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해일은 궁 밖의 계단을 빠르게 내려와 주차장 구역에 세워둔 자신의 오토바이 앞에 섰다.
검고 날렵한 프레임 위에 희미하게 왕궁의 불빛이 반사되었다.
웅장함을 뽐내는 왕궁은 울창한 나무들에 둘러 쌓여 있어 굉장히 외로워 보였다.
그 외로움은 뱀파이어들이 느끼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며 해일은 헬멧을 머리에 툭 내려 쓰고 오토바이에 올라 시동 버튼을 눌렀다.
브으응— 묵직한 엔진음이 밤공기를 가르며 울렸다.
그 진동이 손끝에서 팔까지 올라오자, 해일은 본능적으로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후....”
그는 짧게 숨을 토해내며 말을 잇지 못한 채 한 번 허공을 바라보았다. 이현명과의 면담이 끝났다.
왕의 앞에서 수백 년 살아온 자도 여전히 긴장할 수밖에 없는 자리였지만— 어찌 되었든 모든 것이 정리되었다.
절차 위반도, 보고 누락도, 인간 정부와의 외교 문제까지. 모두 뒤로 넘겼다.
이제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돌아가는 것. 엔진이 안정적으로 회전하는 소리 속에서,
해일은 키를 살짝 틀어 도로로 나섰다.
거리의 어둠이 순식간에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갔고, 도시의 불빛이 먼 곳에서 미세하게 깜빡이며 다가왔다. 큰 일을 끝내고 나니 머리가 유난히 맑았다.
왕궁 안에서 무겁게 짓누르던 공기가 사라지고, 몸이 가볍게 떠오르는 듯한 홀가분함이 온몸을 감쌌다.
어느덧 안전 구역이 있는 마을 입구에 들어선 오토바이는 골목 끝까지 몰아 자신이 운영하는 가게인 피앤치킨(Pee & Chicken) 앞에 주차를 한 후 오토바이 시동을 끈 후 내렸다.
피앤치킨 (Pee & Chicken)
—밥집이라고 하기엔 이름이 이상하고, 술집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편했고 배달전문점이라고 하기해도 애매한 곳. 그렇지만 여기야말로 수십 년간 그가 지켜온 ‘집 같은 공간’이었다.
해일은 오토바이를 세우고 헬멧을 벗어 들며 문을 밀었다. 딩–동—
문 위의 종소리가 울리자마자, 안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던 직원들이 일제히 돌아봤다.
“사장님!!!”
“어? 사장님 왔다!”
“어휴.... 심판자님, 진짜 괜찮으신 거죠?”
그러더니 마치 계획이라도 한 듯, 직원들이 한 명씩 달려들어 해일의 주변을 에워쌌다.
“사장님, 폐하께서 뭐라고 하시나요?”
“진짜 괜찮은 거 맞아요?”
“혹시 가게는... 안전한 거죠?”
“혹시.... 저희까지 문제 생기는 건 아니죠? 저 아직 대출금도 다 못 값았다구요....”
우다다다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질문 폭격.
자신이 운영하는 피앤치킨은 야간 운영 중에도 인간과 뱀파이들이 뒤섞여 일하는 곳이었다.
뱀파이어 직원은 자신들의 안전을 물었고, 인간 직원은 인간으로서의 현실을 걱정했다.
순간, 해일은 그 순간, 왕 앞에서조차 없던 두통이 찾아오는 것을 느꼈다.
“잠깐. 잠깐만.”
그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직원들은 입을 다물지 않은 채 서로 눈치를 보며 여전히 두리번거렸다.
“사장님, 표정이 안 좋은데요?”
“아이고... 혹시 또 싸움 난 거예요?”
“아! 혹시 인간 정부에서 항의 왔어요?!”
해일은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 단호하게 말했다.
“다 조용히.”
순간, 가게 안이 딱 멈춘 듯 고요해졌다. 튀김 기름 끓는 소리만 보글보글 들렸다.
해일은 주방 쪽 벽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끼며 말했다.
“아무 일 없다. 폐하께서 잘 정리하신다. 걱정할 거 없어.”
직원들의 얼굴에 안도감이 쫙 퍼졌다.
“헉... 다행이다....”
“사장님 죽으면 가게 누가 이어받나 고민했어요…”
“근데 폐하가 뭘 정리하세요?”
“그건.... 말하면 안 되는 거죠? 맞죠? 아....맞구나.”
“사장님..... 저희 인간들은 괜찮은거 맞죠? 저 여기 그만두면 당장 힘든데....”
또 다시 쉴 틈 없이 이어지는 수다에 해일은 눈을 감고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왕보다.... 얘네가 더 피곤하다.
해일은 그냥 왕에게 조금 더 잔소리를 듣고 왔어야 했나하고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는 머리를 흔들며 직원들을 향해 말했다.
“일단.... 일이나 해라. 주문 밀린 거 배달 안 할 거야?”
해일이 한 손으로 헬멧을 턱에 걸친 채 말하자, 직원들이 서로를 쿡쿡 찌르며 허둥지둥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아 맞다! 배달 번호 27번 세트 메뉴 준비 된거야? 배달 가야되!!”
“네! 근데 치킨 소스 아직 안 나왔어요!”
“아니 그걸 지금 말하면 어떡해!!”
작게 폭발하는 소란 속에서 해일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직원들의 어깨를 차례로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 인간 직원들은 걱정하지 마.”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이상하게도 따뜻했다.
“여기 문 닫을 일도 없고... 계속 안전하게 일할 수 있어. 내가 지킨다.”
그 말에 인간 직원 셋이 동시에 숨을 내쉬었다.
“헉.... 다행이다...”
“사장님이 지킨다니까 뭔가 더 무서운데....?”
“아냐, 그건 든든하다는 뜻이잖아. 그렇지 사장님?”
“....너희 말투 왜 이래.”
하지만 직원들의 표정은 확실히 가벼워졌다. 그들은 다시 주방과 카운터로 뛰어가듯 자리로 흩어졌고, 가게 안은 금세 주문이 쏟아지는 평소의 활기로 돌아갔다.
“얘들아, 나 루비 아워 다녀올 테니까 일 열심히 하고 있어.”
해일이 헬멧을 집어 들며 말하자 직원들이 일제히 군기 잡힌 신병처럼 대답했다.
“네!! 사장님!!”
“치킨 5번 튀겨 들어갑니다!”
“라이더님 도착하셨어요!”
“포스기 좀 살려! 고장 아니라고 했잖아!”
가게 안은 금세 평소의 정신없는 활기로 돌아갔다.
아까까지 해일을 에워싸던 걱정의 그림자도 싹 사라지고, 그저 ‘일하는 인간들과 뱀파이어들’의 익숙한 소음만 남았다.
해일은 마지막으로 피앤치킨 직원들을 둘러보고는 가게 맞은편, 한 블록 사이를 둔 루비 아워를 향해 걸었다.
가로등 아래 붉은빛 간판이 따뜻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유리창 너머로는 손님들이 웃음소리 섞인 대화를 나누며 커피를 마시는 평화로운 일상이 흘러가고 있었다.
—정말, 이곳은 언제나 같다.
전쟁 같은 하루를 보내고 와도, 이 문 안에서는 시간이 고요하게 흘렀다. 해일은 천천히 문을 열었다. 딩— 특유의 종소리가 울리자 카페 안의 공기가 살짝 흔들렸다.
“지율아, 나왔어.”
해일의 목소리가 낮게 퍼지자 카운터 뒤에서 컵을 닦고 있던 지율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 순간, 그의 얼굴이 말 그대로 환해졌다.
“해일형~!! 어서와!!!”
지율은 손에 쥔 컵을 급히 내려놓고 카운터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어떻게 됐어? 괜찮아? 왕한테 많이 혼났어?”
목소리엔 걱정과 안도와 호기심이 한꺼번에 섞여 있었다.
해일은 아무렇지 않은 듯 손을 휘적이며 여유를 부렸다.
“나 조해일이야. 아무 일 없었어. 이야기 잘 끝냈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 특유의 장난기 섞인 자신감에 지율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아... 진짜 다행이다. 오늘 있었던 일 때문에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잘 해결되서 다행이다.”
지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해일의 뒤편에서 조용히 다가오는 그림자가 있었다.
툭— 은재가 해일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손끝의 힘은 가볍게 누르는 정도였지만, 그 안에 진짜 걱정이 얼마나 담겨 있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해일이 돌아보기도 전에 은재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형... 나 때문에 덜 혼난 거 알지?”
목소리는 낮았지만, 평소 투덜거리는 톤이 아니라 조금은 미안하고, 조금은 안도하고, 그리고 아주 조금은.... 속상해하는 목소리였다.
해일의 표정이 잠시 흔들렸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은재가 신고 버튼을 제때 눌러주지 않았다면 오늘 하루는 전쟁과도 같았을 것이다.
신고 없이 해일이 단독으로 움직인 게 드러났다면....
—궁에서 시말서만 열 장은 썼을 거고, 보고서는 두 배로 늘어날 것이며, 고위 관료들과 인간 헌터들에게 잔소리를 잔뜩 들었을 것이다.
해일은 아찔해지는 감각에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래... 고맙다~ 하은재!! 오늘 너의 혈청 커피는 내가 사줄게.”
해일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은재의 다크써클이 살짝 위로 올라가는 것처럼 보였다.
기분이 좋아지면 다크써클도 탄력 받는 건가— 해일은 한순간 헛웃음이 났다.
“형!! 진짜지? 방금 전에 세 번째 혈청 커피 다 먹었는데... 와, 다행이다!! 나 항상 먹던 걸로 주문해도 되지?”
은재의 목소리는 들뜬 아이처럼 가볍고 밝았다. 카페 전체가 순간 반짝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 기쁨의 반응과는 달리, 포스기 앞에서 혈청 샷 계산 중이던 뱀파이어 직원이 해일이 건네는 카드를 받아들도 충격적은 은재의 말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세 번째...?”
직원의 눈이 희미하게 떨렸다.
“그... 그걸 벌써... 드셨어요? 은재형......?”
은재는 아무렇지 않게 포스기 앞에 허리를 숙여 턱을 괴고 말했다.
“응. 버그 터졌잖아. 힘없으면 죽지. 지금 네 번째 들어가면 딱 뇌 회전수 돌아올 타이밍이야.”
직원은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은재가 뱀파이어라는 것을 제외하고서라도 정말 괴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해일도, 지율도, 직원도 모두 어이 없다는 듯 얼이 빠진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저 말은.... 인간 기준으로 말하면 ‘오늘 커피 8잔째’ 같은 거 아닌가...? 직원은 도저히 계산이 안 되는지 포스 화면을 보다가 해일을 보다가 다시 화면을 보며 더 당황했다.
“어... 사장님... 네 번째... 진짜 결제... 들어가도 되는 건가요....? 은재형 괜찮은거 맞아요?”
지율은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고, 해일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아, 괜찮아. 은재는 혈청 커피 내성 거의 최고 레벨이야. 예전에 하루에 일곱 잔 먹고도 멀쩡했어.”
“더... 더 멀쩡한 게 이상한 수준 같은데요...?”
루비 아워의 직원은 은재의 말에 놀라 물었다.
지율은 뒤에서 쓴웃음을 지었다.
“그만큼 일도 미친 듯이 하는 애지. 은재 아니었으면 회사 서버 터지고 혼란 올거야.”
해일은 쿡 웃으며 직원에게 손짓했다.
“결재해. 네 번째 잔은 내가 사주는거야. 괜찮아.”
직원은 결국 포기한 표정으로 계산 버튼을 눌렀다.
“네... 은재형. 혈청 라떼, 샷 세 개... 또... 들어갑니다...”
은재는 환하게 웃으며 해일의 팔을 툭 치고 말했다.
“역시 형밖에 없어~ 오늘 형 최고야.”
현목이 뱀파이어 세계의 새로운 황제에 오른 뒤, 매체는 온통 그의 이야기로 가득했다.새로운 황제의 즉위는 세계 뱀파이어 사회에서도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각국의 언론에서는 현목의 과거와 가족관계, 황제로서의 행보까지 앞다투어 보도하기 시작했다.정작 당사자인 현목은 그런 관심을 신경 쓸 여유조차 없었다.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예전처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고, 처리해야 할 업무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다.그동안 자신을 따라다니며 온갖 잔소리를 늘어놓던 비서는 약속했던 대로 휴가를 떠났다.덕분에 현목은 한동안 혼자서 업무를 처리해야 했지만, 이상하게도 불평하지 않았다.자신이 선택한 자리였고, 자신이 책임져야 할 일이었기 때문이다.반면....황제의 자리에서 내려온 이현명은 오히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뱀파이어가 되어버렸다.수백 년 동안 황제라는 이름으로 살아왔던 그에게 갑자기 주어진 것은 자유였다.하지만 막상 자유를 얻고 보니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궁을 나온 이현명은 한동안 자신의 차 안에 앉아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았다.‘....그래서 이제 뭘 하지?’황제였을 때는 하루의 모든 일정이 정해져 있었다.어디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누구를 만나야 하는지, 어떤 일을 처리해야 하는지 누군가가 끊임없이 알려주었다.그런데 이제는 아무도 자신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해주지 않았다.이현명은 한동안 휴대전화 화면을 바라보았다.황제로 지내는 동안 받았던 급여는 한 번도 제대로 사용하지 않았다.궁에서 생활하다 보니 식비며 생활비를 걱정할 필요도 없었고, 필요한 것들은 대부분 궁에서 알아서 준비해 주었다.그렇게 수백 년 동안 쌓인 돈은 어느새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자
시간은 차근 차근 흘러 승계식 당일이 되었다.고위 뱀파이어들이 모이고, 현 뱀파이어 황제인 이현명이 주관하는 아주 큰 행사였다.몇 백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현명이 통치해 온 한국의 뱀파이어 세계에서 새로운 황제가 즉위한다는 소식은 세계의 뱀파이어 사회에서도 큰 뉴스거리였다.그래서, 승계식이 열리는 행사장은 고위 뱀파이어들과 각국의 뱀파이어 기자들이 모여들었다.그들의 식사를 담당하는 시현은 그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에서 준비한 핏물이 가득 고인 스테이크를 준비했고, 현목의 부인이 운영하는 와인바에서는 최고급 와인들이 공급되었다.지율이 운영하는 루비 아워에서는 다양한 혈청 커피가 놓여있었고, 하이브리드 뱀파이어들은 행사 진행이 원활하도록 서포트 해주고 있었다.하이브리드 뱀파이어의 등장은 세계 각국의 순혈 뱀파이어들의 또다른 큰 뉴스였다.‘한국에는 순혈 뱀파이어만 있는 것이 아니었군...’‘하이브리드 뱀파이어가 존재하는 것인가?’그 사실만으로도 각국의 기자들에게는 수많은 의문이 생겨났다.자신들의 나라에도 하이브리드 뱀파이어가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한국의 하이브리드 뱀파이어들은 순혈 뱀파이어들과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또한 순혈 중심의 뱀파이어 사회에서 그들이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수많은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쏟아지고 있었다.“하윤아 우리 괜찮은거 맞지?”“긴장하지마. 우리가 처신을 잘 해야 세계에 퍼져있는 하이브리드 뱀파이어들에게 도움이 될거야.”하이브리드 뱀파이어의 곁에는 지율이 지키며 행사 진행 전반에 걸쳐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지율은 행사장 곳곳을 살피며 하이브리드 뱀파이어들에게 필요한 지시를 내리고, 진행 상황을 꼼꼼하게 확인했다
현목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하며 충분한 행복을 느꼈다.함께 식사를 하고, 오랜만에 정원을 거닐고, 별것 아닌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그동안 쌓였던 피로가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그렇게 가족들과 보내는 순간에 온전히 집중하며 며칠을 보낸 뒤, 목요일 아침이 되었다.현목은 다시 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이번에는 사위인 백도진이 직접 차를 운전했다.두 사람이 함께 차에 올라타자, 조금 전까지의 편안했던 분위기와는 달리 차 안에는 묘하게 무거운 공기가 감돌았다.한동안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바라보던 현목이 먼저 입을 열었다.“자네, 그동안 잘해왔겠지만.....”백도진이 룸미러를 통해 현목을 바라보았다.“2주 뒤면 승계식이니 앞으로는 더 바빠질 걸세.”“예. 전하. 알고 있습니다.”백도진은 앞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대답했다.“저도 승계식까지는 최대한 업무에 집중할 생각입니다.”“그래야지.”현목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잠시 침묵이 흘렀다.그러다 현목이 조금 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리고 승계식이 이루어지면.... 자네 장모는 궁으로 모셔오게.”“궁으로 말씀이십니까?”백도진이 의아한 듯 되묻자 현목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궁에는 왕비궁이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나.”현목은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지금 폐하께서는 혼인을 하지 않으셨으니 왕비궁이 비어 있었지.”“아....”
차를 몰아 궁을 빠져나와 자신의 아내가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향하는 현목은 삐져나오는 웃음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2주가 조금 넘는 시간 동안 궁에 머물며 승계식 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황위에 오르는 일이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닌 만큼 처리해야 할 일도 많았고,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하지만 이제는 잠시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무엇보다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현목은 신호에 걸려 차를 멈추면서도 입가에 번진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집에 가서 부인이랑 뭐부터 할까.......”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어디에서 어떻게 데이트를 해야 잘 했다고 칭찬을 받을까 고민해보기 시작했다.부인과 함께 시현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까.아니면 오랜만에 느긋하게 루비 아워에서 혈청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눌까.그것도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옆에 붙어 있을까.생각할수록 입가의 미소가 짙어졌다.“.....아니.”현목이 피식 웃었다.“일단 얼굴부터 봐야겠지.”그는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운전하다 보니 어느새 집 앞에 도착했다.현목은 차량을 주차장에 세운 뒤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굉장한 부촌에 자리 잡은 현목의 집은 넓은 마당을 갖추고 있었다.아내가 좋아하는 텃밭이 한쪽에 자리하고 있었고, 그 주변으로 각종 나무와 꽃들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궁에서 지내는 동안에는 한 번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던 익숙한 풍경이었다.현목은 마당을 잠시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현목의 장난스러운 웃음에 비서는 결국 머리를 쥐어뜯었다.“전하~!! 지금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이러시면 정말 곤란합니다!!!”비서의 절규가 집무실을 쩌렁쩌렁 울렸다.그러자 현목은 한숨을 내쉬며 비서에게 다가가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그의 양손을 잡아 얌전히 아해로 내려주었다.“이봐..... 그러다가 머리카락 다 빠지겠어.”“......”비서는 멍하니 현목을 바라보았다.자신의 머리카락을 걱정하는 현목을 바라보며 ‘지금 내 머리카락을 걱정할 때인가?’라는 생각을 하며 벙찐 표정으로 잠시 할 말을 잃었다.그러나 이내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듯 주먹을 꽉 움켜쥐었고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기 시작했다.“전하!”팡!“지금 제 가슴이!”팡!“이렇게 답답합니다!”팡!“정말 터질 것 같다고요!!!”비서의 절규에 현목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이내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게.”“전하 때문에 걱정하는 겁니다!!”“내가 알아서 한다고 하지 않았나.”“그 말이 제일 불안합니다!!!”비서의 절규가 다시 한번 집무실을 울렸지만 현목은 결국 웃을 수 밖에 없었다.“하하하!”반면 비서는 웃을 기분이 전혀 아니었다.‘......대체 저분을 어떻게 말려야 하지?’비서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현목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서류를 정리하고 있을 때,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인기척에 현목은 잽싸게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표정을 관리했다.“똑, 똑.”“전하, 기자들 도착했습니다.”문밖에서 들려오는 비서의 목소리에 현목은 목시늉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들어오게.”입가에 감돌던 음습한 미소는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낮게 깔린 그의 목소리에는 일국의 전하다운 정갈함과 범접할 수 없는 품위만이 매끄럽게 묻어났다.문이 열리며 비서가 들어섰고, 그 뒤로 카메라와 녹음기를 든 기자들이 머뭇거리며 발을 들였다.현목은 책상 위에 정갈하게 정돈된 서류에 손을 가볍게 올려놓은 채, 안경알 너머로 들어오는 이들을 향해 완벽하게 계산된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방금 전 서류에 서명하며 감돌던 기괴한 피로감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맑고 기품 있는 얼굴이었다.“바쁜 발걸음 하느라 고생들 하였소.”현목의 기품 있는 인사에 기자들은 저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으며 셔터를 눌러대기 바빴다.사방에서 플래시 세례가 터져 나가자, 비서가 “큼!” 하고 얕은 헛기침을 던졌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기자들이 살짝 놀라며 준비된 석상에 급히 자리를 잡았다.“전하, 안녕하십니까.”“바쁘신 와중에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기자들이 저마다 깍듯이 인사를 건네자, 현목은 그 인사를 너그럽게 받아주듯 온화한 미소를 띤 채 그들의 맞은편 상석에 천천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자... 그럼 인터뷰를 시작하지.”기자는 카메라의 영상 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