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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Author: hikarikyo
last update Petsa ng paglalathala: 2026-09-05 22:00:47

아까 명찰에서 보았던 이름, 이예원.

랩 네임은 클레이(Clay). 현재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는 본토 유학파였다.

다소 통통한 체형에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은우의 눈에는 전혀 다르게 보였다.

솔직히 첫 소절을 뱉는 호흡은 엉망이었다.

마이크를 쥔 손이 잘게 떨릴 만큼 긴장한 탓에, 박자를 저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주변 참가자들의 입꼬리가 ‘그럼 그렇지’라는 듯 비웃음으로 슬쩍 올라가던 그때.

비트를 비틀며 쏟아져 나온 유창한 영어 벌스 한 줄.

그 거친 그루브와 슬랭이 묻어난 톤을 듣는 순간, 은우의 귀가 번쩍 쫑긋했다.

‘발음이 죽이네?’

유튜브나 학원에서 흉내 낸 유창함이 아니었다.

현지 골목의 거친 호흡이 혀끝에 완벽하게 배어 있는 소리였다.

‘저건 긁지 않은 복권이었지. 반면에 과거의 나는…… 에휴.’

은우는 무심결에 제 턱선을 쓸어내렸다.

굳이 거울을 보지 않아도 기억이 생생했다.

과거의 자신은 늘 번들거리는 개기름과 거친 모공으로 가득 찬 피부였다.

하지만 손끝에 닿는 지금의 피부는 거짓말처럼 매끈했다.

다행히 꿈이 아니었다.

‘나중에 기연 누나한테 연결해 줘야겠다. 래퍼보다는 제대로 다듬으면 빛날 아이돌 보컬 상이야.’

진흙 속에서 다이아몬드 원석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은우는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

긴 녹화 시간 탓도 있었지만, 솔직히 슬슬 지루해진 탓이었다.

물론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인성 논란을 잠재울 만큼 확실한 눈도장을 찍은 상태는 아니었으니까.

“이어서 2학년들의 사이퍼가 진행됩니다!”

장내가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키가 훤칠하고 덩치가 산만 한 윤영진이 묵직한 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저기, 윤영진 참가자. 정말 고2 맞습니까?”

심사위원석에 앉아 있던 헤이팍이 마이크를 잡았다.

“네. 열여덟 살, 고2 맞습니다.”

“홀리 쉿.”

헤이팍이 랩을 듣기도 전에 신고 있던 신발을 벗어 바닥에 던지는 리액션을 취했다.

그러자 윤영진이 덥수룩한 턱수염 아래로 매서운 눈빛을 번뜩이며 헤이팍을 노려보았다.

“아, 영진 학생, 오해하지 마요. 이미 얼굴부터 완성된 갱스터 아우라라서 그래요. 특히 턱수염이 아주 멋있네요.”

윤영진은 고등학생 참가자 중 유일하게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그가 덤덤하게 손을 들며 덧붙였다.

“저, 누가 봐도 열여덟 살 맞습니다.”

그 능청스럽고 뻔뻔한 한마디에 주변 참가자들은 고개를 돌리고 키득거리며 웃음을 참았다.

하지만 유일하게 은우만은 웃지 않았다.

아니, 웃을 수 없었다.

‘쯧쯧. 외모로만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되지.’

은우는 오히려 겉모습만 보고 호들갑을 떠는 헤이팍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2학년 참가자들 중 단연 군계일학은 윤영진이었다.

‘역시 날것의 감성이 주는 묵직한 울림이 있어.’

마치 제작진이 윤영진을 위해 맞춤형으로 준비한 듯, 거친 비트 위에 둔탁한 랩이 꽂혔다.

목소리에서 8기통 대형 트럭 엔진 소리가 나는 독보적인 톤.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스스로 빌런이 될 수밖에 없었던 서사가 랩에 그대로 녹아 있었다.

비록 치기 어린 10대의 감성이 묻어났지만, 그 묵직한 질감은 결코 아무나 흉내 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심사위원들의 표정에도 흡족한 기색이 완연했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과연 그가 대중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인가와 향후 ‘누가 이 독이 든 성배를 감당할 것인가’였다.

힙합 씬은 늘 크고 작은 사건 사고로 얼룩져 있었다.

스타성은 확실하지만, 통제 불능의 인성 논란과 일탈 위험을 안고 시작해야 하니 제작자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운 카드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이유만으로 외면하기엔 너무나 아까운 재능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윤영진은 2년 뒤에 대중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게 되지. 하지만 결국 스스로 나락을 선택하고 마는데…… 이번 생에는 제발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네.’

은우가 씁쓸한 생각을 삼키고 있을 때, 진행 멘트가 이어졌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3학년 8명의 사이퍼를 시작하겠습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표은우는 망설임 없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무대였다.

비록 눈앞에 있는 관객이라곤 30여 명의 참가자들과 스태프들이 전부였지만, 심장이 기분 좋게 요동쳤다.

“DJ 바냐, 드롭 더 비트!”

띠리리릭- 둥, 둥!

날카로운 신스음과 육중한 베이스가 스튜디오 바닥을 묵직하게 흔들었다.

다른 3학년 참가자들은 비트의 템포를 가늠하며 평소 써둔 벌스 중 어떤 것을 우겨넣을지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바로 그때, 은우가 거침없이 중앙으로 걸어 나가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마이크를 들어 올렸다.

‘저런 빡센 트랩 비트에도 아까처럼 싱잉 랩을 비비겠다고?’

‘박자 다 쪼개지는 비트인데 설마 자폭하려는 건가?’

모두가 의아함과 조소 어린 시선으로 바라볼 때, 체인쏘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저 녀석…… 또 눈 돌아갔네.’

과거 예선장에서 손을 번쩍 들고 도발하던 바로 그 섬뜩한 눈빛이었다.

은우가 마이크를 입가에 바짝 대고 첫 소절을 내뱉었다.

“내 희망을 고문하면, 네 행복을 공개처형……”

스튜디오의 공기를 단숨에 얼려버리는 차갑고 음산한 로우 톤.

순식간에 참가자들의 얼굴이 굳어졌고, 심사위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라쿤아.”

“네, 형.”

“너 고등학생 중에 저런 눈빛으로 랩하는 놈 본 적 있냐?”

“없어요…… 눈빛이 무슨 지옥에서 한 번 죽었다 기어 나온 악마 같은데요?”

틀린 말이 아니었다.

은우는 지난 생의 한과 절망을 딛고 되살아난 존재였으니까.

“동화책 덮어, 여긴 선물 따윈 없어. 산타 대신 사탄이 네 목을 꺾어-”

기괴한 소름을 유발하는 음산한 래핑이 스튜디오를 집어삼켰다.

1분 남짓한 시간 동안, 현장에 있던 전원이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그 압도적인 광기에 홀려버렸다.

삐비비빅-

DJ 바냐가 다음 비트로 전환했다.

하지만 마이크를 이어받으려 나서는 참가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비트 하나가 통째로 허공에 날아갔다.

“어…… 다음 학생, 나와 주세요!”

보다 못한 MC 넋업샨이 마이크를 잡고 재촉했다.

하지만 그조차 은우가 깔아놓은 이 서슬 퍼런 공기 속에서 과연 누가 제정신으로 랩을 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때, 한 소년이 성큼 마이크를 낚아채 중앙으로 나섰다.

지역 예선 조회 수 최강자, 이민태였다.

“반갑구먼! 소 여물 주다 올라온 이민태여!”

구수한 사투리와 상반되는 밝고 타격감 넘치는 하이 톤 랩이 은우가 만든 다크한 분위기를 단숨에 환기했다.

‘제법이네. 역시 미래의 머니더쇼 우승자답다.’

원래 역사대로라면 이민태는 이번 급식 래퍼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뒤, 이듬해 ‘머니더쇼 11’에서 당당히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게 된다.

그만큼 리듬감과 스타성이 완성된 래퍼였다.

은우 역시 과거에 그의 스타일이 마음에 들어 수없이 카피하며 연습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은우의 랩 스승이기도 했다.

지금의 은우가 유리한 것은 훗날의 트렌드와 방대한 음악적 경험 덕분이지, 순수한 힙합 스킬 하나만 놓고 본다면 결코 방심할 수 없는 상대였다.

말하자면 이민태는 지금, 1년 뒤 완성될 자기 자신의 미래와 맞붙고 있는 셈이었다.

“옛다, 받아라!”

벌스를 깔끔하게 끝낸 이민태가 뒤쪽 대기자에게 마이크를 가볍게 토스했다.

하지만 세 번째 주자는 앞선 두 괴물의 기세에 완전히 질려 첫 박을 놓쳤다.

네 번째 주자 역시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고 가사를 절었다.

이어 마이크를 넘겨받은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참가자는 아예 멘탈이 나간 채 고개를 가로저으며 마이크를 뒤로 넘겨버렸다.

일곱 번째 참가자가 간신히 비트를 탔지만 앞선 무대들에 비하면 턱없이 밋밋했다.

저학년 대기석 쪽에서는 슬그머니 ‘3학년 거품설’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위이이잉-!”

마지막 여덟 번째 주자인 체인쏘가 전기톱 소리를 연상시키는 날카로운 발성으로 랩을 쏟아냈다.

앞선 주자들이 줄줄이 무대를 망쳐놓은 덕분인지, 체인쏘의 깔끔한 딜리버리가 한층 돋보였다. 은우에게 참패한 뒤 현역 언더 래퍼에게 개인 레슨까지 받으며 이를 갈고 연습한 결과물이었다.

“오, 쟤 나쁘지 않은데?”

헤이팍이 고개를 까딱이며 리듬을 탔고, 라쿤 역시 큐시트에 무언가를 빠르게 메모했다.

체인쏘의 랩을 끝으로 마침내 모든 학년의 사이퍼가 종료되었다.

“자! 이상으로 총 서른두 명 참가자의 사이퍼를 모두 들어봤습니다! 저희는 이제 4명씩 총 8개의 팀으로 나뉘게 됩니다. 팀 선택 베네핏은 각 학년별 1위에게 주어지며, 1위로 선정된 학생은 원하는 팀원을 직접 지목해 데려갈 수 있습니다. 아, 그런데 은우 학생!”

“네?”

“외모와는 정반대로 어마어마한 반전 랩을 보여줬는데…… 혹시 아까 그 벌스, 무반주로 한 번만 더 들려줄 수 있나요?”

넋업샨이 순수한 리스너의 욕심을 담아 던진 제안이었다.

하지만 은우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못 합니다.”

“네? 아, 무반주라 부담스러워서요? 그럼 DJ한테 아까 그 비트 다시 틀어달라고 할까요?”

“아뇨, 그게 아니라…… 방금 건 즉흥 프리스타일이어서요. 저도 제가 무슨 가사를 뱉었는지 솔직히 기억이 잘 안 납니다. 하하.”

은우가 쑥스럽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 정교한 라임 배치와 날 선 은유로 가득 찬 랩이, 미리 써둔 벌스가 아니라 순수 즉흥이었다고?

순간 스튜디오 전체가 거대한 충격과 의구심에 휩싸였다.

그때, 침묵을 깨고 심사위원석에서 육중한 그림자가 벌떡 일어났다.

“잠깐만요. 표은우 학생, 방송에서 거짓말하면 안 됩니다.”

힙합 씬의 산증인이자 대부로 불리는 풀스윙(A.K.A 귓방망이)이었다.

그가 굵은 팔짱을 낀 채, 날카로운 눈빛으로 은우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현역 베테랑조차 며칠 밤을 새워 깎아야 나올 수준의 고밀도 벌스.

10대 아이돌 지망생이 즉흥으로 뱉었다는 말을 그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아까 던진 질문처럼 남의 가사를 도용해 놓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 의심한 그의 턱 근육이 팽팽하게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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