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도 아저씨가 그렇게 대담하게 민시후까지 엮어 함정을 파고 기회를 이용해 범가온을 독살할 줄은 예상 못 했겠죠. 아버지가 시켰다는 걸 밝힐까 봐 죄책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처럼 꾸민 거 아닙니까?”“이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곽현수는 분노로 얼굴이 새파래진 채 손에 들고 있던 시가를 바닥에 내던졌다.“네가 감히 네 아버지를 이렇게 의심해? 내가 고은서를 손보려면 방법이야 많아. 굳이 백승엽을 이용할 필요는 없지! 백승엽은 오랫동안 내 곁에서 집사를 해 왔어. 공로가 없진 않다고. 내가 왜 그런 사람을 궁지로 몰아넣어 죽게 만들겠어!”곽승재는 바닥에 떨어진 시가를 흘깃 내려다본 후 무표정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정말 아버지와 상관없습니까?”“당연하지!”곽현수는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누가 너한테 쓸데없는 소리를 했길래 날 의심하는 거야! 혹시 고은서야?”곽현수는 차갑게 비웃으며 말했다.“너랑 이혼한 걸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해서 지금 온갖 문제를 일으키고 네가 아직 미련이 남아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 일부러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는 거잖아! 곽승재!”곽현수는 낮고 위협적인 목소리로 경고했다.“더 이상 나를 거스르지 마라. 안 그러면 나도 더 이상 봐주지 않을 거다. 백유미를 귀국시킨 건 내가 맞지만 너랑 고은서의 관계와 감정이 정말 단단했다면 그렇게 쉽게 흔들릴 리도 없었겠지!”곽현수의 표정이 점점 더 험악해졌다.“고은서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아직도 질질 끌어? 이미 더 나은 선택지가 있는데 무슨 미련이 남아서 이러는 거냐. 아니면 네 엄마 때문에 일부러 내 화를 돋우려고 그러는 거야?”곽승재는 코웃음을 치며 낮게 웃음을 흘렸다.“누가 지금 일부러 이러고 있는데요?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의 문제에는 끼어들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저와 여씨 가문의 혼사는 얘기가 다르죠.”곽승재는 또 다른 서류를 꺼내어 곽현수 앞에 내밀었다.“사람을 시켜 조사해봤더니 1년 전 Y 국에서 열린 연회에 원래 초대받은 사람은 아
곽현수는 곽승재의 말을 듣고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네 할머니의 생각은 고려하지 않는다 해도 여씨 가문 체면은 고려해야 하지 않겠니? 고은서와 강제로 이혼시키고 다시 여씨 가문과 결혼한다면 더러운 소문 때문에 여씨 가문에도 피해가 가지 않겠니? 그런 상황에 여씨 가문이 널 받아들이겠어?”곽승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한참을 침묵하던 곽승재가 냉소하며 입을 열었다.“아버지가 이렇게 세심하고 사려 깊은 분인줄은 미처 몰랐습니다.”곽승재의 비꼬는 말투에 곽현수의 표정이 다시 험악해졌다.“이제라도 내 뜻을 알았으니 더 늦기 전에 여씨 가문과의 결혼을 확정 지어라!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없다.”“누가 후회할지는 두고 봐야죠.”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곽승재의 크고 곧은 체격은 마치 한 그루의 장성한 소나무처럼 위풍당당했다.“이미 관련 증거는 경찰에 넘겼습니다. 아저씨의 죽음이 아버지와 관련 있는지는 경찰이 조사할 겁니다.”“너 이 자식이!”곽현수는 분노로 숨이 턱 막혔다.“못난 놈!”곽현수가 화를 내건 말건 곽승재는 신경 쓰지 않고 긴 다리를 뻗어 유유히 룸을 빠져나갔다....테니스 코트 안에서 육현석은 땀을 흘리며 테니스 라켓을 휘둘렀다.육현석은 박지연 병원의 배구 친선 경기에 참여한 이후로 꾸준히 운동을 해왔다. 혹시라도 다음에도 비슷한 활동이 있으면 박지연의 체면을 살려주려는 의도도 있었다.막 열정이 솟아오를 때쯤 육현석은 멀찍이 서 있는 곽승재를 발견했다.그는 헐레벌떡 곽승재의 옆으로 달려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형, 여긴 무슨 일이야? 아직 몸이 다 낫지도 않았는데 격렬한 운동하면 안 돼.”그러나 곽승재는 아무 말 없이 곧장 옆에 있던 의자에 앉았다.육현석도 땀을 닦으며 그의 옆에 앉았다.“형, 참 답답하다니까. 부상당한 몸으로 제대로 쉬지도 않고 밤새 고은서 돌보느라 잠도 안 자고 심지어 계속 안고 다니기까지 하면서... 후유증이라도 남으면 어쩌려고 그래?”곽승재는 육현석을 흘깃 쳐다보더니 드디어 입을 열었다
체육관 주차장에서 차가 미친 듯이 고은서를 향해 돌진했던 장면을 떠올리기만 해도 곽승재는 아찔한 공포를 느꼈다.그는 고은서를 보고 있어야만 안심할 수 있었다.육현석은 곽승재의 생각을 간파하고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진작 이런 마음을 깨달았더라면 은서가 그렇게까지 이혼을 결심했을까? 휴... 됐어.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지.’“형, 백승엽 사건에 대해 경찰도 결론을 내렸지? 전에 형이 아버님이 백승엽 사건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조사한 건 어떻게 됐어?”곽승재는 관자놀이를 누르던 손가락을 풀고 오후에 곽현수를 만나고 온 이야기를 간략하게 육현석에게 전했다.육현석이 놀라며 말했다.“그럼 아버님이랑 상관없는 일이었던 말이야?”곽승재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아버지가 한 말도 일리가 있어. 만약 진짜로 은서를 해치려 했다면 굳이 이렇게 번거로운 방식을 쓸 필요가 없어. 그리고 민씨 가문까지 끌어들일 이유도 없고.”“그럼 백승엽은 도대체 누구의 사주를 받은 걸까? 설마 자기 마음대로 벌인 일일리는 없잖아. 백승엽은 형한테 밉보일까 봐 누군가한테 원한을 품어도 작은 꼼수 정도만 부렸지 이렇게까지 악랄한 짓은 저지르지 않았잖아. 최근 백승엽과 접촉한 사람들을 다 확인해 봤어? 아버님 외에 수상한 인물은 없었어?”곽승재는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현재로선 발견된 게 없어. 백승엽이 사람을 시켜 차 사고를 일으키고 불법 경로로 마약을 구매한 모든 증거가 명확하게 남아 있어.”“내가 듣기로 민시후가 은서를 도와 예전에 백씨 가문과 거래했던 고객들을 다시 이어줬다고 하더라고. 그리고 백유미의 정신 감정 보고서가 조작된 것임을 입증할 수 있는 의사도 찾았다고 하더라. 혹시 이런 일들이 백승엽을 자극한 건 아닐까? 게다가 백유미가 수술 중 대출혈로 고비도 겪었잖아. 분노에 휩싸여 이성을 잃은 걸지도 모르지.”그럴싸한 이유이긴 했지만 곽승재는 여전히 뭔가 석연치 않았다.‘백승엽이 분노에 휩싸여 이성을 잃었다면 이렇게 냉정하고 신속하게 일을 꾸밀 수 있었을
박지연이 고은서를 설득한 이유는 간단했다. “현재 민시후는 아직 회복되지 않은 상태라 해야 할 검사도 많아. 너도 기운 없이 병색이 완연한 모습이야. 오늘 하루는 일단 쉬고 내일 민시후의 상태가 조금 더 안정된 후에 가서 보는 게 어때?”하지만 고은서는 기다릴 수 없었다.“싫어. 그냥 가서 민시후가 정말 깨어났는지만 확인할 거야.”말을 마친 고은서는 박지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침대에서 내려와 신발을 신었다.박지연이 손을 뻗어 고은서를 잡았다.“민시후 정말 깨어났어. 내가 너한테 거짓말이라도 할까 봐?”“전에 민시후가 혼수상태일 때도 나한테 숨겼잖아.”“너한테는 정말 못 당하겠네.”박지연은 체념한 듯 말했다.“지금 민씨 가문 사람들이 다 민시후를 지키고 있어. 민시후가 너와 대화할 여유가 있을 것 같아? 게다가 너 지금 이 상태로 들어가 봐야 민시후가 오히려 걱정할 거야. 조금 참았다가 내일 가도 똑같잖아.”고은서는 박지연의 말도 일리가 있다는 걸 알았지만 정말로 민시후가 무사한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그럼 병실에는 안 들어가고 밖에서 보기만 할게.”박지연도 더 이상 막을 수 없었다.“그럼 같이 가자.”“응.”10분 후 박지연은 고은서를 데리고 민시후의 병실 앞에 도착했다.병실 문이 완전히 닫혀 있지 않아 안이 살짝 보였고 그 안에는 민씨 가문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의사와 간호사도 있었다.민시후는 병상에 누워 있었고 몸에 부착된 기기들은 제거된 상태였다.머리에는 두꺼운 붕대가 감겨 있었고 손에는 링거가 꽂혀 있었다.의사의 검사에 응하면서도 힘없는 듯한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와 같은 짜증이 섞여 있었다.“귀찮게 하지 말고 나가요. 쉬고 싶어요.”민시후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고은서의 가슴속에 벅찬 감정이 밀려왔다.‘민시후가 정말 깼어! 무사해... 멀쩡히 누워 있어.’“은서야, 이제 봤으니까 가자.”박지연이 조용히 말하자 고은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지금 민시후는 허약한 상태라 고은서는 자신이 들어가서 괜히 폐를 끼치면 안
“너 표정 왜 그래? 무슨 일 있어?”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박지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무것도 아니야. 송민아가 좀 이따 올 거야. 너랑 같이 민시후 보러 갈 거라고 하더라.”고은서는 마음이 따뜻해졌다.“민아는 내가 민시후 형 때문에 곤란해질까 봐 걱정하는 거겠지? 정말 다정하네.”얼마 지나지 않아 송민아가 도착했다.고은서는 곧바로 민시후를 보러 가자고 했지만 송민아는 잠시 망설이며 박지연과 눈을 마주쳤다.“왜 그래? 너희 둘 다 왜 이렇게 수상해?”고은서가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냈다.“아무것도 아니야. 가자.”송민아가 고은서의 팔을 살짝 부축했다.고은서도 두 사람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일단 민시후를 만나고 나서 추궁하기로 했다.고은서와 송민아가 병실 앞에 도착했다.병실에는 어제보다 사람이 적어진 것인지 한결 조용했다.송민아가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민시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들어오세요.”거의 일주일만이었다.드디어 다시 민시후와 대화할 수 있다는 생각에 고은서는 왠지 모를 설렘을 느꼈다.송민아가 병실 문을 열자 안에는 민시아와 민시후 남매 둘 뿐이었다.고은서는 민시아에게 인사할 겨를도 없이 곧장 민시후에게 시선을 돌렸다.어젯밤 문틈 사이로 보았을 때보다 확실히 상태가 나아 보였다.그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앉아 있었고 앞에는 작은 간이식탁이 놓여 있었다.식사가 차려져 있었지만 민시후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 듯했다.민시후는 아무것도 덮지 않은 채로 붕대를 감은 다리를 그대로 드러냈다.송민아가 말해줬던 대로 민시후는 머리 부상 외에도 팔과 다리가 골절되었다.그날 밤의 사고가 떠오르자 고은서의 눈가가 붉어졌다.“왜 또 왔어?”힘없는 민시후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섞여 있었다.“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내 앞에서 그만 알짱대.”놀란 고은서가 고개를 들자 민시후의 말은 고은서가 아닌 송민아를 향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은서는 지금 이 상황이 의아했다.‘송민아는 이미 오래전에 민시후를 향한 감정을 정리했
송민아는 고은서가 눈을 크게 뜨고 멍하니 있는 모습을 보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막 입을 열려던 찰나 민시아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은서 씨, 미안해요. 시후가 깨어나긴 했지만 아직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에요. 의사도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다고 해서 제가 미처 시후한테 모든 걸 설명하지 못했어요.”고은서는 충격에서 벗어나 침착함을 되찾았다.그녀도 처음 깨어났을 때 뇌진탕 때문에 사고 당시의 기억이 없었다.민시후도 같은 상황일 가능성이 컸다.“괜찮습니다.”고은서는 요동치는 감정을 억누르며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제가 신중하지 못했네요. 이럴 때 방해해서 죄송해요. 민시후, 푹 쉬어. 우린 먼저 가볼게.”고은서의 말이 끝나자 민시후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잠깐, 왜 우리 두 사람이 같이 있다가 사고가 일어난 건지 아직 설명 안 했잖아.”사고라는 말에 고은서는 본능적으로 움찔했고 사고 당시의 장면이 떠올라 숨이 막혀왔다.“미안해. 다 나 때문이야.”고은서의 말을 들은 민시후의 눈가에 의심이 스쳤다.“설마 너랑 곽승재가 짜고 치는 연극은 아니지?”고은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역시 민시후다운 생각 방식이었다.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의 의도를 몇 번이나 의심했던 그였다.‘정말 나를 기억하지 못하나 보네.’고은서는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실망, 허탈함과 깊은 죄책감이 그녀를 뒤덮었다.민시후가 이렇게 된 건 모두 본인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코끝이 시큰해진 고은서는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먼저 쉬어. 나중에 다시 올게.”그렇게 말하고는 고은서는 송민아와 함께 병실을 나왔다.병실을 나와 복도를 걸어가던 고은서는 옆에 있던 의자에 힘없이 앉아버렸다.“은서야, 괜찮아?”송민아가 걱정스럽게 묻자 고은서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시후 상태 알고 있었어?”송민아는 미안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솔직히 답했다.“시아 언니가 어제 민시후가 기억을 잃었다고 알려줬어. 병원에 와 보라고 해서 와서 확인했더니 최근
민승호는 형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민시현은 가차 없이 물었다.“여긴 왜 오신 거죠?”고은서는 솔직히 답했다.“시후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어서 보러 왔어요.”민시현의 목소리는 냉랭했다.“은서 씨도 시후 상태가 어떤지 잘 알겠죠. 두 사람 사이의 일은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을 테니 앞으로는 이렇게 방해하러 오지 마세요. 완전히 인연을 끊으면 더 좋겠네요.”“아저씨! 시현 오빠!”고은서가 답하기도 전에 송민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송민아를 보자 민시현의 태도는 조금 누그러졌고 민승호는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민아도 시후 보러 왔니? 시후가 많은 걸 잊어도 너에 대한 기억은 또렷한 걸 보니 네가 시후 마음속 깊이 자리하고 있었던 거 아닐까?”민승호가 장난스럽게 말했다.송민아는 옆에 있던 고은서를 흘끗 보더니 짐짓 장난스러운 말투로 답했다.“아저씨, 이제 더 이상 그런 농담 하시면 안 돼요. 시후 오빠가 모든 기억을 잃은 것도 아닌데 저와 있었던 일들을 기억하는 건 당연하죠. 하지만 저는 정말 오빠를 완전히 내려놓았어요. 그러니까 절대 저희 두 사람 다시 이어주려고 하지 마세요!”민승호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나는 정말로 네가 마음에 들었어. 우리 막내며느리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시후 저 녀석이...”송민아는 이에 답하지 않고 그저 웃으며 말했다.“아저씨, 시현 오빠. 저랑 은서는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말을 마친 송민아는 고은서의 팔을 잡고 함께 엘리베이터로 향했다.“우리 집안과 민씨 가문은 원래 친분이 깊어. 아저씨도 나를 좋아해서 시후 오빠와 결혼시키고 싶어 하셨던 거야. 너를 난처하게 만들려고 한 건 아니야.”“위로하려고 그러는 거면 안 해도 돼. 뭐든지 각오하고 있었어.”“시현 오빠가 너한테 심한 말한 건 아니지?”송민아가 자책했다.“좀 더 참을 걸 그랬어. 널 병실에 바래다주고 화장실에 갔어야 했는데...”고은서는 송민아의 표정과 말투에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그게 무슨 상관이야. 화장실
송민준은 손에 들고 있던 선물을 내려놓으며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한 채 말했다.“민아한테 상황은 들었어요. 시후 병문안 온 김에 겸사겸사 은서 씨도 보러 왔어요.”고은서는 감사 인사를 전한 뒤 그를 자리에 앉게 했고 참지 못하고 물었다.“민시후는 어때요? 괜찮나요?”민시후가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는 데다 민씨 가문 사람들도 그녀가 면회하는 걸 허락하지 않았기에 고은서는 지난 이틀 동안 민시후를 직접 보지 못했다.“그럭저럭 괜찮습니다. 다만 몸에 상처가 많아 손과 다리를 쓰는 걸 불편해하더라고요. 게다가 두통도 자주 와서 감정 기복도 심해졌어요.”“민준 씨는 기억하는 거죠?”고은서는 의도적으로 물었다.그녀도 당연히 송민준을 기억하고 있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하지만 민시후가 그에게 여전히 예전처럼 경계심을 가지는지 궁금해 직접적으로 묻는 대신 돌려서 물은 것이었다.송민준은 그녀의 의도를 눈치채고 미소를 지었다.“시후가 예전의 불편한 감정들은 잊었는지 저한테는 그럭저럭 예의를 갖추더라고요.”민시후는 이전의 사람들과 사건들을 기억하면서도 유독 그녀와 해성에서 있었던 일만 잊은 것이다.“시현 형이랑 아저씨는 시후를 해외 병원으로 옮길 계획이더라고요.”고은서가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송민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뇌 쪽 혈종 문제가 심각해서 선진 기술을 가진 해외에 가서 전문가에게 맡길 건가 봐요. 그편이 시후한테도 좋긴 하죠.”고은서는 순간 멍해졌다.‘민씨 가문 사람들이 민시후를 해외로 보낸다고?’“언제 가요? 그리고 얼마나 있을 예정일까요?”“아마 며칠 안에 출국할 거예요. 얼마나 머물지는 정해지지 않았어요. 병원의 치료 계획과 시후의 회복 상태에 따라 달라질 것 같아요.”민씨 가문이 이렇듯 급하게 민시후를 해외로 보내려는 건 치료 목적도 있지만 그녀와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려는 의도도 있을 것이다.어쩌면 이전에 민시아가 북성으로 데려가겠다고 한 것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었다.고은서는 머리로는 이 상황을 이해했지만 마음이 아려왔다.하
지난번 숙모에게 가방을 선물했을 때, 숙모가 엄청나게 기뻐했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그래서 이번엔 삼촌에게도 뭔가를 사서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은서는 노 사장님에게 코담배병을 어디서 샀는지 물어봤다. 그리고 가족에게 드릴 선물로 하나 사고 싶다고 말을 덧붙였다.“이건 친구가 선물한 거라 어디서 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노 사장님은 미안한 듯 말했다.고은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그냥 예뻐서 한번 여쭤본 거예요. 나중에 백화점 가서 한번 골라볼게요.”“아가씨는 참 효심이 깊구먼.”노 사장님은 칭찬을 몇 마디 건넨 뒤, 주문한 메뉴를 주방으로 가져갔다.“은서 씨 아버님께서 코담배병을 좋아하시나요? 선물하시려고요?”여재훈이 부드럽게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전 아버지가 없어요. 삼촌께 드리려는 거예요.”여재훈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그는 고은서를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기에 그녀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도 오늘 처음 들었다.“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여재훈은 곧바로 사과했다.고은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괜찮아요. 저희 가족끼리도 잘 지내고 있어요.”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여재훈은 고은서의 그 미소는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때 여재훈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전화번호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시은아, 왜 그래... 주사 맞는 게 당연히 좀 아프지. 하지만 주사를 안 맞으면 어떻게 낫겠어... 알겠으니깐 떼쓰지 말고, 의사 말 잘 들어.”전화를 끊고 나서 여재훈은 고은서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시은이가 아픈데 주사 맞기 싫다고 하네요.”고은서는 여시은의 이름에 반응이 컸다. 예전에 여시은에게 학대받다 죽은 쿠아가 떠올랐다. 그 기억 때문에 속이 불쾌해지고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그녀는 말없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여재훈은 고은서의 반감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그는 조심
여재훈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은서는 여시은이 아픈 시기가 참으로 절묘하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밖의 여론이 여시은에게 불리해서 고은서를 만나고 싶지 않았을 뿐일 것이다.요 며칠, 인터넷에서는 여시은과 관련된 뉴스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은서가 KK한테 도움을 요청한 것 외에도, 아마 곽승재도 뒤에서 힘을 써준 것 같았다.“원래 연회 다음 날에 시은이를 데리고 직접 사과드리려고 했는데, 며칠간 일이 좀 많아서 오늘로 미뤄졌어요.”여재훈은 이어 말했다.“오늘 아침에 갑자기 시은이가 열이 나서, 제가 혼자 찾아오게 됐습니다.”“은서 씨, 지난 일은 전부 시은이의 잘못입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여재훈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고은서는 담담하게 웃으며 대꾸했다.“재훈 씨의 사과는 저한테 너무 과분해요. 다만 저를 나쁜 사람으로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고은서가 지난번 여씨 가문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여재훈은 마음이 더욱 불편해져났다.“제가 도우미와 시은이의 말만 믿었네요. 시은이에게는 그 일에 대해 이미 훈계했고, 요 며칠 집에서 반성하고 있습니다.”고은서는 여시은이 그저 여재훈에게 보여주기 위해 반성하는 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결코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여재훈은 여시은을 여전히 굳게 믿고 있었고 그녀의 이중적인 모습에도 크게 실망하지 않은 듯했다.고은서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운전 중이던 여재훈도 잠시 침묵을 지켰다.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한적한 곳에 있는 개인 요리 식당에 도착했다.그 식당은 규모가 너무 크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는 엄청 좋았다.정원에는 다양한 희귀한 꽃들과 식물들이 놓여 있었고 작은 인공 폭포와 휴식용 테이블과 의자들도 마련되어 있었다.입구 쪽의 돌 테이블 위에는 하얀색의 통통한 고양이 두 마리가 게으르게 햇볕을 쬐고 있었다.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니 고은서의 마음이 한결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송민아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저번에 네가 너무 진지하게 말하길래, 나 진짜 겁먹었잖아.”고은서가 다시 한번 웃으며 잡담하듯 물었다.“민아야, 너 예전에 말했잖아. 너랑 네 오빠는 엄마가 다르다고. 그럼 네 아빠랑 네 오빠 엄마는 이혼하신 거야?”송민아는 사무실 밖을 슬쩍 확인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조용히 말했다.“몰래 엄마한테 물어봤는데, 우리 오빠 엄마는 아빠랑 혼인신고도 안 했대. 둘이 약혼까진 했는데, 무슨 이유인진 모르겠지만 오빠 엄마가 아빠랑 결혼하길 거절했대.”고은서는 눈썹을 찌푸렸다.‘설마 송민준의 엄마도 결혼 안 하고 그를 낳은 걸까?’지난번 고은서가 송민준과 함께 바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그가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면서 송민준은 어릴 때부터 보호만 받고 자라서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없다고 고은서한테 말한 기억이 있다.그때 그의 말투는 평소의 부드러운 말투가 아니라 약간의 조롱 섞인 느낌이었다. 마치 그의 어린 시절이 순탄치 않았다는 듯이.‘혹시 송민준의 어머니가 결혼도 안 하고 그를 낳아서 상처를 받은 탓일까?’“은서야, 이건 진짜 너한테만 말한 거니까, 절대 우리 오빠한테 묻지 마!”송민아가 신신당부하면서 말했다.“오빠는 이 얘기를 누구한테도 한 적 없어. 분명히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 우리 엄마가 말하는 데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더래.”“오빠는 혼자 살긴 해도 우리 엄마한테는 되게 예의 바른 거 있지. 나도 이 비밀 듣기 전까진 우리 둘이 같은 엄마 뱃속에서 태어난 줄 알았어.”고은서는 절대 이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도, 송민준에게 묻지도 않겠다고 약속했다.“민아야, 혹시 너희 엄마가 네 아빠의 다른 연애 상대에 대해 말한 적 있어?”고은서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참지 못하고 묻는 성격이었다.혹시라도 송민아의 어머니가 송민준 부모의 관계에 끼어든 거라면 송민아의 어머니가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그냥 어른들 옛날 연애사에 호기심이 생긴 거야. 만약 불쾌했
송민준의 단어 사용은 꽤 신박했다.그는 “어젯밤 그 일은, 네가 의도한 거야?”라고 물었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가 아니라.그러니까 송민준의 말뜻은 그가 어젯밤 일이 여시은을 고의로 함정에 빠뜨리려고 한 고은서의 계획이었음을 알고 있다는 건가?하지만 그 테라스는 비교적 한적했고 로마식 기둥이 시야를 가려 일반적으로는 사람들이 잘 알아채기 어려운 장소였다.고은서가 로비에서 넘어졌을 때 여시은은 빈 와인잔을 들고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이 상황을 봤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민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그런데 어떻게 송민준은 고은서가 여시은을 속이기 위해 고육지계를 쓴 걸 알아챈 걸까?고은서는 아예 직설적으로 물었다.“민준 오빠, 왜 그렇게 물어보는 거야? 설마 어젯밤 내가 넘어졌던 게 자작극이라고 생각한 거야?”그 말을 듣자 송민준은 웃으며 물었다.“은서야, 그런 뜻이 아니야. 난 그냥 그 농장 영상 말이야, 그걸 일부러 어젯밤 그 시점에 터뜨린 건지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알고 보니 송민준은 농장 영상을 묻고 있었던 것이다.그날 송민준의 컴퓨터에서 영상을 확인하고 난 후, 송민아가 고은서에게 이 영상을 바로 여재훈에게 전달할 거냐고 물었을 때, 고은서는 송민준을 경계해 일부러 연회 이후에 결정하겠다고 말했었다.하지만 실제로는 연회 그 자리에서 바로 그 영상을 공개해 버렸다.송민준이 의심하는 것도 정상이다.“맞아.”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원래는 어젯밤이 지나고 여재훈 씨를 따로 찾아가려고 했는데, 그 상황에서는 여시은이 그런 행동을 할 만한 동기를 증명하려면 그걸 꺼낼 수밖에 없었어.”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다른 뜻은 없었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네 선택이 맞아, 난 항상 널 지지할 거니깐.”그의 표정을 본 고은서는 확신했다. 송민준은 고은서가 아직 그를 경계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그의 성격상, 어젯밤 그녀가 계획적으로 움직였다는 것쯤은 쉽게 짐작했을 테니까. 하지만 송민준
박지연은 계속해서 불만을 터뜨렸다.“내가 보기엔 여시은은 태생이 못돼먹었어!”“이번에 그렇게 크게 당했으니 더더욱 널 원망할 거야. 너 조심 좀 해.”박지연이 걱정스럽게 당부했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각을 세우기로 마음먹었기에 여시은과 평화롭게 지낼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앞으로는 여시은을 더 철저히 경계할 것이다.“듣자 하니 곽승재가 내내 널 감싸줬다며? 너한테 점점 마음이 가는 모양이야.”박지연이 코웃음을 쳤다.어젯밤 곽승재가 고은서를 계속 도와줬던 건 사실이었다. 증거를 공개하자고 제안한것도 곽승재의 생각이었고 마지막에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줬다. 곽승재가 고은서에게 큰 도움을 준 셈이었다.하지만 고은서는 곽승재에 대한 이야기를 박지연과 깊이 나누지 않았다.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던 중 박지연이 고은서에게 뜬금없는 소문 하나를 전했다.“우리 과장님한테서 들었는데, 어제 혜린 씨가 다니는 병원에 조 여사님이 찾아가서 난리를 쳤대. 혜린 씨 남자관계가 복잡하다고, 다른 남자랑 팔짱 낀 사진까지 들고 와서 공개하면서 혜린 씨랑 그 자리에서 머리끄덩이 잡고 싸움 났대!”고은서는 지난번 소동 이후 손자를 중시하는 조수연이 한동안은 조용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고작 며칠 만에 또 난리를 친 거였다. 조수연의 전투력은 엄청 대단했다.“아니, 그러다 혜린 씨 혹시라도 애를 지우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고은서가 물었다.박지연은 말했다.“조 여사님 말로는 혜린 씨 뱃속 애가 자기 아들 애가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해서 혜린 씨를 끌고 가서 친자 확인하자고 했대. 그래서 둘이 몸싸움까지 벌어져서 이미지도 최악이라 혜린 씨는 한 달 정직당했어.”“혜린 씨 배속에 애가 온승준 씨 애가 아니라고? 그럼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그 집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거야? 그냥 진짜 애 아빠랑 결혼하면 될걸...”고은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소문엔 그 남자가 유부남에 애까지 있다고 하더라. 자세한 건 나도 몰라. 그냥 과장님이 흘린 얘기야.”
여시은은 여전히 여재훈의 다리를 붙잡고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그럼, 아빠가 생각하시는 해결 방법은 뭐예요?”여재훈은 여시은에게 홍보팀을 통해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공개 사과하고, 개인적으로 고은서에게 직접 진심으로 사과한 뒤 집에서 2주 동안 자숙하라고 말했다.“제 회사는 아직 개업식도 제대로 안 했는데 공개 사과를 하라뇨? 그럼 모든 사람들이 저를 웃음거리로 볼 거 아니에요!”여시은은 눈이 퉁퉁 부은 채 애원했다.“아빠, 저 은서한테 개인적으로 사과만 하면 안 돼요? 저도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사람들을 이끌기 힘든데, 공개적으로 사과하면 앞으로 누가 저를 믿고 따르겠어요?”“안 된다.” 여재훈은 단호하게 말했다.“이 일은 이미 파장이 커졌고 많은 사람들이 너를 지켜보고 있어. 그러니 모든 사람에게 확실하게 해명해야 한다.”“시은아, 잘못을 저지른 건 무서운 일이 아니야. 진심으로 뉘우치고 성실하게 사과하면 은서 씨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너에게 다시 기회를 줄 거다.”여재훈은 계속해서 말했다.“사람은 자기가 저지른 잘못에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 네가 잘못했는데 내가 덮어주면 그건 너를 망치는 거야. 그러니까 이 일은 이렇게 결정된 거다!”여시은은 그 말을 듣자 속으로 분노가 치밀었다.‘고은서를 그저 연못에 좀 빠지게 했을 뿐인데 이게 뭐 그렇게 큰일이라고 이렇게까지 일을 키운단 말인가?’‘공개 사과라니, 이제 예전처럼 모두에게 존경받고 칭찬받던 모습은 끝이라는 거잖아.비록 인터넷의 영상은 지워지더라도 사람들이 나에 대한 나쁜 인상은 지워지지 않을 거란 말이야!’오늘 밤 그렇게 많은 부유층과 정재계 인사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녀는 그들에게 최악의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해성에서 쌓아온 그녀의 완벽한 이미지가 단번에 무너진 셈이다.예전엔 그녀가 울기만 하면 여재훈은 안쓰러워하며 뭐든지 다 용서해 줬었다.‘지금은 무릎까지 꿇었는데도 아빠는 고은서 때문에 자신의 딸을 벌하려 한다니, 정말 나를 딸로 생각하긴 하는 걸까?’
여시은은 그 말을 듣자 눈이 시뻘게지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아빠, 제가 한 게 아니라니까요! 고은서가 일부러 저를 함정에 빠뜨린 거예요. 왜 저를 믿지 않으세요!”“시은아!”여재훈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난생처음으로 이토록 차가운 눈빛으로 딸에게 화를 냈다.“너는 어쩌다 이렇게 뻔뻔하게 거짓말만 하는 사람이 됐니!”“내가 사람을 시켜서 확인해 봤어. 연회장 CCTV 꺼놓은 거, 그거 네가 시킨 거더라.”여재훈은 딸을 억울하게 만들까 걱정돼 CCTV 관련 내용을 직접 조사했다.그런데 정말로 여시은이 꺼놓았던 것이었다.“네가 정말 은서 씨를 해치려는 의도가 없었다면 왜 CCTV를 미리 꺼놓은 거냐?”여재훈은 냉정한 태도로 물었다.여시은은 자신이 고은서의 계략에 걸려든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고은서는 일부러 도발적인 눈빛으로 여시은을 자극했고 곧바로 테라스로 이끌어냈던 것이다. 모두 여시은한테 엿 먹이려는 행동이었다!여시은은 고은서가 쿠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격동적으로 행동해 자신을 밀칠 거라 확신했었다.왜냐하면 고은서는 지난번엔 쿠아를 다치게 한 일로도 크게 충격을 받았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번엔 반전이 생겼다.고은서는 오히려 침착하게 반격했고 지난번 농장에서의 ‘물에 빠진 사건’ 증거까지 들고나왔다.일이 이렇게 커져 버린 이상 여시은은 더 이상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 걸 알았다.그녀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여재훈을 향해 소리쳤다.“맞아요! 저 고은서가 너무 꼴 보기 싫었어요! 왜 아빠는 맨날 걔만 칭찬하세요? 이러니깐 제가 질투 나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고은서한테 꼽 주고 싶었어요!”“어차피 이미 벌어진 일이에요. 전 잘못한 거 없어요! 후회도 안 해요!”“너!”여재훈은 손을 번쩍 들어 여시은의 뺨을 때리려 했지만, 그녀의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보고는 차마 때릴 수가 없었다.“시은아, 아빠가 평소에 너를 어떻게 가르쳤니? 사람은 자기 양심에 떳떳해야 하고 올곧게 살아야 한다고 했잖아! 근데 너는 어떻게 질투심에 눈이
이미숙은 유튜브 영상을 보고 있었는데, 바로 여시은이 고은서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겨 연못 가까이로 끌어당기는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그 영상은 누군가가 휴대전화로 촬영해 올린 것 같았고 화질이 너무 좋은 건 아니지만 전반 상황을 알아보는 데에는 충분했다.영상의 끝에는 고은서와 여시은의 얼굴을 비춘 장면도 담겨 있었다.다소 초라해진 고은서는 곽승재의 부축을 받으며 옆에 서 있었다. 여시은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눈빛엔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했다.그 와중에 영상의 제목이 더욱 눈길을 끌었다.[재벌가 아가씨, 두 얼굴의 진실!]“사모님, 저 여자는 어쩜 저리 독하대요. 이렇게 심하게 괴롭히다니. 누가 폭로해 줘서 다행이지! 이제 세상 사람들 다 그 여자 피해서 다니겠어요!”이미숙은 화가 난 듯 말했다.고은서는 이번 일이 오래 퍼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시은 뒤에는 여재훈이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번 일로 여시은이 보기 좋게 망신을 당했고, 여재훈 역시 자신의 딸이 그렇게 순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테니, 이번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고은서는 이미숙의 휴대전화 영상에 대뜸 ‘좋아요'를 눌렀다.한편, 여씨 가문에서.여시은 역시 유튜브 영상을 확인했다. 분노에 찬 그녀는 휴대전화를 바닥에 내던졌다.밖에 서 있는 박미화가 조심스럽게 말을 전했다.“시은 아가씨, 회장님께서 지금 바로 서재로 오시래요. 할 말씀이 있으시답니다.”이번이 박미화가 세 번째로 말을 전하러 온 것이었다.여시은은 곧바로 얼굴에 드리워진 분노와 짜증을 숨기고는 일부러 슬프고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방문을 열었다.박미화는 방안에서 반응이 없자 방문을 열려고 하였다. 때마침 여시은이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을 보고 급히 손을 거두며 사과했다.여시은은 박미화의 손을 움켜쥐었다. 조금 전에 분노로 인해 물어뜯은 날카로운 손톱이 그녀의 살을 깊이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여시은은 울먹이는 말투로 물었다.“미화 언니, 아빠가 나한테 화 많이 나신 거야? 나 어떻게 해야
얼마 지나지 않아 운전기사가 차를 라이트문 아파트 앞에 세웠다.고은서와 곽승재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고은서는 샤워하기 위해 자신의 방으로 직행했고 곽승재는 거실에 남았다.샤워를 마치고 나온 고은서는 의외의 광경을 목격했다. 곽승재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 한 잔이 놓여 있었다.“왜 또 왔어? 할 말 있어?”고은서가 물었다.곽승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논의할 게 있어서. 그전에 이 콜라 생강차부터 마셔. 아주머니께서 특별히 준비하신 거야.”“사모님, 콜라 생강차는 감기 예방에도 효과적이거든요. 어서 드세요!”이미숙이 차를 가져오며 말했다.고은서는 감기에 걸릴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녀는 잔을 들어 올리더니 이상한 듯 물었다.“아줌마, 제가 방금 들어온 걸 보지도 못하셨을 텐데 어떻게 제가 감기 걸릴 줄 아시고 미리 차를 준비하셨어요?”이미숙의 눈가에는 잠시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곽승재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내가 알려줬어. 일단 마셔.”고은서는 고개를 숙여 생강차를 내려다 볼뿐 이미숙의 표정 변화를 주의 깊게 보지 못했다.물론 곽승재의 눈에 비친 기대감도 보지 못했다.생강차의 냄새를 맡아보니 생강 향이 꽤 진했다.고은서는 생강차를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콜라의 단맛과 생강의 톡 쏘는 맛이 어우러져 생각보다 맛이 나쁘지 않았다.“맛이 어때요?”이미숙이 물었다.“좋네요. 그런데 오늘은 생강을 좀 많이 넣으신 것 같네요. 예전에 만드신 것보다 더 매운데요.”이미숙은 잠시 망설이다가 급히 대답했다.“생강 양을 조절하지 못했네요. 주의할게요.”고은서는 더는 따지지 않고 다시 마시려던 참이었는데 곽승재가 말을 건넸다.“맛이 별로면 안 마셔도 돼.”고은서는 그를 흘겨보았다.“누가 맛없다고 했어? 아줌마가 정성스럽게 준비해주신 건데 끝까지 마셔야지.”“사모님, 도련님과 얘기 나누세요. 저는 할 일이 남아서 먼저 가보겠습니다.”이미숙은 두 사람의 언쟁을 피하려는 듯 급히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