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서야, 뭘 그렇게 긴장하고 있어? 할아버지 아직 건강해. 부축해 주지 않아도 혼자 걸을 수 있어.”고준석이 웃으며 말했다.고은서는 외할아버지의 팔에 기대어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그럼 제가 걷기 힘들어서 의지하고 싶어 하는 걸로 생각해 주세요!”고준석은 잠시 생각하다 물었다.“은서야, 무슨 걱정되는 일이라도 있는 거니? 요즘 너 많이 변한 것 같아서 말이야.”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할아버지는 제가 이렇게 변한 게 좋은 변화라고 생각하세요, 아니면 나쁜 변화라고 생각하세요?”고준석은 손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할아버지는 네가 이렇게 어른스럽고 얌전해질 필요 없다고 생각해. 그냥 네가 행복하게 살면 돼.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살아도 괜찮아.”외할아버지의 말에 고은서는 코끝이 찡해지며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외할아버지는 언제나 그녀를 아껴주셨다. 무슨 잘못을 해도 절대 그녀를 나무라지 않으셨다.“왜 또 울려고 하니? 무슨 억울한 일이라도 있었어?”고준석이 물었다.고은서는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그냥 할아버지한테 죄송해서요. 예전에는 곽승재밖에 몰랐고, 할아버지께는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어요.”고성준이웃으며 말했다.“바보 같은 소리하고 있구나.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할아버지는 기뻤단다.”고은서가 더 말을 하려는 순간, 앞쪽에서 갑자기 놀란 비명이 들렸다.곧이어 한 대의 오토바이가 빠른 속도로 그들을 향해 질주해 왔다.고은서는 가슴이 철렁하며, 외할아버지를 부축하고 급히 옆길로 몸을 피했다.오토바이는 그들이 서 있던 곳을 아슬아슬하게 지나갔다.간신히 한숨을 돌리려던 찰나, 또 다른 오토바이가 그들을 향해 돌진해 오는 것을 보았다!“할아버지, 조심하세요!”고은서는 재빨리 길가에 있던 주차 금지 표지판을 잡아 들고 오토바이를 향해 던졌다.“끼익!”오토바이가 갑작스러운 충격에 브레이크를 밟으며 미끄러졌다. 타이어와 도로가 부딪히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고은서는 지난 생에 백유미를 해치려 방화 사건을 꾸민 범인으로 몰렸었다. 그 사건을 꾸민 자들 중 한 명이 방금 헬멧을 떨어뜨린 그 남자였다.그와 또 다른 남자는 경찰서에서 고은서가 주범이고 그들은 단지 돈을 받고 일을 한 것뿐이라고 주장했다.그때 고은서는 그들과 맞서 싸우며 한참을 억울함에 시달렸어야 했기에 그들의 얼굴이 뚜렷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설마 여기까지 와서 외할아버지를 공격하려 할 줄이야.그렇다면 전생에서 외할아버지가 당한 사고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누군가의 계획된 범행이었던 것이다.“벡유미, 대체 어디까지 해보려는 거야!”고은서의 주먹이 바들바들 떨렸다.자신을 정신병원에 가두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외할아버지까지 해치려 하다니!전생 이맘때쯤 곽승재는 이미 백유미에게 마음이 기울어 있었다.고은서는 백유미의 SNS를 엿보며 그들이 매일 함께 일하고, 밥을 먹고, 영화를 보는 등 거의 연인 관계에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곽승재는 고은서에게 말을 거는 것조차 싫어했고,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짜증을 냈다.그런데도 왜 전생의 백유미는 굳이 외할아버지를 해치려 했을까?원지훈이 고은혜에게 접근했던 건 GS그룹을 무너뜨리려는 계획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하지만 외할아버지를 노린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외할아버지는 그녀의 감정 문제에 관여한 적도 없고, 이미 오래전에 회사 경영에서도 손을 뗐는데.백유미는 고은서 주위의 모든 사람을 해치려 했던 걸까.고은서는 온몸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다른 사람의 일이라면 천천히 대응할 수 있겠지만, 외할아버지에게 해를 입히는 건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고은서는 당장이라도 해성으로 돌아가 백유미의 목을 조르고 싶은 심정이었다.“도착했습니다.”기사의 목소리가 고은서를 증오와 분노의 감정에서 깨어나게 했다.고은서는 깊이 숨을 들이쉬며 감정을 추스르고 차에서 내렸다.유성준은 병원 입구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은서야, 대체 무슨 일이야?”“혹시 일에 방해가 되진 않았어요?”고은서는
유성준은 고은서를 호텔로 데려다주며 부드럽게 말했다.“너무 걱정하지 마. 경찰 쪽은 내가 계속 신경을 써서 소식이 들어오는 대로 바로 알려줄게.”고은서는 진심으로 그에게 고마움을 표했다.다른 사람들은 모두 이번 일을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했지만 유성준만은 고은서의 우려를 이해하며 그녀와 함께 세세한 조사까지 도와주었다.호텔로 돌아온 고은서는 외할아버지가 그녀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것을 알고 외할아버지 방으로 갔다.문을 두드리자 고준석이 걱정 어린 얼굴로 문을 열어 주었다.“은서야, 돌아왔구나. 얼굴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무슨 일 있었니?”고은서는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아무 일도 아니에요.”“아까 성준이에게 전화했는데, 네가 카메라 영상을 확인하러 갔다고 하더구나. 오늘 일은 정말 그냥 우연이었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고은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만 오토바이가 두 대나 우리를 거의 칠 뻔했어요. 너무 우연하다고 생각되지 않나요?”그녀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방 안에서 곽승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할아버지, 지금 누구와 이야기하고 계신 건가요?”고준석은 그제야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은서야, 들어와서 이야기 좀 하자. 마침 승재랑 영상 통화 중이었어. 너도 몇 마디 나눠보렴.”영상 통화 화면 속에 보이는 곽승재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자, 고은서의 머릿속에는 예전에 옷을 갈아입다가 실수로 영상 통화를 받았던 부끄러운 기억이 떠올랐다.“괜찮아요, 할아버지. 저 좀 피곤해서 먼저 방에 들어가 쉴게요.”고은서는 방에서 나와 곧바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녀는 곽승재와 나눌 말이 없었다.방으로 돌아온 고은서는 민시후에게 전화를 걸었다.“은서 씨, 요즘 나한테 연락 자주 하네요? 내가 보고 싶어진 건가?”민시후가 농담을 섞어 말했다.고은서는 핸드폰을 든 채 눈을 굴리며 말했다.“해성에 아는 사람 많죠?”“이젠 내 인간관계도 조사하는 거예요?”민시후는 과장을
전화를 끊은 후 고은서는 호텔 침대에 몸을 뉘었다.오늘 밤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렸다.외할아버지께서 다치지 않으셔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는 자신을 절대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다.잠시 누워있으려는데 휴대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나를 차단 목록에서 해제해.’주민기의 휴대폰에서 온 메시지였다.내용만 봐도 곽승재가 보낸 것임을 알 수 있었다.맞다. 그날 통화를 끊고 그녀는 아예 그의 번호를 차단해 버렸다.해제는 무슨.고은서는 곽승재를 떠올리며 화가 치밀었다.그가 이혼을 시원하게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백유미가 여차 손을 대게 된 것 아닌가.고은서가 메시지에 답하지 않자 곽승재는 호텔 방으로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고은서는 짜증이 나서 아예 방 전화선까지 뽑아버렸다.드디어 조용해졌다.고은서는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한 뒤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얼마나 잤을까, 문득 방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감사합니다.”그리고 나지막하게 들려온 곽승재의 감사 인사.고은서는 놀라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곽승재가 정말 눈앞에 서 있었다.외할아버지와의 영상 통화에서 입고 있던 그 정장을 입고 있었고, 손에는 작은 가방을 들고 있었다. 먼 길을 달려온 듯 피곤해 보였다.“여기, 여긴 왜 있어?”고은서의 목소리가 떨렸다.지금이 몇 시인데 해찬시까지 찾아왔단 말인가.곽승재는 가방을 내려놓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외투를 벗어 옷장에 걸었다. 마치 퇴근하고 집에 돌아온 남편처럼 그의 행동은 매우 자연스러웠다.“호텔 직원이 어떻게 들여보낸 거야?”고은서는 상황을 파악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곽승재는 평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우린 부부잖아. 프런트에 결혼 증명서를 보여주니까 간단히 확인만 하고 문을 열어주던데.”“...”고은서는 쓴웃음을 지었다.결혼 증명서를 이용해 권리를 주장하던 건 항상 자신이었는데 이제 곽승재가 그것을 이용할 줄이야.“그래서, 이 시간에 여기까지 와서 대체 뭘 하려는 건데?”고
고은서는 곽승재의 행동에 짜증이 났다.그와 말다툼하는 대신 그녀는 방 전화선을 다시 꽂고 프런트로 전화를 걸었다.“혹시 남는 방 있나요? 하나 더 예약하고 싶어요.”곽승재가 이 방을 쓰게 놔두고, 그녀가 다른 방을 쓰기로 한 것이다.그러나 프런트에서는 이렇게 대답했다.“죄송합니다, 손님. 현재 저희 호텔은 만실입니다.”고은서는 방해받아 잠에서 깨어난 것만으로도 화가 나 있었는데 방이 없다는 소식을 듣고 더 화가 났다.“내 허락도 없이 사람을 내 방에 들이다니, 어떻게 된 거예요? 당장 방을 하나 마련해주지 않으면 이 호텔을 신고할 거예요!”프런트 직원은 당황하며 설명했다.“죄송합니다, 손님. 상대방이 남편이라고 하시는데 너무 늦은 시간이라 손님 휴식에 방해 될까 봐 조심스러워서 그렇게 했습니다...”고은서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전화를 끊어버렸다.침대 옆에 여전히 앉아 있는 곽승재를 더 이상 쫓아낼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옷장에 여분의 이불이 있어. 알아서 방바닥에 깔고 자.”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하고는, 고은서는 곽승재에게 등을 돌리고 다시 잠을 청했다.곽승재는 고은서의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침대에 누워 있는 가녀린 등을 바라보며 그녀의 조금 전 행동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테이블에서 고은서가 전에 사용했던 연고를 찾아내 그녀의 왼손을 이불 속에서 꺼내 살살 바르기 시작했다.밤공기가 서늘해서인지, 곽승재의 손은 평소보다 더 차가웠다. 고은서는 그의 손길에 닿은 피부가 불편했다.손을 빼내려 했지만 곽승재가 단단히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가만히 있어.”한밤중에 싸우고 싶지 않았던 고은서는 그가 약을 다 바를 때까지 옆으로 누운 자세로 조용히 있었다.“어깨 상처는 어때? 약 뿌렸어?”곽승재가 물었다.고은서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곽승재, 제발 작작 좀 해. 여기까지 오지 않아도 난 네 '좋은 남편' 이미지를 망치지 않을 테니까.”곽승재는 잠시 숨을 고르며 말했다.“외할아버지 말씀으로는 네가 밤새 우
고은서는 침대에서 일어나 빠르게 얼굴만 씻고 겉옷을 걸친 채 민낯으로 방문을 열었다.고준석과 오춘식은 이미 준비를 마치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원래 일찍 일어나는 외할아버지는 더 자라고 했지만 고은서는 꼭 같이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호텔의 뷔페 레스토랑은 1층 로비 반대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지금은 아침 7시가 막 지난 시각이라 몇 명의 당직 직원들 외에는 손님이 거의 없었다.고은서는 외할아버지의 팔짱을 끼고 가볍게 대화를 나누며 걷고 있었다. 그때 고준석이 앞쪽을 가리키며 말했다."저기 있는 사람, 승재 아니냐?"고은서는 외할아버지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바라보았다.호텔 로비에 있는 긴 소파에 정말로 곽승재가 누워 있었다.그는 셔츠에 바지를 입고 있었고, 겉옷은 옆에 벗어둔 채, 마치 자기 집에 있는 것처럼 소파에 기대어 있었다.아무리 이런 초라한 상황에서도 그는 여전히 기품 있는 귀족처럼 보였다.고은서는 어젯밤 곽승재가 문을 쾅 닫고 나가면서 다른 호텔로 간 줄 알았지, 그가 로비에서 잠을 청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곽승재가 왜 여기 있어요, 할아버지 잘못 보신 거예요. 우리 가서 아침 먹어요."고은서는 외할아버지를 식당으로 데려가려고 했지만 외할아버지는 그녀의 이마를 톡 쳤다."너 정말 할아버지가 눈이 어두워진 줄 아는 거야? 승재를 내가 못 알아보겠니?"고은서는 입을 삐죽 내밀고 오춘식에게 먼저 식당으로 가라고 했다. 그리고 외할아버지와 함께 곽승재 쪽으로 걸어갔다."승재야, 언제 도착했어? 왜 여기서 자는 거야?"고준석의 목소리를 듣고 곽승재가 눈을 떴다.늘 차갑고 무덤덤한 그의 눈에는 다크서클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가 제대로 쉬지 못했음이 분명했다.곽승재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할아버지, 새벽에 도착했습니다. 호텔이 만실이라 여기서 잠깐 눈을 붙였어요.”평소엔 낮고 단단했던 그의 목소리도 잠에서 덜 깬 듯 쉰 목소리였다.“여기서 어떻게 쉬냐, 왜 은서 방에 안 들어갔어?”고준석은 걱정스러운 표정
너무 피곤해서인지 곽승재는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고은서는 곽승재를 깨우지 않고 조용히 화장실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한 후 고준석을 모시고 병원에 다녀왔다.그들이 오후에 돌아간다는 것을 알게 되자 유정길은 미련이 가득했다.함께 이야기를 조금 나눈 후, 고준석과 유정길에게 단독으로 대화할 시간을 주기 위해 고은서와 유성준은 병실 밖으로 나왔다.“요 며칠 너희를 데리고 여기를 제대로 구경시키지도 못했네.”유성준이 미안해하자 고은서는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 할아버지의 몸이 회복되시거든 다시 찾아와서 제대로 놀면 되죠.”유성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이렇게 말하지만, 유정길의 병이 낫지 않을 거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인생은 정말 어떻게 될지 몰라. 외국에 나가 있으면서 2년 동안 할아버지의 곁을 지키지 않은 게 너무 후회돼.”유성준은 가볍게 탄식했다.저번 생에 고은서는 고준석을 모시고 해찬시에 가지 않았었기에 유정길의 병세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고은서는 유성준에게 위로를 건넸다.“너무 자책하지 말아요. 오빠도 할아버지가 아플 거 모르셨잖아요.”“은서야, 너도 이제는 정말 다 컸구나. 똑똑하고 듬직하더니 이젠 사람을 위로할 줄도 아네.”유성준이 놀리자 고은서는 콕 집어 물었다.“제가 예전에는 철이 없었나요?”두 사람이 웃으면서 얘기를 나누던 중 고은서는 복도 끝에서 훤칠하게 생긴 곽승재가 과일 바구니를 들고 그들을 향해 걸어오는 것 같았다.곽승재는 연한 남색의 셔츠로 갈아입었고 블랙 수제 양복을 걸치고 있었다. 기운이 돌아오자 그는 또 도도하고 시크한 모습이었다.‘호텔에서 휴식하고 있던 거 아니었어? 왜 여기까지 찾아온 거지?’고은서의 눈길을 따라 유성준도 곽승재를 보았다.“은서, 너의 남편이야?”유성준의 물음에 고은서는 살짝 놀라서 물었다.“어떻게 아셨어요?”유성준이 말했다.“할아버지한테서 이름을 들은 적이 있고 또 우연히 인터뷰를 본 적이 있거든.”두 사람이
고은서는 눈을 감은 채 생각대로 대답했다.“그럭저럭. 예전에 한 번 만난 적 있어.”곽승재는 똑같은 속도로 말했다.“친하지 않은데 오빠라고 불러?”고은서는 눈을 뜨고 의심하는 눈빛으로 곽승재를 보며 말했다.“그게 왜?”곽승재는 입술을 오므리고 말했다.“왜 그냥 이름 부르지 않아?”고은서가 말했다.“그거야 나보다 나이 많으니까 오빠라고 부른 거지.”곽승재가 말했다.“나도 너보다 나이 많잖아.”고은서는 곽승재의 말뜻을 알아들었다.그녀는 이 상황이 우스웠다. 지난번 전미자와 가족 모임에 참석했다가 술에 취했을 때도 곽승재는 그녀에게 왜 오빠라고 부르지 않냐고 물었었다.그리고 억지로 오빠라고 한마디 부르게 했었다.지금 곽승재는 또 고은서가 유성준을 오빠라고 부른 것에 대해 꼬치꼬치 따지고 있었다.‘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당신이 날 얼마나 아끼는 줄 알겠어.’고은서는 코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당신 진짜 노잼이다.”말을 마치고 고은서는 창밖을 내다보았다.곽승재는 고은서를 반나절 동안 쳐다보았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침묵 속에서 예원 별장에 돌아왔다.이미숙은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고은서는 곽승재와 단둘이 있는 것이 싫어 주방으로 향했다.곽승재는 위층의 서재로 올라갔다.이미숙은 분위기를 살피더니 고은서에게 알렸다.“사모님, 사실 도련님께서 사모님을 많이 관심하십니다. 사모님이 해찬시에 계시던 동안 도련님은 매일 아침 조식을 먹을 때 그곳의 기후를 확인하셨습니다.”고은서는 건성으로 대답했다.“그랬어요? 승재가 많이 한가했나 보네요.”이미숙은 흥미롭게 대답했다.“네. 도련님께서 퇴근하고 돌아오시면 사모님의 사진도 보셨습니다.”“아줌마, 어떻게 그런 것도 알아요?”고은서가 장난치듯 말했다.“설마 할머니께서 그렇게 얘기하라고 시키신 거 아니죠?”고은서가 믿지 않는 눈치자 이미숙은 다급하게 설명했다.“사모님, 제가 말한 건 사실입니다. 여사님이랑 상관없습니다. 제가 방금 도련님께 우유를 가져다드
구경하는 사람들도 송민준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도대체 왜 그의 여자 파트너가 곽승재의 품에 안겨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송민준은 사람들의 의문스러운 시선을 받고 있었지만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여시은 씨, 저는 단지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은서와 여시은 씨의 사이에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은서가 왜 그런 행동을 하겠습니까?”“아빠, 정말 제가 한 게 아니에요! 저 사람들은 같은 편이라서 일부러 저를 괴롭히려는 거예요!”여시은은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그녀의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했다.여재훈은 눈물 글썽이는 딸을 바라보더니 온몸이 흐트러진 고은서를 향해 물었다.“고은서 씨, 사실대로 말해보세요.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고은서는 감정을 어느 정도 추스렸지만 이런 일을 당하면 당연히 난처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최대한 평온한 어조로 대답했다.“여 대표님, 제가 뭘 말해도 소용없을 겁니다. 시은이와 저는 각자 주장이 다르기 때문에 누구도 판단하기 어려울 겁니다.”고은서는 로비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여기 곳곳에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요. 직원들을 시켜 감시 카메라를 확인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러면 진실도 드러나겠죠.”이 말을 듣자 여시은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고은서가 여시은보다 먼저 바닥에 넘어졌는데 감시 카메라의 확인까지 제안하다니!‘설마 은서가 이 시간대에 감시 카메라를 꺼뒀다는 걸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시은아, 너의 생각은 어때?”고은서는 고개를 들어 여시은에게 물었다.여시은은 분노를 꾹 참고는 여전히 억울하고 순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좋아! 하지만 개업식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데 감시 카메라는 확인하는 동안 내가 먼저 개업식을 진행하고 나중에 이 문제를 논의하는 게 어때?”“안 돼.”고은서의 작은 얼굴에는 단호한 표정이 담겨있었다.“이 사건은 반드시 바로 조사되어야 한다고 봐.”고은서는 다시 여재훈을 바라보며 말했다.“여 대표님,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제가 시은이 만큼 귀하지는 않지만 이런
고은서는 얼굴과 몸이 온통 와인으로 범벅이 된 채로 바닥에 주저앉았다.와인은 그녀의 얼굴 결을 따라 드레스 위로 떨어졌고 머리카락에도 많이 튀었다. 그리고 젖은 앞머리 몇 가닥이 이마에 붙어 고은서를 더욱 가여워 보이게 했다.고은서는 놀란 듯 눈동자에 공포가 가득 차 있었다.“괜찮아요?”그 순간 곽승재와 송민준이 동시에 고은서를 향해 급히 다가왔다.곽승재가 송민준보다 한발 앞서 도착해 고은서를 부축하며 다급하게 물었다.고은서는 몸을 살짝 떨면서 두려움을 겨우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네, 괜찮아요.”누군가 물티슈를 건네자 곽승재는 서둘러 고은서의 얼굴을 닦아주었다.여시은은 텅 빈 와인 잔을 들고 테라스에서 고은서와 멀지 않은 곳에 떡하니 서 있었다.모든 일이 순식간에 벌어졌다.평소 감정을 잘 숨기던 여시은도 고은서의 이런 행동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그사이 로비의 음악은 멈췄고 상황을 보려는 사람들이 점점 모여들었다.“은서야, 괜찮아? 어떻게 넘어진 거야?”여시은은 금세 정신을 차리고 고은서의 앞에 다가가며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하지만 고은서는 여시은을 보더니 놀란 기색이 역력했고 몸까지 움츠리며 뒤로 물러났다.곽승재는 고은서를 안정시키듯 감싸며 여시은을 향해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여시은 씨, 대체 무슨 일이죠?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송민준이 곽승재보다 먼저 여시은에게 질문하고는 자신의 재킷을 벗어 고은서에게 걸쳐주려 했다.그러나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곽승재가 재킷을 받아 고은서에게 걸쳐주었다.“시은아!”소식을 접한 여재훈이 급히 달려왔다.“아빠!”여재훈을 본 여시은은 든든한 빽이라도 생긴 듯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으윽...”여재훈이 여시은을 달래기도 전에 고은서가 타이밍 좋게 아픔을 참는 소리를 냈다.“왜요? 아파요?”고은서에게 재킷을 걸쳐주던 곽승재가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고은서는 말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지만 다른 한 손으로 팔꿈치를 문지르는 동작을 했다.곽승재가 고은서의 팔을 살펴
이런 수법은 백유미도 쓴 적이 있었다.안타깝게도 여시은은 백유미처럼 곽승재에게 은혜를 베푼 적이 없기 때문에 이 수작은 곽승재에게 통하지 않았다.아마 고은서의 시선이 너무 노골적이었던 탓인지 여시은의 시선이 마침 고은서에게로 향했다.고은서는 입가의 비웃음을 다 감추지도 못한 채 여시은과 눈을 마주쳤다.여시은의 눈빛이 차가워졌지만 고은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손에 들고 있던 주스를 한 모금 마시더니 여시은에게 잔을 들어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는 기분 좋게 앞쪽 테라스로 걸어갔다.고은서는 여시은이 이런 식으로 도발을 당한 적이 없었기에 참지 못하고 따라올 것으로 생각했다.역시나 고은서가 테라스에 도착지 얼마 되지 않아 뒤에서 여시은의 목소리를 들려왔다.“은서야, 왜 혼자 여기서 술을 마시고 있어? 송 대표님은?”여시은은 손에 와인 잔을 들고 있었고 목소리는 여전히 달콤했다.고은서는 잔을 내려놓으며 씨익 웃으며 말했다.“여시은 씨, 매일 이렇게 연기하느라 피곤하지 않으세요? 아니면 제가 여시은 씨처럼 건망증이 심한 줄 아세요?”여시은은 고은서가 이런 태도를 보일 줄 몰랐는지 환했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은서야, 지난번에 아버지께서 우리 둘 사람을 불러 화해시켜줬잖아. 왜 아직도 화를 내고 있어?”여시은은 무언가 떠올랐는지 갑자기 슬픈 어조로 계속해서 말했다.“은서야, 너에게 말하지 못한 게 있는데 쿠아가 사고를 당해서 이미 하늘나라로 갔어.”고은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쿠아가 죽었다고?’여시은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졌다.“쿠아가 연못에 빠져 사고를 당했어. 연못에 금붕어들이 많이 있었는데 쿠아가가 놀면서 잡으려다가 빠진 모양이야. 내가 발견했을 때는 쿠아가 이미 물 위에 떠 있는 상태였어. 내가 직접 건져 올렸지만 쿠아의 몸이 이미 굳어버린 거 있지. 눈도 뜨인 채로 털은 전부 젖어서 몸에 붙어 있었어. 정말 안됐지...”고은서는 알고 있었다. 여시은이 일부러 이 사실을 그녀에게 알려주었다는 것을.그리고 쿠아가 물고기를 잡다가
곽승재는 현재 판주 투자은행에 있지만 감히 그를 얕보는 사람은 없었다.그는 곽씨 가문의 장손이자 곽씨 그룹의 유일한 후계자였기 때문이다. 판주 투자은행에 간 것도 일종의 시련으로 여겨질 뿐이다.앞으로의 곽씨 그룹은 여전히 곽승재가 이어받게 된다는 것도 모두가 뻔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사람들 속에 둘러싸인 곽승재는 평소처럼 검은색의 양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키가 크고 훤칠한 체구에 빼어난 외모는 마치 이곳이 그의 무대가 된 듯한 느낌을 주었다.여시은과 여재훈 역시 그에게 다가가 친근하고 허물없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주변에서는 곧장 수군거리는 소리가 퍼져 나왔다.“곽씨 가문과 여씨 가문이 혹시 좋은 일이라도 생기는 거 아니에요? 저렇게 친밀하게 대화하는 걸 보면 마치 한 가족 같잖아요.”“아직도 모르셨어요? 여씨 가문이 이번 투자은행의 개업을 순조롭게 하게 된 것도 곽 대표님이 뛰어다니며 큰 도움을 줬다잖아요!”“얼마 전까지 곽 대표님이 연예인과 스캔들 난 거 아니었어? 요즘은 소식이 뚝 끊겼던데... 아마도 정략결혼 얘기가 오가면서 그런 여자들은 정리한 모양이네.”“솔직히 곽 대표님과 여시은 씨는 그야말로 천생연분이죠. 진짜 결혼하면 주가가 어디까지 치솟을지 가늠이 안 가네요!”“그러게 말이야. 얼른 주식 좀 사둬야겠다...”주변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은서는 담담한 미소만 지었다.여시은이 곽승재와 결혼할 마음이 굉장히 확고한 모양이었다. 곽승재에게만 신경 쓰는 게 아니라 여론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있었으니까.하지만 고은서는 그런 것에 한 치도 관심이 없었다. 오늘은 따로 할 일이 있었다.KK에게 전화를 걸어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음을 확인한 고은서는 홀로 로비 안으로 들어가 자신을 찾아온 몇몇 동업자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곽승재 역시 고은서를 발견했지만 이런 자리에서 두 사람은 묵묵히 고개만 끄덕이며 인사만 했다.하지만 그 모습을 여시은이 눈치채고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살짝 어두운 그림자가
여시은은 몇몇 귀부인들에게 고은서를 소개했다.고은서도 예의 바르게 그녀들에게 인사를 나눴다.“시은아, 이분이 바로 네가 말했던 요즘 사업을 크게 성공시키고 관청에서 상까지 받은 그 친구야?”화려한 옷을 입은 한 귀부인이 물었다.“네, 언니. 은서는 정말 뛰어난 사람이라 제가 본받을 만한 점이 많아요. 우리 회사도 은서 회사처럼 잘 운영될 수만 있다면 너무 만족할 것 같아요!”여시은은 과장된 어조로 대답했다.“고은서 씨가 뛰어난지는 잘 모르겠지만 얼굴은 참 예쁘네.”이혜화로 불리는 사람이 이렇게 평가했다.“요즘 젊은이들은 정말 대단한 것 같다니까. 자기 장점을 잘 파악하고 이용하다니! 우리 세대는 따라갈 수 없는 것 같아.”다른 한 귀부인이 감탄했다.고은서는 눈앞의 여자들의 말하고 있는 의도를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그녀의 성과가 얼굴 덕분이라는 얘기였다.고은서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언니들이 이루신 지위와 성과에 비하면 제가 이 얼굴로 얻은 작은 성과는 비교도 안 되죠. 앞으로는 미모와 실력을 겸비한 언니들에게 많이 배워야겠어요.”고은서의 자기 비하와 아첨이 섞인 말을 들은 이혜화 일행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이때 여시은이 달콤하게 웃으며 말했다.“언니들, 은서가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 말재주도 좋고! 제가 이렇게 훌륭한 분을 언니들에게 소개해 드리길 잘했죠?”고은서도 웃으며 말을 이었다.“제 생각에 더 대단한 분은 시은인 것 같아요. 어떤 사람들은 끊임없는 노력과 투쟁으로 원하는 것을 얻어야 하지만 시은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성공한 삶을 살고 있잖아요. 예를 들어 제가 투자은행에서 오래 일하면서 크고 작은 만찬회도 많이 참석했지만 언니분들과 같은 귀한 분들을 만날 기회가 한 번도 없었어요. 그런데 오늘 시은의 개업식에서 이렇게 많은 언니를 한자리에 모이게 하다니 시은의 인맥이 얼마나 넓은지 알 수 있는걸요.”고은서는 살짝 한숨을 쉬며 진심인지 아닌지 모를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래서 시은이가 저를 부러워한다는
고은서도 미소를 지었다.“그렇게 큰일은 아니고. 만약 리셉션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면 오빠가 내 편을 들어줄 수 있을까 해서. 나 혼자 싸우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까 봐 좀 두렵거든.”송민준은 다시 한번 고은서를 안심시켰다.“은서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그렇게 큰 심리적인 부담을 가질 필요도 없고. 그냥 평범한 연회처럼 생각하면 돼.”“알았어.”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오늘은 결코 평범한 파티가 아닐 것으로 추측했다.얼마 후, 차가 여씨 가문에서 예약한 호텔에 도착했다.이곳은 해성에서 오랫동안 명성을 떨친 5성급 호텔로 환경과 서비스 모두 매우 훌륭했다. 평소에도 연예인과 부자들이 기자회견이나 연회를 열 때 가장 선호하는 장소 중 하나였다.운전기사가 차를 현관문 앞에 멈추자 곧바로 웨이터가 와서 문을 열어주었다.운전기사에게 주차를 부탁한 송민준은 고은서에게 신사답게 팔을 내밀었다.고은서가 송민준을 바라보자 그의 표정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마치 예의를 갖추는 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고은서는 송민준과 실랑이를 벌이지 않고 가볍게 그의 팔에 손을 얹고 함께 호텔 로비로 들어갔다.현장에는 축하 화분들이 가득해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고 있었다.그중에는 유일 투자은행의 화분도 있었는데 이는 고은서가 특별히 보내도록 지시한 것이었다.고은서는 여시은에게서 한 수 배웠다. 그것은 바로 누군가에게 불만이 있으면 있을수록 예의를 더 잘 지켜야 하며 상대방에게 어떤 흠도 잡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야 나중에 관계가 틀어져도 사람들이 그녀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두 사람은 출석 체크를 마친 후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입구 근처에서 여재훈과 여시은이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여재훈은 멋진 양복을 입었는데 전체적으로 성숙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풍겼다.여시은은 옅은 푸른 색의 맞춤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 세련된 스타일은 그녀를 마치 상류층 귀부인처럼 우아해 보이게 했다.여시은은 고은서와 송민준을
어깨를 움츠린 송민아의 모습은 불쌍하고 유약해 보였다.“오빠가 너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는 건 사실이잖아. 둘이 진전이 없더라도 내가 마음속으로 생각할 수는 있잖아?”고은서는 송민아를 노려보았다.“안 돼. 듣기 불편해.”“알았어. 앞으로는 두 사람을 연관 짓지 않을게. 이거 좀 놓을래? 무서워.”“...”고은서는 그제야 송민아를 놓아주었다.송민아는 고은서의 갑작스러운 독단적 행동에 적응하지 못한 듯 팔을 문지르며 말했다.“대표님, 다음부터는 말로 해주세요. 갑자기 이러니까 적응이 안 돼요.”고은서는 눈을 흘기며 받아쳤다.“네가 자꾸 나와 민준 씨를 엮으니까 그렇지. 민준 씨가 어떤 성격인지 몰라? 아무 이유 없이 나를 좋아할 리 없잖아.”송민아는 고은서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송민준은 감정이 없는 기계가 아니라 정상적인 남자야. 이렇게 예쁘고 능력 있는 너를 좋아하는 게 당연하잖아?”“그리고 내가 오빠를 잘 아니까 이런 생각을 하는 거야. 다른 여자에게는 이런 인내심을 보인 적이 없거든.”송민아는 고은서의 옆에 바짝 다가앉으며 말을 이었다.“네가 싫다면 더 이상 억지로 연결하지 않을게. 오빠가 정말 너를 좋아해도 중간에서 도와주지 않을 거야. 능력이 있으면 스스로 네 마음을 얻을 수 있겠지.”고은서가 진심으로 화낸 것은 아니었다. 여동생으로서 오빠의 연애를 응원하는 마음은 이해할 수 있었다.다만 송민준이 적인지 친구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남녀 감정으로 엮이고 싶지 않았다. 만약 송민준이 C선생이라면 그녀는 너무 구역질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어느새 여시은의 예흥 투자은행 개업식 날이 됐다.현장에서 간소하게 개업식을 치렀던 고은서와 달리 여시은은 5성급 호텔의 컨벤션홀을 빌려 리셉션 형식으로 개업식을 치른다고 한다. 리셉션은 오후에 시작돼 만찬회까지 이어진다.고은서는 만찬회 예절에 맞춰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블랙 정장 드레스를 차려입었다. 소재와 핏 모두 흠잡을 데 없이 고급스러웠다.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올리고 분위기에
그날 저녁, 라이트문 아파트에 돌아온 고은서는 주차장에서 곽승재와 마주쳤다.두 사람은 묵묵히 엘리베이터로 향했다.엘리베이터를 탈 때, 고은서는 곽승재의 코트에서 익숙한 향수 냄새가 나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가 여시은을 위해 직접 조합한 향이었다.이는 곽승재가 오후에 여시은과 함께 있었다는 증거였다.“오후에 여시은 씨 회사에서 미팅이 있었어. 퇴근할 때까지 줄곧 바빠서 전화를 못 했어. 그래서 끝나는 대로 라이트문 아파트로 온 거야.”곽승재는 지나가는 말처럼 설명했고, 고은서는 그냥 웃었다.여시은은 곽승재가 자리를 비웠을 때 일부러 코트에 향수를 뿌린 게 분명했다.‘이따위 유치한 장난질로 도발하는 건가?’...며칠 후, 고은서는 여시은이 보낸 개업 리셉션 초대장을 받았다.초대장은 송민아가 직접 사무실로 가져왔다.“여시은이 이번에 유명 기업인과 업계 엘리트를 대거 초대하고 언론사도 여러 군데 초청했나 봐. 우리 유일 투자은행 개업식 때보다 훨씬 화려하고 이목이 쏠릴 것 같아.”고은서는 그저 웃었다.‘나한테 본때를 보여주려면 규모에서 압도해야 했겠지.’“은서야, 그날 나랑 같이 가자.”여시은이 고은서에게 나쁜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 그녀는 여시은을 유난히 경계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정형외과 프로젝트가 마무리 단계이니 너는 거기에 집중해. 그냥 리셉션 참석하는 거니까 별일 없을 거야.”하지만 송민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여시은이 너를 물에 빠뜨리기까지 했었잖아. 그렇게 싫어하면서 왜 초대했을까? 분명 꿍꿍이가 있을 거야.”고은서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심리학 공부를 그렇게 많이 하고도 모르겠어? 여시은이 리셉션 주최자잖아. 문제가 생기면 체면을 구기는 건 그 여자야. 그렇게 멍청하게 자기 무대를 망칠 리가 없잖아?”“여시은이 나를 초대한 건 아버지 앞에서 겉으로는 친구인 척하며 친분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야. 그리고 동시에, 내가 자기랑은 급이 다르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거겠지.”도리는
“곽 대표님은 제가 그렇게 싫으세요? 병뚜껑 열어주는 것조차 꺼릴 만큼?”여시은의 말투에는 약간의 유감과 억지로 짜낸 서운함이 섞여 있었다.곽승재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시은 씨가 원하는 건 물을 마시는 결과가 아닌가요? 물을 마실 수 있으면 되지, 누가 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잖아요.”“왜 중요하지 않아요?”여시은은 눈을 깜박이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농담을 던졌다.“저는 곽 대표님이 열어준 병의 물만 마시고 싶은데요.”노골적인 애정 공세에 곽승재는 표정 변화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여시은은 전혀 민망한 기색이 없이 여전히 공세를 이어갔다.“솔직히 말할게요.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우리가 천생연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두 집안 어른의 뜻대로 조금씩 알아가면 안 될까요?”곽승재는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우리 집안에서 할머니와 어머니는 정략결혼을 반대하세요. 아버지의 일방적인 희망 사항일 뿐이죠.”“그리고 이미 말씀드렸듯이 저는 재혼 계획이 없습니다.”여시은은 여전히 달콤한 미소를 유지했다.“당장 결혼하자는 뜻은 아니에요. 어쩌면 만나다가 전혀 안 맞는다는 걸 깨달을 수도 있잖아요?”“그럴 필요 없어요. 저는 시은 씨와 맞지 않아요.”곽승재는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고은서는 원래 활발하고 웃음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저와 결혼한 후 시들어버렸고,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온갖 방법을 다해 저한테서 도망쳤어요. 이혼한 후 그 여자는 다시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 됐죠. 그러니 저는 남편으로 자격 미달이에요.”“시은 씨는 여 회장님께서 애지중지하는 따님이고 조건이 우월하니 더 나은 남자를 만나셔야죠.”여시은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저는 고은서와 달라요. 고은서는 완전한 사랑을 원했지만 저는 조건이 맞는 파트너면 돼요.”“사랑이 있으면 금상첨화이고 없어도 상관없어요.”그녀는 돌직구를 날렸다.“제가 고은서보다 승재 씨에게 더 잘 맞는다고 생각해요. 고은서 만큼 똑똑하거나 유능하지는 않지만, 이게 남자들에게는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