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이현명은 궁전의 가장 높은 권좌에 앉아 아래를 향해 묵묵히 해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천장의 붉은 조명과 검은 대리석 바닥의 대비 속에서 왕의 존재감은 더욱 절대적으로 보였다.
그의 양옆에는 뱀파이어 고위 관리들이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한눈에 봐도 분위기는 평소보다 한층 엄중했다.
“해일 심판자.”
이현명은 부러 단호한 목소리로 해일의 이름을 불렀다.
“오늘 인간 헌터들에게서 루비 아워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들었네.”
잠시 숨을 고르고 왕은 계속 말했다.
“그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그대가 신생 뱀파이어들을 심판했다지?”
해일은 흔들림 없는 자세로 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변명도, 후회도 없었고, 오직 확신만이 있었다.
“예, 폐하.”
해일은 굉장히 당당했고, 자신은 반드시 해야할 일을 했다고 생각했다.
위험 상황에서 안전 구역을 지켜야할 의무는 분명 심판자인 자신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루비 아워를 위협했고 인간 사냥을 정당화하는 발언까지 했습니다.”
궁정의 공기가 다시 무거워졌다. 고위 관리들은 표정을 굳히고 해일을 응시했다.
“뱀파이어 심판자로서,”
해일은 평화를 위협하는 자들을 처단한 것에 대해 확실한 자신의 의견을 전달했다.
“즉각적인 심판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해일 오른쪽에 서 있던 고위 관리가 참다 못한 듯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그러나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
관리의 목소리가 궁정에 울려 퍼졌다.
“인간 사냥꾼들의 초기 조사는 인간 헌터들이 먼저 하는 게 규칙일세!”
왕궁의 공기가 파르르 떨릴 정도였다.
“그런데, 그대는 먼저 나서서—”
관리의 눈이 번뜩였다.
“일을 그르치다니! 조사 절차도 없이, 심문도 없이! 인간 헌터들이 얼마나 불만을 표했는지 아는가?!”
해일은 그 말을 묵묵히 들었다. 고개를 숙이지도, 표정을 바꾸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의 판단에 대해 흔들림 없는 눈으로 왕만 바라보고 있었다.
해일은 한 번 깊게 호흡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오직 왕 이현명만을 바라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떨림 하나 없이 단단했다.
“저라고 어찌 모르겠습니까, 폐하.”
해일의 말이 궁정 안에 차분하게 울렸다.
“일에는 분명 순서가 있고, 절차를 따라야 하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헌터들이 먼저 심문하고, 우리가 그다음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것— 머리로는 알고 있습니다.”
고위 관리들은 그의 말에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해일은 한 치 흔들림 없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오늘 일은.... 시간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궁정 안의 분위가가 낮게 가라앉고 있었다.
“루비 아워를 중심으로 한 마을은 안전 지대들 중에서도 가장 안정적인 곳으로 꼽히는 곳입니다.”
해일은 고위 관료들을 한 번 바라 본 후 다시 이현명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 곳이 신생 인간 사냥꾼들에게 공격 당하기 직전 이었습니다.”
절차를 따지던 고위 관리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 역시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는지 보고서를 통해 알고 있었다. 반박할 말이 목까지 차올랐다가...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이현명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해보라.”
해일은 곧바로 이어 말했다.
“안전 지대가 그들의 사냥 본능 하나로 뚫리는 순간— 인간 사회와 뱀파이어 사회의 평화는
단숨에 깨져버립니다.”
궁정이 조용해졌다. 불씨 같은 말이 중앙 홀 위에 떠오른 듯했다.
“인간들은 이미 작은 징후만으로도 우리 존재를 의심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 불안이 현실이 되는 순간, 우린 더는 숨어 지낼 수도, 평화롭게 공존할 수도 없습니다.”
해일은 마침내 정면에서 왕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저는 심판자로서 선제적으로 위험을 제거했습니다. 절차를 위반한 것은 인정하겠습니다. 그러나—”
해일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있었고, 자신감이 넘치고 있었다.
“그 선택만이, 루비 아워와 우리 사회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이현명의 낮은 한숨이 넓은 홀 안에 잔잔히 퍼졌다. 왕좌 위에서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은 날카로웠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이해가 담겨 있었다.
“해일아, 심판자로서 빠른 판단은 좋았다. 하지만 절차라는 것이 있으니... 인간 사회와 더 좋은 관계를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말끝이 흘러내리자, 양옆의 관료들은 미묘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왕의 말에 힘을 보탰다.
그러나 누구도 해일을 정면으로 비난할 용기는 없었다. 이번 사건의 핵심이 ‘루비 아워’였기 때문이다.
“예. 폐하. 저도 이번 일에서 잘못한 부분은 인정하는 부분이나 지켜야 할 것들이 많았습니다. 이 점 폐하도 이해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해일의 말이 끝나자, 홀을 메운 공기가 잠시 멈춘 듯 조용해졌다.
이현명은 왕좌에 등을 기댄 채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천천히 두드렸다. 그 리듬은 짧았지만, 분명했다—왕이 지금 생각을 정리 중이라는 신호였다.
“그래.”
그는 낮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너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이현명은 짧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인간들의 대통령에게 잘 이야기해보마. 넌 돌아가도 좋다.”
그 말은 해일을 꾸짖는 것도, 완전히 용서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의 성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왕의 이해였다.
“폐하의 넓은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해일이 깊이 허리 숙여 경의를 표하자, 왕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에게 추가로 충고해봐야, 그 곧은 성질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현명은 왕좌에 다시 몸을 기댄 채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가라. 오늘은 충분히 들었다.”
그 한 마디가 떨어지자, 양옆의 관료들까지 조용히 숨을 골랐다.
누구도 해일의 앞을 막지 않았고 그 누구도 시선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해일은 궁의 거대한 성문을 지나며 잠시 걸음을 멈췄다.
밤하늘의 차가운 공기가 그의 얼굴을 스쳤고, 그는 손등으로 미세한 떨림을 훑어냈다.
수백 년간 왕의 곁에서 숱한 사건과 전쟁을 겪어왔지만— 왕 앞은 여전히 쉽지 않았다.
“하....”
그는 깊게 숨을 내쉬며 헛웃음을 지었다.
“몇 백 년을 봤는데도 적응이 안 되네.”
왕궁 특유의 무거운 기운이 어깨에서 조금씩 가벼워지자, 해일의 표정도 천천히 풀렸다.
이제 돌아갈 곳이 있었다.
“....이제 루비 아워로 돌아가 볼까?”
그가 한 손으로 외투 깃을 고쳐 세우며 중얼거리자, 마치 몸이 먼저 반응한 듯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빨라졌다.
루비 아워. 지율이 조용히 커피 잔을 닦고 있을 카페.
그리고— 그곳 안에서 자신의 놀림에도 쿡쿡 받아치며 기세등등하게 눈을 흘기던, 그 귀찮고도 기다려지는 얼굴. 은재.
해일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왕 앞에서는 결코 나오지 않는 종류의, 편안하고 날카롭지 않은 미소였다.
은재는 지금쯤 뭐 하고 있을까? 버그에 치여서 또 다크서클이 한 층 내려왔을까? 커피 피드백을 핑계 삼아 투덜거리며 자신을 붙잡아둘까?
혹은— 자기가 돌아오지 않아 조용히 초조해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 생각이 스쳐가는 순간, 그의 가슴이 묘하게 따뜻해졌다.
“...보고 싶네.”
해일은 그 말을 인정한 순간, 더 이상 걸을 필요도 없다는 듯 단번에 속도를 높였다.
자신은 한낱 뱀파이어에 불과한 존재다. 단지 인간들보다 오래 살고, 오래 본 것뿐.
화려한 신분도, 칭송받는 직책도 결국 겉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원한다면 몇 백 년 더 살아갈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삶이 특별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해일은 인간들과 섞여 살아가는 삶을 스스로 선택했다.
그 선택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을 살수록 인간의 온기, 웃음, 하루하루가 얼마나 애틋한지 너무 잘 알게 되었으니까.
많은 뱀파이어들이 자신도 인간이었을 때를 그리워한다. 사라진 가족을 떠올리며 밤낮 없이 길거리를 떠도는 자들도 있었고, 인간 애인 옆에서 늙지 않는 얼굴을 감추기 위해 도시를 떠나는 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 인간들을 진심으로 사랑해, 그들과 함께 평화로운 일상을 선택하는 자들도 있었다.
해일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그 평화를 깨는 존재가 나타난다면— 그 순간 그는 더 이상 ‘한낱 뱀파이어’가 아니었다.
그는 심판자(Hunter Judge)였다. 균형을 무너뜨리는 존재를 베어내고, 피의 계약을 어기려는 자를 조용히 사라지게 만들고, 인간과 뱀파이어의 경계를 넘어 혼란을 일으키려는 자를 ‘심판’하는 존재.
“나는 그냥... 맡은 역할을 할 뿐이지.”
해일은 스스로에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누구보다 더러운 일을 맡는 자.
누군가는 필요하지만, 누구도 원하지 않는 자리.
그리고 그 뒤처리를 해주는 건 왕과 고위 관료들의 몫이었다.
그들은 외교적 문구로 인간 정부를 달래며, 사건의 흔적을 지우고, 언론과 정치의 틈을 봉합한다.
그 속에서 해일은 늘 보이지 않는 한 조각일 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필요한 그림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평화를 지키는 삶이란 게 때로는 얼마나 외로운지, 누구보다 절감하고 있었다.
해일은 오토바이에서 내려 궁의 문 앞을 지키고 있는 보디가드 뱀파이어 앞에 섰다.“폐하를 만나러 왔네.”“해일 심판자님. 연락받았습니다. 들어가십시오.”보디가드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자 궁의 문이 열렸다.해일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궁 안으로 들어섰고 곧장 현목이 있는 집무실로 향했다.승계식이 끝난 후 황제의 자리에 오른 현목은 가끔씩 해일에게 전화를 걸어 신세 한탄을 하곤 했다.황제가 된 뒤 처리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쉬는 시간조차 제대로 가질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특히 황후 폐하와 함께할 시간이 줄어든 것이 가장 힘들다고 했다.예전 같으면 아무리 바빠도 틈을 내어 황후 폐하를 찾아갈 수 있었지만, 이제는 황제라는 자리가 그마저도 마음대로 허락하지 않는 모양이었다.해일은 그 이야기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황제의 자리에 오르시더니 신세 한탄이 느셨군...’하지만 그만큼 현목에게 황후 폐하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오늘 자신이 현목을 만나러 온 목적은 분명했다.이솔에게 프로포즈하기 전에 현목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특히 인간이었던 황녀님께서 뱀파이어가 되기까지 어떤 고민과 결정을 했는지 듣고 싶었다.하지만 그렇다고 처음부터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았다.도움이 되는 조언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현목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집무실 문 앞에 선 해일은 가볍게 노크했다.‘똑똑.’“폐하. 해일 심판자입니다.”“들어오게.”해일은 집무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서 현목 앞에 서서
해일은 이솔과 정식으로 만남을 갖기 시작한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고,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깊어졌다.처음에는 그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해일에게는 점점 더 큰 고민이 생겼다.뱀파이어인 자신은 늙지 않았고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지금의 모습 그대로 살아갈 수 있었다.하지만 인간인 이솔의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가고 있었다.지금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자신의 곁에서 웃고 있지만.... 언젠가는 나이를 먹을 것이고, 결국 자신보다 먼저 늙어갈 것이다.해일은 그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졌다.이솔과 오래오래 함께하고 싶었지만 가능하다면 지금처럼 수백 년의 시간을 함께 살아가고 싶었다.하지만 그렇다고 이솔에게 자신의 삶을 따라와 달라고 강요하고 싶지는 않았다.뱀파이어가 되는 것은 결코 가벼운 선택이 아니었다.한 번 선택하면 다시 인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 자신의 삶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것은.... 해일에게 너무나 이기적인 일이었다.그렇게 생각하며 매일 자신의 마음을 다잡았지만 그 이기심은 사라지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었다.결국 해일은 더 이상 혼자 고민할 수 없어 지율에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았다.“지율아.....”“응?”해일은 한동안 입만 달싹 거릴 뿐이었지만 결국 어렵게 입을 열었다.“나..... 이솔 씨랑 오래오래 함께하고 싶어.”지율은 아무 말 없이 해일을 바라보았다.해일은 고개를 숙인 채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지금처럼 계속 함께 있고 싶어.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이현명이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난 후, 그의 여행이 그렇게 오래 이어질 것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그저 모두가 그의 새로운 삶을 응원할 뿐이었다.그렇게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들의 일을 하며 평범한 일상을 이어가고 있었다.그중에서도 순혈 뱀파이어 사회에서 가장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존재들은 단연 하이브리드 뱀파이어들이었다.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순혈 뱀파이어들에게 좋은 가십거리가 되기 쉬웠다.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가 과장되어 퍼지기도 했고, 사소한 행동 하나가 하이브리드 뱀파이어 전체의 이미지로 이어지기도 했다.때문에 하이브리드 뱀파이어들은 외부에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평소보다 몸가짐에 더욱 신경을 써야 했다.물론 그런 상황이 불편하다고 하소연하는 이들도 있었다.“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저렇게 쳐다보는 거야?”“그러니까. 지나갈 때마다 수군거리는 것도 너무 싫어.”불만 섞인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자 하윤은 조용히 그들을 바라보았다.그리고 한숨을 내쉬며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순혈 뱀파이어가 아니잖아.”하윤의 말에 주변이 조용해졌다.“게다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뱀파이어 사회에 제대로 등록조차 되어 있지 않았어. 이제 막 우리 존재를 인정받기 시작한 거니까.... 다른 뱀파이어들이 우리를 우려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건 당연한 일이야.”하윤은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우리가 불편하다고 해서 그 시선을 무시할 수는 없어.”“하지만 너무 억울하잖아.”한 하이브리드 뱀파이어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지만 하윤은 그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현명은 최근 아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황제의 자리에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정신없이 바빴다.황제였을 때는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와 국정 업무 때문에 바빴다면, 지금은 집을 알아보고 여행 계획을 세우는 일로 하루가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특히 이현명을 가장 지치게 만든 것은 집을 알아보는 일이었다.“집을 알아보는 것이 이렇게 정신없는 일인가?”며칠째 여러 집을 둘러본 이현명이 지친 얼굴로 중얼거렸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지율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선황 폐하. 원래 집을 알아보는 것이 가장 어려운 법입니다.”“자네는 언제까지 선황 폐하라고 부를 것인가? 어?”이현명이 짜증스럽게 눈을 가늘게 뜨자 지율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크게 웃었다.“노력하고 있습니다.”“노력?”“네.”지율은 웃음을 가라앉히며 태연하게 대답했다.“그러니 선황 폐하께서도 노력해 주십시오.”“내가 뭘?”“황제가 아니라 평범한 뱀파이어로 사는 것에 익숙해지시는 것 말입니다.”순간 이현명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지율은 그런 이현명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웃었다.“선황 폐하께서는 아직도 저나 은재에게 지시하는 것이 익숙하시잖습니까.”“......”“이제는 조금 느긋하게 생각하시고 선황 폐하께서 지시가 아닌 결정을 하시는 겁니다.”이현명은 팔짱을 끼고 지율을 바라보았다.“자네...... 요즘 나한테
사색에 잠겨 앞으로 황제가 아닌 평범한 뱀파이어로 살아가는 삶에 대해 고민하던 이현명은 현관에서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에 감았던 눈을 떴다.삑, 삑, 삑.곧 현관문이 열리고 해일이 안으로 들어왔다.이현명은 소파에 앉은 채 해일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왔나?”“.....”해일은 현관에 들어선 그대로 걸음을 멈춰서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이현명의 모습을 바라보았다.이현명은 두 손을 가지런히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있었다.등받이에 기대지도 않았고, 다리를 꼬지도 않았다.그저 정자세로 앉아 정면만 바라보고 있었다.해일은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 속으로 중얼거렸다.‘누가 선비 아니랄까 봐......’이현명은 조선 초기부터 살아온 뱀파이어였다.인간이었던 시절에는 꼬장꼬장하기로 유명한 선비였고, 왕의 곁에서 조금이라도 잘못된 일이 보이면 거리낌 없이 충언을 올리던 사람이었다.말 한마디를 할 때도 예의를 갖췄지만, 그 말 속에는 언제나 뼈가 있었다.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시절의 습관은 사라지지 않았고 황제의 자리에서 내려온 지금까지 소파에 앉은 자세 하나만큼은 흐트러짐이 없었다.결국, 해일은 결국 피식 웃을 수 밖에 없었다.“오셨습니까?”“그래.”이현명은 여전히 꼿꼿한 자세를 유지한 채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해일은 신발을 벗으며 거실 안으로 들어와 이현명 가까이로 다가가 소파 앞에 놓인 테이블을 바라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형......”자신을 부르는 해일의 목소리에 이현명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
현목이 뱀파이어 세계의 새로운 황제에 오른 뒤, 매체는 온통 그의 이야기로 가득했다.새로운 황제의 즉위는 세계 뱀파이어 사회에서도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각국의 언론에서는 현목의 과거와 가족관계, 황제로서의 행보까지 앞다투어 보도하기 시작했다.정작 당사자인 현목은 그런 관심을 신경 쓸 여유조차 없었다.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예전처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고, 처리해야 할 업무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다.그동안 자신을 따라다니며 온갖 잔소리를 늘어놓던 비서는 약속했던 대로 휴가를 떠났다.덕분에 현목은 한동안 혼자서 업무를 처리해야 했지만, 이상하게도 불평하지 않았다.자신이 선택한 자리였고, 자신이 책임져야 할 일이었기 때문이다.반면....황제의 자리에서 내려온 이현명은 오히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뱀파이어가 되어버렸다.수백 년 동안 황제라는 이름으로 살아왔던 그에게 갑자기 주어진 것은 자유였다.하지만 막상 자유를 얻고 보니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궁을 나온 이현명은 한동안 자신의 차 안에 앉아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았다.‘....그래서 이제 뭘 하지?’황제였을 때는 하루의 모든 일정이 정해져 있었다.어디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누구를 만나야 하는지, 어떤 일을 처리해야 하는지 누군가가 끊임없이 알려주었다.그런데 이제는 아무도 자신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해주지 않았다.이현명은 한동안 휴대전화 화면을 바라보았다.황제로 지내는 동안 받았던 급여는 한 번도 제대로 사용하지 않았다.궁에서 생활하다 보니 식비며 생활비를 걱정할 필요도 없었고, 필요한 것들은 대부분 궁에서 알아서 준비해 주었다.그렇게 수백 년 동안 쌓인 돈은 어느새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