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모인지도 꽤 된 것 같은데 조금 이따 같이 한잔하러 가지 않을래?”육현석이 시무룩해 하며 물었다.그러나 곽승재는 컴퓨터 모니터를 보면서 그의 말에 응대하지도 않았다.이를 본 육현석은 책상 변두리에 걸터앉으면서 컴퓨터 모니터를 손으로 가렸다.“형, 내 말 들었어?”곽승재는 덤덤한 눈빛으로 그를 힐끗 째려보며 말했다.“이 시간에 지연 씨랑 같이 데이트나 하지 그래. 왜 나한테 와서 존재감을 찾는 거야?”“형이 걱정되어서 그러지. 그리고 그 인플루언서와는 대체 무슨 사이야? 스캔들이 퍼진지 며칠째인데 아직도 그대로냐고.”곽승재는 차를 마시면서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형, 민시후가 이젠 위협이 되진 않지만 형수님을 좋아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잖아.”육현석이 일부러 고은서에 관해 말했다.“지연이한테서 들었는데 사업 파트너 중에 여러 명이 형수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대. 심지어 쉴 새 없이 형수님 회사로 선물까지 보낸다고 하던데. 그리고 그 잘생긴 연예인 있잖아. 이틀 후면 해성으로 돌아온다고 형수님한테 만나자고 매일 문자가 온대.”육현석은 이어 자신의 결론을 보태었다.“쓸데없는 일을 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진짜 형수님을 빼앗길 수도 있어.”“나랑 무슨 상관인데?”곽승재의 눈빛이 삽시에 어두워졌다.“불안하면... 뭐? 방금 뭐라고 했어?”육현석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형, 나 지금 고은서에 관해 얘기하고 있는 거야. 형이 재혼하고 싶어 미치는 그 전처 말이야. 그런데 지금 형이랑 무슨 상관이냐고 말한 거야?”육현석은 말하면서 곽승재가 열이라도 나는지 그의 이마를 짚어보려고 했다.곽승재는 성가시다는 듯 그의 손을 뿌리치면서 냉담한 표정으로 말했다.“이후로 고은서에 관한 얘기는 하지 않아도 돼. 나가. 나 바쁘니까.”“...”육현석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형은 왜 또 자존심을 세우고 난리야? 형수님이랑 재혼하기 싫은 거야?’육현석은 그 영문을 파헤치기 위해 한참 동안 떼를 썼지만
고은서를 쿠아를 여시은에게 돌려주며 말했다.“쿠아가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을 구해주고 정성을 다해 보살펴준 시은 씨겠죠.”“그런데 모든 일이 정성을 다했다고 이뤄지는 건 아니잖아요. 쿠아가 저보다 은서 씨를 더 잘 따르는 것 같은데요.”여시은이 쿠아의 머리를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쿠아는 몸을 옹크리고 긴장한 듯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그래서 부럽다는 거예요. 일도 잘하고 매력적이고 심지어 동물들도 은서 씨를 좋아하잖아요.”여시은은 전에도 이와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고은서는 그녀가 그저 예의를 차리는 거라고 생각하면서 똑같이 칭찬을 해줬었다.“저는 시은 씨가 더 부러운데요. 집안도 좋고 자식을 무척 사랑해주는 아버지도 있잖아요. 시은 씨야말로 인생 승자죠.”여시은은 계속 쿠아를 어루만지면서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진짜 인생 승자인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죠.”고은서가 어리둥절해 하고 있을 때 여시은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을 이어갔다.“아버지도 언젠간 저를 떠나게 될 거잖아요. 게다가 저는 또 할 줄 아는 것도 별로 없는데 나중에 의지할 곳 하나 없을까 봐 무서워요.”고은서는 문뜩 민시후가 전에 여씨 가문 방계들이 현재 가주 자리를 호시탐탐하고 있는데 여재훈이 곽승재를 사위로 들이고 싶은 이유가 아마 그의 능력 때문일 거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그런데 나중에 여씨 가문이 어떻게 되든 여시은은 여전히 지금처럼 부유하게 살 수 있을 텐데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니지.’“어머. 갑자기 저도 모르게 이런 얘기가 나왔네요.”여시은이 이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은서 씨, 곧 밥 먹을 시간인데 우리 같이 나가 먹지 않을래요?”고은서가 아직 할 일이 남았다고 사양하려고 할 때 여시은이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은서 씨, 아무리 바빠도 밥은 챙겨 먹어야죠. 원래 오늘 아빠가 돌아오신다고 했는데 갑자기 일이 생겨서 못 오게 되었어요. 그래서 저한테 친구랑 같이 놀라고 하던데 제가 해성에 친구가 별로 없는 걸 은서 씨도
여시은은 사과하다가 말고 깜짝 놀라했다.고은서가 다가가 확인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룸 안에는 곽승재가 앉아 있었는데 그의 옆에는 마재경도 함께 있었다.도착한 지 얼마 안 되는지 웨이터가 마침 음식을 올리고 있었다.그녀의 시선을 느낀 곽승재가 고개를 들고 덤덤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곽 대표님, 여기서 이렇게 만나게 되네요. 밥 먹으러 오신 건가요?”여시은이 의외라는 듯 먼저 말을 꺼냈다.“재경이가 이 레스토랑의 음식이 맛있다고 해서 한 번 먹어보러 온 거예요.”곽승재가 담담하게 답했다.옆에 있던 마재경이 부끄럽다는 듯 나긋하게 웃어 보였다.“고마워요, 대표님.”“미리 예약하고 오신 거예요? 우린 만석이라고 좀 기다려야 된다던데.”여시은이 부러워하며 물었다.“괜찮으시다면 합석하실래요?”마재경이 곽승재를 힐끔 보더니 예의 바르게 물었다.여시은은 문 쪽에 서있는 고은서를 보면서 물었다.“은서 씨, 어때요?”마재경은 그제야 고은서를 발견하고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그녀를 안으로 초대했다.“은서 씨,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얼른 들어오세요.”‘밥 먹으러 왔는데 왜 하필 곽승재랑 부딪치는 거야?’고은서는 사실 별로 합석하고 싶지 않았다. 반면 음식 냄새를 맡은 여시은은 약간 흥분해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심지어 고은서의 손을 잡아당기면서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다.“밥만 같이 먹는 건데 대표님도 괜찮으시죠?”“들어오세요.”곽승재가 무표정을 얼굴을 하고 답했다.이렇게 된 이상 고은서는 더는 머뭇거리지 않고 여시은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네모난 나무 식탁 앞에 곽승재가 센터 자리에 앉고 마재경은 그의 왼쪽 자리에 앉아 있었고 고은서는 곽승재의 맞은 켠 자리에 앉았다.여시은 아주 자연스럽게 곽승재의 오른쪽에 있는 자리에 앉으면서 쿠아를 잠시 웨이터에게 부탁했다.사람이 많아진 탓에 곽승재는 웨이터를 불러 음식을 몇 가지 더 주문했다.“와, 다 매운 음식이네요. 은서 씨, 괜찮겠어요?”여시은이 관심하는 말투로 물었다
뚝배기 안에 있던 우유는 몹시 뜨거웠는데 여시은이 국자를 떨어뜨리면서 우유가 그녀의 손에 튕겼다.여시은은 순간 아악 비명을 지르면서 들고 있던 그릇을 옆으로 팽개쳤다.그러자 뜨거운 우유가 마침 고은서와 마재경의 손등에 튕겼다.두 사람은 동시에 갑자기 몰려오는 고통에 신음소리를 내면서 손을 움켜쥐었다.“괜찮아?”곽승재가 벌떡 일어서면서 고은서의 손을 잡았다.바로 이때, 꽈당하는 소리와 함께 마재경이 의자와 같이 뒤로 넘어졌다.뚝배기랑 더 가까이 있었던 마재경이 사실상 더 심하게 데였는데 방금 튕겨오는 우유를 피하면서 실수로 뒤로 고꾸라졌던 것이다.그러나 곽승재는 그녀를 관심할 겨를이 없었다.그는 이미 식은 차를 빨갛게 데인 고은서의 손등에 부으면서 옆에 넋을 놓고 있는 웨이터를 향해 호통쳤다.“지금 멍해서 뭐 하고 있는 거예요? 얼른 찬물을 가져오지 않고!”“네네.”웨이터가 황급히 찬물을 가지러 가고 여시은은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된 듯했다.“죄송해요. 제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은서 씨, 괜찮아요?”여시은이 긴장해 하며 물었다.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밀려오는 고통 때문에 저도 모르게 손을 거두어들이려고 했다. 그러나 곽승재가 차가운 목소리로 그녀를 제지했다.“움직이지 마.”“마재경 씨, 왜 넘어지셨어요. 얼른 일어나세요.”여시은이 마재경 곁으로 다가가며 말했다.“앗, 재경 씨도 데었어요? 죄송해요.”여시은이 자책하면서 사과했다.그녀도 곽승재를 따라 식은 찻물로 임시 처치를 해주려고 했는데 쓸 수 있는 찻물은 이미 그가 다 써버린 후였다.“괜찮아요. 웨이터가 곧 올 거예요.”여시은이 마재경을 위안했다.마재경은 얼굴이 사색이 되어 여시은의 부축하에 힘겹게 일어섰다.웨이터는 이내 찬물을 가져왔고 이어 상황을 처리하러 온 매니저가 사과하며 나타났다.그와 동시에 다른 한 담당자가 화상 연고를 들고 룸으로 들어 왔다.곽승재는 눈살을 찌푸린 채 고은서를 위해 연고를 발라주었다.행여나 그녀가 아파할까 봐 애써 힘
고은서는 곽승재의 숨결이 가빠진 걸 느낄 수 있었다.잠시 후, 곽승재는 콧방귀를 뀌면서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마재경을 바라보았다.“가자. 병원으로.”그제야 관심을 받은 마재경은 가엽게 눈물을 흘리면서 입을 열었다.“대표님, 저 괜찮아요. 별로 안 아파요.”“그래도 안심하게 검사받아.”곽승재는 말하면서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마재경은 머뭇거리면서 고은서를 힐끔 보더니 이내 곽승재를 향해 가까이 다가가며 그의 팔짱을 꼈다.키큰 곽승재 옆에 서있는 마재경의 뒷모습이 유독 더 작아보였다.고은서는 두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은서 씨도 병원에 가서 검사 받아보는게 어때요?”여시은이 관심하는 듯한 어투로 말했다.고은서는 이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리면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여시은 씨, 곽승재랑 마재경 씨가 이 레스토랑에 있다는 걸 알고 일부러 이곳에 오자고 한 거죠?”전에 노숙자 일과 마찬가지로 우연이라고 해도 너무 수상했다.‘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여시은이 그 현장에 있는다는 게 말이 돼? 한두 번도 아니고. 우연이라고 해도 이런 우연이 어디 있어?’여시은은 멈칫하더니 이내 울먹이면서 물었다.“은서 씨,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저는 그저 여기 음식이 맛있다고 들어서 먹어보러 온 것뿐이에요. 저도 이곳에서 곽 대표님을 만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여시은은 마치 정말 상처라도 입은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다치게 한 건 정말 죄송해요. 이럴 줄 알았더라면 합석하는 게 아니었는데... 다른 레스토랑으로 가든 얌전히 자리가 나길 기다리면 될 것을.”고은서는 상심해 하는 여시은을 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우연이 아니라면 대체 왜 그런 거지?’“여시은 씨, 곽승재 비서를 하러 판주에 들어간 것도 곽승재한테 호감이 있어서죠?”고은서가 직설적으로 자신의 의문을 내뱉었다.여시은은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답했다.“확실히 능력이 뛰어나고 우리 아빠도 마음에 들어 하면서 우리
“지연아, 차라리 연예 기자를 하는 건 어때? 간호사보다 더 잘 어울릴 것 같은데.”박지연은 자신을 향해 장난치는 고은서를 보며 전혀 화내지 않았다.“안 될 일은 없지. 그럼 우선 날 위해 엔터테인먼트 하나를 매수해주지 않을래? 그리고 저기요, 왜 제 물음을 피하시는 거죠?”박지연은 끝까지 캐물을 생각인 것 같았다.“아무렇지도 않거든. 됐지?”고은서가 그녀를 째려보며 답했다.“그만하고 나 손 아파.”그녀는 화제를 돌리면서 박지연을 향해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박지연은 눈이 휘둥그레서 황급히 어떻게 다친 거냐고 물었다.고은서는 그제야 밥 먹을 때 있었던 일을 그녀에게 알려주었다.“그러니까 그 인플루언서가 병원을 간 게 화상을 입어서란 말이지? 그래서 아까 놀라지도 않았던 거고.”그러나 박지연은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그 여시은이라는 사람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나도 똑같은 생각을 했었어. 그런데 그럴 이유가 뭔지 도무지 모르겠어.”박지연은 이내 이미숙한테 연고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면서 그녀의 말에 답했다.“그게 왜 이해가 안 돼. 곽승재가 그 인플루언서랑 가까이 지내는 걸 알고 일부러 너를 이용해서 두 사람을 데어놓으려는 거겠지. 상대방한테 곽승재가 좋아하는 사람은 너라고 주제를 알라고 경고하는 거잖아. 그럼 그 인플루언서도 자연스럽게 널 질투하게 되는 거지. 그렇게 되면 여시은이 어부지리로 모든 이득을 갖게 되는 거고.”박지연의 설명을 들은 고은서는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음식을 주문할 때랑 밥을 먹으면서까지 여시은이 은근슬쩍 곽승재가 아직도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건 확실히 느껴졌어. 특히 그 우유가 튕길 때 곽승재의 반응이 그 모든 게 사실이라고 증명하는 셈이 되었지. 만약 여시은이 일부러 마재경의 질투심을 일으키려 한 거라면 목적을 이루게 된 거네.’“그런데 여시은이 마음에 다른 여자를 둔 남자는 싫다고 했는데.”고은서는 아직도 어리둥절했다.‘곽승재를 좋아하지 않는 거라면 왜 자꾸 그를 시험하려 하는
“괜찮아. 급한 일도 없고 한데 그냥 쉴 겸 기다린 거야.”주인혁은 말하면서 아주 정교하게 포장된 선물 하나를 꺼내 고은서에게 건네주었다.“누나, 이거 내가 주는 선물이야. 개업한 거도 축하하고 해성 10대 청년상을 받은 것도 축하하는 의미에서 주는 선물. 비록 조금 늦었지만 양해 부탁해.”고은서는 선물을 받아 열어보았다.그 안에는 옥으로 된 평안 목걸이가 들어 있었는데 빨간 줄로 장식되어 있었고 불빛 아래에서 아주 영롱한 빛을 선보이고 있었다.축하 선물이라기엔 너무 귀중해 보였다.“촬영장 근처에 아주 영험한 절이 하나 있는데 누나를 위해 내가 가서 직접 받아온 거야.”주인혁이 약간 쑥스러워하며 말했다.“누나가 계속 평안하게 행복하게 살았으면 해서.”전에 매번 그와 연락할 때마다 고은서는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아마 그 이유 때문에 나한테 이걸 주는 거겠지.’고은서는 그의 정성에 감동을 받았다.“고맙게 받을게. 너무 마음에 들어. 가자. 누나가 밥 사줄게.”그러나 주인혁은 갑자기 그녀의 손등에 있는 상처를 보고 다급해 하며 물었다.“누나, 손등은 왜 이래? 다쳤어?”어제 데인 상처에 연고를 발랐다고 하지만 하루아침에 다 나을 리가 없었다.물집은 또 어느새 터졌는지 주변이 새하얗게 되면서 물집 아래의 빨간 살이 드러났다.확실히 보는 사람이 놀랄만한 비주얼이었다.“괜찮아. 약을 바르면 돼.”고은서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그럼 안 되지. 의사한테 가서 보여야지. 누나, 나랑 같이 병원 가자.”주인혁이 병원을 가자고 고집부렸다.고은서는 이까짓 상처로 병원까지 갈 필요가 없다고 느꼈지만 태도가 결연한 주인혁을 보면서 밥 먹으러 가는 도중에 의원에 들러보려고 했다.주인혁이 워낙 인기가 많아서 행여나 기자들한테 찍힐까 봐 고은서는 기사한테 주차장에서 대기하라 하고 곧장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그러나 엘리베이터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송민준을 만났다.그는 캐쥬얼한 옷차림을 한 채 손에 간식거리를 들고 있었는데 송민아를 찾으
하강하는 엘리베이터 안에는 두 사람 외에 아무도 없었다.고은서는 희망으로 가득한 주인혁의 두 눈을 마주 보았다.이 상황에서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기라도 하면 그가 오랫동안 참아왔던 속마음을 토로할 것만 같았다.주인혁이 단 한 번도 자신의 마음을 명확히 말한 적이 없었지만 고은서는 그가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고은서는 항상 주인혁을 진취심이 있는 남동생으로 여기면서 그와 친구 사이로 지내는 반감하지 않았고 그가 큰 성과를 이룩하길 바랐다.그러나 그뿐이었다.더 이상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고은서는 이내 그의 뜻을 못 알아들은 것처럼 연기했다.“서로 잘 맞는 여자친구를 찾아서 함께 노력해 나가면 좋지 않아?”주인혁은 입술을 달싹이더니 끝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두 사람은 주차장에 도착했다.대화도 자연스럽게 중단되었다.차에 오른 후 고은서는 기사에게 근처에 있는 진료소로 가달라고 했다.당직을 서는 의사는 한 중년여성이었는데 이 나이대의 사람들은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의사는 그녀의 손등을 보자마자 자신의 몸을 아낄 줄 모른다고 피부가 이렇게 될 때까지 왜 처치하지 않았냐면서 고은서를 꾸짖었다.그리고 걱정하는 눈빛으로 고은서를 바라보고 있는 주인혁을 보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청년, 여자친구를 어떻게 보살핀 거야?”“제 남동생이에요.”고은서가 다급하게 부인했다.“얘 탓이 아니에요. 아침저녁으로 연고도 바르고 해서 괜찮을 줄 알고 의사를 보러 가지 않았거든요.”“화상을 그렇게 쉽게 넘어가서는 안 돼. 처치 안 했다가 나중에 상처가 감염이라도 되면 어쩌려고.”의사는 고은서의 상처를 처치해주고 주인혁에게 당부했다.“돌아가서 누나를 잘 챙겨. 그래야 미래의 여자친구도 행복할 거 아니야.”주인혁은 얼굴이 새빨개서 고개를 끄덕였다.의사는 고은서를 위해 약을 발라주고 또 몇 가지 소염제와 바르는 약을 처방해주었다.마침 점심시간이라 약사들이 밥 먹으러 간 탓에
박지연은 계속해서 불만을 터뜨렸다.“내가 보기엔 여시은은 태생이 못돼먹었어!”“이번에 그렇게 크게 당했으니 더더욱 널 원망할 거야. 너 조심 좀 해.”박지연이 걱정스럽게 당부했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각을 세우기로 마음먹었기에 여시은과 평화롭게 지낼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앞으로는 여시은을 더 철저히 경계할 것이다.“듣자 하니 곽승재가 내내 널 감싸줬다며? 너한테 점점 마음이 가는 모양이야.”박지연이 코웃음을 쳤다.어젯밤 곽승재가 고은서를 계속 도와줬던 건 사실이었다. 증거를 공개하자고 제안한것도 곽승재의 생각이었고 마지막에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줬다. 곽승재가 고은서에게 큰 도움을 준 셈이었다.하지만 고은서는 곽승재에 대한 이야기를 박지연과 깊이 나누지 않았다.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던 중 박지연이 고은서에게 뜬금없는 소문 하나를 전했다.“우리 과장님한테서 들었는데, 어제 혜린 씨가 다니는 병원에 조 여사님이 찾아가서 난리를 쳤대. 혜린 씨 남자관계가 복잡하다고, 다른 남자랑 팔짱 낀 사진까지 들고 와서 공개하면서 혜린 씨랑 그 자리에서 머리끄덩이 잡고 싸움 났대!”고은서는 지난번 소동 이후 손자를 중시하는 조수연이 한동안은 조용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고작 며칠 만에 또 난리를 친 거였다. 조수연의 전투력은 엄청 대단했다.“아니, 그러다 혜린 씨 혹시라도 애를 지우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고은서가 물었다.박지연은 말했다.“조 여사님 말로는 혜린 씨 뱃속 애가 자기 아들 애가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해서 혜린 씨를 끌고 가서 친자 확인하자고 했대. 그래서 둘이 몸싸움까지 벌어져서 이미지도 최악이라 혜린 씨는 한 달 정직당했어.”“혜린 씨 배속에 애가 온승준 씨 애가 아니라고? 그럼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그 집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거야? 그냥 진짜 애 아빠랑 결혼하면 될걸...”고은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소문엔 그 남자가 유부남에 애까지 있다고 하더라. 자세한 건 나도 몰라. 그냥 과장님이 흘린 얘기야.”
여시은은 여전히 여재훈의 다리를 붙잡고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그럼, 아빠가 생각하시는 해결 방법은 뭐예요?”여재훈은 여시은에게 홍보팀을 통해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공개 사과하고, 개인적으로 고은서에게 직접 진심으로 사과한 뒤 집에서 2주 동안 자숙하라고 말했다.“제 회사는 아직 개업식도 제대로 안 했는데 공개 사과를 하라뇨? 그럼 모든 사람들이 저를 웃음거리로 볼 거 아니에요!”여시은은 눈이 퉁퉁 부은 채 애원했다.“아빠, 저 은서한테 개인적으로 사과만 하면 안 돼요? 저도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사람들을 이끌기 힘든데, 공개적으로 사과하면 앞으로 누가 저를 믿고 따르겠어요?”“안 된다.” 여재훈은 단호하게 말했다.“이 일은 이미 파장이 커졌고 많은 사람들이 너를 지켜보고 있어. 그러니 모든 사람에게 확실하게 해명해야 한다.”“시은아, 잘못을 저지른 건 무서운 일이 아니야. 진심으로 뉘우치고 성실하게 사과하면 은서 씨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너에게 다시 기회를 줄 거다.”여재훈은 계속해서 말했다.“사람은 자기가 저지른 잘못에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 네가 잘못했는데 내가 덮어주면 그건 너를 망치는 거야. 그러니까 이 일은 이렇게 결정된 거다!”여시은은 그 말을 듣자 속으로 분노가 치밀었다.‘고은서를 그저 연못에 좀 빠지게 했을 뿐인데 이게 뭐 그렇게 큰일이라고 이렇게까지 일을 키운단 말인가?’‘공개 사과라니, 이제 예전처럼 모두에게 존경받고 칭찬받던 모습은 끝이라는 거잖아.비록 인터넷의 영상은 지워지더라도 사람들이 나에 대한 나쁜 인상은 지워지지 않을 거란 말이야!’오늘 밤 그렇게 많은 부유층과 정재계 인사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녀는 그들에게 최악의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해성에서 쌓아온 그녀의 완벽한 이미지가 단번에 무너진 셈이다.예전엔 그녀가 울기만 하면 여재훈은 안쓰러워하며 뭐든지 다 용서해 줬었다.‘지금은 무릎까지 꿇었는데도 아빠는 고은서 때문에 자신의 딸을 벌하려 한다니, 정말 나를 딸로 생각하긴 하는 걸까?’
여시은은 그 말을 듣자 눈이 시뻘게지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아빠, 제가 한 게 아니라니까요! 고은서가 일부러 저를 함정에 빠뜨린 거예요. 왜 저를 믿지 않으세요!”“시은아!”여재훈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난생처음으로 이토록 차가운 눈빛으로 딸에게 화를 냈다.“너는 어쩌다 이렇게 뻔뻔하게 거짓말만 하는 사람이 됐니!”“내가 사람을 시켜서 확인해 봤어. 연회장 CCTV 꺼놓은 거, 그거 네가 시킨 거더라.”여재훈은 딸을 억울하게 만들까 걱정돼 CCTV 관련 내용을 직접 조사했다.그런데 정말로 여시은이 꺼놓았던 것이었다.“네가 정말 은서 씨를 해치려는 의도가 없었다면 왜 CCTV를 미리 꺼놓은 거냐?”여재훈은 냉정한 태도로 물었다.여시은은 자신이 고은서의 계략에 걸려든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고은서는 일부러 도발적인 눈빛으로 여시은을 자극했고 곧바로 테라스로 이끌어냈던 것이다. 모두 여시은한테 엿 먹이려는 행동이었다!여시은은 고은서가 쿠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격동적으로 행동해 자신을 밀칠 거라 확신했었다.왜냐하면 고은서는 지난번엔 쿠아를 다치게 한 일로도 크게 충격을 받았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번엔 반전이 생겼다.고은서는 오히려 침착하게 반격했고 지난번 농장에서의 ‘물에 빠진 사건’ 증거까지 들고나왔다.일이 이렇게 커져 버린 이상 여시은은 더 이상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 걸 알았다.그녀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여재훈을 향해 소리쳤다.“맞아요! 저 고은서가 너무 꼴 보기 싫었어요! 왜 아빠는 맨날 걔만 칭찬하세요? 이러니깐 제가 질투 나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고은서한테 꼽 주고 싶었어요!”“어차피 이미 벌어진 일이에요. 전 잘못한 거 없어요! 후회도 안 해요!”“너!”여재훈은 손을 번쩍 들어 여시은의 뺨을 때리려 했지만, 그녀의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보고는 차마 때릴 수가 없었다.“시은아, 아빠가 평소에 너를 어떻게 가르쳤니? 사람은 자기 양심에 떳떳해야 하고 올곧게 살아야 한다고 했잖아! 근데 너는 어떻게 질투심에 눈이
이미숙은 유튜브 영상을 보고 있었는데, 바로 여시은이 고은서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겨 연못 가까이로 끌어당기는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그 영상은 누군가가 휴대전화로 촬영해 올린 것 같았고 화질이 너무 좋은 건 아니지만 전반 상황을 알아보는 데에는 충분했다.영상의 끝에는 고은서와 여시은의 얼굴을 비춘 장면도 담겨 있었다.다소 초라해진 고은서는 곽승재의 부축을 받으며 옆에 서 있었다. 여시은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눈빛엔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했다.그 와중에 영상의 제목이 더욱 눈길을 끌었다.[재벌가 아가씨, 두 얼굴의 진실!]“사모님, 저 여자는 어쩜 저리 독하대요. 이렇게 심하게 괴롭히다니. 누가 폭로해 줘서 다행이지! 이제 세상 사람들 다 그 여자 피해서 다니겠어요!”이미숙은 화가 난 듯 말했다.고은서는 이번 일이 오래 퍼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시은 뒤에는 여재훈이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번 일로 여시은이 보기 좋게 망신을 당했고, 여재훈 역시 자신의 딸이 그렇게 순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테니, 이번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고은서는 이미숙의 휴대전화 영상에 대뜸 ‘좋아요'를 눌렀다.한편, 여씨 가문에서.여시은 역시 유튜브 영상을 확인했다. 분노에 찬 그녀는 휴대전화를 바닥에 내던졌다.밖에 서 있는 박미화가 조심스럽게 말을 전했다.“시은 아가씨, 회장님께서 지금 바로 서재로 오시래요. 할 말씀이 있으시답니다.”이번이 박미화가 세 번째로 말을 전하러 온 것이었다.여시은은 곧바로 얼굴에 드리워진 분노와 짜증을 숨기고는 일부러 슬프고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방문을 열었다.박미화는 방안에서 반응이 없자 방문을 열려고 하였다. 때마침 여시은이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을 보고 급히 손을 거두며 사과했다.여시은은 박미화의 손을 움켜쥐었다. 조금 전에 분노로 인해 물어뜯은 날카로운 손톱이 그녀의 살을 깊이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여시은은 울먹이는 말투로 물었다.“미화 언니, 아빠가 나한테 화 많이 나신 거야? 나 어떻게 해야
얼마 지나지 않아 운전기사가 차를 라이트문 아파트 앞에 세웠다.고은서와 곽승재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고은서는 샤워하기 위해 자신의 방으로 직행했고 곽승재는 거실에 남았다.샤워를 마치고 나온 고은서는 의외의 광경을 목격했다. 곽승재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 한 잔이 놓여 있었다.“왜 또 왔어? 할 말 있어?”고은서가 물었다.곽승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논의할 게 있어서. 그전에 이 콜라 생강차부터 마셔. 아주머니께서 특별히 준비하신 거야.”“사모님, 콜라 생강차는 감기 예방에도 효과적이거든요. 어서 드세요!”이미숙이 차를 가져오며 말했다.고은서는 감기에 걸릴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녀는 잔을 들어 올리더니 이상한 듯 물었다.“아줌마, 제가 방금 들어온 걸 보지도 못하셨을 텐데 어떻게 제가 감기 걸릴 줄 아시고 미리 차를 준비하셨어요?”이미숙의 눈가에는 잠시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곽승재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내가 알려줬어. 일단 마셔.”고은서는 고개를 숙여 생강차를 내려다 볼뿐 이미숙의 표정 변화를 주의 깊게 보지 못했다.물론 곽승재의 눈에 비친 기대감도 보지 못했다.생강차의 냄새를 맡아보니 생강 향이 꽤 진했다.고은서는 생강차를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콜라의 단맛과 생강의 톡 쏘는 맛이 어우러져 생각보다 맛이 나쁘지 않았다.“맛이 어때요?”이미숙이 물었다.“좋네요. 그런데 오늘은 생강을 좀 많이 넣으신 것 같네요. 예전에 만드신 것보다 더 매운데요.”이미숙은 잠시 망설이다가 급히 대답했다.“생강 양을 조절하지 못했네요. 주의할게요.”고은서는 더는 따지지 않고 다시 마시려던 참이었는데 곽승재가 말을 건넸다.“맛이 별로면 안 마셔도 돼.”고은서는 그를 흘겨보았다.“누가 맛없다고 했어? 아줌마가 정성스럽게 준비해주신 건데 끝까지 마셔야지.”“사모님, 도련님과 얘기 나누세요. 저는 할 일이 남아서 먼저 가보겠습니다.”이미숙은 두 사람의 언쟁을 피하려는 듯 급히 자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곽승재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그녀는 친구에게 부탁해 적절한 시기에 감시 카메라를 끊어놓도록 준비해두었다.하지만 여시은이 먼저 참지 못하고 로비의 카메라를 꺼버린 것이다.고은서가 감히 감시 카메라의 확인을 제안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만의 준비를 했을 뿐만 아니라 여시은 역시 감시 카메라를 조작할 것이라는 점까지 예측했다.“만약 여시은이 참고 끝까지 널 찾지 않았다면 어떻게 할 작정이었어?”곽승재가 물었다.고은서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개업식이 끝난 후 대형 스크린에 공개할 계획이었어.”곽승재가 눈썹을 추켜세웠다.“네가 앞서 백스테이지 주위를 둘러본 것도 동영상을 공개할 준비를 했던 거야?”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여시은이 일부러 나를 물에 빠뜨리고 향수로 나를 함정에 빠뜨렸을 뿐만 아니라 쿠아까지 학대했어. 내가 당연히 가만히 있을 수 없지! 그리고 시은이가 인내심을 가졌다고 해도 난 개업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을 거야.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러지 못했지. 시은이는 결국 참지 못하고 테라스에서 쿠아의 죽음을 언급하며 나를 자극했고 다시 같은 수법을 쓸 참이었던 거지. 나는 그저 시은이가 파려던 함정을 그대로 돌려준 것뿐이야.”곽승재는 고은서가 준비를 해왔을 거라 예상했지만 이런 고육지계를 공개적인 자리에서 펼칠 줄은 몰랐다.게다가 그녀의 연기는 너무나도 실감 났다.고은서가 바닥에 넘어져 흐트러진 모습을 보는 순간 곽승재는 정말로 여시은의 소행일 것으로 생각할 정도였다.고은서는 곽승재의 생각을 읽었는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가여운 척 한 거 아니야. 백유미와 여시은이라는 고수들 덕분에 나도 한 수 배웠을 뿐이지.”백유미의 과거 행동을 떠올린 곽승재는 가슴을 죄는 듯한 자책감이 밀려왔다.곽승재는 진지하게 사과했다.“은서야, 미안해.”무심코 흘린 말에 곽승재가 사과하는 모습을 본 고은서는 잠시 당황했다.“사과할 필요는 없어. 당신도 백유미 씨에게 속았을 뿐이잖아. 어쨌든 ‘목숨의 은인'
“시은아!”영상 속 장면에 충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재훈은 걱정된 목소리로 딸을 불렀다. 그리고 뒤이어 멀리 있는 부하들에게 명령했다.“어서 따라가서 시은이를 보호해! 무슨 일이라도 생기게 해서는 안 돼!”부하들이 여시은의 뒤를 쫓아 나간 뒤 여재훈은 스크린을 힐끗 바라보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고은서에게 사과했다.“제가 딸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이 일은 제가 시은에게 직접 확인한 뒤 여은서 씨께 해명해 드리겠습니다.”고은서는 목적을 달성했으니 더는 그곳에 머물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는 이유로 자리를 떠나려 했다.“여 대표님, 제가 은서 씨를 모셔다드리겠습니다.”곽승재가 말했다.송민준 역시 함께 가겠다고 전했다.여재훈은 당연히 거절하지 않았다. 개업식에서 이런 소동을 일으킨 이상 누구라도 축하할 마음이 없을 터였다.고은서 일행이 떠나자 여재훈은 참석자들에게 직접 사과하며 홍보팀에 현장 수습을 지시했다.호텔 앞 광장에서 곽승재와 송민준의 운전기사들이 각각 차를 대기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송민준은 고은서를 배웅하려는 태도를 보였으나 곽승재가 고은서를 부축하면서 예의를 갖추어 말했다.“번거로울 텐데 제가 은서 씨를 모시고 가겠습니다.”송민준은 자기가 고은서의 파트너로 왔기 때문에 그녀를 집까지 모셔다드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설득했다.곽승재는 송민준의 이런 친근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억지로 고은서를 안아 들어 자신의 차에 태우고 싶었지만 고은서가 화를 낼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는 입을 오므리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선택권을 고은서에게 넘겼다.고은서는 당연히 송민준과 함께 갈 생각이 없었다.“오빠, 오늘은 고마웠어. 오늘 승재 오빠의 차를 타고 갈게. 어차피 길도 같으니까. 내일 다시 연락할게.”고은서의 반응에 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알겠어. 집에 도착하면 연락해.”곽승재는 고은서를 차에 태운 뒤 트렁크에서 깨끗한 외투를 꺼냈다.차 안에 앉자 곽승재는 고은서의 어깨
여시은은 고은서의 말에 더욱 어리둥절해졌다.‘갑자기 왜 또 농장 일을 다시 꺼내는 거지?’여시은은 속으로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생각할수록 점점 더 억울하고 분했다.“은서야, 왜 나를 이렇게 모함하는 거야? 내가 언제 너를 물에 빠뜨렸다고 그래? 네가 나를 밀었잖아! 내가 우리 아빠를 생각해서 참고 넘어갔는데 이제 와서 또 나에게 뒤집어씌우다니!”여시은은 여재훈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혔다.“아빠, 저는 항상 사람을 보는 안목이 없는 것 같아요... 은서가 이런 사람일 줄은 정말 몰랐어요... 너무 속상해요...”여시은의 슬프고 안쓰러운 모습에 여재훈은 점차 진지해졌고 고은서를 보며 물었다.“고은서 씨, 시은이가 은서 씨를 물에 빠뜨렸다는 증거라도 있어요?”“물론 있죠.”고은서는 이미 곽승재의 부축을 받아 일어난 상태였다.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송민준이 보낸 영상을 찾았다.현장에 있던 사람들 모두 다가가지는 않았지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은서가 진짜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더니 그들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다.이때 곽승재가 제안했다.“여 대표님, 모두가 보는 앞에서 영상을 공개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모두가 직접 보면 진실이 명백해질 테니 나중에 왜곡되는 일도 없을 겁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여시은은 고은서가 미리 준비한 듯한 태도를 보이자 불안감이 더욱 커졌다.고은서가 이렇게 계획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증거를 손에 넣었을지도 모른다.여시은이 고은서를 과소평가했던 것이다.여시은은 붉어진 눈으로 소리쳤다.“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에요! 이미 개업식 시간이 다 됐는데 계속 이러쿵저러쿵하며 일을 벌이다니! 고의로 우리 개업식을 방해하는 거 아니에요?”“아빠, 오늘 이분들은 분명히 좋은 의도로 온 게 아닌 것 같아요. 그냥 쫓아내는 게 낫겠어요!”“여시은 씨, 말씀이 참 지나치군요. 우리는 단지 진실을 알고 싶을 뿐입니다.”송민준이 여재훈보다 먼저 입을 열
구경하는 사람들도 송민준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도대체 왜 그의 여자 파트너가 곽승재의 품에 안겨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송민준은 사람들의 의문스러운 시선을 받고 있었지만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여시은 씨, 저는 단지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은서와 여시은 씨의 사이에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은서가 왜 그런 행동을 하겠습니까?”“아빠, 정말 제가 한 게 아니에요! 저 사람들은 같은 편이라서 일부러 저를 괴롭히려는 거예요!”여시은은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그녀의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했다.여재훈은 눈물 글썽이는 딸을 바라보더니 온몸이 흐트러진 고은서를 향해 물었다.“고은서 씨, 사실대로 말해보세요.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고은서는 감정을 어느 정도 추스렸지만 이런 일을 당하면 당연히 난처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최대한 평온한 어조로 대답했다.“여 대표님, 제가 뭘 말해도 소용없을 겁니다. 시은이와 저는 각자 주장이 다르기 때문에 누구도 판단하기 어려울 겁니다.”고은서는 로비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여기 곳곳에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요. 직원들을 시켜 감시 카메라를 확인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러면 진실도 드러나겠죠.”이 말을 듣자 여시은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고은서가 여시은보다 먼저 바닥에 넘어졌는데 감시 카메라의 확인까지 제안하다니!‘설마 은서가 이 시간대에 감시 카메라를 꺼뒀다는 걸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시은아, 너의 생각은 어때?”고은서는 고개를 들어 여시은에게 물었다.여시은은 분노를 꾹 참고는 여전히 억울하고 순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좋아! 하지만 개업식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데 감시 카메라는 확인하는 동안 내가 먼저 개업식을 진행하고 나중에 이 문제를 논의하는 게 어때?”“안 돼.”고은서의 작은 얼굴에는 단호한 표정이 담겨있었다.“이 사건은 반드시 바로 조사되어야 한다고 봐.”고은서는 다시 여재훈을 바라보며 말했다.“여 대표님,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제가 시은이 만큼 귀하지는 않지만 이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