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리 비켜...”고은서는 온몸에서 전율이 느껴지는 듯했다.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행동을 제지하려고 하는 그녀의 모습이 마치 허세를 부리는 아기 고양이처럼 느껴졌다.욕망을 애써 억누르고 있던 곽승재는 더는 참지 못하고 그녀의 손을 아래로 잡아당기면서 힘겹게 입을 열었다.“은서야, 너무 보고 싶었어. 진짜 더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보고 싶었어...”단단한 무언가에 손이 닿은 고은서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녀는 곽승재의 손을 뿌리치면서 화를 냈다.“변태 새끼!”“은서야, 너도 하고 싶잖아. 참지 말고 날 한 번 믿어봐.”곽승재의 뜨거운 숨결이 고은서의 목에 와닿았다.그의 말이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그녀는 술을 마신 자신이 너무 미웠다.‘술을 마시지 말았어야 했어. 그럼 곽승재의 유혹에 이렇게 쉽게 넘어갈 리도 없었을 텐데.’자신의 몸을 더듬는 곽승재의 손길에 고은서는 더는 참지 못할 것 같았다. 그녀의 저항은 이젠 무용지물이 되었고 심지어 곽승재에겐 크나큰 유혹으로 느껴졌다.곽승재가 그녀를 깨물 때 고은서는 수치스러움에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곽승재, 그만해...”그녀의 울먹이는 소리에 고개를 든 곽승재와 눈이 마주친 고은서는 순간 흠칫했다. 그의 눈빛은 온통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고 목소리도 평소보다 더 매혹적이게 느껴졌다.“은서야, 아파? 내가 더 부드럽게 해줄게.”고은서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싫어.”곽승재는 단번에 그녀의 뜻을 알아차렸다.그녀는 몸에 힘이 풀리면서 거의 그의 품에 기대어 있었는데 두 볼은 빨간 홍조를 띠고 있었고 그를 바라보는 울망울망한 두 눈엔 욕망이 들끓고 있었다.마치 자신을 가지라고 유혹하는 것처럼 느껴졌다.그러나 그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거절하고 있었다.곽승재는 고은서가 진심으로 거절하는 건지 아니면 일부러 그러는 건지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취하지 않은 자신이 너무 미웠다.사실 계속 이어간다고 해도 고은서는 그를 밀어내지 못할 것이다.그러나 그렇게 되면 고은서를
고은서는 곽승재의 장난스러운 말투와 눈빛으로부터 자신의 현재 모습이 얼마나 낭패한 지를 예상할 수 있었다.그녀는 오늘 셔츠와 정장 치마를 입었는데 곽승재 때문에 단추가 풀리면서 속옷이 드러났을 뿐만 아니라 가슴 쪽에 아주 선명한 이빨 자국까지 생겼다.고은서는 자신의 이런 모습이 너무도 창피했다.그녀는 생각을 포기하고 얼굴을 곽승재 가슴팍에 묻은 채 그의 외투를 잡아당기며 자신의 얼굴을 가리려고 했다.곽승재는 고은서의 귀여운 모습에 피식 웃으면서 그녀의 머리에 입을 맞추었다.그는 그녀를 안은 채 엘리베이터 올라 아주 자연스럽게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이내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반응하고 조심스레 고은서에게 물었다.“몇 층이야?”고은서의 대답을 들은 곽승재는 버튼을 누르는 시늉만 하고 또다시 손으로 그녀의 엉덩이를 받쳐 올렸다.곽승재의 욕망은 아직 사그라들지 않았고 심지어 다시 들끓어 오를 기세를 보였다. 이를 가까이 감지한 고은서는 그를 쏘아보며 화냈다.“이상한 생각 그만 좀 해!”그러나 곽승재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내가 오매불망 그리워하던 사람이 지금 내 품에 안겨 있는데 나도 어쩔 수 없어.”코끝은 온통 곽승재의 특유한 설송향으로 가득했고 귓가에는 그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는 얼굴이 또다시 화끈 달아올랐다.‘곧 집이니까 조금만 더 참으면 돼.’두 사람은 고은서 집 문 앞에 도착할 때까지 친밀한 자세를 계속 유지했다.지문을 누르고 집 문을 열리자마자 고은서는 곽승재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다.그러나 곽승재가 핑계를 둘러대면서 그녀를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나 목말라.”고은서는 어쩔 수 없이 곽승재를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집에 들어선 고은서는 황급히 곽승재를 밀어내고 자신의 가슴 부위를 손으로 막았다.“물 저기 있... 우웁!”곽승재는 고은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를 장롱 쪽으로 밀어붙이며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방금전의 키스와 달리 그의 다급함과 미련이 깊이 느껴지는 키
그리고 고은서의 차에 타기 위해 미리 기사를 다른 곳으로 보냈던 것이다.중도에 먼저 튄 것도 곽승재와 고은서에게 단둘만의 시간을 마련해주려고 일부러 그런 것이었다.“그래도 다행히 내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지 않았네.”육현석이 대견하다는 듯 말했다.박지연도 따라 감탄했다.“정말 의리 있는 친구네.”“당연하지.”육현석이 자랑스러워하며 답했다. 그러다 갑자기 무언갈 떠올렸는지 화제를 바꾸었다.“지연아, 혹시 형수님이 말한 결혼 선물이 뭔지 알아? 승재 형한테 물어봐도 알려주지 않아서 그러는데 넌 알고 있어?”박지연은 주문 제작 팔찌에 관한 일을 육현석에게 알려줬다.“내 생각인데 은서가 곽승재한테 마음이 흔들린 것 같아.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마음에 든다고 해도 거절했을 거야.”“정말이야? 형수님과의 더 빠른 재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형한테 더 노력하라고 전해야겠네.”두 사람은 수다를 한창 떨었는데 극락에 달한 박지연은 얘기하면 할수록 소주랑 삼겹살이 땡겼다.전화를 끊은 후 박지연은 샤워하고 있는 고은서를 재촉하러 가려고 했다.그러나 바로 그때, 그녀의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시어머니라는 네 글자를 보자마자 박지연은 순간 기분이 잡쳤다. 그녀는 고민 끝에 폰을 무음모드로 설정했다.고은서는 샤워를 하고 냉수 두 잔을 들이켜고서야 방금 욕망 때문에 들끓어 오른 체온이 점차 내려가는 것 같았다.‘술을 처음 마신 것도 아닌데 오늘따라 정말 이상하네. 아까 지연이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진짜 곽승재한테 덮쳐들었을 거야. 그런데 외롭다고 남자를 갈망할 나이도 되지 않았는데... 설마 몸에 문제라도 생긴 건가?’고은서는 박지연에게 비웃음 받을 준비를 하면서 그녀를 찾으러 방 밖으로 나갔다.그러나 박지연은 덤덤한 표정을 하고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지연아, 왜 그래? 무슨 일 있어?”고은서가 걱정하며 물었다.“별일 아니야. 온승준 엄마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받지 않았거든. 그랬더니 문자로 날 비난하더라고.”그 말을 들은 고은서는 박지연의 폰을
박지연은 고은서의 격려하는 눈빛을 받으며 통화버튼을 눌렀다.“지연아, 엄마가 너한테 전화했었어?”온승준이 물었다.하지만 박지연은 대답 대신 되물었다.“내일 언제 시간이 돼? 우리 얘기 좀 하자.”온승준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내일은 확실하지 않지만 지금은 시간이 있어. 너 어디 사는 거야? 내가 갈까?”박지연은 시계를 확인했다. 지금은 9시, 이른 것도 늦은 것도 아닌 시간이었다.온승준은 언제 바빠질지 모르니, 얘기할 거면 지금 하는 게 맞았다.“좋아.”박지연은 온승준과 라이트 문 아파트 근처의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출발하기 전 박지연은 대충 얼굴을 닦고 외투를 걸쳤다. 옆에서 고은서는 그녀에게 힘을 실어주었다.“걱정하지 마. 네가 어떤 결정을 하든 난 전적으로 지지할 거야.”내심 박지연이 전생의 비극에서 벗어나길 바랐지만, 만약 이게 박지연의 선택이라면 고은서는 그 선택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박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그녀는 카페에 도착했다.커피를 주문할 때 박지연은 습관처럼 온승준이 좋아하는 커피와 디저트를 주문하려다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을 결국 삼켰다.그녀는 도우미도 엄마도 아니기에 다시는 그를 돌보고 희생하는 역할을 맡고 싶지 않았다.자신이 좋아하는 블랙커피와 작은 케이크를 주문한 후 박지연은 멀리서 온승준의 모습을 발견했다.그는 편안한 얇은 니트 외투에 검은색 캐주얼 바지를 입고 날씬한 몸매를 뽐냈다. 코끝에 걸쳐진 은색 테가 달린 안경은 금욕적이면서도 우아한 분위기를 풍겼다.박지연과 온승준은 소개팅에서 만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박지연이 소개팅에서 실수로 커피숍에 앉아 있던 온승준을 소개팅 상대라고 착각한 거였다.그 전에 박지연은 온승준에 대해 조금 들은 적이 있었다. 그는 뛰어난 심장외과 의사였고, 잡지 인터뷰에도 나왔던 사람이었다.박지연은 자신의 운이 믿기지 않아 급히 다가가 자신을 소개하며 말했다.“저는 건강하고 성격 밝고 활발한 사람이에요. 결혼할 준비가 다 됐어요.”어떤 말에 설득됐는
“전화 안 받았어. 어머님이 뭐라고 했는지는 직접 보면 알 거야.”박지연은 휴대폰 메시지를 열어 온승준 앞에 휙 던졌다.온승준은 메시지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첫 문자만 봐도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그는 원래 이런 잡다한 일들을 싫어해서 결혼하고도 이런 일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박지연은 유능하고 성격도 좋았기에 모든 일을 철저하게 챙겨서 그가 신경 쓸 것 없이 모든 것이 잘 돌아갔다.부모님은 그들의 갑작스러운 결혼을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박지연에게서 딱히 흠을 잡을 수 없었다.온승준은 처음에 모든 것이 이렇게 순조롭게 흘러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박지연이 이혼하자고 했다.온승준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 말씀이 너무 거칠었네. 내가 엄마한테 앞으로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할게.”박지연은 온승준의 속마음을 훤히 꿰뚫어 보았기에 조용히 웃었다.“됐어, 더 이상 당신 힘들게 하지 않을게. 어차피 부모님도 나를 좋아하지 않으시니 더 이상 잘 보일 필요도 없잖아. 시간 내서 우리 이혼 절차 진행하자.”온승준은 손끝으로 안경을 정리하며 말했다.“지연아,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거야?”“엄마는 전에 우리에게 간섭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어. 우리의 삶은 우리가 결정하라고도 하셨고. 아마 그동안 네가 집에 안 들어오고 전화를 받지 않아서 화가 나셨을 거야.”온승준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지연아, 나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학술 보고서도 마무리해야 하고. 투정 그만 부려. 예전 일은 내가 미안해. 사과할게.”박지연은 온승준한테 이렇게 투정을 부린 적이 없었다. 늘 자기 혼자 억지로 풀어내고 끝냈지만, 이번엔 달랐다.온승준이 미안하다는 말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이 사태가 그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었다. 번거로운 상황을 피하기 위해 그는 자세를 낮추는 걸 선택했다.박지연은 그날 처음 만났을 때의 설렘, 결혼 증명서를 받았을 때의 행복감을 떠올리며 이혼하려던 마음이 살짝 흔들렸다.
박지연이 뒤를 돌아보자 예상치 못하게 육현석이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그는 손에 알루미늄 호일로 감싼 꼬치와 맥주 몇 병을 들고 있었다.전에 그들이 수다 떨 때 그녀가 아무 생각 없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수다는 꼬치와 맥주가 더 잘 어울려.”‘설마 그 말을 기억하고 특별히 나를 위해 사 온 건가?’“지연아, 여기서 뭐 해?”육현석이 그들 앞에 다가와서 그녀 옆에 있는 온승준을 바라보며 물었다.“이분은?”“온 닥터, 내 남편이야.”그리고 박지연은 반대로 온승준에게도 소개했다.“내 친구 육현석이야.”“아, 온 선생님 반갑습니다!”육현석은 한 손을 비우고 온승준에게 악수를 청했다.온승준은 육현석의 재벌 도련님 인상이 물씬 풍기는 외모와 손에 들려 있는 꼬치와 맥주를 보고는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그럼에도 그는 예의 바르게 손을 내밀며 형식적으로 악수했다.“반갑습니다.”“온 선생님, 오늘 지연이랑 우리 형수님 고은서랑 술 한 잔 하려 했는데, 함께 하실래요?”육현석이 너그럽게 초대했다.온승준은 워낙 낯선 사람과 과도한 사교를 좋아하지 않았고, 쓸데없는 대화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괜찮습니다, 고맙습니다.”그는 정중히 거절하고 박지연에게 말했다.“난 학술 발표 준비가 남아서 먼저 가볼게.”박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온승준이 떠난 뒤 박지연은 육현석을 바라보며 말했다.“육현석, 네 마음은 고맙지만 나 방금 막 식사를 마쳤고 은서도 술을 꽤 마셔서 더는 못 마셔.”육현석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웃으며 대답했다.“그럼 네가 술 마시고 싶을 때 다시 약속 잡자.”“고마워.”박지연은 진지하게 말했다.육현석이 여자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여자를 유혹하는 데도 능숙한 사람임을 그녀도 알고 있었지만, 그가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말을 기억하고 실천한 것에 감동받았다.육현석은 고맙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리 없었기에 웃으며 말했다.“친구 사이에 거리감 느끼게 왜 그래. 그럼 난 가볼게. 내일 병원 운동장에서 보자!”“
“곽 대표님, 서인수는 정말 개자식이에요. 저를 압박해 대표님에게 부탁을 하게 만들기 위해 해외에 있는 아들까지 동원했어요. 서인수를 무시할 수는 있지만, 아들에게 걱정 끼치는 건 정말 원치 않았어요. 그래서 실례인 걸 알면서도 이렇게 대표님을 부른 거예요.”곽승재는 병실을 잠시 훑어보았다. 그 안에서는 서인수가 깨어나 있었고, 의사가 검사하고 있었다.“곽 대표님, 곽 대표님... 컥!”서인수는 창백한 얼굴로 그를 보자마자 급격히 감정이 격해졌다.하지만 몸이 너무 약해서 병상에서 자칫하면 떨어질 뻔했다.의사들이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서인수는 이를 무시하고 비틀거리며 곽승재 앞으로 다가가 애원했다.“곽 대표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고의로 사모님에게 손을 대려던 게 아닙니다. 다 백유미가 시킨 겁니다!”경찰과 의사들이 서인수를 다시 병상으로 밀어 넣으며 그를 제지했다.곽승재가 미간을 찌푸리자, 도아름은 백유미가 서인수를 부추겼던 일에 대해 설명했다.“은서도 알고 있었나요?”곽승재는 아무 감정도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도아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제가 며칠 전에 서인수를 만났어요.”“곽 대표님, 서인수는 그동안 외부에서 칭찬을 받으며 자만해졌어요. 그런 사람은 누군가에게 쉽게 이용당할 수 있는 법이죠. 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 서인수는 이 일에 대해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요.”곽승재는 그 말을 듣고 깊은 눈동자에 냉기가 서렸다.“알겠어요. 제가 처리할게요.”“도 대표님이 저를 부르신 건, 서인수에 일에 대해 부탁이 있어서인가요?”“아니요.”도아름은 태연하게 대답했다.“그저 서인수가 더 이상 희망을 갖지 않게 하기 위해서예요. 은서 씨가 위험에 처할 뻔했으니, 서인수는 받아야 할 처벌을 전부 받아야 해요.”곽승재는 도아름을 감탄하는 표정으로 보며 말했다.“도 대표님, 정말 대범하고 큰 그릇을 가지셨네요. 탄복스럽습니다.”도아름이 답하려던 순간, 그녀의 휴대폰에서 알림이 울렸다.휴대폰을 확인하자, 박지연이 연속 메시지
도아름의 질문에 곽승재는 얇은 입술을 오므리며 대답했다.“도 대표님, 죄송하지만 일부 사항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도아름은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었다.고은서와 곽승재 사이의 일은 그녀가 알지 못하는 부분이 많았고, 곽승재가 나름의 계획이나 고려를 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으니까.다음 날 아침 고은서는 소파에서 눈을 떴다.박지연은 이미 병원에 갔고 식탁 위에는 평소처럼 그녀를 위한 아침이 준비되어 있었다.휴대폰을 열어보니 박지연이 어젯밤 고은서가 잠든 후 찍은 사진 두 장을 보내왔다. 거기에 술 취한 미인이라며 놀리면서 도아름에게 그녀를 모델로 추천했다고 했다.사진을 보고 고은서는 웃었지만, 박지연이 온승준과 화해하기로 결심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톡 화면을 나가려던 고은서는 미확인 전화 두 통이 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발신자는 유성준이었고, 시간은 어젯밤 집에 돌아온 직후였다.그제야 집에 도착하면 연락하겠다고 했던 약속이 떠올라 급히 유성준에게 전화를 걸었다.잠시 후, 유성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은서야, 일어났어?”“미안해요, 성준 오빠. 어제 잠들어서 전화 오는 걸 못 들었어요.”“괜찮아, 예상했어.”유성준은 이어서 말했다.“어젯밤 와인이 꽤 독했지? 나도 약간 취했어.”그 말을 듣고 나서야 고은서는 술이 독해서 취한 거지, 건강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다.유성준과의 통화를 마친 고은서는 아침을 먹으며 박지연과 톡으로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때, 여시은의 이름이 휴대폰 화면에 나타났다.“고은서 씨, 무슨 일이세요?”여시은의 목소리는 막 잠에서 깨어난 듯 살짝 잠겨 있었다.“별건 아니에요. 어제 술 마시고 좀 취하셨나 해서요. 저도 어제 머리가 어지러워서 바로 잠들었거든요. 제 술이 약해서 그런 건지 모르겠네요.”“아마 어제 술이 좀 독했던 것 같아요.”고은서는 유성준도 취했었다는 이야기를 여시은에게 전했다.“성준 씨가 은서 씨를 집까지 데려다줬겠네요. 성준 씨는 괜찮아요?”여시은
박지연은 계속해서 불만을 터뜨렸다.“내가 보기엔 여시은은 태생이 못돼먹었어!”“이번에 그렇게 크게 당했으니 더더욱 널 원망할 거야. 너 조심 좀 해.”박지연이 걱정스럽게 당부했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각을 세우기로 마음먹었기에 여시은과 평화롭게 지낼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앞으로는 여시은을 더 철저히 경계할 것이다.“듣자 하니 곽승재가 내내 널 감싸줬다며? 너한테 점점 마음이 가는 모양이야.”박지연이 코웃음을 쳤다.어젯밤 곽승재가 고은서를 계속 도와줬던 건 사실이었다. 증거를 공개하자고 제안한것도 곽승재의 생각이었고 마지막에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줬다. 곽승재가 고은서에게 큰 도움을 준 셈이었다.하지만 고은서는 곽승재에 대한 이야기를 박지연과 깊이 나누지 않았다.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던 중 박지연이 고은서에게 뜬금없는 소문 하나를 전했다.“우리 과장님한테서 들었는데, 어제 혜린 씨가 다니는 병원에 조 여사님이 찾아가서 난리를 쳤대. 혜린 씨 남자관계가 복잡하다고, 다른 남자랑 팔짱 낀 사진까지 들고 와서 공개하면서 혜린 씨랑 그 자리에서 머리끄덩이 잡고 싸움 났대!”고은서는 지난번 소동 이후 손자를 중시하는 조수연이 한동안은 조용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고작 며칠 만에 또 난리를 친 거였다. 조수연의 전투력은 엄청 대단했다.“아니, 그러다 혜린 씨 혹시라도 애를 지우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고은서가 물었다.박지연은 말했다.“조 여사님 말로는 혜린 씨 뱃속 애가 자기 아들 애가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해서 혜린 씨를 끌고 가서 친자 확인하자고 했대. 그래서 둘이 몸싸움까지 벌어져서 이미지도 최악이라 혜린 씨는 한 달 정직당했어.”“혜린 씨 배속에 애가 온승준 씨 애가 아니라고? 그럼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그 집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거야? 그냥 진짜 애 아빠랑 결혼하면 될걸...”고은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소문엔 그 남자가 유부남에 애까지 있다고 하더라. 자세한 건 나도 몰라. 그냥 과장님이 흘린 얘기야.”
여시은은 여전히 여재훈의 다리를 붙잡고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그럼, 아빠가 생각하시는 해결 방법은 뭐예요?”여재훈은 여시은에게 홍보팀을 통해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공개 사과하고, 개인적으로 고은서에게 직접 진심으로 사과한 뒤 집에서 2주 동안 자숙하라고 말했다.“제 회사는 아직 개업식도 제대로 안 했는데 공개 사과를 하라뇨? 그럼 모든 사람들이 저를 웃음거리로 볼 거 아니에요!”여시은은 눈이 퉁퉁 부은 채 애원했다.“아빠, 저 은서한테 개인적으로 사과만 하면 안 돼요? 저도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사람들을 이끌기 힘든데, 공개적으로 사과하면 앞으로 누가 저를 믿고 따르겠어요?”“안 된다.” 여재훈은 단호하게 말했다.“이 일은 이미 파장이 커졌고 많은 사람들이 너를 지켜보고 있어. 그러니 모든 사람에게 확실하게 해명해야 한다.”“시은아, 잘못을 저지른 건 무서운 일이 아니야. 진심으로 뉘우치고 성실하게 사과하면 은서 씨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너에게 다시 기회를 줄 거다.”여재훈은 계속해서 말했다.“사람은 자기가 저지른 잘못에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 네가 잘못했는데 내가 덮어주면 그건 너를 망치는 거야. 그러니까 이 일은 이렇게 결정된 거다!”여시은은 그 말을 듣자 속으로 분노가 치밀었다.‘고은서를 그저 연못에 좀 빠지게 했을 뿐인데 이게 뭐 그렇게 큰일이라고 이렇게까지 일을 키운단 말인가?’‘공개 사과라니, 이제 예전처럼 모두에게 존경받고 칭찬받던 모습은 끝이라는 거잖아.비록 인터넷의 영상은 지워지더라도 사람들이 나에 대한 나쁜 인상은 지워지지 않을 거란 말이야!’오늘 밤 그렇게 많은 부유층과 정재계 인사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녀는 그들에게 최악의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해성에서 쌓아온 그녀의 완벽한 이미지가 단번에 무너진 셈이다.예전엔 그녀가 울기만 하면 여재훈은 안쓰러워하며 뭐든지 다 용서해 줬었다.‘지금은 무릎까지 꿇었는데도 아빠는 고은서 때문에 자신의 딸을 벌하려 한다니, 정말 나를 딸로 생각하긴 하는 걸까?’
여시은은 그 말을 듣자 눈이 시뻘게지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아빠, 제가 한 게 아니라니까요! 고은서가 일부러 저를 함정에 빠뜨린 거예요. 왜 저를 믿지 않으세요!”“시은아!”여재훈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난생처음으로 이토록 차가운 눈빛으로 딸에게 화를 냈다.“너는 어쩌다 이렇게 뻔뻔하게 거짓말만 하는 사람이 됐니!”“내가 사람을 시켜서 확인해 봤어. 연회장 CCTV 꺼놓은 거, 그거 네가 시킨 거더라.”여재훈은 딸을 억울하게 만들까 걱정돼 CCTV 관련 내용을 직접 조사했다.그런데 정말로 여시은이 꺼놓았던 것이었다.“네가 정말 은서 씨를 해치려는 의도가 없었다면 왜 CCTV를 미리 꺼놓은 거냐?”여재훈은 냉정한 태도로 물었다.여시은은 자신이 고은서의 계략에 걸려든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고은서는 일부러 도발적인 눈빛으로 여시은을 자극했고 곧바로 테라스로 이끌어냈던 것이다. 모두 여시은한테 엿 먹이려는 행동이었다!여시은은 고은서가 쿠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격동적으로 행동해 자신을 밀칠 거라 확신했었다.왜냐하면 고은서는 지난번엔 쿠아를 다치게 한 일로도 크게 충격을 받았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번엔 반전이 생겼다.고은서는 오히려 침착하게 반격했고 지난번 농장에서의 ‘물에 빠진 사건’ 증거까지 들고나왔다.일이 이렇게 커져 버린 이상 여시은은 더 이상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 걸 알았다.그녀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여재훈을 향해 소리쳤다.“맞아요! 저 고은서가 너무 꼴 보기 싫었어요! 왜 아빠는 맨날 걔만 칭찬하세요? 이러니깐 제가 질투 나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고은서한테 꼽 주고 싶었어요!”“어차피 이미 벌어진 일이에요. 전 잘못한 거 없어요! 후회도 안 해요!”“너!”여재훈은 손을 번쩍 들어 여시은의 뺨을 때리려 했지만, 그녀의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보고는 차마 때릴 수가 없었다.“시은아, 아빠가 평소에 너를 어떻게 가르쳤니? 사람은 자기 양심에 떳떳해야 하고 올곧게 살아야 한다고 했잖아! 근데 너는 어떻게 질투심에 눈이
이미숙은 유튜브 영상을 보고 있었는데, 바로 여시은이 고은서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겨 연못 가까이로 끌어당기는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그 영상은 누군가가 휴대전화로 촬영해 올린 것 같았고 화질이 너무 좋은 건 아니지만 전반 상황을 알아보는 데에는 충분했다.영상의 끝에는 고은서와 여시은의 얼굴을 비춘 장면도 담겨 있었다.다소 초라해진 고은서는 곽승재의 부축을 받으며 옆에 서 있었다. 여시은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눈빛엔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했다.그 와중에 영상의 제목이 더욱 눈길을 끌었다.[재벌가 아가씨, 두 얼굴의 진실!]“사모님, 저 여자는 어쩜 저리 독하대요. 이렇게 심하게 괴롭히다니. 누가 폭로해 줘서 다행이지! 이제 세상 사람들 다 그 여자 피해서 다니겠어요!”이미숙은 화가 난 듯 말했다.고은서는 이번 일이 오래 퍼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시은 뒤에는 여재훈이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번 일로 여시은이 보기 좋게 망신을 당했고, 여재훈 역시 자신의 딸이 그렇게 순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테니, 이번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고은서는 이미숙의 휴대전화 영상에 대뜸 ‘좋아요'를 눌렀다.한편, 여씨 가문에서.여시은 역시 유튜브 영상을 확인했다. 분노에 찬 그녀는 휴대전화를 바닥에 내던졌다.밖에 서 있는 박미화가 조심스럽게 말을 전했다.“시은 아가씨, 회장님께서 지금 바로 서재로 오시래요. 할 말씀이 있으시답니다.”이번이 박미화가 세 번째로 말을 전하러 온 것이었다.여시은은 곧바로 얼굴에 드리워진 분노와 짜증을 숨기고는 일부러 슬프고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방문을 열었다.박미화는 방안에서 반응이 없자 방문을 열려고 하였다. 때마침 여시은이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을 보고 급히 손을 거두며 사과했다.여시은은 박미화의 손을 움켜쥐었다. 조금 전에 분노로 인해 물어뜯은 날카로운 손톱이 그녀의 살을 깊이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여시은은 울먹이는 말투로 물었다.“미화 언니, 아빠가 나한테 화 많이 나신 거야? 나 어떻게 해야
얼마 지나지 않아 운전기사가 차를 라이트문 아파트 앞에 세웠다.고은서와 곽승재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고은서는 샤워하기 위해 자신의 방으로 직행했고 곽승재는 거실에 남았다.샤워를 마치고 나온 고은서는 의외의 광경을 목격했다. 곽승재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 한 잔이 놓여 있었다.“왜 또 왔어? 할 말 있어?”고은서가 물었다.곽승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논의할 게 있어서. 그전에 이 콜라 생강차부터 마셔. 아주머니께서 특별히 준비하신 거야.”“사모님, 콜라 생강차는 감기 예방에도 효과적이거든요. 어서 드세요!”이미숙이 차를 가져오며 말했다.고은서는 감기에 걸릴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녀는 잔을 들어 올리더니 이상한 듯 물었다.“아줌마, 제가 방금 들어온 걸 보지도 못하셨을 텐데 어떻게 제가 감기 걸릴 줄 아시고 미리 차를 준비하셨어요?”이미숙의 눈가에는 잠시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곽승재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내가 알려줬어. 일단 마셔.”고은서는 고개를 숙여 생강차를 내려다 볼뿐 이미숙의 표정 변화를 주의 깊게 보지 못했다.물론 곽승재의 눈에 비친 기대감도 보지 못했다.생강차의 냄새를 맡아보니 생강 향이 꽤 진했다.고은서는 생강차를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콜라의 단맛과 생강의 톡 쏘는 맛이 어우러져 생각보다 맛이 나쁘지 않았다.“맛이 어때요?”이미숙이 물었다.“좋네요. 그런데 오늘은 생강을 좀 많이 넣으신 것 같네요. 예전에 만드신 것보다 더 매운데요.”이미숙은 잠시 망설이다가 급히 대답했다.“생강 양을 조절하지 못했네요. 주의할게요.”고은서는 더는 따지지 않고 다시 마시려던 참이었는데 곽승재가 말을 건넸다.“맛이 별로면 안 마셔도 돼.”고은서는 그를 흘겨보았다.“누가 맛없다고 했어? 아줌마가 정성스럽게 준비해주신 건데 끝까지 마셔야지.”“사모님, 도련님과 얘기 나누세요. 저는 할 일이 남아서 먼저 가보겠습니다.”이미숙은 두 사람의 언쟁을 피하려는 듯 급히 자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곽승재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그녀는 친구에게 부탁해 적절한 시기에 감시 카메라를 끊어놓도록 준비해두었다.하지만 여시은이 먼저 참지 못하고 로비의 카메라를 꺼버린 것이다.고은서가 감히 감시 카메라의 확인을 제안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만의 준비를 했을 뿐만 아니라 여시은 역시 감시 카메라를 조작할 것이라는 점까지 예측했다.“만약 여시은이 참고 끝까지 널 찾지 않았다면 어떻게 할 작정이었어?”곽승재가 물었다.고은서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개업식이 끝난 후 대형 스크린에 공개할 계획이었어.”곽승재가 눈썹을 추켜세웠다.“네가 앞서 백스테이지 주위를 둘러본 것도 동영상을 공개할 준비를 했던 거야?”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여시은이 일부러 나를 물에 빠뜨리고 향수로 나를 함정에 빠뜨렸을 뿐만 아니라 쿠아까지 학대했어. 내가 당연히 가만히 있을 수 없지! 그리고 시은이가 인내심을 가졌다고 해도 난 개업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을 거야.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러지 못했지. 시은이는 결국 참지 못하고 테라스에서 쿠아의 죽음을 언급하며 나를 자극했고 다시 같은 수법을 쓸 참이었던 거지. 나는 그저 시은이가 파려던 함정을 그대로 돌려준 것뿐이야.”곽승재는 고은서가 준비를 해왔을 거라 예상했지만 이런 고육지계를 공개적인 자리에서 펼칠 줄은 몰랐다.게다가 그녀의 연기는 너무나도 실감 났다.고은서가 바닥에 넘어져 흐트러진 모습을 보는 순간 곽승재는 정말로 여시은의 소행일 것으로 생각할 정도였다.고은서는 곽승재의 생각을 읽었는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가여운 척 한 거 아니야. 백유미와 여시은이라는 고수들 덕분에 나도 한 수 배웠을 뿐이지.”백유미의 과거 행동을 떠올린 곽승재는 가슴을 죄는 듯한 자책감이 밀려왔다.곽승재는 진지하게 사과했다.“은서야, 미안해.”무심코 흘린 말에 곽승재가 사과하는 모습을 본 고은서는 잠시 당황했다.“사과할 필요는 없어. 당신도 백유미 씨에게 속았을 뿐이잖아. 어쨌든 ‘목숨의 은인'
“시은아!”영상 속 장면에 충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재훈은 걱정된 목소리로 딸을 불렀다. 그리고 뒤이어 멀리 있는 부하들에게 명령했다.“어서 따라가서 시은이를 보호해! 무슨 일이라도 생기게 해서는 안 돼!”부하들이 여시은의 뒤를 쫓아 나간 뒤 여재훈은 스크린을 힐끗 바라보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고은서에게 사과했다.“제가 딸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이 일은 제가 시은에게 직접 확인한 뒤 여은서 씨께 해명해 드리겠습니다.”고은서는 목적을 달성했으니 더는 그곳에 머물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는 이유로 자리를 떠나려 했다.“여 대표님, 제가 은서 씨를 모셔다드리겠습니다.”곽승재가 말했다.송민준 역시 함께 가겠다고 전했다.여재훈은 당연히 거절하지 않았다. 개업식에서 이런 소동을 일으킨 이상 누구라도 축하할 마음이 없을 터였다.고은서 일행이 떠나자 여재훈은 참석자들에게 직접 사과하며 홍보팀에 현장 수습을 지시했다.호텔 앞 광장에서 곽승재와 송민준의 운전기사들이 각각 차를 대기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송민준은 고은서를 배웅하려는 태도를 보였으나 곽승재가 고은서를 부축하면서 예의를 갖추어 말했다.“번거로울 텐데 제가 은서 씨를 모시고 가겠습니다.”송민준은 자기가 고은서의 파트너로 왔기 때문에 그녀를 집까지 모셔다드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설득했다.곽승재는 송민준의 이런 친근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억지로 고은서를 안아 들어 자신의 차에 태우고 싶었지만 고은서가 화를 낼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는 입을 오므리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선택권을 고은서에게 넘겼다.고은서는 당연히 송민준과 함께 갈 생각이 없었다.“오빠, 오늘은 고마웠어. 오늘 승재 오빠의 차를 타고 갈게. 어차피 길도 같으니까. 내일 다시 연락할게.”고은서의 반응에 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알겠어. 집에 도착하면 연락해.”곽승재는 고은서를 차에 태운 뒤 트렁크에서 깨끗한 외투를 꺼냈다.차 안에 앉자 곽승재는 고은서의 어깨
여시은은 고은서의 말에 더욱 어리둥절해졌다.‘갑자기 왜 또 농장 일을 다시 꺼내는 거지?’여시은은 속으로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생각할수록 점점 더 억울하고 분했다.“은서야, 왜 나를 이렇게 모함하는 거야? 내가 언제 너를 물에 빠뜨렸다고 그래? 네가 나를 밀었잖아! 내가 우리 아빠를 생각해서 참고 넘어갔는데 이제 와서 또 나에게 뒤집어씌우다니!”여시은은 여재훈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혔다.“아빠, 저는 항상 사람을 보는 안목이 없는 것 같아요... 은서가 이런 사람일 줄은 정말 몰랐어요... 너무 속상해요...”여시은의 슬프고 안쓰러운 모습에 여재훈은 점차 진지해졌고 고은서를 보며 물었다.“고은서 씨, 시은이가 은서 씨를 물에 빠뜨렸다는 증거라도 있어요?”“물론 있죠.”고은서는 이미 곽승재의 부축을 받아 일어난 상태였다.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송민준이 보낸 영상을 찾았다.현장에 있던 사람들 모두 다가가지는 않았지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은서가 진짜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더니 그들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다.이때 곽승재가 제안했다.“여 대표님, 모두가 보는 앞에서 영상을 공개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모두가 직접 보면 진실이 명백해질 테니 나중에 왜곡되는 일도 없을 겁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여시은은 고은서가 미리 준비한 듯한 태도를 보이자 불안감이 더욱 커졌다.고은서가 이렇게 계획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증거를 손에 넣었을지도 모른다.여시은이 고은서를 과소평가했던 것이다.여시은은 붉어진 눈으로 소리쳤다.“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에요! 이미 개업식 시간이 다 됐는데 계속 이러쿵저러쿵하며 일을 벌이다니! 고의로 우리 개업식을 방해하는 거 아니에요?”“아빠, 오늘 이분들은 분명히 좋은 의도로 온 게 아닌 것 같아요. 그냥 쫓아내는 게 낫겠어요!”“여시은 씨, 말씀이 참 지나치군요. 우리는 단지 진실을 알고 싶을 뿐입니다.”송민준이 여재훈보다 먼저 입을 열
구경하는 사람들도 송민준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도대체 왜 그의 여자 파트너가 곽승재의 품에 안겨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송민준은 사람들의 의문스러운 시선을 받고 있었지만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여시은 씨, 저는 단지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은서와 여시은 씨의 사이에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은서가 왜 그런 행동을 하겠습니까?”“아빠, 정말 제가 한 게 아니에요! 저 사람들은 같은 편이라서 일부러 저를 괴롭히려는 거예요!”여시은은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그녀의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했다.여재훈은 눈물 글썽이는 딸을 바라보더니 온몸이 흐트러진 고은서를 향해 물었다.“고은서 씨, 사실대로 말해보세요.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고은서는 감정을 어느 정도 추스렸지만 이런 일을 당하면 당연히 난처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최대한 평온한 어조로 대답했다.“여 대표님, 제가 뭘 말해도 소용없을 겁니다. 시은이와 저는 각자 주장이 다르기 때문에 누구도 판단하기 어려울 겁니다.”고은서는 로비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여기 곳곳에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요. 직원들을 시켜 감시 카메라를 확인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러면 진실도 드러나겠죠.”이 말을 듣자 여시은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고은서가 여시은보다 먼저 바닥에 넘어졌는데 감시 카메라의 확인까지 제안하다니!‘설마 은서가 이 시간대에 감시 카메라를 꺼뒀다는 걸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시은아, 너의 생각은 어때?”고은서는 고개를 들어 여시은에게 물었다.여시은은 분노를 꾹 참고는 여전히 억울하고 순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좋아! 하지만 개업식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데 감시 카메라는 확인하는 동안 내가 먼저 개업식을 진행하고 나중에 이 문제를 논의하는 게 어때?”“안 돼.”고은서의 작은 얼굴에는 단호한 표정이 담겨있었다.“이 사건은 반드시 바로 조사되어야 한다고 봐.”고은서는 다시 여재훈을 바라보며 말했다.“여 대표님,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제가 시은이 만큼 귀하지는 않지만 이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