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서는 듣자마자 재빨리 대신 거절했다.“할아버지, 여기 갈아입을 옷도 없는데 그냥 돌아가서 쉬게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고준석이 말했다.“없다니? 전에 네가 산 그 많은 옷들이 아직도 옷장에 있지 않느냐.”“...”확실히 전에 옷을 많이 사두긴 했었다.어느 날 이곳에 묵게 될 때 갈아입을 옷이 없는 상황을 대비해 여러 벌 사두었었다. 하지만 곽승재는 전에 한 번도 고준석 집에 묵은 적이 없었다.“회사에 처리할 일이 많아서 회사로 돌아가야 한다고요.”고은서가 다른 이유로 다시 둘러댔다.“그래?”고준석이 곽승재를 보며 물었다.고은서는 경고하는 눈빛으로 곽승재를 노려보았다.‘같이 밥 먹는 것도 짜증 나 죽겠는데 여기에 묵을 생각은 절대 하지마!’곽승재는 고은서를 힐끗 보더니 고준석에게 말했다.“확실히 처리할 일들이 남아있긴 해요.”고은서가 그의 말을 듣고 속으로 은근 좋아할 때 곽승재는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하지만 온라인으로 처리하면 되는 거라 괜찮아요.”“잘됐구나. 그럼 힘들게 돌아가지 말고 여기서 하룻밤 자고 가렴.”고준석은 허허 웃으면서 결정을 내렸다.“할아버지, 저도 오늘 여기서 하룻밤 자고 갈래요.”고은혜가 말했다.“너 내일 학교 가는데 왜 갑자기 할아버지 집에서 자겠다는 거야. 얼른 집으로 돌아가!”단은숙이 명령조로 말했다.고은혜는 입을 삐죽거리며 반박했다.“엄마, 평소에 시도 때도 없이 할아버지 환심 사게 자주 곁에 있어줘라고 했었잖아. 오늘 할아버지 말동무가 되어주겠다는데 왜 그러는 거야.”“환심을 사는 게 아니라 할아버지 설득해서 지금 해외로 가려고 그러는 거잖아!”고은혜가 벌떡 일어서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엄마, 고집 좀 그만 부려. 나 스무 살이야, 이제 어른이라고. 할아버지 집에서 하룻밤 자고 가겠다는 일쯤은 나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고!”“너!”단은숙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라 얼굴이 빨개졌다.“그만해. 은혜가 자고 가겠다는데 그렇게 하게 해. 애도 다 컸는데 너무 엄하게 대하지
고준석은 고은서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은서야, 승재를 방으로 안내해줘. 그리고 갈아입을 옷도 준비해서 전해주고.”고은서는 못마땅했지만 할아버지 말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곽승재는 위층으로 올라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너도 올라가 봐. 은서가 말은 그렇게 하지만 너한테 아직도 마음은 있어.”“감사합니다, 할아버지.”곽승재는 이어 위층으로 따라 올라갔다.고은서의 방으로 다가가 보니 방문이 열려있었는데 고은서는 방 안 드레싱룸 구석에서 곽승재 옷을 찾고 있었다.고은서 방에 들어가는 건 처음이었다.방은 아주 소녀소녀하게 꾸며져 있었는데 핑크색 벽지와 침구 용품, 심지어 화장대까지 다 연분홍색이었다.침대 위에는 여러 가지 인형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침대 머리맡에는 학창시절 사진이 놓여 있었다.사진 속의 그녀는 복스러운 얼굴에 보는 사람의 기분도 함께 좋아질 정도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그러나 곽승재의 인상 속의 그녀는 단 한 번도 이렇게 웃은 적이 없었다.대부분 조심스럽게 행동하거나 질투하거나 불만스러운 모습뿐이었다. 함부로 웃지도 화를 내지도 못했었다.결혼한 후로 한 번도 즐거웠던 적이 없었다던 고은서의 말을 떠올린 곽승재는 기분이 약간 언짢았다.그러나 예전의 그녀와 비겼을 때 이 모든 게 사실이라는 걸 그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이거 받아!”고은서는 힘겹게 찾아낸 옷 여러 벌을 곽승재에게 던져주었다.옷더미 안에는 잠옷과 수건, 그리고 셔츠도 있었다. 구석에 보관해둔 탓에 접힌 흔적이 있긴 했으나 옷 질량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고 또 아주 깨끗했다.고은서가 사들인 후 열심히 씻어서 다려 놓은 게 분명했다.“객실은 옆방이야. 사용인들 시켜서 침구 용품 다 새것으로 바꿨으니까 오늘은 그 방에서 쉬면...”“고은서, 그때 당시 나랑 결혼한 이유가 뭐야?”곽승재가 고은서의 말을 끊고 물었다.그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하던 말을 멈추고 그를 쳐다보았다.“이 결혼이 너한테 네가 원하는 걸 줄 수 없다는 걸 너
“전에 백유미가 운호 산장에서 알레르기 일으킨 일을 조사해봤는데 약국의 실수로 일어난 일이래. 너랑 전혀 무관한 일이야.”그 말을 듣자마자 고은서의 주의력이 곽승재에게로 쏠렸다.백유미가 과민한 일이 약국 탓일 리가 없다. 백유미의 자작극이 분명했으니 말이다.“누가 조사한 거야?”고은서가 물었다.“승엽 아저씨가 직접 조사했어.”곽승재는 오후에 있었던 일을 고은서에게 간단히 알려줬다.고은서는 곽승재의 얘기를 듣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날 모함하려고 들더니 왜 갑자기 백승엽과 함께 말을 바꾸는 거지?’“내가 조사해봤는데 성아연과 백유미가 서로 연락하고 있는 건 맞지만 그날 저녁 백유미를 찾아간 건 성아연 혼자의 뜻이야.”곽승재는 차근차근 말을 이어갔다.‘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 같네.’고은서는 순간 모든 걸 깨달았다. 일이 곽승재에게 들키는 게 무서워서 먼저 손을 써서 억울한 캐릭터를 만들려는 심보였다.‘전생에 날 귀신도 모르게 죽인 사람이 아니랄까 봐. 확실히 총명하긴 하네.’“성아연한테서 어떤 사과를 원하는지 말만 해.”곽승재가 말했다.고은서는 미간을 찌푸리고 그를 보며 말했다.“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지? 이 일을 꾸민 사람은 백유미인데 왜 성아연이 나한테 사과해야 하는 거지? 사과해야 하는 사람은 백유미야.”“백유미와 성아연 사이에 아무런 경제적인 거래도 없었어.”곽승재가 답했다.“그러니까 지금 그 말은 백유미가 시켜서가 아니라 성아연 혼자 모든 걸 꾸몄다는 거야?”고은서가 어이없다는 듯 냉소를 흘렸다.고은서가 화날 거라는 걸 알고 있던 곽승재가 차근차근 그녀를 달랬다.“내가 백유미 편을 들어준다고 생각 드는 거라면 육현석한테 한 번 더 조사해보라고 맡길게. 너도 육현석이 지금 널 얼마나 아끼는지 알고 있을 거 아니야. 육현석이 널 가짜 서류로 널 속일 일은 없을 거잖아.”고은서는 점심에 육현석한테서 걸려온 전화가 떠올랐다.그가 했던 말을 결론 지어 보면 곽승재가 아직도 날 많이 관심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말을 꺼
곽승재의 눈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벅차오르고 있는 듯했다. 고은서는 이 상황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어찌할 바를 몰랐다.“고은서, 전에는 백유미가 신고하지 않아서 다행이지 만약 백유미가 신고하려거든 상처받는 건 너뿐이야.”곽승재가 말했다.고은서는 눈길을 돌리고 답했다.“내가 어떻게 되는 당신이랑 상관없는 일이야.”곽승재는 고은서의 턱을 잡고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넌 내 아내야. 네 일이라면 다 나랑 상관있는 일이라고.”고은서는 성가시다는 듯 그의 손을 뿌리치고 말했다.“얼마 지나지 않으면 난 당신 아내가 아니야.”“고은서, 난 이혼할 생각이 없어.”곽승재가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네가 집에서 나간 후로 적응이 안 될 뿐만 아니라 네가 다른 남자랑 있는 모습을 볼 때도 마음이 불편해. 나 너한테 감정이 생긴 것 같아.”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아파왔다.전생에 그녀가 바라고 바라던 그 말을 지금 이렇게 곽승재 입으로 듣게 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전생의 곽승재는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기 싫어했으니 말이다.이번 생만큼은 이혼하고 곽승재에게서 벗어나려고 했는데 갑자기 자신에게 감정이 생겼다는 말을 들으니 너무도 우스웠다.‘전생의 내가 참 비참하기도 했지.’“넌 날 사랑해서 나랑 결혼한 거잖아. 그럼 지금에 와서 꼭 이혼할 필요도 없는 거잖아. 그러니까 다시 한번 잘 생각해봤으면 좋겠어. 우리 서로에게 한 번씩 기회를 줄 수는 있잖아.”곽승재가 그녀에게 이혼하지 말자고는 여러 번이고 말했었지만 지금처럼 사랑까지 얘기 하면서 간절했던 적은 없었다. 아마 진짜 이혼하기 싫은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의 자존심으로 이렇게 끌어가면서 이혼을 거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나...”쿵.고은서가 입을 열기도 전에 무언가가 문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려보니 고은혜가 문앞에 쪼그리고 앉아 부딪친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나, 나 아무것도 못 들었어. 금방 문앞에 도착한 거야!”고은혜가 황급히 변명했다.“얘기 나눠.”
고은서는 고은혜를 어디서부터 반박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네 마음속에선 원지훈이 괜찮은 사람이야?”‘원지훈 조건으로 고씨 집안 기사가 되려고 해도 어림없는데 괜찮다고?’고은혜는 고은서의 말투가 약간 거슬렸다.“당연히 곽승재랑은 비교가 안 되지. 그런데 곽승재보다 더 출중한 사람이 원래 얼마 되지도 않잖아. 게다가 원지훈 집안도 사업하는 집안이고 또 본인도 요즘 창업하고 있는데 회사 규모도 나쁘지 않고 머리고 꽤 영리하고. 누가 알아, 언젠가는 우리 MQ까지 넘어서는 존재가 될지.”고은서는 절대 그가 MQ를 넘어서는 일이 없다고, 그의 회사가 곧 망한다고 알려주고 싶었다.“원지훈 조건은 그렇다고 쳐. 그런데 결혼 상대를 찾을 때는 적어도 상대방이 널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고려해 봐야 할 거 아니야. 조건만 보고 인품을 안 보는 건 아니지 않아?”고은혜는 입을 삐죽거리며 반박했다.“전에 귀걸이 사건도 나한테 설명했어. 친구가 자신을 속인 거래, 원지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그리고 너한테 보낸 문자도 그저 내에 관해 알고 싶어서 그런 거래. 게다가 나 지금 좋아하는 사람도 없고 또 원지훈은 내가 원하는 거라면 다 해주고 사람 달랠 줄도 아는데 왜 애인으로 알맞지 않다는 거야? 성아연도 나한테 이런 남자가 쥐락펴락하기 쉽다고 나한테 어울린다고 했어.”“성아연?”고은서는 중점을 잡아냈다.“언제 성아연이랑 친해진 거야?”고은혜는 고은서의 표정이 갑자기 싸늘해진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네가 성아연이랑 절친인 건 알겠는데 내가 성아연이랑 친해지면 안 된다는 법은 없잖아.”고은서가 답했다.“이젠 절친이 아니야. 그보다 어떻게 연락이 닿은 거야? 성아연이 너한테 먼저 연락했어?”고은혜는 전미자 할머니 생신날에 MQ가 큰 합작을 이뤄낸 게 성아연 아버지 성동욱 덕분이라고 이실직고했다.“엄마가 성씨 집안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성아연을 우리 집에 여러 번 초대했었어. 저번에 마침 나도 집에 있어서 자연스레 내 카톡 추가해서 심심
“알았어, 알았어. 우리 엄마보다 잔소리가 더 심하네.”고은혜는 기분이 금세 풀렸는지 고은서의 말의 이상한 점을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기뻐하며 방문을 나섰다.고은서는 고은혜의 뒷모습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은혜가 나한테 먼저 말해서 다행이야.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일인데. 그러고 보니 원지훈과 만날 때도 된 것 같네.’고은서는 원지훈에게 귀국했다고 톡을 보냈다.그러자 내일 오후에 만나자고 칼답이 왔다.폰을 내려놓고 답답해서 바람도 쐴 겸 베란다에 있는 리클라이너에 누우려고 할 때 옆방 베란다에 서 있는 곽승재를 발견했다.그는 고은서가 사준 잠옷을 입고 회사 일로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다.통화를 마친 후 그도 베란다에 있는 고은서를 발견했다.두 사람은 서로 한참 마주 보고 있었다.“고은서, 내가 아까 했던 말 잘 생각해봤어?”밤하늘 아래에 서 있는 곽승재는 여느 때보다 더 매력적이었다.고은서는 담담하게 말했다.“전에 M에서 말했다시피 난 당신에게 더는 아무런 감정이 없어. 당신이 나한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든 내가 이혼하려는 결정은 변치 않을 거야.”곽승재는 아무 말 없이 한참 서 있다가 방으로 돌아갔다.고은서도 저녁 바람을 좀 쐬다가 돌아가 침대에 누웠다.이튿날, 그녀가 일어났을 때 곽승재는 이미 이른 아침부터 나갔고 고은혜도 학교로 갔다.아침을 먹고 고준석과 함께 아침 운동까지 하고 방으로 돌아가 폰을 확인하니 박지연한테서 걸려온 부재중 전화가 여러 개였다.‘뭐가 이리 급한 거지?’고은서가 박지연에게 전화를 걸었다.“고은서, 너 지금 어디야?”박지연의 목소리가 꽤 심각해 보였다.고은서도 따라 긴장해졌는데 갑자기 전에 했던 건강검진이 떠올랐다.“왜 그래? 내 위에 문제라도 생겼어?”박지연이 답했다.“직접 만나서 얘기해야 할 것 같은데.”고은서는 더 긴장되었다.“먼저 알려줘. 그렇지 않으면 나 긴장해서 운전도 못 해.”“위에는 아무 문제 없어.”“다행이다. 다른 병은 더 쉽게 이겨낼 수
박지연이 말했다.“곽승재가 백유미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약간의 미흡한 점이 있긴 했는데 육현석은 이 사이에 오해가 존재한다고 했어. 게다가 곽승재가 아직도 널 좋아하는 건 확실하잖아. 그러니까 만약 이혼하려는 의사가 그렇게 강하지 않다고 해도 난 네 선택을 존중해.”고은서는 더 어리둥절했다.“지연아, 할 말이 있다고 날 불러 내놓고 할 말이 고작 그거야? 내가 왜 이혼하려고 하는지 너도 잘 알고 있잖아.”“잘 알고 있는데 네가 이혼할 염원이 그렇게 강렬했으면 왜 피임조치도 하지 않았냐고.”박지연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하고 싶어서 했다고 해도 피임조치는 왜 안 한 건데?’고은서는 오리무중에 빠졌다.“피임조치?”박지연은 약간 어이가 없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고은서, 모르는 척하는 거야 아니면 진짜 모르는 거야? 너 임신했어!”“임신?!”고은서가 소리 지르면서 놀라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머리에 있던 물방울들이 이리저리 튕겼다.옆방에 있던 사람들도 화들짝 놀랐는지 물건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밖에 있던 미용사가 황급히 들어와서 고은서에게 수건을 건네주며 말했다.“손님, 얼른 다시 누우세요. 그렇지 않으면 손님 옷이 다 젖을 수가 있어요.”고은서는 박지연의 말에 머리가 멍해져 다른 사람의 말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미용사가 멍하니 앉아있는 그녀의 머리를 닦아주면서 조심스레 물었다.“손님, 괜찮으세요?”“수건 저한테 주시고 나가보세요.”박지연이 수건으로 머리를 싸고 침대에서 일어나면서 미용사에게 말했다.미용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건을 박지연에게 건네주고는 문을 닫고 나갔다.박지연은 고은서의 어깨를 툭 치면서 말했다.“고은서, 좋아서 그러는 거야 아니면 놀라서 그러는 거야?”고은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이 휘둥그레서 물었다.“지연아, 확실해? 나 진짜 임신했어?”박지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응. 오전에 네 진단서 가지러 갔는데 다른 곳에는 별문제가 없고 임신했다고 쓰여져 있던데.”“그게
고은서는 박지윤 덕에 머리를 말리고 미용실에서 나왔다.“차키 줘. 내가 운전할게.”박지연이 말했다.고은서도 고집부리지 않고 차키를 박지연에게 건네주었다.미용실.아주 정성껏 꾸민 여자 한 명이 룸에서 걸어 나왔다.“손님, 헤어디자인 해드릴까요?”헤어디자이너가 물었다.여자의 온화한 웃음 속에는 악랄함이 숨겨져 있었다.“아니에요. 볼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해요.”...병원 복도.고은서는 임신 삼 주라는 진단서를 들고 아직도 방금전의 당황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이번 생에는 위암이라는 소식을 받아들일 준비를 미리 하고 있었지만 임신할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해보지도 못했다.심지어 곽승재를 아이를 임신하는 건 더더욱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하늘이 나를 놀리는 건가? 곧 이혼할 예정인데 갑자기 아이가 생기다니.’“고은서, 너 어쩔 거야?”박지연이 물었다.고은서는 너무 긴장한 탓에 손발이 차가워났다.“나도 잘 모르겠어.”아이를 가져본 건 처음이라 기쁘다기보다 당황스러움이 앞섰고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지도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아이를 없애려거든 너무 잔인한 것 같았고 또 아이를 낳으려거든 일이 너무 복잡해질 것 같았다.“곽승재한테는 알려줄 거야?”“아니!”이것만은 처음부터 확실했다. 곽승재가 이 일을 알게 되면 이혼이 더 어려워질 것이고 고준석과 전미자가 알게 되면 어려움이 한층 더 가해질 것이다.그녀는 아이 때문에 묶이고 싶지 않았다.“설마 혼자 몰래 낳으려는 건 아니지?”박지연이 또다시 물었다.그러나 고은서는 자신의 엄마처럼 싱글맘이 될 용기는 없었다.사실 박지연의 연이은 물음 속에 고은서는 이미 자신이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갈피를 잡은 듯했다.그녀는 손을 꽉 움켜쥐고 힘겹게 물었다.“나 같은 상황은 언제 수술이 가능해?”박지연은 애써 괜찮은 척하는 고은서를 보며 마음이 아팠다.“은서야, 이렇게 빨리 결정 내릴 필요 없어. 며칠 더 생각해보고 결정 내려도 돼.”그러나 이혼하려거든 이 아이를 남기지 않는 게
박지연은 계속해서 불만을 터뜨렸다.“내가 보기엔 여시은은 태생이 못돼먹었어!”“이번에 그렇게 크게 당했으니 더더욱 널 원망할 거야. 너 조심 좀 해.”박지연이 걱정스럽게 당부했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각을 세우기로 마음먹었기에 여시은과 평화롭게 지낼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앞으로는 여시은을 더 철저히 경계할 것이다.“듣자 하니 곽승재가 내내 널 감싸줬다며? 너한테 점점 마음이 가는 모양이야.”박지연이 코웃음을 쳤다.어젯밤 곽승재가 고은서를 계속 도와줬던 건 사실이었다. 증거를 공개하자고 제안한것도 곽승재의 생각이었고 마지막에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줬다. 곽승재가 고은서에게 큰 도움을 준 셈이었다.하지만 고은서는 곽승재에 대한 이야기를 박지연과 깊이 나누지 않았다.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던 중 박지연이 고은서에게 뜬금없는 소문 하나를 전했다.“우리 과장님한테서 들었는데, 어제 혜린 씨가 다니는 병원에 조 여사님이 찾아가서 난리를 쳤대. 혜린 씨 남자관계가 복잡하다고, 다른 남자랑 팔짱 낀 사진까지 들고 와서 공개하면서 혜린 씨랑 그 자리에서 머리끄덩이 잡고 싸움 났대!”고은서는 지난번 소동 이후 손자를 중시하는 조수연이 한동안은 조용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고작 며칠 만에 또 난리를 친 거였다. 조수연의 전투력은 엄청 대단했다.“아니, 그러다 혜린 씨 혹시라도 애를 지우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고은서가 물었다.박지연은 말했다.“조 여사님 말로는 혜린 씨 뱃속 애가 자기 아들 애가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해서 혜린 씨를 끌고 가서 친자 확인하자고 했대. 그래서 둘이 몸싸움까지 벌어져서 이미지도 최악이라 혜린 씨는 한 달 정직당했어.”“혜린 씨 배속에 애가 온승준 씨 애가 아니라고? 그럼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그 집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거야? 그냥 진짜 애 아빠랑 결혼하면 될걸...”고은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소문엔 그 남자가 유부남에 애까지 있다고 하더라. 자세한 건 나도 몰라. 그냥 과장님이 흘린 얘기야.”
여시은은 여전히 여재훈의 다리를 붙잡고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그럼, 아빠가 생각하시는 해결 방법은 뭐예요?”여재훈은 여시은에게 홍보팀을 통해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공개 사과하고, 개인적으로 고은서에게 직접 진심으로 사과한 뒤 집에서 2주 동안 자숙하라고 말했다.“제 회사는 아직 개업식도 제대로 안 했는데 공개 사과를 하라뇨? 그럼 모든 사람들이 저를 웃음거리로 볼 거 아니에요!”여시은은 눈이 퉁퉁 부은 채 애원했다.“아빠, 저 은서한테 개인적으로 사과만 하면 안 돼요? 저도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사람들을 이끌기 힘든데, 공개적으로 사과하면 앞으로 누가 저를 믿고 따르겠어요?”“안 된다.” 여재훈은 단호하게 말했다.“이 일은 이미 파장이 커졌고 많은 사람들이 너를 지켜보고 있어. 그러니 모든 사람에게 확실하게 해명해야 한다.”“시은아, 잘못을 저지른 건 무서운 일이 아니야. 진심으로 뉘우치고 성실하게 사과하면 은서 씨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너에게 다시 기회를 줄 거다.”여재훈은 계속해서 말했다.“사람은 자기가 저지른 잘못에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 네가 잘못했는데 내가 덮어주면 그건 너를 망치는 거야. 그러니까 이 일은 이렇게 결정된 거다!”여시은은 그 말을 듣자 속으로 분노가 치밀었다.‘고은서를 그저 연못에 좀 빠지게 했을 뿐인데 이게 뭐 그렇게 큰일이라고 이렇게까지 일을 키운단 말인가?’‘공개 사과라니, 이제 예전처럼 모두에게 존경받고 칭찬받던 모습은 끝이라는 거잖아.비록 인터넷의 영상은 지워지더라도 사람들이 나에 대한 나쁜 인상은 지워지지 않을 거란 말이야!’오늘 밤 그렇게 많은 부유층과 정재계 인사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녀는 그들에게 최악의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해성에서 쌓아온 그녀의 완벽한 이미지가 단번에 무너진 셈이다.예전엔 그녀가 울기만 하면 여재훈은 안쓰러워하며 뭐든지 다 용서해 줬었다.‘지금은 무릎까지 꿇었는데도 아빠는 고은서 때문에 자신의 딸을 벌하려 한다니, 정말 나를 딸로 생각하긴 하는 걸까?’
여시은은 그 말을 듣자 눈이 시뻘게지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아빠, 제가 한 게 아니라니까요! 고은서가 일부러 저를 함정에 빠뜨린 거예요. 왜 저를 믿지 않으세요!”“시은아!”여재훈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난생처음으로 이토록 차가운 눈빛으로 딸에게 화를 냈다.“너는 어쩌다 이렇게 뻔뻔하게 거짓말만 하는 사람이 됐니!”“내가 사람을 시켜서 확인해 봤어. 연회장 CCTV 꺼놓은 거, 그거 네가 시킨 거더라.”여재훈은 딸을 억울하게 만들까 걱정돼 CCTV 관련 내용을 직접 조사했다.그런데 정말로 여시은이 꺼놓았던 것이었다.“네가 정말 은서 씨를 해치려는 의도가 없었다면 왜 CCTV를 미리 꺼놓은 거냐?”여재훈은 냉정한 태도로 물었다.여시은은 자신이 고은서의 계략에 걸려든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고은서는 일부러 도발적인 눈빛으로 여시은을 자극했고 곧바로 테라스로 이끌어냈던 것이다. 모두 여시은한테 엿 먹이려는 행동이었다!여시은은 고은서가 쿠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격동적으로 행동해 자신을 밀칠 거라 확신했었다.왜냐하면 고은서는 지난번엔 쿠아를 다치게 한 일로도 크게 충격을 받았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번엔 반전이 생겼다.고은서는 오히려 침착하게 반격했고 지난번 농장에서의 ‘물에 빠진 사건’ 증거까지 들고나왔다.일이 이렇게 커져 버린 이상 여시은은 더 이상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 걸 알았다.그녀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여재훈을 향해 소리쳤다.“맞아요! 저 고은서가 너무 꼴 보기 싫었어요! 왜 아빠는 맨날 걔만 칭찬하세요? 이러니깐 제가 질투 나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고은서한테 꼽 주고 싶었어요!”“어차피 이미 벌어진 일이에요. 전 잘못한 거 없어요! 후회도 안 해요!”“너!”여재훈은 손을 번쩍 들어 여시은의 뺨을 때리려 했지만, 그녀의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보고는 차마 때릴 수가 없었다.“시은아, 아빠가 평소에 너를 어떻게 가르쳤니? 사람은 자기 양심에 떳떳해야 하고 올곧게 살아야 한다고 했잖아! 근데 너는 어떻게 질투심에 눈이
이미숙은 유튜브 영상을 보고 있었는데, 바로 여시은이 고은서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겨 연못 가까이로 끌어당기는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그 영상은 누군가가 휴대전화로 촬영해 올린 것 같았고 화질이 너무 좋은 건 아니지만 전반 상황을 알아보는 데에는 충분했다.영상의 끝에는 고은서와 여시은의 얼굴을 비춘 장면도 담겨 있었다.다소 초라해진 고은서는 곽승재의 부축을 받으며 옆에 서 있었다. 여시은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눈빛엔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했다.그 와중에 영상의 제목이 더욱 눈길을 끌었다.[재벌가 아가씨, 두 얼굴의 진실!]“사모님, 저 여자는 어쩜 저리 독하대요. 이렇게 심하게 괴롭히다니. 누가 폭로해 줘서 다행이지! 이제 세상 사람들 다 그 여자 피해서 다니겠어요!”이미숙은 화가 난 듯 말했다.고은서는 이번 일이 오래 퍼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시은 뒤에는 여재훈이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번 일로 여시은이 보기 좋게 망신을 당했고, 여재훈 역시 자신의 딸이 그렇게 순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테니, 이번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고은서는 이미숙의 휴대전화 영상에 대뜸 ‘좋아요'를 눌렀다.한편, 여씨 가문에서.여시은 역시 유튜브 영상을 확인했다. 분노에 찬 그녀는 휴대전화를 바닥에 내던졌다.밖에 서 있는 박미화가 조심스럽게 말을 전했다.“시은 아가씨, 회장님께서 지금 바로 서재로 오시래요. 할 말씀이 있으시답니다.”이번이 박미화가 세 번째로 말을 전하러 온 것이었다.여시은은 곧바로 얼굴에 드리워진 분노와 짜증을 숨기고는 일부러 슬프고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방문을 열었다.박미화는 방안에서 반응이 없자 방문을 열려고 하였다. 때마침 여시은이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을 보고 급히 손을 거두며 사과했다.여시은은 박미화의 손을 움켜쥐었다. 조금 전에 분노로 인해 물어뜯은 날카로운 손톱이 그녀의 살을 깊이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여시은은 울먹이는 말투로 물었다.“미화 언니, 아빠가 나한테 화 많이 나신 거야? 나 어떻게 해야
얼마 지나지 않아 운전기사가 차를 라이트문 아파트 앞에 세웠다.고은서와 곽승재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고은서는 샤워하기 위해 자신의 방으로 직행했고 곽승재는 거실에 남았다.샤워를 마치고 나온 고은서는 의외의 광경을 목격했다. 곽승재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 한 잔이 놓여 있었다.“왜 또 왔어? 할 말 있어?”고은서가 물었다.곽승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논의할 게 있어서. 그전에 이 콜라 생강차부터 마셔. 아주머니께서 특별히 준비하신 거야.”“사모님, 콜라 생강차는 감기 예방에도 효과적이거든요. 어서 드세요!”이미숙이 차를 가져오며 말했다.고은서는 감기에 걸릴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녀는 잔을 들어 올리더니 이상한 듯 물었다.“아줌마, 제가 방금 들어온 걸 보지도 못하셨을 텐데 어떻게 제가 감기 걸릴 줄 아시고 미리 차를 준비하셨어요?”이미숙의 눈가에는 잠시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곽승재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내가 알려줬어. 일단 마셔.”고은서는 고개를 숙여 생강차를 내려다 볼뿐 이미숙의 표정 변화를 주의 깊게 보지 못했다.물론 곽승재의 눈에 비친 기대감도 보지 못했다.생강차의 냄새를 맡아보니 생강 향이 꽤 진했다.고은서는 생강차를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콜라의 단맛과 생강의 톡 쏘는 맛이 어우러져 생각보다 맛이 나쁘지 않았다.“맛이 어때요?”이미숙이 물었다.“좋네요. 그런데 오늘은 생강을 좀 많이 넣으신 것 같네요. 예전에 만드신 것보다 더 매운데요.”이미숙은 잠시 망설이다가 급히 대답했다.“생강 양을 조절하지 못했네요. 주의할게요.”고은서는 더는 따지지 않고 다시 마시려던 참이었는데 곽승재가 말을 건넸다.“맛이 별로면 안 마셔도 돼.”고은서는 그를 흘겨보았다.“누가 맛없다고 했어? 아줌마가 정성스럽게 준비해주신 건데 끝까지 마셔야지.”“사모님, 도련님과 얘기 나누세요. 저는 할 일이 남아서 먼저 가보겠습니다.”이미숙은 두 사람의 언쟁을 피하려는 듯 급히 자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곽승재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그녀는 친구에게 부탁해 적절한 시기에 감시 카메라를 끊어놓도록 준비해두었다.하지만 여시은이 먼저 참지 못하고 로비의 카메라를 꺼버린 것이다.고은서가 감히 감시 카메라의 확인을 제안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만의 준비를 했을 뿐만 아니라 여시은 역시 감시 카메라를 조작할 것이라는 점까지 예측했다.“만약 여시은이 참고 끝까지 널 찾지 않았다면 어떻게 할 작정이었어?”곽승재가 물었다.고은서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개업식이 끝난 후 대형 스크린에 공개할 계획이었어.”곽승재가 눈썹을 추켜세웠다.“네가 앞서 백스테이지 주위를 둘러본 것도 동영상을 공개할 준비를 했던 거야?”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여시은이 일부러 나를 물에 빠뜨리고 향수로 나를 함정에 빠뜨렸을 뿐만 아니라 쿠아까지 학대했어. 내가 당연히 가만히 있을 수 없지! 그리고 시은이가 인내심을 가졌다고 해도 난 개업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을 거야.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러지 못했지. 시은이는 결국 참지 못하고 테라스에서 쿠아의 죽음을 언급하며 나를 자극했고 다시 같은 수법을 쓸 참이었던 거지. 나는 그저 시은이가 파려던 함정을 그대로 돌려준 것뿐이야.”곽승재는 고은서가 준비를 해왔을 거라 예상했지만 이런 고육지계를 공개적인 자리에서 펼칠 줄은 몰랐다.게다가 그녀의 연기는 너무나도 실감 났다.고은서가 바닥에 넘어져 흐트러진 모습을 보는 순간 곽승재는 정말로 여시은의 소행일 것으로 생각할 정도였다.고은서는 곽승재의 생각을 읽었는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가여운 척 한 거 아니야. 백유미와 여시은이라는 고수들 덕분에 나도 한 수 배웠을 뿐이지.”백유미의 과거 행동을 떠올린 곽승재는 가슴을 죄는 듯한 자책감이 밀려왔다.곽승재는 진지하게 사과했다.“은서야, 미안해.”무심코 흘린 말에 곽승재가 사과하는 모습을 본 고은서는 잠시 당황했다.“사과할 필요는 없어. 당신도 백유미 씨에게 속았을 뿐이잖아. 어쨌든 ‘목숨의 은인'
“시은아!”영상 속 장면에 충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재훈은 걱정된 목소리로 딸을 불렀다. 그리고 뒤이어 멀리 있는 부하들에게 명령했다.“어서 따라가서 시은이를 보호해! 무슨 일이라도 생기게 해서는 안 돼!”부하들이 여시은의 뒤를 쫓아 나간 뒤 여재훈은 스크린을 힐끗 바라보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고은서에게 사과했다.“제가 딸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이 일은 제가 시은에게 직접 확인한 뒤 여은서 씨께 해명해 드리겠습니다.”고은서는 목적을 달성했으니 더는 그곳에 머물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는 이유로 자리를 떠나려 했다.“여 대표님, 제가 은서 씨를 모셔다드리겠습니다.”곽승재가 말했다.송민준 역시 함께 가겠다고 전했다.여재훈은 당연히 거절하지 않았다. 개업식에서 이런 소동을 일으킨 이상 누구라도 축하할 마음이 없을 터였다.고은서 일행이 떠나자 여재훈은 참석자들에게 직접 사과하며 홍보팀에 현장 수습을 지시했다.호텔 앞 광장에서 곽승재와 송민준의 운전기사들이 각각 차를 대기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송민준은 고은서를 배웅하려는 태도를 보였으나 곽승재가 고은서를 부축하면서 예의를 갖추어 말했다.“번거로울 텐데 제가 은서 씨를 모시고 가겠습니다.”송민준은 자기가 고은서의 파트너로 왔기 때문에 그녀를 집까지 모셔다드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설득했다.곽승재는 송민준의 이런 친근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억지로 고은서를 안아 들어 자신의 차에 태우고 싶었지만 고은서가 화를 낼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는 입을 오므리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선택권을 고은서에게 넘겼다.고은서는 당연히 송민준과 함께 갈 생각이 없었다.“오빠, 오늘은 고마웠어. 오늘 승재 오빠의 차를 타고 갈게. 어차피 길도 같으니까. 내일 다시 연락할게.”고은서의 반응에 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알겠어. 집에 도착하면 연락해.”곽승재는 고은서를 차에 태운 뒤 트렁크에서 깨끗한 외투를 꺼냈다.차 안에 앉자 곽승재는 고은서의 어깨
여시은은 고은서의 말에 더욱 어리둥절해졌다.‘갑자기 왜 또 농장 일을 다시 꺼내는 거지?’여시은은 속으로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생각할수록 점점 더 억울하고 분했다.“은서야, 왜 나를 이렇게 모함하는 거야? 내가 언제 너를 물에 빠뜨렸다고 그래? 네가 나를 밀었잖아! 내가 우리 아빠를 생각해서 참고 넘어갔는데 이제 와서 또 나에게 뒤집어씌우다니!”여시은은 여재훈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혔다.“아빠, 저는 항상 사람을 보는 안목이 없는 것 같아요... 은서가 이런 사람일 줄은 정말 몰랐어요... 너무 속상해요...”여시은의 슬프고 안쓰러운 모습에 여재훈은 점차 진지해졌고 고은서를 보며 물었다.“고은서 씨, 시은이가 은서 씨를 물에 빠뜨렸다는 증거라도 있어요?”“물론 있죠.”고은서는 이미 곽승재의 부축을 받아 일어난 상태였다.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송민준이 보낸 영상을 찾았다.현장에 있던 사람들 모두 다가가지는 않았지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은서가 진짜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더니 그들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다.이때 곽승재가 제안했다.“여 대표님, 모두가 보는 앞에서 영상을 공개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모두가 직접 보면 진실이 명백해질 테니 나중에 왜곡되는 일도 없을 겁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여시은은 고은서가 미리 준비한 듯한 태도를 보이자 불안감이 더욱 커졌다.고은서가 이렇게 계획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증거를 손에 넣었을지도 모른다.여시은이 고은서를 과소평가했던 것이다.여시은은 붉어진 눈으로 소리쳤다.“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에요! 이미 개업식 시간이 다 됐는데 계속 이러쿵저러쿵하며 일을 벌이다니! 고의로 우리 개업식을 방해하는 거 아니에요?”“아빠, 오늘 이분들은 분명히 좋은 의도로 온 게 아닌 것 같아요. 그냥 쫓아내는 게 낫겠어요!”“여시은 씨, 말씀이 참 지나치군요. 우리는 단지 진실을 알고 싶을 뿐입니다.”송민준이 여재훈보다 먼저 입을 열
구경하는 사람들도 송민준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도대체 왜 그의 여자 파트너가 곽승재의 품에 안겨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송민준은 사람들의 의문스러운 시선을 받고 있었지만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여시은 씨, 저는 단지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은서와 여시은 씨의 사이에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은서가 왜 그런 행동을 하겠습니까?”“아빠, 정말 제가 한 게 아니에요! 저 사람들은 같은 편이라서 일부러 저를 괴롭히려는 거예요!”여시은은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그녀의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했다.여재훈은 눈물 글썽이는 딸을 바라보더니 온몸이 흐트러진 고은서를 향해 물었다.“고은서 씨, 사실대로 말해보세요.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고은서는 감정을 어느 정도 추스렸지만 이런 일을 당하면 당연히 난처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최대한 평온한 어조로 대답했다.“여 대표님, 제가 뭘 말해도 소용없을 겁니다. 시은이와 저는 각자 주장이 다르기 때문에 누구도 판단하기 어려울 겁니다.”고은서는 로비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여기 곳곳에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요. 직원들을 시켜 감시 카메라를 확인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러면 진실도 드러나겠죠.”이 말을 듣자 여시은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고은서가 여시은보다 먼저 바닥에 넘어졌는데 감시 카메라의 확인까지 제안하다니!‘설마 은서가 이 시간대에 감시 카메라를 꺼뒀다는 걸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시은아, 너의 생각은 어때?”고은서는 고개를 들어 여시은에게 물었다.여시은은 분노를 꾹 참고는 여전히 억울하고 순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좋아! 하지만 개업식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데 감시 카메라는 확인하는 동안 내가 먼저 개업식을 진행하고 나중에 이 문제를 논의하는 게 어때?”“안 돼.”고은서의 작은 얼굴에는 단호한 표정이 담겨있었다.“이 사건은 반드시 바로 조사되어야 한다고 봐.”고은서는 다시 여재훈을 바라보며 말했다.“여 대표님,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제가 시은이 만큼 귀하지는 않지만 이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