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入“왜 이렇게까지 하시죠?”
아티니스의 목소리에는 불편함과 억눌린 분노가 섞여 있었다.
세이런은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차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잠시 생각에 잠긴 뒤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는 그 이유를 알아. 그리고 도와줄 수 있어.”
“그 말도... 병약하다는 것도, 전부 거짓말이죠?”
아티니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 오늘 거절하러 온 거예요. 그리고 비밀을 지켜준다고 한 말… 끝까지 지켜주세요. 전 그걸 확인하러 온 거예요.”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등을 돌렸다.
이곳에 더 머무르는 것은 위험하다고 느껴졌다.
알아서는 안 될 것을 알게 될 것 같았고, 엮여서는 안 될 일에 휘말릴 것만 같았다.
그런데—
“윽….”
등 뒤로 낮고 거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돌아보니 세이런이 가슴을 움켜쥔 채, 고르지 못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만하세요. 그런 연기쯤은 속지 않아요.”
그러나 그는 점점 더 몸을 앞으로 숙였다. 이를 악문 채 고통을 견디는 듯,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연기가… 아닌 거야?'
순간,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괜찮아요?!”
아티니스는 더 이상 생각할 틈도 없이 그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훅!
“꺄앗!”
손목이 붙잡히는 순간, 그녀의 몸은 순식간에 그의 품으로 끌려들었다. 중심을 잃은 아티니스는 마치 안기듯 세이런의 가슴에 닿았다.
그의 숨결이 이마에 스치듯 닿았다.
“아, 영애.”
세이런이 낮고 깊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우리 둘만 있다고 이렇게 덮치면 곤란한데.”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그는 뻔뻔하게 말했다.
그러나 아주 잠깐, 장난스런 미소 같은 것이 그의 입가에 스쳤다가 사라졌다.
“누, 누, 누가 덮쳤다는 거예요?! 대공자님이 잡아당긴 거잖아요!”
당황한 아티니스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황급히 몸을 빼려 했지만, 세이런은 붙잡은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
“이름도 알려줬는데, 아직도 대공자님이야?”
“놓아 주세요.”
“거절 시. 비밀 유지 취소. 그리고 날 덮친 영애로 소문나겠지.”
“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말이 막혔다.
‘세상에… 사람이 이렇게까지 뻔뻔할 수 있어?’
아티니스는 남은 손으로 그의 가슴을 힘껏 밀쳤다.
꽤 힘을 실었지만, 세이런은 요지부동이었다.
“아프다는 거... 정말 거짓말이었죠?”
억울함과 당황스러움이 뒤섞인 눈빛으로 쏘아보자, 세이런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짧게 웃으며 손을 풀어주었다.
손목이 자유로워지자 아티니스는 반사적으로 도망치는 고양이처럼 재빠르게 세이런에게서 몇 걸음 물러났다.
그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세이런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세어 나왔다.
“진짜야. 몸이 점점 나빠지고 있어. 특히 오러를 쓰면... 심장 쪽이 아파. 아예 못 일어나는 날도 있고."
그가 천천히 손가락으로 자신의 심장을 가리켰다.
“생명이 조금씩, 조각조각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야.”
“... 오러요?”
생소한 단어에 아티니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영애가 마법을 쓰듯, 나에게도 특별한 힘이 있어. 그게 오러야.”
아티니스는 자신처럼 능력을 가진 타인을 처음 만나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마법과는 달라. 정확히는 나도 잘 몰라. 오러는 내 몸 안에 깃든 생명력을 잠시 끌어올리는 힘이야. 신체 능력이 극대화되는 대신, 대가가 커.”
세이런은 주머니에서 팬 하나를 꺼냈다.
순간 팬에 푸른빛이 스치듯 흐르자, 그는 그것을 응접실 테이블 중앙에 가볍게 꽂았다.
쾅—!
굉음과 함께 순식간에 테이블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 갈라진 틈 사이로 연기가 피어올랐다.
“와—! 아, 아니… 지, 지금 이게 무슨…?!”
아티니스는 놀란 눈으로 테이블과 세이런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방금 본 푸른빛이 오러야. 사물에 주입해 위력을 증폭시킬 수도 있어.”
“그럼… 포르투릭스 사람들은 모두 그런 힘을 쓸 수 있나요?”
세이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영애처럼 나도 유일해. 왜 나에게만 있는지… 나도 몰라. 그래서 가능하면 쓰지 않으려 해. 쓰고 나면 몸이 너무 아프거든.”
“그럼 왜 방금 쓴 거예요?! 설마… 지금도 아픈 거예요?”
그녀의 걱정 어린 물음에, 세이런은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는 괜찮아. 그리고 이렇게 해야 날 좀 믿어줄 것 같아서.”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을 말했다.
“... 그래서 제 마법으로 치료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건가요?”
날카로운 그녀의 물음에 그는 답하지 못했다.
그저 피할 수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시선에서 아티니스는 자신의 예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 마법으로 병을 고칠 수는 없어요. 아니, 저는 그걸 어떻게 하는지도 몰라요.”
그녀의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씁쓸했다.
세이런은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마법 때문에만 영애를 찾은 건 아니야.”
“네...? 그럼 왜.... 왜 하필 저와 결혼하려는 거죠?”
“영애는 나한테 특별하니까.”
봄볕이 따사롭게 내리쬐는 오후였다.릴리스는 아버지를 따라 응접실에 들어섰다. 아버지의 오랜 지인인 세레스니타 백작이 자리에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릴리스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사내아이가 앉아 있었다.릴리스의 아버지는 세레스니타 백작을 반갑게 맞이하고는 이내 릴리스에게 시선을 돌렸다.“릴리스, 인사하렴. 이 아빠의 친구 세레스니타 백작님의 아들, 글라디 영식이란다.”릴리스의 눈앞에는 자신과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며 수줍어하는 영식이었다. 귀까지 빨개진 채 시선을 바닥에 두고 있었다.‘왜 저렇게 쑥스러워하지?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데.’릴리스는 그저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아직 어린아이니까.릴리스는 허리를 곧게 펴고 단정하게 인사했다.“안녕하세요, 릴리스입니다.”어린 나이에도 우아한 자태를 잃지 않는 인사였다. 어른들이 흐뭇한 눈빛을 교환하는 사이, 글라
“그 소설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이 한 것처럼 편지를 써서 보냈어.”이사벨라의 눈이 반짝였다. 어떤 답장이 왔는지 궁금해하는 눈치였다.“그래서요? 답장이 왔어요?”“왔으니까 여기까지 왔겠지.”세이런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층 낮았다. 묘하게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이사벨라는 편지를 받아 펼쳤다.[이토록 분별없이 행동하시는 분인 줄은 미처 알지 못하였습니다.호의라기보다 무례에 가깝게 느껴지는군요.더 이상의 초대도, 서신도 받고 싶지 않습니다.이쯤에서 그만두시는 것이 서로의 체면을 위해서도 좋을 듯합니다.부디 더는 저를 곤란하게 하지 마시고, 앞으로는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 모르는 사람으로 지냈으면 합니다.— 아티니스 세레스니타]“…….”
하지만 세이런의 얼굴을 보고 있자 웃음은 금세 사라졌다.정말로 방법을 몰라 찾아온 얼굴이었다.이사벨라는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했다.‘세이런, 그 세레스니타 백작 영애를 진심으로 좋아하는구나.’말수가 적고 냉정하기로 유명한 세이런이었다. 언제나 혼자서 일을 해결하며, 남에게 도움을 구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그런 사람이 겨우 한 사람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몰라 자신을 찾아왔다.그것만으로도 어떤 고백보다 그의 마음이 선명하게 느껴졌다.“음…..”이사벨라는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말했다.“일단 세이런은 연애라는 감정 자체를 거의 모르잖아요.”세이런의 눈썹이 꿈틀했다.“거의가 아니라 아예 모른다고 하려던 건 아니지?
이사벨라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세이런의 모습을 긍정으로 받아들이고 팔짱을 끼며 말했다.“이름은 알아요?”잠시 침묵하던 세이런이 입을 열었다.“아티…”“아티요? 들어본 적 없는 것 같은데.”“.... 애칭인 것 같더군.”이사벨라가 눈을 깜빡였다.“잠깐만요. 그럼 본명도 모르고, 어느 가문의 영애인지도 모르는 거예요?”“지금 찾고 있어.”“그걸 어떻게 찾아요?”이사벨라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얼굴은 제대로 기억하고 있어요?”세이런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황태자 책봉식에 다녀온 그날 이후로, 세이런이 이상해졌다.처음에는 이사벨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가 며칠쯤 멍하니 있는 것이야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왜냐하면 세이런은 원래 말이 없고 표정도 없는 사람이었다.하지만 그게 평범한 일이 아니라는 걸 며칠이 지나서야 알았다.세이런이 직접 마리카이드 후작가에 찾아왔다.그것도 데런을 보러 온 것이 아니라, 이사벨라를 만나기 위해.“세이런? 지금 오라버니는 저택에 안 계시는데요.”“알아. 데런 보러 온 거 아니야.”늘 차갑던 세이런이 오늘은 이상했다. 이사벨라는 그 눈빛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챘다.“무슨 일 있어요?”“... 미안해. 약혼은 없던 일로 하자.”“... 네?”
“만약 내가 다른 머리색으로 태어났다면… 어머니도 나도 지금까지 살아남지 못했을 거야”세이런은 숨을 삼켰다.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충격이 밀려왔다. 황태자라는 자리 아래에 이런 이야기가 있을 줄은 몰랐다. 이건 황실의 극비밀이었다.“그때, 네가 내 방에 왔을 때. 어머니를 만나고 오는 길이었어.”“왜 몰래 만나는데?”“... 어머니가 나를 데리고 도망가려다 들켰거든. 그래서 황제가 어머니를 아무도 없는 탑에 가뒀어… 그리고 아무도 만나지 못하게 해. 그래서 몰래 어머니를 만나러 가.”세이런은 황태자면서도 그런 어두운 배경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세이런은 꾹 다문 입을 열어 약속했다.“비밀 지켜줄게.”세이런은 클라루스를 바라보며 강하게 흔들림 없이 말했다.
청혼서라는 말에 아티니스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일면식 없는 대공가에서 결혼을 제안하다니. 게다가 시골 영지에 틀어박혀 살아온 자신을 어떻게 알고 보낸 건지 아티니스는 의아했다. “설마… 예전에 황실 파티에서 우리 아티를 본 건 아닐까요?”백작부인이 조심스레 말했다. “시골 영지 영애인 제게 누가 관심을 보였겠어요… 저도 관심 없었고요.”“무슨 소리야. 우리 아티의 아름다움은 태어날 때부터였단다. 세상을 밝혀주는 따스한 아침 햇살 같은 주홍색 머리카락에, 릴리스를 쏙 빼닮은 아메랄드를 담고 있는 두 눈동자. 그 무도회에
“안 되겠어요. 사람을 부를게요. 집사든 누구든….”아티니스가 자리에서 일어서 도움을 청하러 가려 하자, 세이런이 힘겹게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아니야… 소용없어… 그들이 와도… 별다른 방법이 없어… 조금만... 쉬면 괜... 찮아.”그 말에 아티니스는 잠시 멈칫했다.‘그럼, 정말… 혼자서 이렇게 견디는 거야?’아티니스는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따뜻한 손이 세이런의 차가운 손끝에 닿았다.그리고 아티니스는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이 마법이 존재하는 이유가 있다면… 제발 이 사람의 고통을… 병을
둘은 물에 흠뻑 젖은 채 서로를 바라봤다. 아티니스는 다시 넘어지지 않게 두 손으로 몸을 지탱하며 그 소년을 내려다보았고, 소년은 팔꿈치로 몸을 일으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은 잠시 동안 서로에게서 눈을 때지 못했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눈빛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ㅁ… 뭘 봐.”정적을 깨는 차가운 말투였다. 그 말에 아티니스는 눈을 깜빡였다. 잠시나마 그에게서 느꼈던 환상이 살짝 깨지는 듯했지만 그의 얼굴은 쉽게 그 환상을 깨지 못했다. 그의 목소리 또한 그랬다. “옷 다 젖어 버렸네
부드럽게 스며드는 햇살과 달리, 아티니스 세레스니타의 표정은 흐린 하늘처럼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말없이 긴 숨을 내쉬며 그녀는 마치 잘못을 저지르고 혼나러 가는 아이처럼 무거운 발걸음으로 마차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아티… 정말 혼자 가야겠니? 엄마가 같이 가 준다니까….”아티니스 뒤를 따라 나온 릴리스 백작부인의 애타는 목소리에 이어,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던 글라디 백작도 걱정 어린 눈으로 딸을 바라보았다. 나란히 선 두 사람은 도무지 딸을 혼자밖에 내보낼 마음의 준비가 안 된 모양이었다.‘3년전부터 외출은 허락해 주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