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시후는 깨끗한 병원복을 입고 있었고 머리의 상처도 잘 치료한 뒤 붕대를 감고 있었다. 얼굴이 조금 창백해졌지만 그는 잠든 것처럼 보였다.고은서는 그가 그냥 장난으로 자는 척하는 것이길 바랐고 이제 그만 깨어나서 모든 게 그녀를 놀리기 위한 장난이었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하지만 반나절을 서 있었지만 민시후는 전혀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후회와 자책이 마음을 무겁게 짓눌러와 고은서의 눈시울이 더욱 붉어졌다.거의 쓰러질 것 같은 고은서의 모습을 보던 송민아는 의자 하나를 가져다주었다.고은서는 눈물을 참으며 조심스럽게 민시후의 손을 잡았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정작 고요한 그의 얼굴을 마주하자 목이 메어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자신 때문에 다친 민시후의 모습을 보면서 설사 그의 가족이 자신을 원망하지 않는다고 해도 고은서 자신은 앞으로 민시후를 전처럼 대할 수 없을 것 같았다.그래서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누워있는 민시후에게 어떤 약속도 할 수 없었다.중환자실의 면회는 15분 정도였고 고은서는 곧 떠나야 했다.면회 시간이 곧 끝나가자 송민아가 부드럽게 재촉했다. 드디어 고은서는 쉰 목소리로 힘겹게 한마디 내뱉었다.“미안해. 모두 다 나 때문이야. 나 때문에 시후 씨가 이렇게...”“시후 씨 쓰러지면 안 돼. 어머님께 아버님 말씀을 잘 들을 거라고 약속했잖아, 약속을 어기면 안 돼...”고은서는 다시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했고 두 사람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송민아도 누워있는 민시후를 향해 말했다.“시후 오빠, 은서를 좋아한다고 했잖아. 만약 깨나지 못하고 이대로 계속 누워만 있다간 완전히 기회가 사라질 거야!”하지만 그들이 뭐라고 말하든, 병상에 있는 민시후는 잠든 것처럼 조용히 누워있었다.고은서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눈물은 민시후의 손등에 떨어졌다.간호사가 들어와 재촉하자 고은서와 송민아는 할 수 없이 병실을 떠났다.그 순간, 민시후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였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병실 밖에서는 민시현이 여전히
넋을 놓고 있는 고은서의 모습을 보자 박지연은 그녀는 부축하여 병상에 눕혔다.하지만 고은서는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그녀는 의식을 잃고 누워있는 민시후의 얼굴을 머릿속에서 떨칠 수 없었다.식물인간, 이 네 글자는 마치 거대한 산처럼 고은서의 마음을 눌러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고은서는 차마 식물인간이 된 민시후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 그의 가족들이 얼마나 슬플지, 앞으로 그들과 어떻게 대면해야 할지 몰랐다.밝았던 하늘이 점차 어두움으로 빠지자 고은서는 그제야 서서히 잠이 들었다.깊은 밤, 고은서는 별안간 꿈에서 깨어났고 눈을 뜨니 병실에는 곽승재가 아닌 박지연과 육현석이 있었다.무슨 일이 있는 듯 두 사람의 얼굴은 모두 심각해 보였다.“지연아.”고은서가 낮은 목소리로 박지연을 불렀다. 박지연과 육현석 두 사람은 동시에 다가왔다.“깼어? 배고프지 않아? 물 가져다줄까?”박지연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너 오늘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 먼저 물이라도 마셔.”고은서가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별로 마시고 싶지 않아.”육현석이 미안한 듯 말을 꺼냈다.“미안해. 요즘 일도 많았고 또 백승엽을 조사하느라 바빠서 병문안 올 시간이 없었어. 오늘에야 겨우 시간을 내서 왔어.”고은서는 그런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백승엽은 어떻게 됐어요? 찾았나요?”그 말을 듣고, 육현석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바뀌었다. 그는 박지연과 시선을 마주친 뒤, 결국 입을 열었다.“찾기는 찾았는데 예기치 않은 상황이 발생했어. 백승엽이 죽었어.”“죽었다고요?”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그러다 현기증이 몰려와 머리를 움켜잡았다. “진정해, 너무 흥분하지 말고.”박지연이 급하게 말렸다.고은서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백승엽이 정말 죽었어요?”“그래.”“다리가 불편한 백승엽은 경호원을 데리고 자취를 감췄어. 그런데 그도 숨을 곳도 마땅치 않았던 거야. 그래서 우리는 아마 그들 백승엽의 고향 집에 숨어
앞쪽 병실에서 백유미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고 육현석은 그 소리를 듣고 갑자기 얼굴이 굳어져서 황급히 달려갔다.“승재 형!”고은서의 미간이 저도 모르게 찌푸려졌다. T 국의 그 폐창고에서도 백유미가 비슷한 비명을 지른 후 원지훈이 사고를 당했었다.고은서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혹시 백유미가 또 미친 척하고 승재 씨를 다치게 한 걸까?”“현석 씨도 너무 놀라서 착각한 거야. 백유미는 방금 수술을 마친 상태고 또 범가온한테 칼까지 맞았으니 지금은 곽 대표를 다치게 할 기운이 없을 거야.”박지연이 고은서의 생각을 알아채고 침착하게 말했다.“그리고 너도 몸이 아직 다 회복된 게 아니니까 천천히 가자.”고은서는 원래 달려갈 생각이 없었다. 곽승재의 실력으로 백유미가 그에게 상처를 입힐 리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설령 곽승재가 다쳤다 해도 그녀가 달려간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병실은 멀지 않았고 고은서와 박지연은 1분도 채 되지 않아 병실 앞에 도착했다.병실 안의 곽승재는 정말로 멀쩡했다. 그의 큰 키와 체격은 병실을 꽉 채운 느낌이었다.“승재 형, 은서 씨도 왔어.”곽승재는 고개를 돌려 고은서를 보고 놀란 표정으로 빠르게 병실을 나왔다.“은서야, 이렇게 늦었는데 왜 왔어?”고은서가 바로 말했다. “백승엽의 소식을 나도 들었어. 그래서 백유미를 만나러 온 거야.”곽승재는 잠시 생각하다 이내 입을 열었다.“의사가 말하길 백유미는 이미 유산으로 큰 충격을 받았고 제 아버지의 사망 소식까지 듣자 정신이 다시 이상해진 것처럼 보인다고 했어.”“연기하는 거겠죠.”박지연이 비웃으며 말했다. “사람도 눈 깜짝 안 하고 죽일 수 있는 백유미가 그런 일로 정신이 이상해진다고?”고은서도 박지연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냉혹하고 악랄한 백유미가 아버지의 사망 소식 정도에 진짜로 미쳐버릴 리가 없었다.고은서도 조용히 병실에 들어섰다.병실 안에는 백유미 외에도 두 명의 경호원이 있었다.지금의 백유미는 병원복을 입고 앉아
곽승재는 더 이상 고은서를 설득하지 않았다. 백유미가 계속해서 몸부림치자 그는 경호원에게 손짓해 그녀를 침대 옆에 묶도록 지시했다.모두가 병실을 나가기 전, 박지연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은서야, 정말 괜찮겠어?”“걱정하지 마. 괜찮아.” 고은서는 병상에 묶여 움직일 수 없는 백유미를 보며 답했다.“이렇게 묶어놨으니 나를 다치게 할 수 없을 거야.”“우리도 문 앞에 있을 테니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우리를 불러.”박지연의 당부에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곧, 사람들은 모두 나갔고 병실엔 고은서와 백유미만 남았다.고은서는 조용히 방문을 잠갔고 백유미는 여전히 겁에 질려서 고통스러운 듯 소리쳤다.“꺼져! 가까이 오지 마!”고은서는 바로 입을 열지 않고 의자를 찾아 앉은 뒤 차분하게 방을 둘러봤다.벽은 하얗게 칠해져 있었고 방 안에는 간단한 철제 침대와 커피 테이블,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천장에는 링거를 걸 수 있는 이동식 레일도 있었다.천천히 방을 살펴본 후, 고은서는 백유미에게 시선을 돌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백유미 씨, 이렇게 미친 척해서 정신병원에 갇히는 게 감옥에 가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해?”“곽 대표는 이미 너의 정신 감정 보고서가 조작됐다는 증거를 찾았어. 그걸 제출하면 곧 전문가가 다시 정신 감정을 진행할 거야. 그때도 계속 미친 척할 수 있을까?”백유미는 고은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계속 몸부림치며 떨고 있었다.고은서는 냉정하게 말을 이어갔다.“여기엔 우리 둘뿐이야. 내 휴대폰은 박지연한테 있으니 녹음도 못 할 거야. 그러니까 내 앞에서 미친 척할 필요 없어. 네가 정말로 미쳤는지 아닌지 우리는 다 알고 있으니까.”고은서는 자신의 빈 호주머니를 꺼내 백유미에게 보여줬고 백유미는 여전히 울부짖었지만 목소리가 훨씬 작아졌다.“백유미 씨, 당신 정말 잔인하더군. 당신은 아버지를 설득해서 숙모를 살해하게 만들고 또 우리까지 없애려고 했어. 그리고 일을 망치자 발각될까 두려워 자기 아버지까지 죽여?
백유미의 비명과 함께 고은서는 주저 없이 유리 조각을 그녀의 살에 찔러 넣었다!전생에서 고은서의 외할아버지는 백유미 때문에 죽임을 당했었다. 이번 생에서도 백유미가 저주를 퍼붓자 고은서의 마음속에서 증오가 치솟아 올랐다.유리 조각의 날카로운 끝이 병원복을 뚫고 그녀의 피부에 박혀 붉은 피가 스며 나왔다.고은서가 왜 문을 잠갔는지 백유미는 그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누군가가 들어와서 막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고은서, 미쳤어?”백유미의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마주하며 고은서가 싸늘하게 웃었다.“미친 사람은 너야, 정신병자가 자해하는 건 아주 정상적인 일이잖아? 곽 대표도 날 위해 증인으로 나설 거야. 그 상처는 전부 네가 자해하면서 생긴 상처라는걸!”백유미는 고은서의 말이 결코 빈말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의 곽승재는 그녀에게 결코 자비를 베풀지 않을 것이고 설령 고은서가 그녀를 죽인다고 해도 곽승재는 고은서를 편들 것이다!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지만 백유미는 식은땀을 흘리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녀의 몸은 이제 허약할 때로 허약해져 어떤 고문도 견딜 수 없었다.백유미는 더 이상 자존심을 세우지 않았고 겸손하게 자신이 잘못했다고, 더 이상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겠다고 고은서에게 빌었다.고은서는 무표정하게 유리 조각을 뽑아냈다. 백유미는 고통에 입술이 하얗게 질려 있었고 병원복에는 피가 배어 나왔다.하지만 고은서는 그 빨간 핏자국을 응시하며 그날 밤 민시후가 흘린 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고는 분명 백유미가 벌인 일이었으며 민시후의 처참한 상태를 떠올리다 그가 식물인간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고은서의 눈은 다시 분노로 물들었다.백유미가 유산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고은서는 그녀의 목숨을 뺏고 싶은 충동을 다시 느꼈다.“너 뭐 하려는 거야?”백유미는 고은서 눈에 비친 살의를 보고 등 뒤가 서늘해졌다.“아버지가 한 일이라 나랑 아무 상관 없다고! 난 그때 수술 중이라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백유미는
그때, 박지연의 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송민아였다.전화를 받은 박지연은 금세 들뜬 표정을 하고 스피커폰을 켰다.“민아야, 진짜야? 다시 말해줘!”“진짜야, 시아 언니가 방금 말했어. 시후 오빠가 손가락도 움직였고 눈에도 반응이 있다고 의사가 확인했어. 이건 깨어날 징조래!”송민아의 목소리도 매우 흥분해 있었고 박지연이 고은서를 바라보며 말했다.“은서야, 들었어? 시후 씨 곧 깨어날 거래. 식물인간이 되지 않을 거라고!”순간, 고은서의 마음속에 눌려 있던 무언가가 내려앉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억지로 짜냈던 힘이 서서히 빠져나갔다.백유미의 머리채를 잡고 있던 고은서의 손이 바닥에 툭 떨어졌고 유리 조각도 땅에 떨어졌다.자신이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자 백유미는 고은서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싸늘하게 말했다.“좋은 날들도 이제 끝이야. 이미 누군가가 너랑 너희 가문을 노리고 있다고.”정신이 번쩍 든 고은서가 다시 백유미의 멱살을 잡고 따지려는 순간, 강한 팔 힘이 그녀를 잡아당겼다.은은한 설송향과 함께 곽승재가 고은서를 품에 감싸안았다.“은서야. 더 이상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마. 너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지 말라고.”곽승재가 단호한 목소리로 달랬다.고은서가 몸을 비틀며 저항하자 곽승재는 그녀의 등 뒤 상처를 피해 힘을 빼고 그녀를 풀어주었다.곽승재가 싸늘하게 백유미를 응시하며 말했다.“방금 뭐라고 말한 거야?”백유미의 상처에서 여전히 피가 새어 났고 곽승재가 따지자 그녀는 겁에 질려 머리를 계속 흔들며 입을 꾹 다물었다.“은서야, 저 여자 말 신경 쓰지 마. 우선 병원으로 돌아가자. 시후 씨가 곧 깨어날지도 몰라!”박지연이 급히 말했다.“그래. 시간도 늦었고, 내가 두 사람 병원에 데려다줄게.”육현석도 거들었다.고은서는 백유미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백유미의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알고 싶지 않았고 민시후의 상황이 더 걱정되어 박지연의 부축을 받으며 병실을 나섰다.“승재
“넌 나와 조건을 이야기할 자격이 없을 텐데.”비록 곽승재와 더 이상 잘 될 가능성이 없었고 그가 자신에게 감정이 없다는 걸 알았지만 백유미는 그의 그 말에 여전히 상처를 받았다.백유미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승재 씨, 내가 전에 뭘 했든 단 한 번도 당신을 다치게 한 적이 없어! 당신이 나를 이 모양 이 꼴로 만들었지만 나는 한 번도 당신을 미워한 적이 없다고!”“난 지금 단지 묶인 손을 풀어주고 상처를 닦아줄 사람을 요구하는 것뿐이야. 내가 마지막 존엄을 지키며 당신과 이야기할 수 있게 해주는 게 그렇게 잘못된 거야?”백유미는 눈시울을 붉히며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의 애원에 곽승재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지금 네가 할 수 있는 건, 알고 있는 걸 모두 털어놓는 거야.”그 말에 백유미는 미친 듯이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한참 웃고 나서 그녀는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내가 아는 건 이미 다 말했어. 그런데 또 뭘 알고 싶다는 거야? 나는 계속 여기 갇혀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데, 승재 씨는 자꾸 내가 뭘 알고 있다고 말하는 거야?”“그것만 말해줄 수 있어. 승재 씨는 절대로 고은서와 잘 될 수 없을 거야.”백유미는 악담을 퍼붓듯 말했다.“고은서는 재앙 그 자체야. 그 여자와 가까이 있는 사람은 누구든 불행해져. 민시후가 바로 그 증거야.”“승재 씨가 그 여자를 포기하지 않으면 다음 불행한 사람은 바로 당신이라고!”백유미는 다시 미친 듯이 웃었다.“그러고 보니 승재 씨도 당연히 불행해져야 해. 당신은 범가온 그 여자가 나를 고문하게 방치하고 나에게 아이 낳을 걸 강요했는데도 모른 척했어. 그래서 우리 아버지가 할 수 없이 그 여자를 죽이려고 했던 거야!”“그리고 고은서와 민시후, 그 두 사람은 서로 짜고 나를 함정에 빠뜨렸고, 우리 가문을 파산하게 만들었어. 그러니 우리 아빠가 그 두 사람의 목숨을 빼앗으려 한 것도 전혀 잘못된 게 아니지! 하하하!”그 모습을 본 곽승재는 아무 말 없이 문 옆의 경비
관련된 세부 사항을 조율한 후 고은서는 외할아버지께 전화를 걸었다.위험했던 일은 고준석이 걱정할 것 같아 차마 말씀드릴 수 없었지만 이제 상황이 어느 정도 안정되었기에 외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전화를 한참 걸었지만 고준석은 받지 않았다.고은서는 급히 오춘식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를 통해 오늘 단은숙이 집에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늘 집에 들어서자마자 어르신을 보고 울고불고 소란을 피우다 지금 서재에서 이야기 나누고 계셔.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고은서는 순간 어제 백유미의 조롱 섞인 한마디가 떠올랐다.“이미 너랑 너희 집안 주시하고 있는 사람이 있어.”‘백유미가 단순히 도발하려고 한 말일까 아니면 정말 우리 집안을 겨냥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 걸까?’불안해진 고은서는 유성준에게 연락해 MQ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닌지 물었다.유성준은 아무 일도 없다고 했고 오히려 MQ의 맞춤 제작 사업이 최근 좋은 성과를 내면서 바빠졌다고 덧붙였다.“은서야,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어보는 거야? 무슨 일 있었어?”유성준이 의아해하며 물었다.고은서와 민시후의 교통사고 소식은 곽승재와 민씨 가문 사람들이 철저히 차단했기에 외부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당연히 유성준도 사실을 모르고 있었기에 고은서는 적당한 핑계를 둘러댄 뒤 바로 고은혜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고은혜 역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나도 요즘 인턴 생활에 바빠. 우리 엄마 원래 별일도 아닌 걸로 할아버지한테 난리 치잖아.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할 필요 없어.”30분 후 마침내 고준석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고준석의 말을 듣고 나서야 고은서는 단은숙이 찾아온 이유를 알았다.단은숙은 고국성이 한 여성 고객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의심했고 그 문제로 고준석에게 찾아와 심경을 토로한 것이었다.단은숙이 비록 명문가 출신은 아니지만 외모가 뛰어났고 고국성과 결혼한 이후로 고국성도 그녀의 말을 잘 따르는 편이었다.‘갑자기 삼촌한테 이런 스캔들이 터질 리가 없
박지연은 계속해서 불만을 터뜨렸다.“내가 보기엔 여시은은 태생이 못돼먹었어!”“이번에 그렇게 크게 당했으니 더더욱 널 원망할 거야. 너 조심 좀 해.”박지연이 걱정스럽게 당부했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각을 세우기로 마음먹었기에 여시은과 평화롭게 지낼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앞으로는 여시은을 더 철저히 경계할 것이다.“듣자 하니 곽승재가 내내 널 감싸줬다며? 너한테 점점 마음이 가는 모양이야.”박지연이 코웃음을 쳤다.어젯밤 곽승재가 고은서를 계속 도와줬던 건 사실이었다. 증거를 공개하자고 제안한것도 곽승재의 생각이었고 마지막에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줬다. 곽승재가 고은서에게 큰 도움을 준 셈이었다.하지만 고은서는 곽승재에 대한 이야기를 박지연과 깊이 나누지 않았다.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던 중 박지연이 고은서에게 뜬금없는 소문 하나를 전했다.“우리 과장님한테서 들었는데, 어제 혜린 씨가 다니는 병원에 조 여사님이 찾아가서 난리를 쳤대. 혜린 씨 남자관계가 복잡하다고, 다른 남자랑 팔짱 낀 사진까지 들고 와서 공개하면서 혜린 씨랑 그 자리에서 머리끄덩이 잡고 싸움 났대!”고은서는 지난번 소동 이후 손자를 중시하는 조수연이 한동안은 조용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고작 며칠 만에 또 난리를 친 거였다. 조수연의 전투력은 엄청 대단했다.“아니, 그러다 혜린 씨 혹시라도 애를 지우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고은서가 물었다.박지연은 말했다.“조 여사님 말로는 혜린 씨 뱃속 애가 자기 아들 애가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해서 혜린 씨를 끌고 가서 친자 확인하자고 했대. 그래서 둘이 몸싸움까지 벌어져서 이미지도 최악이라 혜린 씨는 한 달 정직당했어.”“혜린 씨 배속에 애가 온승준 씨 애가 아니라고? 그럼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그 집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거야? 그냥 진짜 애 아빠랑 결혼하면 될걸...”고은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소문엔 그 남자가 유부남에 애까지 있다고 하더라. 자세한 건 나도 몰라. 그냥 과장님이 흘린 얘기야.”
여시은은 여전히 여재훈의 다리를 붙잡고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그럼, 아빠가 생각하시는 해결 방법은 뭐예요?”여재훈은 여시은에게 홍보팀을 통해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공개 사과하고, 개인적으로 고은서에게 직접 진심으로 사과한 뒤 집에서 2주 동안 자숙하라고 말했다.“제 회사는 아직 개업식도 제대로 안 했는데 공개 사과를 하라뇨? 그럼 모든 사람들이 저를 웃음거리로 볼 거 아니에요!”여시은은 눈이 퉁퉁 부은 채 애원했다.“아빠, 저 은서한테 개인적으로 사과만 하면 안 돼요? 저도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사람들을 이끌기 힘든데, 공개적으로 사과하면 앞으로 누가 저를 믿고 따르겠어요?”“안 된다.” 여재훈은 단호하게 말했다.“이 일은 이미 파장이 커졌고 많은 사람들이 너를 지켜보고 있어. 그러니 모든 사람에게 확실하게 해명해야 한다.”“시은아, 잘못을 저지른 건 무서운 일이 아니야. 진심으로 뉘우치고 성실하게 사과하면 은서 씨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너에게 다시 기회를 줄 거다.”여재훈은 계속해서 말했다.“사람은 자기가 저지른 잘못에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 네가 잘못했는데 내가 덮어주면 그건 너를 망치는 거야. 그러니까 이 일은 이렇게 결정된 거다!”여시은은 그 말을 듣자 속으로 분노가 치밀었다.‘고은서를 그저 연못에 좀 빠지게 했을 뿐인데 이게 뭐 그렇게 큰일이라고 이렇게까지 일을 키운단 말인가?’‘공개 사과라니, 이제 예전처럼 모두에게 존경받고 칭찬받던 모습은 끝이라는 거잖아.비록 인터넷의 영상은 지워지더라도 사람들이 나에 대한 나쁜 인상은 지워지지 않을 거란 말이야!’오늘 밤 그렇게 많은 부유층과 정재계 인사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녀는 그들에게 최악의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해성에서 쌓아온 그녀의 완벽한 이미지가 단번에 무너진 셈이다.예전엔 그녀가 울기만 하면 여재훈은 안쓰러워하며 뭐든지 다 용서해 줬었다.‘지금은 무릎까지 꿇었는데도 아빠는 고은서 때문에 자신의 딸을 벌하려 한다니, 정말 나를 딸로 생각하긴 하는 걸까?’
여시은은 그 말을 듣자 눈이 시뻘게지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아빠, 제가 한 게 아니라니까요! 고은서가 일부러 저를 함정에 빠뜨린 거예요. 왜 저를 믿지 않으세요!”“시은아!”여재훈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난생처음으로 이토록 차가운 눈빛으로 딸에게 화를 냈다.“너는 어쩌다 이렇게 뻔뻔하게 거짓말만 하는 사람이 됐니!”“내가 사람을 시켜서 확인해 봤어. 연회장 CCTV 꺼놓은 거, 그거 네가 시킨 거더라.”여재훈은 딸을 억울하게 만들까 걱정돼 CCTV 관련 내용을 직접 조사했다.그런데 정말로 여시은이 꺼놓았던 것이었다.“네가 정말 은서 씨를 해치려는 의도가 없었다면 왜 CCTV를 미리 꺼놓은 거냐?”여재훈은 냉정한 태도로 물었다.여시은은 자신이 고은서의 계략에 걸려든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고은서는 일부러 도발적인 눈빛으로 여시은을 자극했고 곧바로 테라스로 이끌어냈던 것이다. 모두 여시은한테 엿 먹이려는 행동이었다!여시은은 고은서가 쿠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격동적으로 행동해 자신을 밀칠 거라 확신했었다.왜냐하면 고은서는 지난번엔 쿠아를 다치게 한 일로도 크게 충격을 받았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번엔 반전이 생겼다.고은서는 오히려 침착하게 반격했고 지난번 농장에서의 ‘물에 빠진 사건’ 증거까지 들고나왔다.일이 이렇게 커져 버린 이상 여시은은 더 이상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 걸 알았다.그녀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여재훈을 향해 소리쳤다.“맞아요! 저 고은서가 너무 꼴 보기 싫었어요! 왜 아빠는 맨날 걔만 칭찬하세요? 이러니깐 제가 질투 나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고은서한테 꼽 주고 싶었어요!”“어차피 이미 벌어진 일이에요. 전 잘못한 거 없어요! 후회도 안 해요!”“너!”여재훈은 손을 번쩍 들어 여시은의 뺨을 때리려 했지만, 그녀의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보고는 차마 때릴 수가 없었다.“시은아, 아빠가 평소에 너를 어떻게 가르쳤니? 사람은 자기 양심에 떳떳해야 하고 올곧게 살아야 한다고 했잖아! 근데 너는 어떻게 질투심에 눈이
이미숙은 유튜브 영상을 보고 있었는데, 바로 여시은이 고은서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겨 연못 가까이로 끌어당기는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그 영상은 누군가가 휴대전화로 촬영해 올린 것 같았고 화질이 너무 좋은 건 아니지만 전반 상황을 알아보는 데에는 충분했다.영상의 끝에는 고은서와 여시은의 얼굴을 비춘 장면도 담겨 있었다.다소 초라해진 고은서는 곽승재의 부축을 받으며 옆에 서 있었다. 여시은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눈빛엔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했다.그 와중에 영상의 제목이 더욱 눈길을 끌었다.[재벌가 아가씨, 두 얼굴의 진실!]“사모님, 저 여자는 어쩜 저리 독하대요. 이렇게 심하게 괴롭히다니. 누가 폭로해 줘서 다행이지! 이제 세상 사람들 다 그 여자 피해서 다니겠어요!”이미숙은 화가 난 듯 말했다.고은서는 이번 일이 오래 퍼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시은 뒤에는 여재훈이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번 일로 여시은이 보기 좋게 망신을 당했고, 여재훈 역시 자신의 딸이 그렇게 순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테니, 이번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고은서는 이미숙의 휴대전화 영상에 대뜸 ‘좋아요'를 눌렀다.한편, 여씨 가문에서.여시은 역시 유튜브 영상을 확인했다. 분노에 찬 그녀는 휴대전화를 바닥에 내던졌다.밖에 서 있는 박미화가 조심스럽게 말을 전했다.“시은 아가씨, 회장님께서 지금 바로 서재로 오시래요. 할 말씀이 있으시답니다.”이번이 박미화가 세 번째로 말을 전하러 온 것이었다.여시은은 곧바로 얼굴에 드리워진 분노와 짜증을 숨기고는 일부러 슬프고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방문을 열었다.박미화는 방안에서 반응이 없자 방문을 열려고 하였다. 때마침 여시은이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을 보고 급히 손을 거두며 사과했다.여시은은 박미화의 손을 움켜쥐었다. 조금 전에 분노로 인해 물어뜯은 날카로운 손톱이 그녀의 살을 깊이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여시은은 울먹이는 말투로 물었다.“미화 언니, 아빠가 나한테 화 많이 나신 거야? 나 어떻게 해야
얼마 지나지 않아 운전기사가 차를 라이트문 아파트 앞에 세웠다.고은서와 곽승재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고은서는 샤워하기 위해 자신의 방으로 직행했고 곽승재는 거실에 남았다.샤워를 마치고 나온 고은서는 의외의 광경을 목격했다. 곽승재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 한 잔이 놓여 있었다.“왜 또 왔어? 할 말 있어?”고은서가 물었다.곽승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논의할 게 있어서. 그전에 이 콜라 생강차부터 마셔. 아주머니께서 특별히 준비하신 거야.”“사모님, 콜라 생강차는 감기 예방에도 효과적이거든요. 어서 드세요!”이미숙이 차를 가져오며 말했다.고은서는 감기에 걸릴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녀는 잔을 들어 올리더니 이상한 듯 물었다.“아줌마, 제가 방금 들어온 걸 보지도 못하셨을 텐데 어떻게 제가 감기 걸릴 줄 아시고 미리 차를 준비하셨어요?”이미숙의 눈가에는 잠시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곽승재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내가 알려줬어. 일단 마셔.”고은서는 고개를 숙여 생강차를 내려다 볼뿐 이미숙의 표정 변화를 주의 깊게 보지 못했다.물론 곽승재의 눈에 비친 기대감도 보지 못했다.생강차의 냄새를 맡아보니 생강 향이 꽤 진했다.고은서는 생강차를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콜라의 단맛과 생강의 톡 쏘는 맛이 어우러져 생각보다 맛이 나쁘지 않았다.“맛이 어때요?”이미숙이 물었다.“좋네요. 그런데 오늘은 생강을 좀 많이 넣으신 것 같네요. 예전에 만드신 것보다 더 매운데요.”이미숙은 잠시 망설이다가 급히 대답했다.“생강 양을 조절하지 못했네요. 주의할게요.”고은서는 더는 따지지 않고 다시 마시려던 참이었는데 곽승재가 말을 건넸다.“맛이 별로면 안 마셔도 돼.”고은서는 그를 흘겨보았다.“누가 맛없다고 했어? 아줌마가 정성스럽게 준비해주신 건데 끝까지 마셔야지.”“사모님, 도련님과 얘기 나누세요. 저는 할 일이 남아서 먼저 가보겠습니다.”이미숙은 두 사람의 언쟁을 피하려는 듯 급히 자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곽승재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그녀는 친구에게 부탁해 적절한 시기에 감시 카메라를 끊어놓도록 준비해두었다.하지만 여시은이 먼저 참지 못하고 로비의 카메라를 꺼버린 것이다.고은서가 감히 감시 카메라의 확인을 제안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만의 준비를 했을 뿐만 아니라 여시은 역시 감시 카메라를 조작할 것이라는 점까지 예측했다.“만약 여시은이 참고 끝까지 널 찾지 않았다면 어떻게 할 작정이었어?”곽승재가 물었다.고은서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개업식이 끝난 후 대형 스크린에 공개할 계획이었어.”곽승재가 눈썹을 추켜세웠다.“네가 앞서 백스테이지 주위를 둘러본 것도 동영상을 공개할 준비를 했던 거야?”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여시은이 일부러 나를 물에 빠뜨리고 향수로 나를 함정에 빠뜨렸을 뿐만 아니라 쿠아까지 학대했어. 내가 당연히 가만히 있을 수 없지! 그리고 시은이가 인내심을 가졌다고 해도 난 개업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을 거야.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러지 못했지. 시은이는 결국 참지 못하고 테라스에서 쿠아의 죽음을 언급하며 나를 자극했고 다시 같은 수법을 쓸 참이었던 거지. 나는 그저 시은이가 파려던 함정을 그대로 돌려준 것뿐이야.”곽승재는 고은서가 준비를 해왔을 거라 예상했지만 이런 고육지계를 공개적인 자리에서 펼칠 줄은 몰랐다.게다가 그녀의 연기는 너무나도 실감 났다.고은서가 바닥에 넘어져 흐트러진 모습을 보는 순간 곽승재는 정말로 여시은의 소행일 것으로 생각할 정도였다.고은서는 곽승재의 생각을 읽었는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가여운 척 한 거 아니야. 백유미와 여시은이라는 고수들 덕분에 나도 한 수 배웠을 뿐이지.”백유미의 과거 행동을 떠올린 곽승재는 가슴을 죄는 듯한 자책감이 밀려왔다.곽승재는 진지하게 사과했다.“은서야, 미안해.”무심코 흘린 말에 곽승재가 사과하는 모습을 본 고은서는 잠시 당황했다.“사과할 필요는 없어. 당신도 백유미 씨에게 속았을 뿐이잖아. 어쨌든 ‘목숨의 은인'
“시은아!”영상 속 장면에 충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재훈은 걱정된 목소리로 딸을 불렀다. 그리고 뒤이어 멀리 있는 부하들에게 명령했다.“어서 따라가서 시은이를 보호해! 무슨 일이라도 생기게 해서는 안 돼!”부하들이 여시은의 뒤를 쫓아 나간 뒤 여재훈은 스크린을 힐끗 바라보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고은서에게 사과했다.“제가 딸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이 일은 제가 시은에게 직접 확인한 뒤 여은서 씨께 해명해 드리겠습니다.”고은서는 목적을 달성했으니 더는 그곳에 머물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는 이유로 자리를 떠나려 했다.“여 대표님, 제가 은서 씨를 모셔다드리겠습니다.”곽승재가 말했다.송민준 역시 함께 가겠다고 전했다.여재훈은 당연히 거절하지 않았다. 개업식에서 이런 소동을 일으킨 이상 누구라도 축하할 마음이 없을 터였다.고은서 일행이 떠나자 여재훈은 참석자들에게 직접 사과하며 홍보팀에 현장 수습을 지시했다.호텔 앞 광장에서 곽승재와 송민준의 운전기사들이 각각 차를 대기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송민준은 고은서를 배웅하려는 태도를 보였으나 곽승재가 고은서를 부축하면서 예의를 갖추어 말했다.“번거로울 텐데 제가 은서 씨를 모시고 가겠습니다.”송민준은 자기가 고은서의 파트너로 왔기 때문에 그녀를 집까지 모셔다드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설득했다.곽승재는 송민준의 이런 친근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억지로 고은서를 안아 들어 자신의 차에 태우고 싶었지만 고은서가 화를 낼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는 입을 오므리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선택권을 고은서에게 넘겼다.고은서는 당연히 송민준과 함께 갈 생각이 없었다.“오빠, 오늘은 고마웠어. 오늘 승재 오빠의 차를 타고 갈게. 어차피 길도 같으니까. 내일 다시 연락할게.”고은서의 반응에 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알겠어. 집에 도착하면 연락해.”곽승재는 고은서를 차에 태운 뒤 트렁크에서 깨끗한 외투를 꺼냈다.차 안에 앉자 곽승재는 고은서의 어깨
여시은은 고은서의 말에 더욱 어리둥절해졌다.‘갑자기 왜 또 농장 일을 다시 꺼내는 거지?’여시은은 속으로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생각할수록 점점 더 억울하고 분했다.“은서야, 왜 나를 이렇게 모함하는 거야? 내가 언제 너를 물에 빠뜨렸다고 그래? 네가 나를 밀었잖아! 내가 우리 아빠를 생각해서 참고 넘어갔는데 이제 와서 또 나에게 뒤집어씌우다니!”여시은은 여재훈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혔다.“아빠, 저는 항상 사람을 보는 안목이 없는 것 같아요... 은서가 이런 사람일 줄은 정말 몰랐어요... 너무 속상해요...”여시은의 슬프고 안쓰러운 모습에 여재훈은 점차 진지해졌고 고은서를 보며 물었다.“고은서 씨, 시은이가 은서 씨를 물에 빠뜨렸다는 증거라도 있어요?”“물론 있죠.”고은서는 이미 곽승재의 부축을 받아 일어난 상태였다.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송민준이 보낸 영상을 찾았다.현장에 있던 사람들 모두 다가가지는 않았지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은서가 진짜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더니 그들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다.이때 곽승재가 제안했다.“여 대표님, 모두가 보는 앞에서 영상을 공개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모두가 직접 보면 진실이 명백해질 테니 나중에 왜곡되는 일도 없을 겁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여시은은 고은서가 미리 준비한 듯한 태도를 보이자 불안감이 더욱 커졌다.고은서가 이렇게 계획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증거를 손에 넣었을지도 모른다.여시은이 고은서를 과소평가했던 것이다.여시은은 붉어진 눈으로 소리쳤다.“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에요! 이미 개업식 시간이 다 됐는데 계속 이러쿵저러쿵하며 일을 벌이다니! 고의로 우리 개업식을 방해하는 거 아니에요?”“아빠, 오늘 이분들은 분명히 좋은 의도로 온 게 아닌 것 같아요. 그냥 쫓아내는 게 낫겠어요!”“여시은 씨, 말씀이 참 지나치군요. 우리는 단지 진실을 알고 싶을 뿐입니다.”송민준이 여재훈보다 먼저 입을 열
구경하는 사람들도 송민준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도대체 왜 그의 여자 파트너가 곽승재의 품에 안겨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송민준은 사람들의 의문스러운 시선을 받고 있었지만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여시은 씨, 저는 단지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은서와 여시은 씨의 사이에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은서가 왜 그런 행동을 하겠습니까?”“아빠, 정말 제가 한 게 아니에요! 저 사람들은 같은 편이라서 일부러 저를 괴롭히려는 거예요!”여시은은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그녀의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했다.여재훈은 눈물 글썽이는 딸을 바라보더니 온몸이 흐트러진 고은서를 향해 물었다.“고은서 씨, 사실대로 말해보세요.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고은서는 감정을 어느 정도 추스렸지만 이런 일을 당하면 당연히 난처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최대한 평온한 어조로 대답했다.“여 대표님, 제가 뭘 말해도 소용없을 겁니다. 시은이와 저는 각자 주장이 다르기 때문에 누구도 판단하기 어려울 겁니다.”고은서는 로비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여기 곳곳에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요. 직원들을 시켜 감시 카메라를 확인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러면 진실도 드러나겠죠.”이 말을 듣자 여시은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고은서가 여시은보다 먼저 바닥에 넘어졌는데 감시 카메라의 확인까지 제안하다니!‘설마 은서가 이 시간대에 감시 카메라를 꺼뒀다는 걸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시은아, 너의 생각은 어때?”고은서는 고개를 들어 여시은에게 물었다.여시은은 분노를 꾹 참고는 여전히 억울하고 순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좋아! 하지만 개업식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데 감시 카메라는 확인하는 동안 내가 먼저 개업식을 진행하고 나중에 이 문제를 논의하는 게 어때?”“안 돼.”고은서의 작은 얼굴에는 단호한 표정이 담겨있었다.“이 사건은 반드시 바로 조사되어야 한다고 봐.”고은서는 다시 여재훈을 바라보며 말했다.“여 대표님,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제가 시은이 만큼 귀하지는 않지만 이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