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둘은 물에 흠뻑 젖은 채 서로를 바라봤다.
아티니스는 다시 넘어지지 않게 두 손으로 몸을 지탱하며 그 소년을 내려다보았고, 소년은 팔꿈치로 몸을 일으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은 잠시 동안 서로에게서 눈을 때지 못했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눈빛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ㅁ… 뭘 봐.”
정적을 깨는 차가운 말투였다.
그 말에 아티니스는 눈을 깜빡였다.
잠시나마 그에게서 느꼈던 환상이 살짝 깨지는 듯했지만 그의 얼굴은 쉽게 그 환상을 깨지 못했다.
그의 목소리 또한 그랬다.
“옷 다 젖어 버렸네….”
“응? 어….”
아티니스가 말을 잇기 전에 소년은 젖은 옷을 털며 분수대에서 나왔다.
‘나한테 말하는 줄 알았네….’
그가 살짝 뒤돌아보다가 아티니스와 다시 한 번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그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아티니스도 그를 따라 물 밖으로 나왔다.
그녀의 화려하기만 하고 불편하던 드레스가 물을 잔뜩 머금은 채 무겁게 축 늘어졌다.
‘윽… 너무 무겁고 불편해… 엄마, 아빠가 수도에선 절대 마법 쓰지 말랬는데….’
백작가 저택 밖에서 마법 사용을 엄하게 금지하던 부모님의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 상태로 다시 무도회장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걸…. 흠….’
시선을 다시 소년에게로 돌려보니, 뒤돌아 젖은 옷을 탈탈 터는 소년의 귀가 빨개져 있는 게 보였다.
‘귀가 빨갛네… 옷이 젖어서 추운가 보다.’
자신의 잘못도 있었기에 아티니스는 잠시 고민했다.
“흠... 있잖아, 비밀을 지켜준다고 약속하면, 이 누나가 신기한 거 보여줄게.”
아티니스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소년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왜 반말이야? 누가 누나라는 거야?”
여전히 귀가 붉어진 채 내뱉는 소년의 말에 아티니스는 잠시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눈앞의 그 소년은 확실히 아티니스보다 키도 작고 어려 보였다.
“너도 반말하잖아. 그리고 누가 봐도 내가 누나로 보이는 걸.”
아티니스는 태연한 척 허리에 두 손을 얹고 어깨를 으쓱했다.
“... 그래서 뭘 보여준다는 건데?”
소년은 화제를 돌리려는 듯, 끝까지 무뚝뚝한 말투로 말했다.
아티니스는 귀여우니까 봐 준다는 듯 웃으며 그의 옷을 검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순간, 손가락 끝에서 푸른빛이 스치듯 빛나더니, 소년의 옷이 순식간에 물기 하나 없이 뽀송하게 말라버렸다.
“뭐…뭘 한 거야?!”
놀란 소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티니스를 바라봤다. 어느새 아티니스의 옷도 말끔히 말라 있었다.
“쉿! 비밀 지켜줘야 해. 알았지?”
“네가 누구인지 알려주면, 비밀 지켜줄게.”
잠시 망설이던 아티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티ㄴ… 아티야. 넌?”
“가문은?”
일부러 성을 말하지 않았건만, 소년은 대뜸 가문을 물었다.
“으… 이름 알려줬잖아! 비밀은 지켜줘야 해!”
아티니스는 더 말려들기 전에 얼른 자리를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지켜줄게.”
“고마워. 그럼 난 이만 갈게. 부모님이 찾으실 수도 있거든. 너도 조심히 가!”
약속을 지켜줄 거라고 굳게 믿고 안심한 아티니스는, 환희를 웃으며 손을 흔들고 인사를 하고는 재빨리 등을 돌려 무도회장으로 달려갔다.
그녀의 첫 수도 여행이자 황실 무도회는 그렇게 무사히 아무 일 없이 마무리된 듯했다.
아니, 그랬다고 생각했다.
그랬다면 삼 년이 지난 지금, 아티니스가 서 있는 곳은 바로 그의 저택 앞일리가 없었을 테니까.
바스락.
그녀의 손에 구겨 짓듯 들려 있는 편지가 며칠 전의 일을 되새겨 주듯 소리가 났다.
***
[며칠 전 - 백작가]
“아빠! 부르셨어요?”
“우리 아티~ 또 신나게 뛰어놀다 왔구나.”
글라디 백작은 환한 얼굴로 딸을 끌어안더니, 두 뺨을 부비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야말로 딸바보 그 자체였다.
“당신, 아티를 자꾸 너무 어린아이처럼 대하지 말래도.”
딸의 옷에 잔뜩 묻은 나뭇잎을 본 릴리스 백작부인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그리고 아티, 엄마가 나무는 위험하다고 하지 않았니?”
“별로 높지 않은 나무였어요. 그리고 마법으로…”
“아티!”
백작부인은 저택 밖에서 마법을 썼다는 말에 흠칫 놀랐다.
“아무도 없어서 썼어요. 진짜예요.”
아티니스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하며 엄마에게 안겼다.
활발한 이 딸을 어찌 통제하겠냐는 듯 백작부인은 미소를 지으며 딸의 애교에 넘어가 주었다.
하지만 화기애애한 분위기와는 달리, 부모님의 얼굴에는 어딘가 무거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 모습을 눈치챈 아티니스가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일이 있으세요?”
한동안 말을 아끼던 백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티… 혹시 전에 포르투릭스 대공자와 만난 적 있니?”
“아뇨? 처음 들어보는 가문인데요?”
수도 귀족들과 교류가 거의 없었던 시골 영지 백작가의 아티니스는 그런 이름조차 생소했다.
“이것도… 거절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백작부인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남편에게 속삭였다.
“왜요? 뭐가 왔나요?”
더 궁금해진 아티니스가 부모님께 물었다.
“... 포르투릭스 대공가에서 너에게 청혼서를 보냈단다.”
“네?!”
황태자 책봉식에 다녀온 그날 이후로, 세이런이 이상해졌다.처음에는 이사벨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가 며칠쯤 멍하니 있는 것이야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왜냐하면 세이런은 원래 말이 없고 표정도 없는 사람이었다.하지만 그게 평범한 일이 아니라는 걸 며칠이 지나서야 알았다.세이런이 직접 마리카이드 후작가에 찾아왔다.그것도 데런을 보러 온 것이 아니라, 이사벨라를 만나기 위해.“세이런? 지금 오라버니는 저택에 안 계시는데요.”“알아. 데런 보러 온 거 아니야.”늘 차갑던 세이런이 오늘은 이상했다. 이사벨라는 그 눈빛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챘다.“무슨 일 있어요?”“... 미안해. 약혼은 없던 일로 하자.”“... 네?”
“만약 내가 다른 머리색으로 태어났다면… 어머니도 나도 지금까지 살아남지 못했을 거야”세이런은 숨을 삼켰다.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충격이 밀려왔다. 황태자라는 자리 아래에 이런 이야기가 있을 줄은 몰랐다. 이건 황실의 극비밀이었다.“그때, 네가 내 방에 왔을 때. 어머니를 만나고 오는 길이었어.”“왜 몰래 만나는데?”“... 어머니가 나를 데리고 도망가려다 들켰거든. 그래서 황제가 어머니를 아무도 없는 탑에 가뒀어… 그리고 아무도 만나지 못하게 해. 그래서 몰래 어머니를 만나러 가.”세이런은 황태자면서도 그런 어두운 배경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세이런은 꾹 다문 입을 열어 약속했다.“비밀 지켜줄게.”세이런은 클라루스를 바라보며 강하게 흔들림 없이 말했다.
연무장에서의 대련 이후로 클라루스는 세이런을 마주칠 수 없었다.하루 머물기로 했는데 만찬도 대공과 단둘이 해야 했고, 대공은 세이런의 사정에 대해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그 모든 상황이 클라루스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하기에 충분했다.‘뭔가 숨기고 있어.’그 확신이 들자, 그는 결국 그날 저녁 아무도 모르게 세이런의 방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조용한 복도를 지나 세이런의 문 앞에 선 그는 조심스럽게 노크했다.“세이런. 나야, 클라루스.”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마치 방 안에 아무도 없는 듯했다.그러나 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 틈 사이로 창백한 얼굴의 세이런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마에는 식지 않은 열기가 느껴졌다.“야, 너… 괜찮아?”클라루스는 그를 보고 놀랐다.“조용히 해.”
제국에서 돌아온 지 몇 주도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 예상치 못한 손님이 포르투릭스 대공가에 나타났다.“왜 오셨죠?”세이런은 무심하게 말했다. 그의 말투엔 귀찮음이 잔뜩 묻어 있었다.억지로 손님맞이를 하고 있다는 게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표정이었다.그가 서재에서 읽고 있던 책을 덮어두고 나와 맞이해야 했던 손님은 다름 아닌 클라루스였다.“네가 놀러 와도 된다고 했잖아.”당당하게 웃으며 클라루스는 같이 놀 기대에 찬 눈으로 말했다. 세이런은 잠시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정말… 금방 놀러 오셨네요.”말투에는 어이가 없다는 기색이 고스란히 묻어났다.“왜? 오늘은 바빠?”“네... 아뇨.”세이런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어서오세요.”
세이런과 클라루스 사이엔 다시 정적이 흘렀다.하지만 여전히 클라루스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져 세이런은 결국 귀찮다는 듯 다시 눈을 떴다.“그만 쳐다보시죠.”“너 황자한테 그렇게 말하면 잡혀 간다는 것도 몰라?”“황자 저하만 말 안 하면 아무도 모르잖아요.”“그, 그건… 그렇지… 내가 말하면 어쩔 건데?”세이런은 잠시 클라루스를 바라봤다.“말 할건가요?”“… 아니.”“그럼 됐죠.”“응…?”클라루스는 잠시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뭔가 자신이 황자의 권위로 겁을 주려 했던 것 같은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기가 세이런에게 대답하고 있었다.“…잠깐만.”
세이런은 어렸을 때 대공을 따라 처음으로 황실에 따라간 적이 있었다.세이런이 태어난 후 한동안 대공은 제국에 발길을 끊었지만, 어느 날 세이런이 심하게 병을 앓자 고칠 방법이 없다는 말에 무슨 이유인지 다시 황실을 오가기 시작했다.아버지가 자꾸 집을 비우는 것이 싫었던 어린 세이런은, 결국 어느 날 그를 졸라 처음으로 함께 나서게 되었다.황제를 알현하기 직전, 대공은 걸음을 멈추고 무릎을 굽혀 그의 눈높이에 맞췄다.그의 눈빛은 단호했지만, 손은 부드럽게 세이런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세이런, 황제 폐하 앞에서는 아무 감정도 보여선 안 된다. 특히 네가 몸이 약하다는 것을 들키게 두어서는 안 된다. 알겠니?”“네, 아버지.”세이런은 아버지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그땐 몰랐다.“엘레우스 제국의 태양인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대공을 따라 세이런도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렸다.고개를 살짝 들어 황제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순식간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안 되겠어요. 사람을 부를게요. 집사든 누구든….”아티니스가 자리에서 일어서 도움을 청하러 가려 하자, 세이런이 힘겹게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아니야… 소용없어… 그들이 와도… 별다른 방법이 없어… 조금만... 쉬면 괜... 찮아.”그 말에 아티니스는 잠시 멈칫했다.‘그럼, 정말… 혼자서 이렇게 견디는 거야?’아티니스는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따뜻한 손이 세이런의 차가운 손끝에 닿았다.그리고 아티니스는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이 마법이 존재하는 이유가 있다면… 제발 이 사람의 고통을… 병을
“대공자님은 그 전설을 어떻게 아는데요?”아티니스가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세이런에게 물었다.“아버지에게 들었어. 아버지가 황실에 갈 때마다 그 전설에 대해 조사하시거든.”그제야 아티니스는 왜 대공이 자리를 비웠는지 이해했다.“그럼 황족도 이 전설에 대해 아나요? 마법에 대해서?”“맞아. 이 정보는 황제가 아주 꽁꽁 숨기고 있는 기밀이거든.”“네? 그럼 대공님은 어떻게 그런 기밀을 아시는 거예요?”“예전에 황제가 귀족들에게 정보를 흘려 마법사를 찾으려 했었대, 그런데 지금은 그것을 초차하지 않아. 그래서 아버지는 몰래
“…아가씨, 그럼 약혼만 하는 건 어때요? 약혼은 결혼보다 깨기도 쉽고, 꼭 같이 지내야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형식적인 관계로만 유지할 수도 있고요.”리리의 말을 듣는 순간, 아티니스의 가슴이 한결 가벼워지는 듯했다.그녀는 밝게 웃으며 리리를 와락 끌어안았다.“리리, 넌 정말 천재야! 좋아, 그럼 따로 지내는 약혼을 전제로 제안해 볼게.”아티니스는 일이 생각보다 잘 해결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러나 그 평온은 오래 가지 못했다.저녁 식사 자리.아티니스는 수프를 뜨던 숟가락을 든 채 그대로 굳어
그저 '특별하다'라는 막연한 대답에 아티니스는 눈살을 찌푸렸다.그는 분명 끝까지 진실을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무언가를 숨긴 채, 그녀에게서 의도적으로 선을 긋고 있었다.“제가 묻는 건, 그런 게 아니에요.”그녀가 차갑게 내뱉은 말에도 세이런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며칠만 대공작에 머물다 가. 영애의 편지가 오늘 아침에야 도착해서 손님 맞이 준비가 미흡했거든. 아버지도 오늘 도착할 줄 모르고 황실에 계셔.”“제가 여기 더 머무를 이유는 없어요. 전 돌아갈 거예요. 부모님도 걱정하실 테고—”그때, 아티니스는 문득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