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아가씨, 그럼 약혼만 하는 건 어때요? 약혼은 결혼보다 깨기도 쉽고, 꼭 같이 지내야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형식적인 관계로만 유지할 수도 있고요.”
리리의 말을 듣는 순간, 아티니스의 가슴이 한결 가벼워지는 듯했다.
그녀는 밝게 웃으며 리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리리, 넌 정말 천재야! 좋아, 그럼 따로 지내는 약혼을 전제로 제안해 볼게.”
아티니스는 일이 생각보다 잘 해결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 평온은 오래 가지 못했다.
저녁 식사 자리.
아티니스는 수프를 뜨던 숟가락을 든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
세이런의 단 한 문장 때문이었다.
“… 지금 뭐라고 하셨죠?”
아티니스는 최대한 웃는 얼굴로 되물었지만, 입꼬리는 부자연스럽게 떨렸고 시선은 흔들렸다.
세이런은 태연하게 다시 대답해 주었다.
“결혼이어야 하고, 대공작에서 지내는 조건이야.”
분명 식사 전까지만 해도, 아티니스는 속으로 싱글벙글 웃으며 외치고 있었다.
‘청혼서도 거절하고, 비밀도 지키고. 아주 좋아!’
모든 게 깔끔하게 끝났다고 믿었는데.
그런데 ‘결혼이여야 하고, 대공작에서 지내는 지내는 조건이야’ 라니!
그녀의 작은 희망이 산산조각났다.
아티니스는 숟가락을 든 채 그대로 석상처럼 굳었다.
“그런 말... 없었잖아요.”
억울함이 가득한 목소리가 조심스레 흘러나왔다.
그녀의 눈동자는 당황함에 흔들렸다.
“난 청혼서를 보냈고, 결혼하면 같이 사는 게 맞잖아. 그걸 조건이라고 부르는 쪽이 더 이상하지.”
세이런은 정말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평온하게 말했다.
“그럼 청혼서를 거절하고, 비밀을 끝까지 지키는 선택지는요?”
“이제는 안 돼. 영애도 내 비밀을 알아버렸잖아. 더더욱 그냥 보내줄 수 없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아티니스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건 당신이 보여준 거잖아요! 내가 보자고 한 게 아니라고요! 아… 잠깐, 나도 내 마음대로 보여주긴 했지…아아!’
머릿속에서 혼자 끝없는 말싸움을 벌이느라 표정이 시시각각 바뀌는 아티니스를 보며, 세이런은 웃음을 참느라 입꼬리를 미세하게 떨었다.
하지만 이내 참지 못하고 웃음이 작게 터져 버렸다.
그의 모습에 그를 오래 곁에서 지켜본 사용인들은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하지만 곧, 세이런은 언제 웃었냐는 듯 웃음을 거뒀다.
그의 시선이 아티니스에게 고정되었다.
“곁에 있어야 내가 지켜줄 수 있잖아.”
그 한마디는 마치 작은 돌이 잔잔한 호수에 떨어지듯, 방 안의 공기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사용인들은 그 말에 놀라 눈이 튀어나오고 몸에 소름이 돋는 듯했다.
아티니스 역시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말했다.
“병약한 사람이 누굴 지킨다는 거예요.”
“이제 내가 아프다는 건 믿어 주는 건가?”
“... 이—...”
입을 열다 말고, 결국 아무 말도 못한 채 아티니스는 고개를 저었다.
“음식은 입에 맞아?”
“... 네, 정말 맛있어요.”
세이런의 느긋한 질문에 아티니스는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하지만 음식이 맛있었던 건 사실이었다.
눈앞에 놓인 음식들은 황궁 못지않은 고급스러움과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듯한 풍미가 가득한 음식들이었다.
“여기서 지내면 매일 이렇게 해 줄 수 있는데.”
턱을 괸 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는 은근한 유혹이 담겨 있었다.
“사양할게요.”
아티니스가 단호하게 잘라내자, 두 사람 사이에 흐르던 미묘한 기류는 다시 팽팽한 긴장으로 변했다.
그렇게 대화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채 식사가 끝나갈 무렵, 세이런이 부드럽게 제안했다.
“잠깐 산책하면서 이야기할까?”
“... 좋아요.”
아티니스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세이런이 자연스레 팔을 내밀었다.
그녀가 잡을까 말까 망설이자 그가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팔 떨어지겠는데?”
결국 아티니스는 마지못해 그의 팔에 손을 얹었다.
밖은 시원한 밤공기와 함께, 만개한 꽃들이 정원을 은은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고요 속에서 세이런이 문득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면 영애가 나랑 결혼해줄까?”
그 말에 아티니스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봤다.
“그럼 이 결혼으로 대공자님이 얻고자 하는 걸 정확히 말씀해 주세요. 더 이상 장난처럼 넘기지 말고요.”
“난 계속 진심이었어.”
아티니스는 아닌 거 다 안다는 듯 그를 살짝 노려보았다.
한참을 망설이던 세이런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 혹시, 크레아티니오스 전설을 들어본 적 있어?”
“아니요. 무슨 전설인데요?”
“...... 음…. 그냥 마법사가 나오는 전설이야.”
길게 머뭇거린 그가 아직도 뭔가 감추고 있다는 걸 그녀는 눈치챘다.
“그게 저희의 결혼이랑 무슨 상관인데요?”
“....... 마법… 처럼 영애 옆에 있으면, 그러니까.... 그… 숨 쉬기가 편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야.”
“... 네?”
아티니스는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표정이었다.
“혹시… 마법이 정말 대공자님의 병을 낫게 해 줄 거라고 믿는 건가요?”
“그건 아니야. 마법으론 낫지 않는단 거 알아.”
“그럼, 왜…?”
“그냥… 영애 옆에 있으면 괜찮아지는 기분이야.”
아티니스는 이해할 수 없었다.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것 같았지만 마지막 말은 진심 같았다.
두 사람은 말을 타고 쉼 없이 달려, 가능한 한 빠르게 제국에 도착했다.황실의 문 앞에 이르렀을 때, 세이런이 아티니스 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이며 낮게 속삭였다.“아티, 데런에게 말해 두었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대공작으로 가지 말고 마리카이드 후작가로 가. 아버지와 내가 없는 대공작보다 거기가 훨씬 안전할 거야.”그 말에 아티니스의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제발, 그런 일은 없기를—그녀는 두 손을 꼭 맞잡았다.‘무슨 일이 있어도… 아버님과 세이런이 나 때문에 다치게 해서는 안 돼.’아티니스는 그렇게 마음속으로 다짐했다.마치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황실에 들어서기도 전에 안내인이 나타나 고개를 숙였다.“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그를 따라 높고 긴 복도를 따라 걸을 때, 구두가 대리석 바닥에 닿는 소리가 음산하게 메아리쳤다.철컥.무거운 문이 열리며 차가운 공기가 알현실 안에서 쏟아져 나왔다.황실의 알현실은 색을 잃은 듯 음울했다.그리고 그 한가운데—감금되었다던 가우디 대공이, 어디하나 다친 곳 없이 서 있었다.“세이런, 새아가…? 대공의 얼굴이 굳어졌다.“왜 여기에…?!”세 사람의 시선이 엇갈렸다.명백한 함정이었다. 가우디 대공의 시선이 곧장 황제 옆에 서 있던 노크스 후작에게로 향했다. 그의 눈빛이 살기로 번뜩였다. 당장이라도 후작의 목을 비틀어 버릴 듯한 분노였다.그 시선을 받은 노크스 후작은 순간 움찔했지만, 이내 황제가 옆에 있다는 듯한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세이런의 눈빛 또한 얼음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자줏빛 눈동자에 짙은 어둠이 스며들었다.아티니스는 두 사람의 그 표정을 처음 보았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이미 이곳까지 들어와 버린 이상 그냥 돌아갈 수 없었다. 세이런은 곧장 몸을 움직여 아티니스가 황제의 시야에 잡히지 않도록 그녀를 등 뒤로 가렸다.낮고 무거운 발소리가 울리며 세이런과 아티니스는 대공의 옆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두 사람은 천천히 머
음악이 흐르고, 종이등 아래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 틈에서 마주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천천히 발을 맞췄다.아티니스는 즐거운 듯 환하게 웃고 있었고, 세이런은 그런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함께 춤을 추었다.시선에도, 생각에도, 마음에도— 그녀뿐인 채.‘아티. 나의 어두운 과거는 네가 평생 몰랐으면 좋겠어.’‘수많은 의사를 찾았었지만, 돌아오는 말은 늘 같았어. 고칠 수 없다, 방법이 없다. 그 말을 듣는 게 너무 싫었어. 또래보다 더디게 자라는 몸. 점점 힘을 잃어가는 육체. 날 보며 수군대는 시선들이, 어린 나에겐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어.’‘그래서 생각했었지. 그럴 바엔… 차라리 빨리 끝내는 게 낫지 않을까. 난 일부러 오러를 써 가며, 스스로 아픔을 불러들였어. 그러면 빨리 죽을 수 있을 줄 알았거든. 하지만 그럴수록 몸만 더 성장을 멈춘 듯 자라지 않았고 피폐해져만 갔지.’‘결국 죽지 못했어.’‘그날 분수대에 있었던 건, 처음으로 아버지의 눈을 피해, 세상 모든 시선을 피해 혼자일 수 있었던 날이었어. 분수대를 바라보며 생각하고 있었지. 얼마나 오래 얼굴을 물에 묻고 있어야 이 심장이 멈출까…?’‘그 순간, 네 목소리가 들렸어.’‘같이 분수대에 빠졌던 날. 네 눈동자를 마주친 순간, 나는 빠져나오지 못했어. 깊은 숲처럼, 숨 쉴 수 없을 만큼 고요하고 선명한 그 눈빛 속에— 나는 완전히 갇혀 버렸어.’‘나처럼 특별한 능력을 가진 너는, 나와 달리 너무나도 빛났어. 그래서 단 한 번만이라도, 다시 보고 싶었어.’‘수소문해서 널 찾았고, 다시 만날 날을 기다렸어. 죽어가던 심장이 오랜만에 설렘을 느꼈어. 하지만 돌아오는 건 늘 거절뿐이었어. 남들과 다른 이 몸이 흉측해서, 네가 나를 거절한다고 생각했어.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었어. 곧 죽더라도, 너의 그 환한 미소를 다시 한 번 보고 싶었거든.’‘그래서 자해를 멈췄고, 먹어도 소용없을 줄 알면서도 몸에 좋다는 음식과 쓴 약들을 삼켰고, 포기했던 훈련도 다시 시작했어. 그
“오— 팀 5 커플, 아주 달아오르고 있네요!”사회자의 외침에 아티니스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얼굴을 붉혔다.“저, 이제 내려 주세요.”조금만 더— 안고 있을 수 있었는데.세이런은 사회자를 힐끗 노려보다가, 결국 아티니스를 조심스럽게 내려주었다.곧 사회자가 목소리를 높였다.“마지막 게임은 ‘영혼의 파트너 퀴즈’입니다!! 서로 질문에 동시에 답해 맞추지 못하면 탈락!!”현재 남은 팀은 단 두 팀, 팀 1과 팀 5. 먼저 팀 1이 첫 번째 질문을 통과했다.그리고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아티니스와 세이런에게로 쏠렸다.“첫 번째 질문! 두 사람의 첫 만남 장소는? 하나, 둘, 셋!”“분수대!”“분수대.”
“와-! 세이런! 이것 봐요!”처음 보는 축제에 아티니스는 아이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눈에 들어오는 것마다 신기하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알록달록한 종이등이 하늘을 수놓고, 달콤한 향이 골목마다 가득 퍼진 거리.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노래소리가 어우러진 날이었다.그저 흔한 축제일 뿐인데도 아티니스는 모든 것이 마냥 특별하고 신기한 듯 즐거워했다.그리고 세이런의 눈에는 그 어떤 장식보다도 그녀가 더 눈부시게 보였다.“와, 이건 뭔가요? 냄새가 너무 좋아요.”아티니스가 꼬치 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추자, 세이런은 망설임 없이 가게 주인에게 말했다.“이거 하나 주세요.”곧 건네받은 꼬치에는 노릇하게 구워진 닭고기와 채소가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불에 살짝 그을린 윤기가 은은하게 빛났고, 고소한 향이 바람을 타고 코끝을 간질였다.아티니스는 한입 크게 베어 물더니, 눈이 동그래졌다.
저택으로 돌아온 후, 세이런은 잠시 집무실로 향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데런이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왔다.“찾았어?”세이런이 묻자, 데런은 고개를 끄덕였다.“이번에 새로 고용한 정원사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저희 기사들이 도착했을 땐, 이미 숨을 거둔 뒤였습니다. 독살로 보입니다.”데런의 보고에 세이런의 표정이 굳어졌다. 차가운 분노가 그의 눈동자를 가득 채웠다.“그 말은 노크스 후작이 우리의 결혼식 소식이 알려지기 전부터 이미 의심하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는 거군.”그가 한숨이 섞인 목소리로 내뱉었다.“그 자의 신분은?”“정원사라는 건 가짜였던 것 같습니다. 가족도 없고, 빈민가에서 데려와 신분을 위장시킨 것 같습니다. 진짜 그 이름을 가진 정원사를 찾아가 보니, 전혀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서류와 기록은 모두 진짜였지만, 사람만 바꿔치기되어 있었습니다.”“하—.”
젖은 흰 천이 살결에 바짝 달라붙어 세이런의 단단한 가슴과 선명하게 갈라진 복부의 근육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빗물에 젖은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물방울 하나하나가 지나치게 또렷해, 시선이 붙잡힌 채 쉽사리 떨어지질 않았다.‘어떻게… 몸이 저렇게 좋은 거지? 몸이 약하다면서….’“흠—, 언제 나를 덮치려나, 무섭운데.”세이런이 눈썹을 들어올리며 장난스럽게 물었다.“더, 덮치긴 누가 덮쳐요!”“엄청 뚫어지게 바라보길래.”“아, 아니거든요!”움찔하며 반박하는 그녀의 모습이 세이런의 눈에는 몹시 귀여워 보였다.쏟아지는 빗소리가 나뭇잎을 두드리는 사이, 차가운 공기가 두 사람의 젖은 피부를 스쳤다.아티니스의 몸이, 자각도 없이, 서서히 떨리기 시작했다. 그걸 알아챈 세이런은 잠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가 다시 그녀를 바라보며, 낮고 느리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