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어? 왜?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나중에 뼈저리게 배가 아플 테니까.”
농담처럼 툭 던진 말이었지만,
장군의 깊게 파인 주름 사이로 비치는 눈빛만큼은 어느 때보다 예리하고 진지했다.
40년간 뉴욕 길거리의 수많은 재능이 피고 지는 것을 지켜봐 온 그의 본능적인 직감이 확신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만약 저 낯선 동양인 소년이 이 지독하고 거친 바닥의 유혹에 엇나가지 않고,
지금처럼 곧게 위를 향해 올라가기만 한다면?
장담컨대 머지않아 누구도 함부로 닿을 수 없는 전무후무한 가수가 될 것이 분명했다.
장군의 묵직한 선언에 젤리곰 일행이 흥미롭다는 듯 실없이 웃으며 반문했다.
“하하, 귀 깐깐한 할아범이 근래에 누굴 그 정도로 극찬한 적이 있었나?”
“그 어린 빅토르가 엄마의 무덤을 파헤치려다 묘지기에게 들키지.”감독이 말을 이었다.은우는 숨을 죽이고 들었다.빅토르의 아버지는 아들을 군대에 보낸다.군대는 오히려 빅토르에게 기회였다.의학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빅토르는 다친 병사들을 치료하면서 마음껏 임상실험을 할 수 있었다.그런 그에게 시련이 찾아왔다.전쟁이 끝나 버린 것이다.평화로운 세상의 사람들은 악마의 재능을 감당할 수 없었고, 급기야 빅토르는 칩거에 들어갔다.“전쟁이 끝난 게 시련이라고요?”“그게 이 이야기의 무서운 점이야. 빅토르에게는 전쟁터가 실험실이었으니까.”“빅토르는 나쁜 사람이에요?”“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아니야. 미친 사람이지. 엄마를 살리고 싶었던 미친 아들.”감독의 대답에 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영화에서는 이 전쟁 장면을 3분짜리 노래 하나로 보여 줘. 포탄이 터지는 참호 속에서 빅토르가 웃으면서 수술을 하지. 그 장면 찍는 데만 2주가 걸렸어.”“3분 때문에 2주요?”“영화는 원래 그래. 관객은 3분 보지만, 우린 2주를 찍어.”그런 빅토르를 찾아온 것이 트레제게였다.트레제게는 빅토르를 동경했고, 아꼈으며, 물질적인 지원도 마다하지 않았다.두 사람이 술을 마시며 실패의 아픔을 달래고 있을 때, 트레제게에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무에서 유를 창조할 순 없지만, 유에서 유를 창조하는 건 더 쉽지 않을까?”빅토르는 어린 시절 죽은 강아지를 살렸던 일을 떠올렸다.“그거야! 트레제게!”
“영화 OST?”표은우의 손가락이 멈춘 곳을 보고 조이가 씨익 웃었다.“역시 그걸 고를 줄 알았어.”“왜?”“마침 지금 당장 가 봐야 하는 현장이 하나 있거든.”조이는 은우가 뭐라 하기도 전에 운전대를 꺾었다.숙소로 가던 차가 방향을 틀어 고속도로로 올라섰다.“지금? 바로?”“응. 급한 일이야. 잠깐만.”조이는 차에 연결된 전화로 어딘가와 짧게 통화했다.상대는 할리우드의 한 영화감독이었다.조이는 지금 그리로 가고 있으니 딱 기다리라는 말만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가면서 설명해 줄게.”조이는 운전하면서 상황을 간단히 설명했다.소닉뮤직스가 투자한 뮤지컬 영화.괴물 역을 맡은 주연 배우가 성대결절에 걸렸다는 것.그리고 녹음이 멈춰서 개봉이 위태롭다는 것까지.“그럼 내가 OST를 부르는 거야?”“음··· 비슷해. 일단 가 보면 알아.”은우는 조이를 흘끗 쳐다봤다.이 말투는 어디서 들어 본 적이 있었다.LA로 오던 날, 강기연도 똑같이 말했다.가 보면 안다고.‘이 바닥 사람들은 왜 다 이렇게 말하지?’“음악감독은 누군데?”“플래쳐.”은우는 그 이름을 알았다.전생에서 그 드러머 영화를 몇 번이나 돌려 봤다.피 묻은 드럼 스틱, 스승의 고함 소리.음악 하는 사람치고 그 영화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그 플
할리우드의 한 녹음 스튜디오.새벽 2시가 넘었는데도 불이 꺼지지 않았다.“다시.”플래쳐는 할리우드에서 매우 유명한 음악감독이다.이미 두 편의 음악 영화를 자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성공시키며 ‘믿고 듣는 감독’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그중 첫 작품은 광기 어린 스승과 드러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였다.피가 튈 때까지 드럼을 치게 만드는 스승.사람들은 그 영화의 음악을 듣고 열광했고, 그 음악을 만든 플래쳐에게 찬사를 보냈다.하지만 이러한 영광이 그를 벼랑 끝으로 몰았다.명예란 모래탑과 같은 것.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기에 그는 강박관념에 빠졌다.‘차기작은 더··· 더 퀄리티를 높여야 해.’그가 이번에 맡은 작품은 한국에서도 유명한 뮤지컬 ‘프랑켄’을 할리우드 버전으로 리메이크한 영화였다.뮤지컬 영화.배우가 직접 노래를 부르고, 그 노래가 곧 대사가 되는 영화였다.음악감독의 역량이 영화의 성패를 가르는 장르였다.유리창 너머 녹음 부스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괴물 역을 맡은 배우, 피터였다.그는 벌써 몇 시간째 같은 소절만 반복하고 있었다.“다시.”“네.”피터가 숨을 고르고 다시 노래를 불렀다.플래쳐가 손을 들어 노래를 끊었다.“거기서 숨 쉬지 말라고 했지?”“숨을 안 쉬면 다음 소절이 안 나와요.”“그건 네 사정이고.”“플래쳐, 벌써 네 시간째예요. 딱 10분만 쉬면···.&rdq
은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해체한 건 알았는데, 왜 해체했는지는 잘 몰라요.”“멤버 중 하나가 문제를 일으켜서 해체가 됐어···.”“아! 그 사건 알아요. 아주 그냥 전국적으로 난리가 났잖아요.”지훈이 아는 체를 하다가 체인쏘에게 옆구리를 찔렸다.지훈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그래. 그 뒤로 케플라에 입사해서 지금까지 있는 거야.”“누나, 대단한 사람이었군요.”“눈보라 멤버들하고는 지금 연락하고 지내세요?”“아니. 다들 조용히 일반인의 삶을 살고 싶다고 해서 연락 안 하고 있어. 몇몇은 안 좋은 소식도 있고.”“아···.”“그래도 가끔 걔네 노래가 라디오에서 나오면, 그날은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아.”강기연은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더는 묻지 말라는 뜻이었다.멤버들도 그 뜻을 알아들었다.곤이 괜히 남은 감자튀김을 강기연 접시에 밀어 줬다.강기연은 피식 웃으며 그걸 집어 먹었다.표은우는 강기연이 보통 사람은 아니라고 느꼈다.아직 30대 중반인데, 자신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많은 일을 겪은 사람이었다.아이돌로 실패하고, 매니저로 성공하고, 그리고 그 성공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까지.그녀의 감은 오랜 경험이 만들어 낸 산물이었다.그리고 은우는 기억하고 있었다.전생에서도 강기연은 못생긴 은우에게 기회를 주려 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모두가 얼굴을 보고 고개를 저을 때, 강기연만 은우의 노래를 들었다.그때는 몰랐다.그
더블유의 근황이 끝나자 이번엔 지훈의 차례였다.지훈은 학교로 돌아가 본격적으로 보컬 수업을 들었다.호흡과 발성을 처음부터 다시 익히는 중이었다.그러면서 알게 됐다.은우가 아무렇지 않게 해내던 것들이 사실은 교과서 맨 마지막 장에 나오는 기술이라는 걸.“진짜 배우면 배울수록 은우 형은 천재라니까요. 선생님들이 하는 말이 이해가 안 되면 은우 형이 부른 노래를 들어요. 그러면 싹 풀려요.”“교과서 취급이네.”“교과서보다 낫죠. 교과서는 노래를 안 하잖아요.”“그럼 한국 가면 직접 봐 줄게. 발성부터.”“진짜요? 약속했어요!”지훈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은우는 못 이기는 척 손가락을 걸었다.“두팔이 형은요? 형은 뭐 했어요?”곤이 체인쏘를 쳐다봤다.체인쏘는 대답 대신 콧방귀를 뀌었다.“흥. 비밀.”“에이, 말해 줘요.”“앨범 나오면 알게 될 거야.”체인쏘는 그 말만 하고 다시 고기를 썰었다.은우는 체인쏘의 손가락 끝을 봤다.펜을 오래 쥔 사람처럼 가운뎃손가락에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가사 쓰고 있었구나.’은우는 모른 척해 주기로 했다.곤이 고기를 꿀꺽 삼키고 손을 들었다.“그럼 형, 여기서 노래 한번 불러 줘요!”“여기서?”은우는 포크를 내려놓았다.“후··· 너희, 내가 미국에서 ‘노래 한 번만’ 소리 듣고 어떤
크리스마스이브 아침.강기연은 숙소 문을 두드려 은우를 깨웠다.“은우야. 일어나. 선물 받으러 가자.”“선물이요? 벌써요?”“응. 근데 선물이 좀 커서 공항으로 가야 돼.”은우는 영문도 모른 채 강기연을 따라 LA 공항으로 향했다.입국장 앞은 사람들로 북적였다.은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공항에서 무슨 선물을 받아? 설마 누나가 한국 가는 비행기 표를 사 준 건 아니겠지?’“누나. 대체 뭔데요?”“기다려 봐. 곧 나와.”“나와요? 선물이 걸어 나와요?”강기연은 대답 대신 전광판만 쳐다봤다.인천발 LA행 비행기의 도착 표시가 막 바뀌고 있었다.그때였다.“은우형!”곤이 저 멀리서 캐리어를 내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