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승준의 어머니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자 박지연은 본능적으로 불쾌감을 느꼈다. [난처하게 안 했어. 그런데 당신은 사과 말고 어머니에게 뭐 더 할 수 있겠어?] 박지연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온 선생님, 당신이 나한테 얼마나 많이 약속했는지 기억 안 나? 당신 어머니가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게 하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조 여사님은 날 볼 때마다 비아냥거리기만 했어.][미... 미안...] 온승준이 미안하다는 말을 꺼내자 박지연은 그 말을 가로막았다. [미안하다는 말은 이제 그만해. 원래 경찰에 신고할 생각이었어. 하지만 유혜린 씨가 임신 중이라는 이유로 이번 한 번만 봐준 거야.] 박지연은 잠시 멈춘 뒤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다음에 또 그런 일이 생기면 그때는 정말 법적 절차를 밟을 거야. 당신 아이가 나중에 죄를 지은 할머니를 두게 될지는 내가 알 바 아니니까.] 온승준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걸 느꼈다. 그의 어머니는 그 일에 대해 전혀 말하지 않았고 오히려 유혜린의 악행을 고발하면서 자연스럽게 박지연을 한 번 언급했다. 그 뒤로 조수연은 잘못된 걸 느끼고 대화를 얼버무리며 다른 이야기로 돌렸다. 온승준은 자신이 어머니의 말을 그대로 들어줬으면 어머니가 약속을 지킬 거라 믿었다. 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게다가 박지연의 말 속에서 유혜린이 뱃속의 아이를 이용해 박지연에게 신고를 취소하도록 부탁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온승준은 부모님의 강한 요청에 따라 유혜린과 혼인신고를 했다. 결혼식은 할 마음도 없었고 마침 국경 없는 의료팀에서 그를 초대해 X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곳은 전쟁과 분쟁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고 온승준은 그곳에서 점점 더 조국이 그리워졌고 특히 박지연이 몹시 그리워졌다. 수없이 많은 밤을 보내며 그는 박지연을 꿈에서 만났다. 꿈 속에서 박지연은 예전처럼 그에게 손을 흔들며 웃었고 병원의 이야기들을 기쁨 가득한 얼굴로 나누었다. 그가 좋아하는 음
온승준이 말을 하려던 찰나,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맑고 가벼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서야, 스테이크 몇 분 익힐까?” “왜 지연이한테 안 물어봐요?” “지연이꺼는 내가 다 알아. 지연이의 모든 취향과 금기 사항은 남자친구로서 당근 다 알아야지.”“네. 잘 들었습니다. 제껀 7분 정도 익혀 주세요. 자꾸 그런 눈빛으로 지연이를 쳐다보면 밥을 안 먹어도 당신들의 애정폭탄에 배부를 것 같아요.” “고은서, 제발 입 다물어.” 장난스러운 대화 뒤로 문이 닫히고 방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방금 뭐라고 하려던 거야?] 박지연은 비로소 아직 전화를 끊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물었다. [별일 아니야.] 온승준은 전화를 끊으면서 ‘요즘 잘 지내?’라는 말을 끝내 하지 않았다. 그런 말은 굳이 꺼내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박지연은 잘 지내고 있었고 그 행복한 모습이 그대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육현석이라는 남자는 박지연에게 정말 잘해주고 있었다. 그는 박지연의 모든 습관을 알고 심지어 박지연과 친구들을 위해 직접 요리까지 해주었다. 찬 바람이 불어오자 온승준의 얼굴이 간지러워졌다. 그는 손을 대어보았고 손에 물이 묻어 있음을 느꼈다....잠시 후, 육현석이 준비한 음식이 완성됐다. 풍성한 서양 요리와 간단한 한식도 함께였다. 도아름 외에도 송민아가 함께 와서 자리를 빛냈다. “현석 씨, 이렇게 많은 요리를 할 줄 알다니 정말 대단해요.” 송민아가 진심 어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육현석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서양 요리는 간단해서 잘하는 편이고 한식은 이 정도만 할 수 있어요. 더 많이 배워서 지연이가 매번 새로운 요리를 먹을 수 있게 해줄 거예요.” “지연 언니, 이런 남자친구는 어디서 구해요?” 송민아는 부러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육현석이 급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민아 씨, 그 말은 틀렸어요. 제가 운이 좋은 거예요. 지연이 같은 좋은 여자를 만났으니까요.” “맞
유일 투자은행은 최근 여러 프로젝트에 투자했으며 그녀가 맡은 명운의 상장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직접 찾아와 투자 요청을 해왔다. 하지만 고은서는 너무 두각을 나타내면 경쟁자들의 질투를 사기 쉽다고 우려했다. 반면 송민아의 생각은 달랐다. “질투할 사람들은 우리가 작은 축하 파티를 열든, 공식적인 술자리를 마련하든 어차피 질투할 거야.” 그녀는 유일 투자은행의 영향력을 키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실력을 널리 알리는 게 더 많은 신뢰를 얻고 시장에서 빠르게 자리 잡는 길 아니겠어?” 송민아는 덧붙였다. “게다가 우리가 ‘world 게임’ 프로젝트 하나만 진행하는 것도 아니고 각자 맡은 프로젝트도 많잖아. 회사 명성이 커지면 우리 일도 더 수월해질 거야.” 그녀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질투하는 사람들은 술자리를 한 번 덜 연다고 해서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 결국 고은서는 송민아의 의견에 설득당했고 그녀를 칭찬했다. “민아야, 대단하네. 갈수록 더 능숙해지는 것 같아.”송민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자랑스럽게 웃었다. “당연하지. 내가 직접 사업을 하는 건 아니지만 아빠가 옛날 무용담을 워낙 자주 들려주셔서 자연스럽게 배웠거든.” 결국 연회는 송민아가 전적으로 맡기로 했다. 한편, KK 측에서 WOR 게임 회사의 핵심 창작진 자료를 고은서에게 전달해왔다. 책임자가 말했던 대로 주요 제작진들은 몇 년 동안 알고 지낸 사이였으며 사회적 배경도 복잡하지 않았고 별다른 문제를 일으킨 적도 없었다. 그중에서도 허 씨 성을 가진 한 핵심 멤버는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다. 가족들은 그가 몇 년 동안 게임을 개발하겠다고 고집하는 것을 반대했고 결국 그는 집을 나와 독립했다. 하지만 이제 ‘WOR 게임’의 내부 테스트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고 정식 출시만 된다면 그들의 몸값은 자연스럽게 치솟을 터였다. 드디어 오랜 시간 버텨온 보람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고은서는 자료를 덮고 데이터를 확인하려던 찰나 핸드폰 벨
유성준과 A/S 책임자는 이미 여러 차례 설명을 마친 상태였다. “고객님들께서는 제품을 수령하신 후 검품까지 마치셨습니다. 별다른 하자가 없는 이상 환불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여성들은 여전히 오만한 태도로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받을 때는 미처 확인을 못 했어. 그런데 최근에 써보니까 향이 너무 저급하더라. 우리 이미지에 치명적이니까 반드시 반품해야겠어. 그렇지 않으면 MQ의 실체를 폭로할 수밖에 없겠네?”그때, 고은서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성준 오빠.” 그녀가 자연스럽게 인사하자 응접실 안의 모든 시선이 일제히 그녀를 향했다. 며칠 전 여시은의 저택에서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상냥하고 공손하던 여자들은 이제 거만한 표정으로 고은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한 명 한 명 성을 부르며 예의 바르게 인사했지만 여자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몇몇은 눈빛에 조소까지 담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순진하게 굴다니. 정말 어리석네.’ 한편, 유성준도 그들의 의도를 뻔히 알고 있었다. 그는 눈짓으로 고은서에게 개입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자신과 직원들이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확실히 MQ는 원칙적으로 문제가 없었다. 법적으로 따져도 MQ가 이길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하지만 저 여자들의 목적은 단순히 환불이 아니었다. 그들은 논란을 일으켜 MQ의 명성을 깎아내리고 싶어 했다. 불만을 부풀려 가십으로 만들기만 하면 결국 MQ를 향한 대중의 의심이 생겨날 것이고 진실이 어떻든 간에 MQ는 여론의 타격을 피할 수 없게 될 터였다. 그 순간 고은서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 제가 오는 길에 이미 몇몇 언론사에 연락해 두었어요. 이렇게까지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싶으시다면 차라리 지금 바로 공식적으로 논의하는 게 어떨까요?” 그녀의 말에 상류층 여성들이 순간 움찔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이번 일이 MQ의 잘못이 아니라면 MQ는 법적으
여시은은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약간의 난처함과 미안함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 마치 고은서가 오해할까 봐 몹시 걱정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고은서는 이미 여시은의 본색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의 노련한 연기에 속을 일은 없었다. 고은서는 그냥 가볍게 미소 지으며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네가 뭘 했길래 내가 오해할 거라고 생각해?” 여시은은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야, 다들 내가 아는 사람들이잖아. 그런데 다 같이 몰려와서 환불을 요구했으니 네가 괜히 나랑 연관 지어 오해할까 봐 걱정돼서.” “그럼 정말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 고은서가 다시 묻자 여시은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당연하지. 오늘 난 향수 맞추러 온 거라니까. 마침 여기서 다들 만날 줄은 진짜 몰랐어.” 고은서는 처음부터 여시은이 무언가를 인정할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얼마나 뻔뻔하게 모르는 척할 수 있을지 보고 싶었을 뿐이다. 굳이 더 캐물을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고은서는 담담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MQ에 대한 오해를 풀어줘서 고마워. 시은아.”여시은도 환하게 웃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아니야. 난 그냥 사실대로 말했을 뿐이야.”두 사람의 대화가 마무리되자 분위기를 살피던 여성들이 슬쩍 눈치를 보며 고은서와 MQ 측에 사과하기 시작했다. 특히 잘못된 향수를 가져와 문제를 일으킨 여성은 몹시 당황한 기색으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유성준과 고은서에게 거듭 사과했다. 유성준은 더 이상 이 일을 문제 삼지 않았고 고은서 역시 적당히 넘어갈 수 있도록 형식적인 말 몇 마디를 덧붙였다. 그렇게 상황이 마무리되자 고은서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 오해도 풀렸으니 이제 본론을 얘기해도 되겠죠?”여시은이 아름다운 큰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은서야, 그날 목장에서 풀향기가 정말 상쾌하고 좋았어. 그런 향기랑 비슷한 향수 만들 수 있어?” 여시은이 이렇게 연기를 하는 데는 당연한 이유가
고은서는 고은혜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고은혜도 알아챘을 정도로 여시은은 자신의 의도를 전혀 숨길 생각이 없는 듯했다. “은서야, 너랑 여시은 씨 사이에 무슨 일 있었어? 방금 네 말에서 다른 의도가 느껴졌어.”유성준도 의아해하며 물었다. “한두 마디로는 설명이 안 돼.” 고은서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오빠, 여시은이 만약 오빠한테 비즈니스를 소개해 준다면 조심하는 게 좋아. 차라리 거절하는 게 나을 거야.” 유성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방금 여시은 씨에게 향수를 개인적으로 선물한다고 한 거야? 그걸 MQ의 기획에 쓸까 봐?” 고은서는 확실이 그 점을 염려하고 있었다. 여시은은 확실한 의도를 가지고 왔고 그녀가 자신에게 향수를 맡기려는 목적이 무엇이든 MQ를 떠나서 그건 두 사람 사이의 개인적인 문제였다. “문제 생기지 않을까?” 고은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이제 사람을 걱정할 줄도 아네?” 고은서는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 다 계획이 있어.” 복이 아니면 화가 될 테니, 고은서는 여시은이 과연 어떤 행동을 할지 지켜보려 했다. 그때, 저녁 식사 시간이 다가오자 고은혜는 고은서에게 해산물을 사달라고 했다. “최근 인턴 생활 너무 힘들어서 위로가 필요해.” “성준 오빠가 너를 소홀히 한 거야?” 고은서가 일부러 물었다. 유성준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 “그냥 내가 더 배우고 싶은데 너무 어려워. 공부보다 더 힘들어.” 고은혜는 찡그린 얼굴로 말했다. 고은서는 웃으며 말했다. “알았어. 뭐 먹고 싶어? 말만 해.” “유 대표님, 같이 가실래요?” 고은혜까 유성준을 초대했다. 유성준은 한동안 고은서를 못 봤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좋아. 이렇게 된 이상 내가 대접할게.”고은혜가 고른 곳은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해산물 레스토랑이었다. 주문을 받을 때 웨이터가 하나의 디저트를 추천했다. 그 디저트에는 견과류가 들어 있었
다음 며칠 동안 고은서는 매우 바빴다. 유일 투자은행의 공식 연회가 송민아의 기획으로 예정대로 열렸다. 연회 당일, 주인혁은 자발적으로 현장에 도착해 개막 게스트로 두 곡을 불렀다. 고은서는 그 장면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주인혁의 현재 명성에 비해 그가 공연하는 것은 다소 과한 일이었지만 그는 연예인으로서가 아니라 친구로서 무대를 도와준다고 했다. “누나, 개업식 때 제가 가려고 했었는데 그때 계약때문에 도저히 갈 수 없었어요. 이번에는 절대 거절하지 마세요.” 주인혁이 간절하게 말했고 송민아도 부추기자 고은서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노래 경연 프로그램의 챔피언인 주인혁의 목소리는 흠잡을 데가 없었고 현장 사람들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송민아는 리허설에서 이미 그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여전히 빠져들고 말았다. “전에 왜 팬들이 연예인을 좋아하는지 이해가 안 갔는데 이제 조금 알겠어. 진짜 매력적인 점이 있네.” “발라드 왕자라는 별명이 그냥 붙은 게 아니야.” 고은서가 농담을 던졌다. “그렇게 좋아하면 인혁 씨를 남자친구로 만들어서 노래 듣고 싶을 때마다 현장에서 불러 달라고 해.” 송민아가 고은서의 농담에 코웃음을 쳤다. “그 사람이 너한테 관심있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게스트로 온 이유도 결국 너 때문이잖아.” 고은서는 주인혁을 도와준 일을 송민아에게 털어놓았다. “사람은 힘든 순간에 받는 따뜻함에 특별히 감동을 받게 돼. 인혁 씨도 결국 언젠가는 깨달을 거야. 사랑은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송민아가 고은서를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왜 그렇게 나이 든 사람처럼 말해? 마치 많은 걸 겪은 사람처럼...” 고은서는 그냥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녀는 확실히 많은 일을 겪었다.곽승재가 그 괴상한 남자를 쫓아내 준 순간, 고은서는 마치 천사가 내려온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부터 사랑의 감정이 싹트기 시작했다. 만약 그들이 그런 방식으로 만난 게 아니었다면 곽승재는 단지 잘생긴 남자
[은서 씨, 방금 저한테 전화했나요?] 송민준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차분하지 않고 흐릿하게 들렸다. [민준 씨, 저...][쾅!] 고은서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전화기 너머로 의자와 테이블, 술잔이 부딪히며 떨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스읍...] 송민준은 아마 어딘가에 부딪힌 모양이었다. 고통에 찬 신음이 들리고 한참 후에야 떨리는 목소리로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해요. 먼저 끊을게요.] 고은서는 잠시 멈칫했다. 그는 술자리에 있는 것 같았고 소리로 듣기엔 꽤 많이 마신 것 같았다. 고은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연회는 이제 거의 끝나고 손님들을 태운 차들이 떠난 뒤 고은서는 자신이 예약한 차로 집에 가려던 참이었다. 그때, 앱을 열자마자 주인혁의 번호가 번쩍였다. [누나, 송민아 씨의 오빠가 다친 것 같아요. 지금 급히 오빠를 찾으려고 하는데 막아야 할까요?] 주인혁이 급하게 물었다. ‘민아는 술에 취해 발걸음도 제대로 못 옮길 텐데 어떻게 송민준 씨를 찾으러 가겠다는 거지?’ 고은서는 급히 답했다. [가지 못하게 해요. 주소 알려줘요. 내가 송민준 씨 찾으러 갈게요.] 주인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말했다. 몇 분 후, 고은서는 주소를 받았고 그것은 술집이었다.고은서는 차를 타고 송민준을 찾으러 갔다. 송민준은 셔츠만 입고 카바나 소파에 기대어 앉아 한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있었다. 술집의 불빛은 어두웠고 고은서는 그의 표정을 정확히 볼 수 없었지만 송민준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평소의 온화하고 완벽한 신사의 모습과는 달리 그의 몸에선 몇 분의 무기력함이 묻어났다. 그때, 한 마른 남자가 송민준에게 몰래 다가가고 있었다. 그 남자는 송민준이 술에 취한 틈을 타 그의 물건을 훔칠 생각인 듯 보였다. “뭐 하는 거야!” 고은서가 크게 소리쳤다. 마른 남자는 놀라서 멈췄고 송민준도 고은서의 목소리를 듣고 몸을 살짝 일으키며 고개를 들었다.
곽승재의 말을 들은 마재경의 얼굴에 두려운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하지만 문득 뭔가를 떠올린 듯 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협박하지 마세요. 가벼운 부상에 불과하니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하면 기껏해야 3년 감옥에 있고 나올 거예요. 당신들이 주는 기회 따위는 필요 없어요.”마재경은 인정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 확실했다. 3년 감옥살이로 거액의 돈을 바꾸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었다.이로 미루어 보면, 마재경은 정말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이다.고은서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3년 청춘을 돈과 바꾸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오점이 생겨 네가 어디 가든 따라다닐 텐데.”“게다가 그렇게 큰돈이 어디서 생겼는지 출처를 밝히지 못하면 경찰이 가만둘 것 같아? 일단 경찰이 알아내면 너의 공범도 잡히고 너는 비호죄까지 추가될 텐데. 정말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고은서의 말에 마재경은 약간 망설였지만 여전히 자기가 혼자 한 것이라고 고집했다. 돈도 어디서 입금됐는지 모르겠고, 어쩌면 팬 중 한 명이 보낸 것일 수도 있다고 둘러댔다.다소 김빠진 고은서는 곽승재와 함께 밖에 나가 마재경의 약점을 찾아보려 했다.그때 곽승재가 입을 열었다.“죄를 지었다는 것이 너의 고향에 알려지면 돈을 들고 금의환향하려는 생각이 실현될 수 있을까?”이 말에 마재경은 허를 찔린 듯 눈에 공포가 감돌았고 몸도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잠시 후, 곽승재의 얼음장 같은 시선 속에서 마재경은 철저히 무너졌다.“말할게요. 전부 다 털어놓을게요...”...여씨 저택.여시은이 수액을 다 맞고 여재훈도 약을 먹은 뒤였다.가정의가 떠나자, 여시은은 여재훈의 옆에 앉았다.“아빠, 왜 그러세요? 계속 미간을 찌푸리고 계시는데, 상처 부위가 많이 아프신 거예요?”여재훈은 순하고 사리에 밝은 딸을 바라보며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시은아, 네가 주워 온 길고양이가 너랑 그리 친하지 않은 것 같더구나?”여시은은 순진무구한 눈빛을 한 채 고개를 끄
마재경은 잠깐 멍하니 있더니 곧바로 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그냥 미워서 괴롭히고 싶었다고 말했다.그러자 고은서는 코웃음을 쳤다.“변명이 너무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안 들어?”“너와 곽승재가 단순히 금전적 관계였던 건 말할 것도 없고, 설령 진심으로 좋아하는 감정이 생겨서 잘해보고 싶은데 외면당했다고 해도 곽승재한테 화풀이해야 하는 거 아닌가?”고은서의 질문에 마재경은 얼굴이 부자연스럽게 일그러졌다.“나는 곽 대표님을 존경했을 뿐 다른 마음은 없었어.”“그런데 너는 나와 곽 대표님의 스캔들 때문에 나를 질투했고, 나의 팬을 돈으로 매수해 나를 반죽음으로 만들었어. 이런 짓을 한 너에게 복수하면 안 되나?”‘흉기 난동 사건까지 내 탓으로 돌리려 하다니?’고은서는 더욱 어이없었다.“마재경, 머리는 장식품으로 달고 다니나? 내가 곽승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누구나 다 알아. 내가 질투심 때문에 돈으로 사람을 매수해 너를 해칠 이유가 없잖아.”“그리고 정말 나를 의심했다면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어? 나를 경찰서에 넘겨서 죄를 묻는 게 더 나았을 텐데.”마재경은 얼굴이 빨개졌지만 여전히 우겼다.“너는 돈도 많고 옆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은데, 내가 어떻게 증거를 찾을 수 있겠어?”고은서는 다시 한번 어이없어 웃었다.“증거도 없다는 거네. 그러면 무슨 근거로 나를 의심해? 나한테 피를 뿌린 것도 모자라 잔인하게 죽이려고까지 했잖아.”“‘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내가 칼에 찔려 과다 출혈로 죽을 뻔했으니 같은 방식으로 너한테 되갚아주고 싶었어.”마재경은 고은서가 정말 자기를 해치기라도 한 것처럼 원한을 쏟아냈다.고은서는 더 이상 그녀와 논쟁을 이어갈 생각이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계속 우기면 너의 남은 인생은 감옥에서 썩게 될 거야. 인플루언서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물론 자유도 잃게 되겠지.”“너!”“협박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네 말대로 나에겐 돈도 많고 곁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아.”이 말을 들은 마재경은
“집에서 모시러 오셨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경찰서에 상황을 알아보러 가야 해서요.”그녀가 식사 자리에서 여시은을 용서할 수 없다고 분명히 밝혔기 때문에 여재훈은 크게 놀라지 않았고 더 이상 설득도 하지 않았다.“고은서 씨, 이번 일은 저와도 상관이 있으니 같이 가도록 해요.”하지만 고은서는 완곡하게 거절했다.“아닙니다. 상대가 저를 노린 것이니 제가 가면 됩니다. 다치셨으니 일찍 들어가 쉬십시오.”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여재훈은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 다만 소식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다.고은서가 인사하고 자리를 뜨려는 순간, 여씨 가문의 가정의가 진료실에서 나오더니 호들갑을 떨었다.“여 대표님, 앞으로 이런 무모한 행동은 삼가세요. 이번에는 동맥을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혈액형도 특이한데 대량 출혈이라도 발생하면 이 작은 병원에서 혈액을 공급받지 못했을 거예요.”‘혈액형이 특이하다고?’고은서도 희귀한 혈액형이었다. 그녀가 여재훈의 혈액형을 물어보려 할 때 여시은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러게요. 아빠, 몸을 좀 아끼세요. 너무 걱정되고 무서워요...”이 광경을 본 고은서는 말없이 떠나갔다....마재경이 뿌린 피가 그녀의 몸을 명중하지 못했는데도 여기저기 피가 튀어 불쾌한 냄새가 났다.곽승재가 경찰서에 같이 가자고 했기 때문에 고은서는 먼저 라이트문 아파트로 돌아가 꼼꼼히 씻은 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곽승재는 빛의 속도로 달려왔다. 고은서가 대충 차려입고 경찰서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돼서 허둥지둥 달려오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곽승재는 얇은 미디엄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매끈한 핏 덕분에 더 훤칠해 보였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그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상처부터 확인했다.곽승재의 따뜻한 손이 피부에 닿자, 고은서는 약간 불편한 듯 그의 손을 살짝 밀어냈다.“정말 괜찮아. 살짝 긁혔을 뿐이고, 이미 약도 발랐어.”곽승재는 손을 거두어들였지만 눈은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말쑥
지난번 여씨 저택에서 여시은이 쿠아에게 할퀴어 상처를 입었을 때 이 의사를 본 적이 있었다.여시은은 아버지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몸 상태도 생각할 겨를이 없이 병원으로 달려온 모양이다. 가정의도 걱정돼서 따라나섰을 것이다.“시은아, 왜 여기까지 왔어? 괜찮다고, 금방 돌아갈 거라고 말했잖아.”여재훈이 나무라듯 말했다.“아가씨께서는 대표님이 병원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수액을 뽑아버리고 운전기사에게 빨리 병원으로 데려다 달라고 하셨어요.”가정의가 설명을 보탰다.역시 그랬다. 여시은은 눈이 빨갛게 충혈되고 예쁜 얼굴에 긴장과 걱정이 가득했다.“아빠,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어쩌다 다치셨어요?”여재훈은 고은서의 말을 듣고 딸에 대한 의심이 생겼지만, 그녀의 걱정스러운 모습을 보고 사람들 앞에서 추궁하지는 않았다.여재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작은 사고가 있었어. 이제 괜찮아.”여시은은 조금 안심된 듯했다. 그제야 진료실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의사와 간호사에게 인사한 뒤 고은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리셉션이 끝난 지 며칠 지났지만 두 사람의 대면은 이번이 처음이었다.리셉션 때보다 여시은은 확연히 풀이 죽은 상태였다. 창백한 얼굴에 화장기 하나 없었고, 입술에도 각질이 일어나 있었다.게다가 여재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살짝 건드리면 깨지는 도자기 인형처럼 취약해 보였다.도대체 어떻게 이런 완벽한 연기를 펼칠 수 있는 건지?민시후의 부하들이 여시은에게 조현병이 없다는 걸 알아내지 못했더라면, 여시은이 이중인격을 가진 게 아닌지 의심했을 정도였다. 순진무구한 인격과 잔인하고 변태적인 인격 말이다.하지만 여시은은 조현병 환자가 아닌 게 분명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눈가에 차가운 기운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비록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것이었지만 고은서는 정확히 포착했다.“고은서, 너 때문에 아빠가 다치신 거야?”여시은은 예전처럼 친한 척하지 않고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고은서가
의사가 여재훈의 상처를 처치하는 사이, 고은서의 휴대폰이 울렸다.번호를 보니 곽승재였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말하고 복도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은서야, 너 사고를 당했다며? 너와 여 대표님이 모두 다쳤다고?”곽승재가 다급히 물었다.임신 오해 사건 이후, 두 사람이 모든 것을 터놓고 얘기한 뒤로 그녀를 몰래 보호하던 인원을 철수한 상태였다.하지만 운전기사는 여전히 주민기가 배치한 인원이어서 고은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 수 있었다.고은서는 어디서 들었는지 캐묻지 않았다.“괜찮아. 마재경이 갑자기 유일 투자은행 주차장에서 나를 습격했어. 여재훈 씨가 막아주다가 팔을 다치셨고.”“나는 지금 출장 중이라 경찰서 쪽에 다른 사람을 보냈어.”곽승재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해성으로 돌아갈게.”고은서는 급히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여긴 별일 없으니까 일에 집중해. 여재훈 씨의 상처 처치가 끝나면 경찰서로 가서 마재경을 만날 거야.”“이쪽 일은 거의 마무리됐어. 내가 돌아가면 같이 경찰서에 가자.”곽승재는 설명을 이어갔다.“지난번 마재경이 다쳤을 때 병원을 방문해 더 이상 협조가 필요 없다고 통보하고 충분한 보상금도 지급했어.”“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 존재감을 과시하지 말라고 몇 번 경고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걸 보면 배후에 조종자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곽승재는 차분한 목소리로 분석을 이어갔고, 고은서도 어느 정도 수긍했다.따져보면, 마재경은 돈 때문에 곽승재와 손잡은 것이고 그녀와 깊은 원한이 없었다.협력 관계가 끝났으면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야 정상이지, 이렇게 위험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복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하지만 마재경이 진심으로 곽승재를 좋아하게 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천천히 사랑을 키워나가고 싶었는데 곽승재가 갑자기 관계를 끊자고 하니 그 분노를 고은서에게 쏟아냈을 수도 있다.고은서가 이 가능성을 말하려는 순간, 간호사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안에 있는 환자분의 부탁이라며 그녀의 상처
‘분명 넘어뜨렸는데.’고은서는 마재경이 이렇게 빨리 일어날 줄은 몰랐고, 가위를 들고 달려들 줄은 더욱 생각지 못했다.피하기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고은서는 다급한 마음에 전기충격기를 꺼내 마재경의 몸에 들이댔다.“조심해요.”고은서와 마재경이 전기충격기와 가위를 손에 들고 서로 공격하려는 순간, 우람한 체구의 남성이 황급히 달려왔다. 여재훈이었다.그는 고은서를 확 끌어당기고 마재경을 밀쳐냈다.쨍그랑! 전기충격기가 땅에 떨어지며 마재경의 몸에 닿았고, 감전된 마재경은 비명을 질렀다.잠시 비틀거리던 마재경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다시 가위를 휘두르며 덤벼들었다.고은서가 마재경을 걷어차려고 다리를 뻗는 순간, 여재훈이 자기 팔로 가위를 막아 그녀를 보호했다.그의 넓은 어깨는 웅대한 산처럼 든든해 보였고,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 품에 안겼을 때처럼 피난처 같은 안정감을 주었다.짝! 가위가 여재훈의 팔을 찌르며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여재훈은 잽싸게 마재경을 발로 걷어찼다.“여재훈 씨, 괜찮으세요?”정신을 차린 고은서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여재훈은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괜찮아요.”이때 경비원 몇 명이 달려와 마재경을 제압했다.고은서는 여재훈의 팔을 살펴보았다. 재킷과 셔츠가 찢기고 기다란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고은서는 가슴이 아려와 다급히 말했다.“다치셨네요. 빨리 병원 가서 싸매야 해요.”“고은서 씨도 다쳤으니 같이 가요.”여재훈이 고은서의 쇄골 부위를 가리키며 말했다.아무 느낌도 없었는데, 여재훈의 말을 듣고 나니 쇄골 근처 어깨죽지 부위에서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손으로 만져보니 피는 나지 않는 듯했다. 오늘 카라 없는 캐주얼 셔츠를 입은 까닭에 마재경이 가위를 휘두를 때 살짝 긁힌 듯하다.“저는 연고만 바르면 될 것 같아요. 어서 병원 가요.”고은서는 경비원에게 마재경을 경찰서에 넘기라고 말했다.그러고는 기사를 불러오고 여재훈과 함께 뒷좌석에 탔다.여재훈의 팔뚝에 번진 핏자국을 보며 고은서는
여재훈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제가 은서 씨를 회사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이 식사는 여재훈이 초대한 자리였으니 끝까지 책임지고 고은서를 안전하게 회사까지 돌려보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돌아가는 길에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아 분위기가 조금 무거웠다.고은서는 여재훈이 자기 딸이 고양이를 학대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혼자 생각할 시간을 줬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유일 투자은행의 주차장에 도착했다.“은서 씨, 곽승재 씨랑 현재 무슨 사이이신가요?”여재훈이 물었다.고은서는 사실대로 답했다.“그냥 평범한 친구 사이예요.”여재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승재 씨는 은서 씨를 많이 신경 쓰는 것 같더군요.”연회 때 곽승재가 고은서를 적극적으로 감싸는 모습을 모두가 똑똑히 봤다.이에 대해 고은서도 부정하지 않았다.“그건 곽승재 씨의 일방적인 감정이에요. 저는 그 사람한테 이성적인 감정은 없어요.”“시은이가 승재 씨를 꽤 마음에 들어 하더라고요. 저한테도 말한 적 있어요. 그와 결혼하고 싶다고.”여재훈은 말을 이었다.“아마 시은이의 질투심도 여기서 시작된 것 같아요. 그래서 은서 씨를 해하려 했던 걸지도 모르죠. 하지만 쿠아는 시은이가 가장 아끼던 반려동물이에요. 시은이가 이유 없이 해칠 리는 없을 겁니다.”고은서는 그 말의 속뜻을 곧바로 이해했다.여재훈의 말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향한 질투 때문에 공격적으로 나왔을 수는 있어도, 쿠아는 여시은이 키우는 반려동물이기에 쿠아를 해칠 사람은 아니라고 믿는다는 것 같았다.고은서는 그저 씁쓸하게 웃었다.가족이라는 필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는 여재훈도 여시은의 본모습을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고은서는 더 말해봤자 의미가 없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간단히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차에서 내린 고은서는 어디선가 여자 하나가 스쳐 지나가는 듯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고, 공기 중에서 약간의 피비린내도 느꼈다.그녀는 주
여재훈은 고은서를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는 물었다.“시은이가 또 무슨 일을 했다는 거죠?”마침 노 사장님이 식전 반찬을 가져다주며 주문한 대표 요리도 곧 준비된다고 알렸다.고은서는 계속해서 말했다.“재훈 씨, 저희 먼저 식사부터 하고 이야기할까요?”고은서는 몹시 배가 고팠다. 만약 지금 이 이야기를 꺼내면 두 사람 모두 식사할 마음이 사라질 것 같았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제안에 동의했다.이 개인 요리 식당의 음식은 색다른 풍미가 있었고, 고은서는 배부르게 먹었다.반면, 여재훈은 거의 먹지 않았다. 마치 그는 고은서를 동반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한 것처럼 보였다.식사 중에는 가끔 일상적이고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약 삼십 분 후, 고은서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배가 너무 부르다고 말했다.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남아있지만, 여재훈은 배부른 고은서를 보며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여재훈은 그녀가 배부르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뻤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찻잔에 물을 따라주며 물었다.“우리 시은이가 또 무슨 잘못을 저질렀던 거죠?”고은서는 찻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숨을 깊이 들이쉬고는 여시은이 고양이를 학대한 일에 대해 털어놓았다.“저번에 제가 쿠아 때문에 경찰에 신고를 했었잖아요?”고은서가 말했다.“전 정말 시은이에게 누명을 씌운 게 아니에요. 여시은이 제 눈앞에서 쿠아의 입술을 다치게 했어요. 그리고 평소에도 쿠아를 자주 괴롭혔어요.”고은서의 말을 들은 여재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시은이는 쿠아를 그렇게 아꼈어요. 집에서도 항상 품에 안고 다녔고, 쿠아가 뭐라도 먹고 싶어 하면 직접 손으로 먹여줬다니까요. 시은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했겠어요?”여재훈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물었다.“은서 씨, 혹시 오해가 있는 건 아니에요? 뭔가 착각하신 거 아닐까요?”평소 여시은은 얌전한 딸의 이미지를 잘 연기해 왔기에 여재훈은 그녀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재훈 씨가 믿기 힘든 거 알아요. 아버지 입장에서야 딸이 그
지난번 숙모에게 가방을 선물했을 때, 숙모가 엄청나게 기뻐했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그래서 이번엔 삼촌에게도 뭔가를 사서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은서는 노 사장님에게 코담배병을 어디서 샀는지 물어봤다. 그리고 가족에게 드릴 선물로 하나 사고 싶다고 말을 덧붙였다.“이건 친구가 선물한 거라 어디서 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노 사장님은 미안한 듯 말했다.고은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그냥 예뻐서 한번 여쭤본 거예요. 나중에 백화점 가서 한번 골라볼게요.”“아가씨는 참 효심이 깊구먼.”노 사장님은 칭찬을 몇 마디 건넨 뒤, 주문한 메뉴를 주방으로 가져갔다.“은서 씨 아버님께서 코담배병을 좋아하시나요? 선물하시려고요?”여재훈이 부드럽게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전 아버지가 없어요. 삼촌께 드리려는 거예요.”여재훈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그는 고은서를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기에 그녀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도 오늘 처음 들었다.“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여재훈은 곧바로 사과했다.고은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괜찮아요. 저희 가족끼리도 잘 지내고 있어요.”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여재훈은 고은서의 그 미소는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때 여재훈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전화번호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시은아, 왜 그래... 주사 맞는 게 당연히 좀 아프지. 하지만 주사를 안 맞으면 어떻게 낫겠어... 알겠으니깐 떼쓰지 말고, 의사 말 잘 들어.”전화를 끊고 나서 여재훈은 고은서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시은이가 아픈데 주사 맞기 싫다고 하네요.”고은서는 여시은의 이름에 반응이 컸다. 예전에 여시은에게 학대받다 죽은 쿠아가 떠올랐다. 그 기억 때문에 속이 불쾌해지고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그녀는 말없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여재훈은 고은서의 반감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그는 조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