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MELDEN화요일 아침, 서연은 작은 여행가방 대신 평소 출근 가방만 들었다.
원룸에는 옷과 세면도구가 그대로 있었다. 하룻밤을 자러 가는데 짐을 싸는 순간부터 우스웠다.봄이는 식탁 달력의 동그라미를 손가락으로 눌렀다.“오늘 진짜 원룸 가?”“응. 내일 회사 갔다가 저녁에 올 거야.”“아침에는?”“아빠랑 먹어.”태주는 팬에서 달걀을 뒤집으며 말했다.“오늘 하원도 아빠, 저녁도 아빠, 내일 등원도 아빠.”“머리도?”“카드에 잘한다고 썼잖아.”봄이는 못 미더운 얼굴로 자기 머리를 만졌다. 그래도 서연에게 남아 달라고 하지는 않았다.출근길에 서연은 두 개의 열쇠가 달린 고리를 만졌다. 작은 은색 열쇠는 원룸, 검은 덮개가토요일 오후, 서연은 804호 거실 바닥에 겨울 장식 상자를 펼쳤다.봄이가 지난주부터 같이 트리를 꺼내 달라고 졸랐고, 서연은 저녁 약속이 없는 날을 골라 오겠다고 했다.“이모, 이건 내가 걸 거야.”봄이는 금색 별 장식을 가슴에 안았다. 태주는 창고에서 꺼낸 작은 나무를 조립하고 전구 선을 풀었다.“작년에는 엄마가 여기다 걸었어.”봄이가 가운데 가지를 가리켰다.“기억나?”“사진에 있어.”태주는 휴대전화에서 지난해 사진을 찾아 보여 줬다. 서희가 트리 옆에 앉아 봄이의 머리에 금색 별을 올려놓고 있었다. 웃다가 눈을 감은 얼굴이었다.상자 바닥에는 서희가 종이점토로 만든 장식도 있었다. ‘봄이 3살’이라고 적힌 삐뚤한 글씨와 작은 손바닥 자국이 남아 있었다. 태주는 그것을 가장 잘 보이는 앞쪽 가지에 걸었다. 서연은 위치를 바꾸지 않았다.“엄마 눈 감았네.”“네 머리에 별 씌우다가 웃은 거야.”“올해는 아빠한테 할래.”봄이가 별을 들고 달려들자 태주는 고개를 숙였다. 서연은 둘의 사진을 찍어 서희 사진 다음 장에 남겼다.장식을 다 건 뒤 셋은 거실 불을 끄고 전구를 켰다. 봄이는 색이 바뀔 때마다 손뼉을 쳤다. 서연은 소파 끝에 앉아 지난해와 올해 사진을 차례로 넘겼다. 한 장이 다음 장을 없애지 않았다.저녁은 태주가 끓인 닭볶음탕이었다. 봄이가 밥을 다 먹고 방에서 색칠책을 가져오자 태주가 서연에게 물었다.“지난번 사람은 어떻게 됐어?”“누구요?”“전 약혼자.”서연은 물컵을 내려놓았다.“한 달만 다시
겨울 침구 기획전이 시작된 금요일, 첫날 주문량은 예상치보다 18% 높았다.소담살림 회의실에서 마지막 점검을 마친 뒤 미경이 박수를 쳤다.“이번 주는 수정 없이 끝내자. 주말에 전화하는 사람 벌금.”온유리빙 직원들도 웃으며 노트북을 닫았다. 재민은 반품 접수 담당 번호와 월요일 확인 사항만 공유했다.“긴급한 품질 문제 외에는 월요일에 대응하겠습니다.”“윤 팀장님도 주말에는 쉬세요.”미경이 말하자 재민은 서연을 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회의가 끝나고 협력사 직원들이 엘리베이터에 탔다. 재민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내려갔다. 서연에게 남으라는 눈짓도, 따로 기다리겠다는 문자도 없었다.서연은 자리로 돌아와 한 달간 주고받은 메일을 정리했다. 재민이 개인적인 문장을 쓴 것은 없었다. 오배송을 해결한 날에도, 첫날 주문 수치가 나온 오늘도 업무 밖으로 넘어오지 않았다.답을 미루는 동안 편했던 것은 사실이었다.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재민의 변화를 계속 시험하는 것도 공평하지 않았다.서연은 퇴근 버튼을 누르기 전에 개인 메시지를 보냈다.‘저녁 먹었어?’답장은 한참 뒤에 왔다.‘아직. 회사 근처야.’‘국밥 괜찮으면 1시간 볼래?’재민은 전화를 걸지 않았다.‘괜찮아. 네 회사 앞으로 갈게.’두 사람은 화려한 식당 대신 골목 안 국밥집에 앉았다. 예전에 데이트할 때 자주 오던 곳은 아니었다. 서연은 순댓국, 재민은 돼지국밥을 주문했다.“기획전 잘 나와서 다행이다.”“네가 전시실 제품 안 가져왔으면 촬영 다시 했어야 해.”“그 얘기 또 고맙다고
일요일 오전, 명자는 약속 시간보다 30분 일찍 804호에 왔다.“봄이 점심은 내가 먹일 테니 서두르지 마.”태주는 현관 거울 앞에서 셔츠 깃을 만졌다.“2시간 안에 옵니다.”“처음부터 시계 보고 앉아 있으면 상대도 알아.”“봄이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닙니다.”“그럼 누구 때문에 그래.”태주는 대답하지 않고 코트를 입었다. 봄이는 거실 바닥에서 색칠책을 펴 놓고 아빠를 올려다봤다.“아줌마 만나고 와?”“응. 점심만 먹고 올게.”“이모도 와?”“이모는 오늘 자기 일 있어.”봄이는 금세 다시 색칠책으로 고개를 숙였다. 태주는 아이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 나왔다.식당에는 신유경이 먼저 와 있었다. 짙은 회색 니트에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여자였다. 태주가 다가가자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강태주 씨 맞으시죠?”“네. 늦지 않았습니까?”“저도 방금 왔어요.”둘은 명자가 미리 주문해 둔 점심 정식을 취소하고 먹고 싶은 메뉴를 다시 골랐다. 유경은 어머니들이 정한 것부터 그대로 따를 필요는 없지 않으냐며 웃었다.“제 얘기는 어디까지 들으셨어요?”태주가 묻자 유경은 물잔을 내려놓았다.“아내분을 올해 잃으셨고, 여섯 살 딸이 있다는 것까지요. 건설회사에서 현장 관리하신다는 것도요.”“틀린 건 없습니다.”“저는 3년 전에 이혼했고 아이는 없어요. 그쪽도 들으셨죠?”“네.&rdquo
일주일 미룬 도서관 약속 날, 봄이는 반납할 책 두 권을 가슴에 안고 서연을 기다렸다. “이모!” 자동문이 열리자 봄이가 뛰어왔다. 서연은 아이의 이마부터 짚었다. “콧물은?” “다 나았어.” “어제까지 조금 났어.” 뒤따라온 태주가 바로잡았다. “그럼 오래 있지 말고 책만 바꾸자.” 서연은 봄이의 가방을 대신 들지 않았다. 지난번 약속대로 봄이가 책을 직접 들고 반납기에 넣었다. 어린이실에서 새 책을 고르는 동안 태주는 창가 의자에 앉아 업무 전화를 받았다. 봄이는 공룡 책과 요리책을 번갈아 들고 고민했다. “둘 다 빌리면 안 돼?” “지난번 빌린 것도 두 권 다 읽었어?” “아빠한테 읽어 줬어.” “내가 읽어 줬지.” 통화를 끝낸 태주가 끼어들자 봄이는 입을 삐죽였다. “나도 제목 읽었어.” 결국 공룡 책 한 권과 짧은 동화 한 권을 골랐다. 대출은 태주가 했고, 서연은 반납 날짜를 봄이의 수첩에 적어 줬다. 도서관을 나온 셋은 근처 분식집에 들어갔다. 봄이는 안 매운 떡볶이를 주문했고 태주는 어묵 국물을 앞에 놓아 줬다. “내일은 할머니 집에서 점심 먹어.” 태주가 말하자 봄이가 어묵을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는 아줌마 만나.” 서연의 젓가락이 멈췄다. 태주가 물컵을 봄이 쪽으로 밀었다. 밀린 물컵이 소개팅이라는 세 음절을 가렸다. 가린 음절이 떡볶이보다 맵게 남았다. “어머니가 아는 분 소개해 주신대.” “아.” “한 번 밥만 먹는 거야.” 그는 묻지도 않은 설명을 덧붙였다. “봄이는 어머니가 보시고. 2시간 정도.” “잘됐네요.” 서연은 떡볶이 접시를 봄이 쪽으로 돌렸다. “어떤 분이에요?” “신유경 씨. 서른넷이고 세무사래. 어머니 친구분 딸.” “괜찮은
금요일 저녁, 민아는 고기 한 점을 불판에 올리며 물었다.“그래서 전 약혼자가 다시 만나자고 했다고?”“두 번째 기회를 달라고 했어.”“그게 그 말이지. 넌 뭐랬는데?”“아직 아무 말 안 했어.”민아는 익은 고기를 서연의 접시에 놓았다.“그 사람, 예전에는 자기 엄마 말 한마디도 못 거절했다며.”“이번엔 달라진 것 같긴 해.”“한 번 상자 들고 왔다고?”“그것 때문만은 아니고.”서연은 촬영장에서 재민이 자기 팀의 실수를 처리한 일을 설명했다. 민아는 듣고도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사람은 달라질 수 있지. 네가 다시 만나야 할 이유랑은 별개고.”“알아.”“그리고 형부 집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또 결혼부터 생각하지 마.”“결혼 생각 안 했어.”“네 얼굴이 계산 중이길래.”서연은 물컵을 들어 입을 가렸다. 민아는 더 캐묻지 않고 불판의 고기를 뒤집었다.밤 10시가 넘어 원룸에 돌아왔을 때 방 안은 이상할 만큼 차가웠다. 보일러 조절기에는 숫자가 켜져 있었지만 바닥에 온기가 없었다.서연은 싱크대 온수를 틀었다. 한참 기다려도 찬물만 나왔다.관리인에게 전화하자 주말 당직 번호를 알려 줬다. 당직 기사는 오늘 방문이 어렵고 토요일 오전에 점검할 수 있다고 했다.서연은 접수번호와 방문 시간을 문자로 받아 두었다. 전기장판은 이사할 때 가져오지 않아 얇은 이불 두 장뿐이었다.‘우리 집 와.’상황을 들은 민아가 먼저 문자를 보냈다.
태주는 세 번째 그릇을 찬장에 넣고 문을 닫았다.“아빠, 왜 이모 그릇 꺼냈어?”봄이가 돈가스에 소스를 찍으며 물었다.“세 개 꺼내던 게 습관돼서.”“이모 이제 여기 안 사는데.”“알아. 밥 먹어.”태주는 대답하고 자기 접시를 봤다. 서연이 떠난 지 두 달이 지났다. 그동안 두 사람 몫만 차린 날이 훨씬 많았다. 그런데 오늘만 손이 틀린 이유까지 따질 필요는 없었다.밤에 봄이를 재운 뒤 그는 휴대전화를 열었다. 서연과의 대화창에는 목요일에 주고받은 도서관 시간과 책 두 권에 관한 메시지가 마지막이었다.‘잘 들어갔어?’적어 둔 문장을 지웠다. 열쇠를 돌려준 날의 확인과 같은 문장이라 더 지웠다. 열쇠를 돌려준 날에도 하지 않은 확인이었다. 대신 주방 불을 끄고 방으로 들어갔다.***다음 주 화요일, 소담살림 겨울 침구 촬영을 2시간 앞두고 문제가 생겼다.온유리빙에서 보내기로 한 베이지색 이불 한 상자가 엉뚱한 물류센터로 갔다. 메인 화면에 들어갈 제품이라 빠지면 촬영 전체를 다시 잡아야 했다.“퀵으로 받아도 3시 넘는대.”미경이 운송장 화면을 보며 혀를 찼다.“스튜디오 4시까지인데.”서연은 촬영 순서를 바꾸려고 작가에게 전화했다. 그때 협업 단체방에 재민의 메시지가 올라왔다.‘오배송은 저희 쪽 확인 누락입니다. 전시실 동일 제품 확보했습니다. 제가 스튜디오로 가져가겠습니다. 도착 예상 13:40.’서연은 전화를 끊고 답했다.‘확인했습니다. 먼저 다른 색상부터 촬영하겠습니다.’1시 37분, 재민이 큰 상자를 안고 스튜디오에 들어왔다. 코트 어깨에 먼지가 묻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