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은재는 지금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피의 욕망에 사로잡혀 인간을 사냥하는 신생 뱀파이어를 잡았고, 해일이 자신을 위해 혈청 커피를 주문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은재는 바리스타가 건네준 혈청 라떼를 두 손으로 받으며 마치 성배라도 들 듯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역시... 이 향이야....”
진한 혈청 향이 코끝을 스치자 은재의 표정은 순식간에 환해졌다.
다크써클조차 1mm는 올라간 것처럼 보였다.
그는 자리로 돌아가 털썩 앉아 컵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리고 한 모금 크게 들이켰다.
후아... 이게 바로 생명력이다. 은재는 만족스러운 숨을 내쉬며 재빨리 스마트폰을 꺼냈다.
메신저 창을 켜자마자 터치 속도가 인간 기준을 초월하는 속도로 바뀌었다.
‘게임 버그 해결 완료. 확인 바람.’
전문 개발자의 말투 그대로, 짧고 명확하고 차갑게.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야 은재는 혈청 라떼를 다시 빠르게 들이켰다.
당장 해결해야 할 일은 모두 끝나고 잠시 혈청 커피의 향을 음미하고 있자 답장이 도착했다.
‘확인 완료. 완벽 함.’
완벽하다는 답을 본 은재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노트북을 덮었다.
은재는 기지개를 켜며 잠시 쉬기로 했다.
밤 동안 처리애햐 했던 코딩 작업, 버그 패치, 팀 공유까지 할 일은 모두 끝났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것을 알았지만 아직 공식 업무 시간은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루비 아워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그는 혈청 커피가 든 종이컵을 천천히 굴리며 카페 안을 천천히 둘러보다 카운터 근처에서 대화 중인 지율과 해일이 보였다.
“지율 형, 해일 형—”
은재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그들에게 다가갔다.
“나 오늘 할 일은 전부 끝나서 공식 업무 끝날 때까지 쉬다가 퇴근 할건데 형들 끝날 때까지 기다릴까?? 어때?”
말 끝이 은근히 길어진다.
평소라면 그냥 “나 먼저 간다~~!!” 하고 튀었을 텐데 오늘은 뭔가.... 심경의 변화가 있었나 하는 생각에 지율이 미소지으며 물어보았다.
“오? 웬일이야? 은재가 누군가를 기다린다고?”
지율은 벌써 ‘놀릴 거리 발견’ 표정이다. 은재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형, 나 원래 기다릴 줄 아는 뱀파이어야. 평소엔 안 기다릴 뿐이지.”
해일은 한쪽 다리를 포스기 옆에 기대놓고 메뉴판을 정리하다가 은재의 말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지율이 수납장을 정리하며 말했다.
“오늘은 먼저 들어가.... 형은 김매니저랑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거든.”
지율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해일은 곧장 그 의미를 알아챘다.
김매니저가 출근하면 오늘 밤 있었던 사건에 대해 대략적인 설명이 필요했다.
지율은 루비 아워의 사장으로서 정리할 거리도 많고, 이야기할 것도 많았다. 해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김매니저 오늘 많이 놀라겠네...... 수고해.”
그때 은재가 해일 옆에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 알았어. 해일 형은? 나랑 같이 퇴근할 거야?”
그 말투에는 ‘같이 가면 좋겠다’는 마음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해일은 잠시 은재의 얼굴을 바라봤다.
다크써클은 그대로였지만, 은재의 눈빛은 오랜만에 편안했다. 그리고, 뭘 그런 당연한 걸 뭍냐는 듯 말했다.
“같이 퇴근하자.”
은재의 입가가 눈에 띄게 올라갔다. 해일은 외투를 집어 들며 지율에게 말했다.
“지율아. 그럼 나는 은재 퇴근할 때 같이 집으로 갈테니까 너는 천천히 일 마무리 해.”
“알았어.”
은재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 노트북을 열었다.
퇴근까지는 아직 1시간 정도가 남았기 때문이었다.
해일도 자신의 매장으로 돌아가 직원들과 함께 마감 정리를 도와 준 후 다시 루비 아워로 돌아왔다.
“은재야~! 이제 퇴근 하자!”
해일의 부름에 은재는 노트북을 정리한 후 가방을 한쪽 어깨에 걸치고 남은 혈청 라떼를 들고 해일의 뒤를 따라 조용히 카페 밖으로 나갔다.
둘의 뒷모습이 골목 끝으로 사라지자, 루비 아워 내부에는 은은한 조명과 정리하는 소리만 남았다. 지율은 카운터 뒤의 벽시계를 힐끔 올려다보니 시계는 오전 7시 50분이었다.
‘하... 이제 곧 오겠네.’
지율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커피머신을 닦던 손을 잠시 멈추었다.
오늘 루비 아워에 들어 온 신생 뱀파이어들은 인간 사냥꾼이었다.
그런 위험한 존재들이 이곳에 들어왔다는 것은 인간 사냥꾼 무리들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
.
.
지율이 걱정스런 마음에 한숨을 쉬고 있을 때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이가 있었다.
이솔은 굉장히 오랜만에 어젯밤 무려 8시간이나 푹 자고 얼굴빛까지 좋아진 상태로 출근 중이었다.
잠시 후 자신이 어떤 말을 듣게 될지는 전혀 모르는 채로 환하게 웃으며 루비 아워 문을 힘차게 열었다.
카페 문이 열리고 이솔이 루비 아워 안으로 들어왔다.
“사장님, 저 왔습니다.”
김매니저가 굉장히 상쾌한 목소리로 인사하며 들어왔다.
웨이브진 깔끔한 머리, 셔츠도 새로 산 듯 빳빳, 얼굴엔 긴 휴가를 떠날 사람이라는 것이 그대로 들어나는 혈색이 돌고 건강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루비 아워 안을 둘러보며 싱긋 웃었다.
“김매니저 왔어요? 잠시 할 이야기가 있는데... 잠시 사무실로 와 줄 수 있어요?”
지율의 말에 김매니저는 외투를 가지런히 걸어두고 조용히 지율을 따라 사무실로 들어갔다.
사무실 안은 아침 햇빛이 스며들어 따뜻했지만 지율의 표정은 그 반대였다— 밤새 끝없이 이어진 긴장감이 그의 얼굴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솔은 의자에 앉으며 지율 얼굴을 유심히 관찰했다.
피곤해 보이는 얼굴과 뱀파이어 특징 중 하나인 하얀 피부는 어쩐지 어두워 보였다.
“사장님... 괜찮으세요? 많이 피곤해 보이세요. 저녁 동안... 무슨 일 있었나요?”
지율은 손으로 머리를 한번 쓸어넘기며 잠시 숨을 골랐다.
“김매니저.... 놀라지 말고 들어요.”
이솔은 등받이에 기대며 살짝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예?”
지율은 한숨을 아주 조용히 내쉬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어젯밤에 인간 사냥꾼인 뱀파이어 셋이 왔었어요.”
순간, 이솔의 눈이 커지며 표정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예?? 사냥꾼이요? 진짜요? 여기에요?”
지율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해일이가 처리하기는 했지만, 위험한 존재들이 점점 거리를 좁히고 있는 것은 맞아요.”
이솔의 입술이 말라갔다.
“저희 안전한거 맞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되물어오는 이솔을 보며 지율은 한숨을 쉬었다.
“김매니저. 걱정하지 말아요. 안전할거에요. 우리가 어떻게든 그렇게 만들거에요.”
지율은 이솔을 안심시키며 말을 이었다.
“지금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경계가 더 강화 될거에요.
이 안전 구역에는 소수의 인간들도 거주 중이니 우리 뱀파이어들이 더 신경쓸거에요.”
이솔은 잠시 고민하는 듯 말이 없었다.
“사장님.... 저 휴가 반납하고 자리를 지키고 있을까요?”
이솔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며 묻는 순간, 지율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김매니저, 아니에요.”
지율은 손을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휴가는 일정대로 다녀와도 돼요. 정말로 지금 당장 무슨 큰일이 일어나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김매니저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루비 아워가 있는 이 지역은 낮 동안에는 일반 인간들이 드나드는 곳이었고, 밤이 되면 인간들은 빠져나가고 뱀파이어들의 시간이 된다.
안전 구역인 이 곳은 인간과 뱀파이어가 공존하되, 뱀파이어의 존재를 이해하고 함께 사는 극소수의 인간들만 이곳에서 거주하거나 함께 일을 한다.
그런 곳에 인간 사냥꾼인 뱀파이어들이 활개를 친다면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된다.
그래서인지— 이솔은 굉장히 책임이 강했다.
뱀파이어 사이에서 일하는 인간으로서, 평화가 깨질 가능성이 보인다면 본능적으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사장님... 진짜 괜찮은 거 맞죠?”
이솔은 걱정되는 마음에 지율에게 물었고, 지율은 그녀가 걱정 없이 휴가를 즐기기를 바랐다.
지율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그녀를 다독였다.
“정말 괜찮아요.”
그는 책상을 살짝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이미 경계를 강화했고, 뱀파이어 헌터들이 교대 근무로 주변을 순찰할 거예요. 해일 같은 심판자들도 계속 주변을 돌기로 했고요.”
이솔은 그 말을 듣고도 쉽게 안심하지 못했다.
“근데 사냥꾼이 셋이나 왔다면서요. 그 정도면 큰일 아닌가요...?”
지율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지금부터 대비하면 ‘문제’가 없어요.”
조용하지만 확신 있는 목소리였다.
“다들 경계망을 더 촘촘히 유지하기로 했고 왕궁에서도 이번 일 주시하고 있어요.”
지율은 이솔의 어깨에 손을 살짝 올렸다.
“김매니저는 걱정 말고. 휴가 다녀오세요.”
그는 부드럽게 웃었다.
“오랜만에 온전한 휴식 누리고 와요. 여긴 우리가 지킬게요.”
그 말에 이솔은 한참을 지율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긴장이 조금씩 풀리는 표정을 지었다.
“...알겠습니다, 사장님.”
그녀는 지율의 확신에 찬 목소리에 수긍 할 수 밖에 없었다.
“네.... 휴가 다녀오겠습니다.”
지율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이솔을 안심 시켰다.
“김매니저, 내일부터 휴가 시작이니까... 지우 씨 출근하면 인수인계 부탁드릴게요.”
이솔은 걱정이 되는 마음이 앞섰지만 인간인 자신은 할 수 있는게 없었다.
“네... 알겠습니다. 사장님.....”
지율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이솔을 다시 한번 안심 시켰다.
“마음 편하게 다녀오세요. 정말요.”
지율은 이솔을 믿는 만큼, 그가 괜히 불안에 휘말리지 않기를 바랐다.
그녀 역시 지율의 그런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인 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장님, 그럼 저는... 이만 일하러 가보겠습니다.”
지율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네, 부탁드릴게요. 그리고 정말... 걱정하지 말아요.”
이솔은 자신의 걱정을 달래 듯 말하는 지율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장님!”
안녕하세요. 《야근 뱀파이어 : 밤의 연인, 낮의 비밀》을 연재하고 있는 초록 개미입니다.7월부터 지금까지 3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직장 생활과 집필을 병행하며 매일 바쁘게 지내다 보니, 어느 순간 잠시 숨을 고르고 스스로를 돌아보며 글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오랜 고민 끝에독자 여러분께 양해를 구하고 잠시 휴재를 하기로 결정했습니다.이에 《야근 뱀파이어 : 밤의 연인, 낮의 비밀》은 약 2개월간 휴재를 진행하려 합니다. 이 기간 동안 충분히 휴식을 취하면서 그동안 미처 정리하지 못했던 생각들을 정리하고,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돌아보려 합니다. 또한 앞으로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어떤 방향으로 풀어나가야 할지, 마지막까지 어떻게 이어가야 작품을 더 좋은 모습으로 완성할 수 있을지 차분하게 고민하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이 작품은 제가 지난해부터 오랜 시간 고민하고, 한 장면 한 장면을 여러 번 수정하며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풀어온 만큼 제게도 무척이나 애정이 깊은 작품입니다. 처음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품었던 마음과 앞으로 들려드리고 싶은 이야기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그래서 단순히 연재를 이어가기 위해 서둘러 이야기를 마무리하기보다는, 잠시 멈춰 작품을 제대로 돌아보고 남은 이야기를 더 충실하게 풀어내고 싶습니다.약 2개월 동안 충분히 재충전하고 이야기를 정리한 뒤 반드시 연재를 재개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제가 처음부터 마음속에 그려왔던 이야기의 마지막까지, 《야근 뱀파이어 : 밤의 연인, 낮의 비밀》을 꼭 완결하
회의 끝에 이지우의 처분이 결정되자 이현명은 더 이상 자신이 할 일은 없다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나는 이만 돌아가도록 하지.”이현명은 그렇게 말한 뒤 회의실을 빠져나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선황이 떠난 후 현목은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왔고, 그곳에는 비서와 백도진이 함께 자리했다.현목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이지우, 그녀의 소멸은 결정되었으니 공식적으로 판결을 내리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좋겠군.”현목의 말에 비서와 백도진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입을 열었다.“맞습니다. 이번 기회에 모든 뱀파이어들에게도 이 사실을 공식적으로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백도진은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며 현목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그렇습니다, 폐하.”비서 역시 곧바로 의견을 보탰다.“이번 판결 자리에는 뱀파이어 기자들과 방송국 관계자들도 함께 참석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현목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음.... 맞는 말이야.”현목은 백도진과 비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그렇다면 백도진, 자네는 판결에 필요한 자료를 준비하게.”“네. 폐하.”현목은 이번에는 비서를 바라보았다.“자네는 기자들과 방송국 관계자들을 섭외하고, 준비가 끝나는 대로 보고서를 올리도록 하게.”“알겠습니다, 폐하.”“그럼, 각자 자리로 돌아가게.”현목의 말이 떨어지자 비서와 백도진은 각자의 업무를 진행하기 위해 정중히
이현명과의 통화를 마친 현목은 자신의 앞에 긴장한 듯 서 있는 백도진을 바라보았다.자신의 사위이자 뱀파이어 죄수들을 관리하는 책임자인 백도진이었다.“선황 폐하께서 내일 궁에 들리신다고 하셨다.”현목의 무뚝뚝한 말투는 백도진을 긴장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뻣뻣하게 굳은 목을 겨우 움직인 백도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네. 알겠습니다, 폐하.”뱀파이어들의 황제이자 자신의 장인어른.두 가지 위치가 겹쳐지자 백도진은 온몸에 잔뜩 힘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현목은 그런 백도진을 가만히 바라보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자아가 사라진 이지우가 예상하지 못한 행동을 보이는 것은 백도진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현목 역시 알고 있었다.그런데도 백도진은 마치 자신이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것처럼 잔뜩 긴장해 있었다.조금만 더 건드리면 정말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현목은 그런 백도진을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자네..... 내가 무서운가?”“.....”백도진은 순간 대답하지 못하고 입만 달싹 거리고 있었고 그 질문을 듣고 있던 뒤쪽의 비서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정말 몰라서 그러십니까?’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이었지만, 황제의 앞에서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백도진과 비서는 잠시 눈이 마주쳤지만 둘은 아무 말 없이 서로 모른 척하기로 암묵적인 합의를 보았다.살짝 시선을 내리깐 백도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하지만 곧 자신의 앞에 앉아 묵직한 아우라를 내뿜고 있는 장인이자 황제인 현목을 바라보았다.결국 솔직하게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ldquo
화려한 궁이 아닌 새로운 보금자리로 거처를 옮긴 이현명은 생각보다 길어진 여행 탓에 이제야 처음으로 자신의 집을 제대로 둘러보게 되었다.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집 안은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기본적인 가구들만 배치되어 있는 탓인지 집 안은 넓은 만큼이나 공허한 느낌이 강했다.이현명은 천천히 집 안을 둘러보다가 한마디를 내뱉었다.“집이 넓군.”자신의 집을 처음 본 소감치고는 지극히 심플한 한마디에 지율은 결국 ‘풋’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기본적인 가구만 배치되어 있어서 그렇습니다.”지율은 빈 공간을 둘러보며 말했다.“앞으로 선황 폐하께서 취향에 맞게 하나씩 꾸미시면 됩니다.”“그런가?”이현명은 다시 한번 집 안을 둘러보았다.넓은 거실과 비어 있는 공간들은 궁과 비교하면 소박하기 그지없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편안했다.“흠.....”이현명은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그렇다면 천천히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워가면 되겠군.”“네.”지율은 미소를 지었다.“선황 폐하께서 직접 꾸미신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집이 될 것 같습니다.”이현명은 그 말을 듣고 작게 웃었다.“그래.....”“그럼 저는 이만 루비 아워로 돌아가겠습니다. 이제 편히 쉬십시오.”지율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넨 뒤 몸을 돌려 현관으로 향했다.몇 걸음 옮기던 지율이 현관문 앞에 다다랐을 때였다.“신경 써줘서 고맙네.”
오랜 시간 이어진 회의 끝에 마침내 완벽한 프로포즈를 위한 준비가 모두 마무리되었다.그리고 기다리던 날.루비 아워에서 진행된 해일의 프로포즈는 예상과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마무리되었다.해일의 진심 어린 고백과 준비된 순간들을 마주한 이솔이.... 감동의 눈물을 펑펑 쏟아낸 것이다.정작 프로포즈를 준비한 해일을 비롯해 지율과 하윤, 은재까지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모두 당황하고 있었다.“이솔 씨, 괜찮아요?”해일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이솔의 눈가를 살폈다.“너무 갑작스러웠나?”해일이 조심스럽게 이솔을 다독이자, 이솔은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해일을 올려다보았다.그녀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지만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해일 씨, 저..... 정말 감동했어요.”이솔은 다시 한번 눈가를 닦으며 말했다.“언제 다 준비한 거예요?”해일은 그제야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몰래 준비하느라 꽤 오래 걸렸지.”“정말.....”이솔은 감동한 듯 다시 눈물을 글썽였다.해일은 그런 이솔의 모습을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이솔 씨.”“네.”“나랑.... 오래도록 함께해 줄래요?”이번에는 이솔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네....”해일은 이솔의 허락을 듣는 순간 양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환호했다.아주 오랜 시간을 돌아 마침내 이솔과 이어질 수 있게 된 순간이었다.그토록 바
은재가 자신의 마음을 깨닫고 하윤에게 조금씩 마음을 드러내기 시작한 지도 꽤 시간이 지났다.그동안 은재는 전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하윤에게 다가갔다.처음에는 그런 은재의 행동에 당황하던 하윤도 조금씩 긴장을 풀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은재와 함께 있는 시간을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한편 해일은 이솔에게 완벽한 프로포즈를 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었다.반지를 고르는 것부터 프로포즈 장소를 꾸미는 일까지 하나하나 직접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지율과 하윤, 은재의 도움을 받았다.특히 은재는 해일의 프로포즈 준비를 돕기 위해 루비 아워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리고 하윤 역시 자연스럽게 그 곁에서 함께 준비를 도왔다.은재는 하윤과 함께 있는 시간을 늘리고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했다.하지만 이상하게도 하윤은 좀처럼 자신의 곁을 온전히 내어주지 않았다.'하... 어렵네......'은재는 답답한 듯 머리를 쓸어넘겼다.분명 자신이 먼저 다가가면 하윤도 조금씩 마음을 열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런데 막상 자신이 적극적으로 다가가기 시작하자 하윤은 오히려 움츠러드는 모습을 보였다.그 모습을 볼 때마다 은재는 점점 더 안달이 났다.“이유가 뭐지....?”자신이 뭔가 잘못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은재가 혼잣말처럼 낮게 중얼거리자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해일이 다가왔다.“무슨 고민이야?”“하윤씨가 자꾸 나를 피하고 있어서.”은재가 답답한 표정으로 말하자 해일은 잠시 하윤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그러고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내가 경험자로서 조언하자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