”
마지막 말은 정말 진심같이 들렸다.
세이런은 단호하게 거절하는 아티니스를 바라보며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그가 입을 열었다.
“영애 부모가 왜 영애를 그렇게 꽁꽁 숨기며 살게 했는지, 알아?”
그 말에 아티니스의 표정이 단숨에 굳었다.
“... 제 부모님까지 조사하신 건가요?”
“제가 알아요. 제가 약속할게요.”신들의 물음에 아티니스는 망설이지 않았다.오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그 끝에. — ...좋다. —— 충분한 죄값을 모두 치른 뒤라면. —— 그에게도 마지막 기회를 허락하겠다. —아티니스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감사합니다!”그리고 그녀는 아무도 없는 어두운 허공을 향해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이건 신들이 네게 허락한 마지막 기회이자, 내가 너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야. 긴 시간을 지나더라도 괜찮아. 죄를 모두 뉘우친 뒤에는… 꼭 다시 돌아와.”신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어딘가에서 듣고 있을 그에게 하는 말이었다.그리고는 작게 미소를 머금은 채 입술을 열었다.“벨루알, 울지 마.”처음과 두 번째 삶에서 그에게 건넸던 말이었다.그를 기억하고 있는 순간에 심장을 빼앗겼던 그 삶에서, 아티니스는 그의 얼굴을 보았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져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던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던 벨루알. 그것은 원망도, 용서도 아니었다.오랜 시간을 함께했던 한 사람에게 건네는 마지막 인사.그리고 언젠가, 모든 죄를 뉘우친 뒤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작은 약속이었다.그 순간.빛 속에서 무언가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바람처럼. 마치 대답처럼.다시 거대한 목소리가 공간에 울려 퍼졌다.— 이제 시간이 되었다. —— 창조주 중 하나인 나, 레이토르가 네게 인간의 생명을 다시 불어넣어 주리라. —“정말 감사합니다!”아티니스는 두 손을 모아 간절하게, 진심을 담아 감사를 표했다. 그 순간 어둠 속에서 서서히 눈부신 빛이 흘러나왔다. 공간이 빛으로 가득 차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환했다. 강렬하지만 따뜻한 빛이었다. 차갑지 않았다. 무섭지 않았다.— 인간 아티니스여, 네게 신들의 축복이 임할 것이다. —그리고 빛이 그녀를 완전히 감쌌다.***세이런은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아티니스 곁에 누워 있었다.이렇게 누워 있다가 조용히 그녀를 따라가려는 듯.그런데 순간, 공기 속에 달콤한 향이 퍼
아티니스가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것은 오로지 어둠뿐이었다.예전에도 한 번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그리고 전생에서도. 빛도 땅도 없이, 위아래조차 구분되지 않는 캄캄한 공간. 그때와 같은 곳이었다. 그러나 그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두렵지 않았다.그때 머릿속을 울리는 듯한 맑은 음성들과 함께 눈부신 빛이 번졌다. 너무 눈이 부셔 눈을 뜨지 못한 채, 울리는 소리만 들었다.— 드디어 네 생명력이 하나로 모였다. —— 그리고 벨루알도 멈출 수 있었다. —아티니스는 말없이 그 말을 들었다.세이런이 이제는 건강한 몸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동시에,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가슴 한쪽이 저릿하게 아려 왔다.하지만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그를 살릴 수 있는 기회를 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전생들에서 절 챙겨 준 주변 사람들이 이번 생엔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해줘서도 고마워요.”
모든 것이 끝났다. 그러나 세이런은 조금도 기뻐하지 않았다.그는 흐릿하고 초점 없는 눈으로 다시 아티니스 곁으로 걸어갔다.말없이 그녀를 두 팔로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힘없이 늘어진 그녀의 머리가 그의 어깨 위로 천천히 흘러내렸다.피로 물든 발걸음이 적막한 공간에 무겁게 울렸다.“세이런….”뒤에서 클라루스가 망설이듯 그를 불렀다.“어딜 가는 거야?”세이런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채, 고개만 아주 조금 돌린 채 나지막이 대답했다.“… 아티가 좋아하던 곳.”그것이 전부였다. 그는 다시 천천히 걸음을 내딛었다.마치 살아갈 이유를 잃은 사람처럼.그에게 세상이 너무나도 조용하게 느껴졌다.
푸른빛이 세이런의 몸을 감싸며 거세게 일렁였다. 천천히 그의 눈꺼풀이 올라갔다.그리고 그의 첫눈에 들어온 것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울고 있던 아티니스였다.그러나 그녀는 그의 품 위에 힘없이 기댄 채 미동도 없었다.“...아티?”세이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를 조심스럽게 흔들었다.“아티…?”그러나 돌아오는 건 아무 반응도, 아무 숨결도 없었다.“...아티니스. 아티니스!!!”목이 찢어질 듯한 외침이 무너져 가는 공간 속으로 파고들었다.그러나 돌아온 것은 적막뿐이었다.세이런의 손끝이 떨렸다.뜨거운 눈물이 흘러 그녀의 창백한 뺨 위로 떨어졌다.&
아티니스는 무릎이 돌바닥에 부딪히는 충격도 느끼지 못한 채, 쓰러져 있는 세이런을 품에 끌어안았다.세이런은 이미 너무 많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복부를 관통한 창이 만든 상처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흘러나왔고, 한계까지 끌어올린 오러는 그의 생명력마저 태워 버린 듯 몸 곳곳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그의 숨결이 점점 더 가늘어졌다. 배에는 깊숙이 창이 박혀 있었고, 이미 한계까지 짜낸 오러로 그의 몸은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안 돼…. 안 돼, 세이런….”아티니스가 떨리는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쌌다. 눈물이 뺨을 타고 그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제발… 또다시 날 두고 가지 말아요.”세이런은 희미하게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 끝에 울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마치 데자뷰처럼 보이는 장면이었지만 정확히 알 수 없었다.“아티… 도망가. 어서…”그의
자신을 기억하고 있음에도 망설임 없이 공격을 한 아티니스를 보며, 벨루알은 그 자리에서 굳은 듯 움직이지 못했다.“….!”붉은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벨루알, 이제는 네가 원하는 대로 하게 놔둘 수 없어.”아티니스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그런 그녀를 굳은 채 잠시 바라보던 벨루알의 입가가 천천히 일그러졌다.“...크.”낮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크흐… 하하….”웃음은 점점 커져 갔다.그러나 그 웃음에는 기쁨이 없었다. 허탈함과 상처, 그리고 체념이 뒤섞인 웃음이었다.기억하면서도 공격하다니. 생각보다 더 가슴이 저려 왔다.
청혼서라는 말에 아티니스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일면식 없는 대공가에서 결혼을 제안하다니. 게다가 시골 영지에 틀어박혀 살아온 자신을 어떻게 알고 보낸 건지 아티니스는 의아했다. “설마… 예전에 황실 파티에서 우리 아티를 본 건 아닐까요?”백작부인이 조심스레 말했다. “시골 영지 영애인 제게 누가 관심을 보였겠어요… 저도 관심 없었고요.”“무슨 소리야. 우리 아티의 아름다움은 태어날 때부터였단다. 세상을 밝혀주는 따스한 아침 햇살 같은 주홍색 머리카락에, 릴리스를 쏙 빼닮은 아메랄드를 담고 있는 두 눈동자. 그 무도회에
둘은 물에 흠뻑 젖은 채 서로를 바라봤다. 아티니스는 다시 넘어지지 않게 두 손으로 몸을 지탱하며 그 소년을 내려다보았고, 소년은 팔꿈치로 몸을 일으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은 잠시 동안 서로에게서 눈을 때지 못했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눈빛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ㅁ… 뭘 봐.”정적을 깨는 차가운 말투였다. 그 말에 아티니스는 눈을 깜빡였다. 잠시나마 그에게서 느꼈던 환상이 살짝 깨지는 듯했지만 그의 얼굴은 쉽게 그 환상을 깨지 못했다. 그의 목소리 또한 그랬다. “옷 다 젖어 버렸네
부드럽게 스며드는 햇살과 달리, 아티니스 세레스니타의 표정은 흐린 하늘처럼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말없이 긴 숨을 내쉬며 그녀는 마치 잘못을 저지르고 혼나러 가는 아이처럼 무거운 발걸음으로 마차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아티… 정말 혼자 가야겠니? 엄마가 같이 가 준다니까….”아티니스 뒤를 따라 나온 릴리스 백작부인의 애타는 목소리에 이어,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던 글라디 백작도 걱정 어린 눈으로 딸을 바라보았다. 나란히 선 두 사람은 도무지 딸을 혼자밖에 내보낼 마음의 준비가 안 된 모양이었다.‘3년전부터 외출은 허락해 주셨
“안 되겠어요. 사람을 부를게요. 집사든 누구든….”아티니스가 자리에서 일어서 도움을 청하러 가려 하자, 세이런이 힘겹게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아니야… 소용없어… 그들이 와도… 별다른 방법이 없어… 조금만... 쉬면 괜... 찮아.”그 말에 아티니스는 잠시 멈칫했다.‘그럼, 정말… 혼자서 이렇게 견디는 거야?’아티니스는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따뜻한 손이 세이런의 차가운 손끝에 닿았다.그리고 아티니스는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이 마법이 존재하는 이유가 있다면… 제발 이 사람의 고통을… 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