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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럽게 스며드는 햇살과 달리, 아티니스 세레스니타의 표정은 흐린 하늘처럼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말없이 긴 숨을 내쉬며 그녀는 마치 잘못을 저지르고 혼나러 가는 아이처럼 무거운 발걸음으로 마차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아티… 정말 혼자 가야겠니? 엄마가 같이 가 준다니까….”
아티니스 뒤를 따라 나온 릴리스 백작부인의 애타는 목소리에 이어,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던 글라디 백작도 걱정 어린 눈으로 딸을 바라보았다.
나란히 선 두 사람은 도무지 딸을 혼자밖에 내보낼 마음의 준비가 안 된 모양이었다.
‘3년전부터 외출은 허락해 주셨지만... 역시 매번 이러신다니까.’
아티니스는 걱정이 가득한 부모님을 안심시키듯, 최대한 밝게 웃어 보였다.
“걱정 마세요. 금방 다녀올게요.”
입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녀의 심장은 이미 큰 잘못을 들킨 사람처럼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부모님이랑 같이 갔다간, 다른 사람 앞에서 마법을 썼다는 걸 들키고 말 거야… 사고 친 건 나니까, 내가 직접 수습해야 해.’
어째서인지 그녀의 부모님은 단 한 번도 마법을 왜 반드시 숨겨야 하는지를 말해 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만에 하나, 다른 사람 앞에서 마법을 썼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순간, 겨우 얻어낸 외출은 다시는 허락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아니, 저택 밖은커녕 방 문조차 마음대로 열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불안은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아티니스는 그것을 꾹 눌러 삼켰다.
그리고 그녀의 하녀, 리리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며칠 동안 이어진 긴 여정 내내, 마차의 흔들림보다 더 거칠게 그녀의 생각이 요동쳤다.
창 밖의 풍경은 쉼 없이 바뀌었지만, 아티니스의 머릿속은 한 자리에 머무른 채 같은 질문만 되풀이했다.
‘대체 어떻게 내가 세레스니타 백작가 영애인 건 알았지? 설마... 내가 마법을 쓸 줄 안다는 걸 이미 누군가에게 말한 건 아니겠지? 아니, 그런데 왜 하필...청혼서야?’
맞은편에 앉아 있던 리리가 한참 동안 창밖을 바라보며 고민하는 아티니스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아티니스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리리를 바라보았다.
잠시 망설이다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리리, 만약에… 정말 만약에, 부모님이 날 방에 가둬두려고 하면, 꼭 날 탈출시켜줘.”
“아가씨, 무슨 말씀이세요? 그리고 아가씨가 그런다고 순순히 방에만 계실 분도 아니잖아요.”
아티니스의 속내를 알 리 없는 리리는 그 말을 농담처럼 받아들이며 웃었다.
태연한 리리의 반응에 아티니스도 어색하게 웃어 보였지만, 끝내 진실을 말하지 못한 불안은 가슴속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아아.... 어떡해에에에.....!'
아티니스는 아직 몰랐다.
평하롭고 고요하기만 했던 그녀의 일상에 균열이 생긴 것이, 삼년 전—한 소년을 만난 그날부터였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 그녀는 바로 그 소년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그녀의 손에는 구겨질 대로 구겨진 편지 한 장.
청혼서였다.
편지 뒷면, 작게 적힌 단 한 줄.
「거절 시, 비밀 유지 취소」
그녀의 손이 더 세게 쥐어졌다.
‘이런... 나쁜 꼬맹이가!!!’
***
삼년 전.
시골 영지 백작가의 영애 아티니스는 생애 처음으로 부모님을 따라 수도를 방문했다.
보통 같으면 수도의 무도회는 피했을 부모님이었지만, 이번에 피할 수 없었다.
엘레우스 제국 황자의 병세가 악화되면서, 16세의 황자가 황태자로 책봉되는 행사였다.
딱딱한 무도회는 시골에서 자유롭게 자란 아티니스에게는 그저 지루하기만 했다.
그래서 지나치게 보호하는 그녀의 부모님이 다른 귀족들에게 끌려가는 사이, 몰래 무도회장을 빠져나왔다.
황실의 화려한 대리석 복도를 지나 정원 입구에 도착하자, 차가운 밤공기가 그녀의 얼굴을 스쳤다.
"후–하아–. 이제야 기분 좋네!"
차가운 공기가 몸속 깊이 스며들며, 아티니스는 답답함이 단번에 사라지는 기분을 느꼈다.
미로처럼 넓은 정원을 걷다가 커다란 분수대 앞에 다다랐다.
황실 분수대라고 자랑하듯 그 분수대는 금빛으로 반짝였지만, 그녀의 시선에 더 반짝이던 건 바로 그 분수대에 앉아 있는 한 소년이었다.
달빛처럼 은빛 머리카락이 밤바람에 살랑였고, 희귀한 사파이어 같은 짙은 자줏빛 눈동자가 보석처럼 반짝였다.
어린 나이임에도 이미 완성된 이목구비는 마치 요정이나 천사 같았다.
‘저렇게 잘생긴 사람은 처음 봐… 요정인가? 천사인가?’
분수대의 후광 때문이었을까, 아티니스는 처음 본 그 소년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 잘생겼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가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그 소리에 소년은 고개를 돌려 그녀와 시선을 마주쳤다.
하지만 그 순간, 그는 중심을 잃고 분수대에 풍덩 빠지고 말았다.
“위험ㅎ—!”
놀란 아티니스는 그를 붙잡으려 달려갔지만 결국 함께 물에 빠지고 말았다.
풍덩—!
<안녕, 나의 열 번째 심장>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연무장에서의 대련 이후로 클라루스는 세이런을 마주칠 수 없었다.하루 머물기로 했는데 만찬도 대공과 단둘이 해야 했고, 대공은 세이런의 사정에 대해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그 모든 상황이 클라루스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하기에 충분했다.‘뭔가 숨기고 있어.’그 확신이 들자, 그는 결국 그날 저녁 아무도 모르게 세이런의 방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조용한 복도를 지나 세이런의 문 앞에 선 그는 조심스럽게 노크했다.“세이런. 나야, 클라루스.”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마치 방 안에 아무도 없는 듯했다.그러나 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 틈 사이로 창백한 얼굴의 세이런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마에는 식지 않은 열기가 느껴졌다.“야, 너… 괜찮아?”클라루스는 그를 보고 놀랐다.“조용히 해.”
제국에서 돌아온 지 몇 주도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 예상치 못한 손님이 포르투릭스 대공가에 나타났다.“왜 오셨죠?”세이런은 무심하게 말했다. 그의 말투엔 귀찮음이 잔뜩 묻어 있었다.억지로 손님맞이를 하고 있다는 게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표정이었다.그가 서재에서 읽고 있던 책을 덮어두고 나와 맞이해야 했던 손님은 다름 아닌 클라루스였다.“네가 놀러 와도 된다고 했잖아.”당당하게 웃으며 클라루스는 같이 놀 기대에 찬 눈으로 말했다. 세이런은 잠시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정말… 금방 놀러 오셨네요.”말투에는 어이가 없다는 기색이 고스란히 묻어났다.“왜? 오늘은 바빠?”“네... 아뇨.”세이런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어서오세요.”
세이런과 클라루스 사이엔 다시 정적이 흘렀다.하지만 여전히 클라루스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져 세이런은 결국 귀찮다는 듯 다시 눈을 떴다.“그만 쳐다보시죠.”“너 황자한테 그렇게 말하면 잡혀 간다는 것도 몰라?”“황자 저하만 말 안 하면 아무도 모르잖아요.”“그, 그건… 그렇지… 내가 말하면 어쩔 건데?”세이런은 잠시 클라루스를 바라봤다.“말 할건가요?”“… 아니.”“그럼 됐죠.”“응…?”클라루스는 잠시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뭔가 자신이 황자의 권위로 겁을 주려 했던 것 같은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기가 세이런에게 대답하고 있었다.“…잠깐만.”
세이런은 어렸을 때 대공을 따라 처음으로 황실에 따라간 적이 있었다.세이런이 태어난 후 한동안 대공은 제국에 발길을 끊었지만, 어느 날 세이런이 심하게 병을 앓자 고칠 방법이 없다는 말에 무슨 이유인지 다시 황실을 오가기 시작했다.아버지가 자꾸 집을 비우는 것이 싫었던 어린 세이런은, 결국 어느 날 그를 졸라 처음으로 함께 나서게 되었다.황제를 알현하기 직전, 대공은 걸음을 멈추고 무릎을 굽혀 그의 눈높이에 맞췄다.그의 눈빛은 단호했지만, 손은 부드럽게 세이런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세이런, 황제 폐하 앞에서는 아무 감정도 보여선 안 된다. 특히 네가 몸이 약하다는 것을 들키게 두어서는 안 된다. 알겠니?”“네, 아버지.”세이런은 아버지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그땐 몰랐다.“엘레우스 제국의 태양인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대공을 따라 세이런도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렸다.고개를 살짝 들어 황제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순식간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제가 알아요. 제가 약속할게요.”신들의 물음에 아티니스는 망설이지 않았다.오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그 끝에. — ...좋다. —— 충분한 죄값을 모두 치른 뒤라면. —— 그에게도 마지막 기회를 허락하겠다. —아티니스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감사합니다!”그리고 그녀는 아무도 없는 어두운 허공을 향해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이건 신들이 네게 허락한 마지막 기회이자, 내가 너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야. 긴 시간을 지나더라도 괜찮아. 죄를 모두 뉘우친 뒤에는… 꼭 다시 돌아와.”신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어딘가에서 듣고 있을 그에게 하는 말이었다.그리고는 작게 미소를 머금은 채 입술을 열었다.“벨루알, 울지 마.”처음과 두 번째 삶에서 그에게 건넸던 말이었다.그를 기억하고 있는 순간에 심장을 빼앗겼던 그 삶에서, 아티니스는 그의 얼굴을 보았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져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던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던 벨루알. 그것은 원망도, 용서도 아니었다.오랜 시간을 함께했던 한 사람에게 건네는 마지막 인사.그리고 언젠가, 모든 죄를 뉘우친 뒤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작은 약속이었다.그 순간.빛 속에서 무언가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바람처럼. 마치 대답처럼.다시 거대한 목소리가 공간에 울려 퍼졌다.— 이제 시간이 되었다. —— 창조주 중 하나인 나, 레이토르가 네게 인간의 생명을 다시 불어넣어 주리라. —“정말 감사합니다!”아티니스는 두 손을 모아 간절하게, 진심을 담아 감사를 표했다. 그 순간 어둠 속에서 서서히 눈부신 빛이 흘러나왔다. 공간이 빛으로 가득 차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환했다. 강렬하지만 따뜻한 빛이었다. 차갑지 않았다. 무섭지 않았다.— 인간 아티니스여, 네게 신들의 축복이 임할 것이다. —그리고 빛이 그녀를 완전히 감쌌다.***세이런은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아티니스 곁에 누워 있었다.이렇게 누워 있다가 조용히 그녀를 따라가려는 듯.그런데 순간, 공기 속에 달콤한 향이 퍼졌
아티니스가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것은 오로지 어둠뿐이었다.예전에도 한 번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그리고 전생에서도. 빛도 땅도 없이, 위아래조차 구분되지 않는 캄캄한 공간. 그때와 같은 곳이었다. 그러나 그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두렵지 않았다.그때 머릿속을 울리는 듯한 맑은 음성들과 함께 눈부신 빛이 번졌다. 너무 눈이 부셔 눈을 뜨지 못한 채, 울리는 소리만 들었다.— 드디어 네 생명력이 하나로 모였다. —— 그리고 벨루알도 멈출 수 있었다. —아티니스는 말없이 그 말을 들었다.세이런이 이제는 건강한 몸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동시에,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가슴 한쪽이 저릿하게 아려 왔다.하지만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그를 살릴 수 있는 기회를 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전생들에서 절 챙겨 준 주변 사람들이 이번 생엔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해줘서도 고마워요.”
“왜 이렇게까지 하시죠?”아티니스의 목소리에는 불편함과 억눌린 분노가 섞여 있었다.세이런은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차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잠시 생각에 잠긴 뒤 조용히 입을 열었다.“나는 그 이유를 알아. 그리고 도와줄 수 있어.”“그 말도... 병약하다는 것도, 전부 거짓말이죠?”아티니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전 오늘 거절하러 온 거예요. 그리고 비밀을 지켜준다고 한 말… 끝까지 지켜주세요. 전 그걸 확인하러 온 거예요.”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등을 돌렸다.이곳에 더 머무르는 것은 위험하다고 느껴졌다.알아
생각지도 못한 큰 키에 아티니스는 고개를 살짝 들어야만 했다. 그의 가슴팍 너머로 올라간 시선 끝에서 마주한 것은 여전히 보석처럼 빛나는 짙은 자주빛 눈동자였다.‘여전히 잘생겼네… 잘생… 기면 안 되는데. 거절해야돼!’그와 시선이 딱 마주치자, 아티니스는 순간 목적을 까먹을 뻔했다.당황한 그녀는 뒷걸음치며 거리를 두었다.“청, 청혼서가 마음에 들긴요. 협박이나 마찬가지였잖아요!”말을 하려다 목소리가 꼬이고, 톤도 이상해졌다.“대공자의 청혼서를 협박이라니. 너무한걸.”당황한 그녀와 달리, 그는 장난기 어린 미소로 되물
청혼서라는 말에 아티니스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일면식 없는 대공가에서 결혼을 제안하다니. 게다가 시골 영지에 틀어박혀 살아온 자신을 어떻게 알고 보낸 건지 아티니스는 의아했다. “설마… 예전에 황실 파티에서 우리 아티를 본 건 아닐까요?”백작부인이 조심스레 말했다. “시골 영지 영애인 제게 누가 관심을 보였겠어요… 저도 관심 없었고요.”“무슨 소리야. 우리 아티의 아름다움은 태어날 때부터였단다. 세상을 밝혀주는 따스한 아침 햇살 같은 주홍색 머리카락에, 릴리스를 쏙 빼닮은 아메랄드를 담고 있는 두 눈동자. 그 무도회에
둘은 물에 흠뻑 젖은 채 서로를 바라봤다. 아티니스는 다시 넘어지지 않게 두 손으로 몸을 지탱하며 그 소년을 내려다보았고, 소년은 팔꿈치로 몸을 일으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은 잠시 동안 서로에게서 눈을 때지 못했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눈빛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ㅁ… 뭘 봐.”정적을 깨는 차가운 말투였다. 그 말에 아티니스는 눈을 깜빡였다. 잠시나마 그에게서 느꼈던 환상이 살짝 깨지는 듯했지만 그의 얼굴은 쉽게 그 환상을 깨지 못했다. 그의 목소리 또한 그랬다. “옷 다 젖어 버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