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2화. 같은 시간, 같은 방
일주일은 빠르게 지나갔다.
진서아에게는 그랬다.
에덴의 밤은 늘 비슷했다. 웃고, 잔을 채우고, 적당한 순간에 상대의 말을 들어주다 보면 새벽이 왔다. 그사이에 남자들은 사랑을 고백하거나, 아내를 욕하거나,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떠들었다.
서아는 전부 들어줬고 대부분 잊었다.
한시준도 그중 하나였다.
조금 잘생겼고, 아주 돈이 많고, 사람을 쳐다보는 눈이 불쾌할 만큼 집요했던 손님.
그 정도였다.
"서아야."
대기실 소파에 앉아 휴대전화를 확인하던 서아가 고개를 들었다.
실장이 문에 기대 서 있었다.
"VIP룸 준비해."
"오늘도요?"
"오늘도라니. 지난주 손님이잖아."
서아는 잠깐 눈을 굴렸다.
지난주 VIP룸.
검은 머리, 목 문신, 사람을 물건처럼 훑던 남자.
그제야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아."
서아의 반응에 실장이 헛웃음을 흘렸다.
"잊고 있었어?"
"손님이 한둘이어야 기억하죠."
"한율그룹 부사장을 일주일 만에 잊는 여자는 너밖에 없을 거다."
서아는 거울을 보며 입술에 붉은색을 덧입혔다.
"다시 오면 기억하면 되잖아요."
"같은 시간에 같은 방으로 예약했어. 술도 지난주랑 똑같은 걸로."
"성실하네."
"그리고 너 말고 아무도 들이지 말래."
그 말에 서아의 손이 잠시 멈췄다.
첫날부터 독점 욕구를 드러내는 남자는 드물지 않았다. 하지만 대부분은 돈을 더 쓰겠다는 말로 끝났다.
한시준은 달랐다.
요구하면 그대로 만들어지는 삶에 익숙한 사람의 방식이었다.
"까다로운 손님이네."
서아가 립스틱 뚜껑을 닫았다.
실장이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조심해."
"제가요?"
서아는 웃었다.
"언니도 알잖아요. 조심해야 하는 건 보통 남자 쪽인 거."
진한 장미 향이 대기실에 번졌다.
서아는 검은 드레스의 허리선을 정리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난주와 다른 옷, 다른 귀걸이, 다른 머리 모양이었다.
미소만 같았다.
VIP룸 문을 열자 익숙한 나무 향이 흘러나왔다.
시준은 지난주와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다리를 길게 뻗은 채 한 손에는 잔을 들고 있었다. 검은 셔츠의 단추가 두 개 풀려 있었고, 그 틈으로 목의 문신이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
서아가 들어오자 그의 눈이 천천히 움직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지난주와 같은 시선이었다.
"안녕하세요."
서아가 웃었다.
"오랜만이에요."
시준의 입가가 비틀렸다.
"일주일이 오래됐나?"
"보고 싶었던 사람한테는 길죠."
매끄러운 대답이었다.
서아는 그의 옆에 앉으며 자연스럽게 술병을 들었다. 이번에는 시준도 막지 않았다.
맑은 술이 잔 안으로 흘러내렸다.
"내가 보고 싶었어?"
시준이 물었다.
서아는 술병을 내려놓고 그를 바라봤다.
"오신다고 하셨잖아요."
"대답이 아닌데."
"기다렸어요."
"그것도 대답이 아니고."
시준은 잔을 들지 않았다.
그는 서아의 얼굴만 보고 있었다.
지난주부터 이어진 시험 같았다.
서아는 조금 더 가까이 몸을 기울였다. 향수 냄새가 두 사람 사이를 채웠다.
"듣고 싶은 말이 따로 있으세요?"
"보고 싶었다는 말."
"말해드릴까요?"
"거짓말로?"
서아가 눈을 휘며 웃었다.
"진짜처럼 해드릴 수는 있는데."
시준의 시선이 입술에 머물렀다.
"그게 네 특기지."
"그래서 일등이고요."
서아는 그의 잔을 손에 쥐여줬다.
손끝이 닿았지만 이번에는 시준이 잡지 않았다.
대신 잔을 받은 채 물었다.
"지난주에 내가 뭘 마셨는지 기억해?"
서아의 시선이 테이블 위 술병으로 향했다.
"이거요."
"보고 대답한 거잖아."
"맞아요."
너무 쉽게 인정하는 태도에 시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기억 못 해?"
"모든 손님이 마신 술까지 외우지는 않아요."
"모든 손님."
낮게 반복한 목소리가 어딘가 서늘했다.
서아는 그 변화가 재미있었다.
그가 듣고 싶은 것은 분명했다.
당신은 달랐다고.
일주일 동안 기억에 남았다고.
다시 올 시간을 기다렸다고.
그러나 서아는 굳이 그런 말을 해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한시준은 이미 다시 왔다.
상대가 잡힌 뒤에는 미끼를 더 줄 필요가 없었다.
"부사장님은 기억하세요?"
그녀가 반대로 물었다.
"뭘."
"제가 지난주에 무슨 드레스를 입었는지."
시준은 망설이지 않았다.
"붉은색."
"귀걸이는요?"
"길게 떨어지는 금색."
"향수는?"
시준이 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장미."
서아의 눈썹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
시준은 그 미세한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왜. 내가 기억해서 놀랐어?"
"조금."
"난 마음에 든 건 잘 기억해."
"그래요?"
"넌 아니고?"
서아는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시준은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그녀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생각보다 거슬렸다.
지난 일주일 동안 시준은 몇 번이나 장미 향을 떠올렸다. 회의 중에도, 차 안에서도, 다른 여자가 옆에 앉아 있을 때조차 붉은 입술과 무심한 눈이 생각났다.
그런데 정작 서아에게 자신은 술 종류조차 외울 가치가 없는 손님이었다.
시준에게는 낯선 감각이었다.
자신만 기억하고 있다는 불균형.
그는 그런 관계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오늘은 얼마나 있어?"
"두 시간."
"그 뒤에는?"
"다른 방이요."
시준의 잔이 테이블 위에 내려앉았다.
단단한 소리가 났다.
"지난주에도 그랬지."
"인기가 많아서요."
서아는 조금도 미안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랑하듯 말했다.
시준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 방에서도 이렇게 웃어?"
"어떻게요?"
"지금처럼."
"네."
"손도 닿고?"
서아는 그의 질투를 알아챘다.
정확히는 질투라기보다 소유욕에 가까웠다.
자신에게 제공된 것이 다른 남자에게도 똑같이 제공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그녀는 그런 남자들을 많이 봤다.
처음에는 자신이 특별하다고 믿고, 나중에는 특별하지 않다는 사실에 화를 내는 남자들.
서아는 시준의 넥타이가 비뚤어진 것을 발견하고 손을 뻗었다.
그가 움직이지 않는 사이 매듭을 느슨하게 풀었다.
"더한 것도 하죠."
시준의 눈빛이 낮아졌다.
"더한 거?"
"손님이 원하고, 저도 괜찮으면."
그녀의 손끝이 셔츠 깃을 스쳤다.
도발처럼 들리는 말이었지만 목소리는 지나치게 태연했다.
시준의 손이 서아의 허리를 감쌌다.
힘이 실린 팔이 그녀를 단숨에 끌어당겼다.
서아의 무릎이 소파 위로 올라갔다. 몸이 가까워지며 드레스 자락이 허벅지 위로 조금 밀렸다.
시준은 그녀를 자신의 다리 가까이에 붙잡아둔 채 얼굴을 들었다.
"그럼 나도 괜찮은지 물어봐."
숨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서아는 허리를 감싼 손을 내려다봤다.
손바닥의 열이 얇은 천을 뚫고 전해졌다.
위험한 남자였다.
돈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신이 원하는 순간 멈추지 않을 것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아는 물러나지 않았다.
그녀는 시준의 어깨에 한 손을 올리고 천천히 몸을 숙였다.
입술이 그의 귓가에 가까워졌다.
"괜찮아요?"
부드러운 숨과 함께 떨어진 질문이었다.
시준의 팔에 힘이 더 들어갔다.
"안 괜찮다고 하면?"
"그럼 내려가고요."
"괜찮다고 하면?"
서아의 입술이 그의 귀에 닿을 듯 말 듯 멈췄다.
"시간만큼은 있어드려야죠."
시준은 짧게 웃었다.
낮고 거친 웃음이었다.
"끝까지 손님 취급이네."
"손님이시니까."
"내가 네 몸에 손을 대고 있는데도?"
서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의 시선이 가까이에서 맞물렸다.
"돈을 내고 제 시간을 산다고 제가 부사장님 여자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되게 만들 수도 있지."
"돈으로요?"
"돈이 아니어도."
자신감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서아는 그 확신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서도 흥미로웠다.
그녀는 시준의 가슴을 가볍게 밀었다.
이번에는 그가 순순히 팔을 풀었다.
서아는 원래 자리로 돌아가 흐트러진 드레스 자락을 정리했다.
"한번 해보세요."
시준의 시선이 그녀를 따라왔다.
"뭘."
"저를 부사장님 여자로 만드는 거."
서아가 잔을 들어 입술에 가져갔다.
"대신 실패하면 창피하실 텐데."
시준의 표정이 멈췄다.
잠시 뒤, 그가 혀끝으로 입술 안쪽을 천천히 훑었다.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서아는 알지 못했다.
그 순간 장난감으로 분류된 것은 자신이 아니라, 한시준의 자존심이었다.
두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서아는 정확한 시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준은 붙잡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가방을 드는 모습을 지켜봤다.
"다음 주에도 올 거예요?"
서아가 물었다.
"넌 내가 오길 바라?"
"오시면 좋죠."
"왜."
"돈 많이 쓰시니까."
너무 솔직해서 오히려 잔인한 대답이었다.
시준은 웃지 않았다.
서아는 문을 열기 전에 돌아봤다.
"예약은 실장님 통해서 해주세요."
"진서아."
"네?"
"개인 번호 줘."
서아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작은 카드를 꺼냈다.
시준이 손을 내밀었다.
카드 앞면에는 에덴의 대표 번호가 적혀 있었다.
시준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게 네 번호야?"
"저한테 연결되는 번호예요."
"가게를 통해서."
"손님은 원래 가게를 통해 만나니까요."
서아가 웃었다.
"다음 주에 봬요, 부사장님."
문이 닫혔다.
시준은 손에 들린 카드를 한참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카드를 반으로 접었다.
한 번.
다시 한 번.
손가락 사이에서 두꺼운 종이가 구겨졌다.
시준은 휴대전화를 꺼내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진서아."
상대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가 말했다.
"개인 번호 알아내."
전화를 끊은 시준은 구겨진 카드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다 잠시 생각을 바꾼 듯 다시 집어 들었다.
버리지는 않았다.
그는 카드에 적힌 에덴 대표 번호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서아는 자신을 손님이라고 했다.
그 말이 얼마나 오래 유지될지 궁금했다.
다음에는 그녀가 정한 선을 하나쯤 넘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선을 넘은 뒤에도 진서아가 지금처럼 웃을 수 있는지 확인할 생각이었다.
# 특별외전 - 우리가 사는 방식## 진서아 시점결혼했다고 해서 라운지의 규칙이 바뀌지는 않았다.한시준도 예외는 아니었다.그런데 결혼 후 첫 금요일, 그는 예약도 없이 라운지 문을 열고 들어왔다.나는 바 안쪽에서 그를 바라봤다."오늘 예약 없는데요."시준이 멈췄다."남편도 예약해야 해?""손님으로 올 거면요."그의 표정이 굳었다.라운지에는 이미 손님이 몇 명 있었다.그중에는 강도현도 있었다.시준은 도현과 바 위에 놓인 디저트 상자를 번갈아 봤다.결혼 전부터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조합이었다."그럼 손님 아니면.""뭐로 왔는데요?"시준은 잠시 생각했다."너 보러.""그건 영업 끝나고요."직원 한 명이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숙였다.시준은 불쾌한 얼굴로 바 끝자리에 앉았다."그럼 예약할게.""오늘은 자리가 없어요.""여기 비어 있잖아.""그 자리는 예약석이에요.""누가.""곧 오세요."시준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나는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예약자를 확인하고 싶을 것이다.남자라면 취소시키고 싶을지도 몰랐다.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잠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끝나면 연락해.""가려고요?""네 규칙이라며."화를 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표정만으로도 라운지 온도가 내려갈 정도였다.그래도 나가야 할 때 나갔다.나는 문을 열고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봤다.직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괜찮으세요?""뭐가?""부사장님 화난 것 같은데.""맞아.""그런데 그냥 보내요?"나는 새 잔을 꺼냈다."화난 건 본인이 해결해야지."그날 마감을 마치고 나가자 시준은 건너편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정확히 네 시간 동안.차에 타자마자 그가 물었다."예약자 누구였어.""여자 손님이요."굳어 있던 얼굴이 아주 조금 풀렸다."그걸 먼저 말했어야지.""왜요?""괜히 기다렸잖아.""여자면 괜찮고 남자면 안 괜찮아요?"시준은 안전벨트를 매주는 척 내 쪽으로 몸을 기울
#특별외전 - 한시준 시점(2)## 네가 내게 걸어오던 날결혼식 날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많이 내리지는 않았다.문제는 비가 내린다는 사실 자체였다.나는 한 시간 단위로 기상 자료를 확인했다.오후에는 그칠 가능성이 높다고 했지만 가능성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실내로 옮길까요?"행사 담당자가 물었다.정원과 연결된 실내 공간은 이미 준비돼 있었다.하객을 전부 수용할 수 있도록 테이블 배치도 바꿀 수 있었다.결정만 하면 됐다.나는 정원 끝의 작은 단상을 바라봤다.서아가 그곳에서 웃고 있는 모습이 상상된다고 말했다.그래서 이 장소를 골랐다.정확히는 서아가 골랐고, 내가 동의했다."기다려."나는 휴대전화를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서아에게 전화하면 드레스와 준비를 마치기도 전에 비 이야기부터 꺼낼 것이다.그녀가 직접 결정하게 해야 했다.그 사실은 알았지만 기다리는 건 여전히 어려웠다.오전 열한 시가 넘어 서아에게 메시지가 왔다.[비 오는 것도 괜찮아요.]나는 화면을 보자마자 전화를 걸었다."밖 봤어?"[봤어요.]"정원 바닥 젖어."[의자만 닦으면 되죠.]"드레스도 젖을 수 있어."[그럼 조금 젖죠.]"감기 걸리면."[한시준 씨.]서아의 목소리에 웃음이 섞였다.[저 결혼하러 가는 거지 야외 촬영하러 가는 거 아니에요.]"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건데."[원래대로 해요.]"비 계속 오면."[우산 쓰고요.]역시 진서아였다.나는 담당자에게 정원 예식을 그대로 진행하라고 말했다.대신 통로 위에 투명 천막을 설치하고, 하객 자리에 우산과 담요를 추가했다.서아가 부탁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선택을 바꾸는 일은 아니었다.비를 멈출 수는 없어도 그녀가 불편하지 않게 준비할 수는 있었다.하객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강재혁은 나를 보자마자 웃었다."긴장하셨습니까?""아니.""넥타이가 비뚤어졌습니다."손을 올려 확인하자 멀쩡했다.재혁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농담입니다.""오늘 끝나고 보자.""결혼
#특별외전 - 진서아 시점(2)## 내가 고른 결혼식결혼식을 하지 않을 생각은 아니었다.다만 한시준과 결혼한다는 이유로 내 결혼식까지 한율그룹 행사가 되는 건 싫었다.그 생각이 더 확실해진 건 한율 비서실에서 보내온 첫 번째 결혼식 기획서를 본 뒤였다.서울 시내 특급호텔 그랜드볼룸.하객 예상 인원 천이백 명.정재계 주요 인사와 계열사 대표, 해외 협력사 관계자까지 포함된 명단.결혼식이라기보다 한율그룹 후계자의 공식 발표회에 가까웠다.나는 기획서를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확인한 뒤 시준을 바라봤다."이거 봤어요?"시준은 소파에 앉아 태블릿으로 업무 자료를 확인하고 있었다."뭘."나는 두꺼운 기획서를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표지에 적힌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한율그룹 한시준 부사장 결혼식 진행안.신부 이름은 작은 글씨로 그 아래에 붙어 있었다.진서아."제 이름이 부제예요?"시준이 문서를 펼쳐보더니 표정이 굳었다."누가 보냈어.""비서실이요."그는 곧바로 휴대전화를 집었다.나는 그의 손을 눌렀다."또 전화부터 하지 말고요.""이건 내가 지시한 게 아니야.""알아요."시준이 원했다면 신부 이름조차 없는 결혼식 기획서가 왔을지도 모른다.그래도 그는 적어도 내게 묻기 전에는 장소조차 정하지 않았다."그럼 어떻게 하고 싶은데."시준이 물었다.나는 기획서를 다시 넘겨봤다."여기 있는 것 중에 마음에 드는 건 하나 있어요.""뭔데.""음식."시준의 입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그것만?""네."나는 기획서를 덮었다."결혼식은 작게 하고 싶어요."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얼마나 작게.""제가 얼굴과 이름을 아는 사람만 부를 수 있을 정도로요.""그럼 한율 쪽은.""시준 씨가 정말 부르고 싶은 사람만요."시준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한율 후계자의 결혼식은 개인 행사가 될 수 없다는 말을 이미 여러 번 들었을 것이다.회사와 집안, 언론과 투자자까지 모두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내가 그 현실을
#특별외전 - 한시준시점 (1) ## 처음으로 갖지 않기로 한 사람결혼한 뒤에도 진서아는 내 것이 아니었다.법적으로는 배우자였고, 같은 주소에 살았으며, 서류 위에는 내 이름 옆에 그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하지만 그것이 서아를 소유할 권리는 아니었다.그 사실을 이해하기까지 나는 너무 많은 것을 망쳤다.에덴에서 진서아를 처음 본 순간, 나는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정확히는 가지고 싶었다.긴 검은 머리와 붉은 입술, 방 안에 들어서는 순간 모든 시선을 자신에게 모으는 태도.자신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여자였다.그런 여자는 익숙했다.원하는 것을 물어보고, 적당한 가격을 제시하면 됐다.그런데 진서아는 달랐다.완벽하게 웃으면서도 나를 보지 않았다.내가 무슨 말을 원하는지 알았고,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도 알았지만, 그 안에 자신은 없었다.세 번의 미소가 전부 같다고 말했을 때 그녀의 눈빛이 처음으로 조금 변했다.그 짧은 흔들림이 마음에 들었다.그래서 손목을 잡았다.그녀가 나를 의식하게 만들고 싶었다."밀어내지 않는다고 원하는 건 아니에요."서아가 내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냈다.기분이 나빴다.내 손을 거절한 여자는 있었지만, 내가 잘못된 기준을 가지고 있다고 가르치듯 말한 여자는 처음이었다.그날부터 나는 진서아를 다시 부르기 시작했다.처음에는 단순한 승부라고 생각했다.다른 손님에게 보이는 얼굴과 내 앞에서 보이는 얼굴을 다르게 만들면 내가 이기는 것이었다.비싼 귀걸이를 보냈다.당연히 하고 올 거라고 생각했다.서아는 돌려보냈다.대신 값도 알 수 없는 검은 귀걸이를 하고 나타났다.내가 선택한 것을 거절하고 자신이 선택한 것을 보여주는 여자.불쾌한데도 눈을 뗄 수 없었다.일부러 늦게 도착한 날에도 그녀는 기다리지 않았다.나를 위해 시간을 비워두는 대신 다른 손님을 받았다.다음부터는 늦지 말라고 했다.그 말을 듣고도 다시 예약했다.지금 생각하면 나는 그때부터 이미 지고 있었다.그녀가 정한 시간에 맞춰
#특별외전 - 진서아 시점(1)##내가 그 남자를 선택하기까지결혼한 뒤에도 한시준은 가끔 나를 손님처럼 기다렸다.정확히 말하면, 내가 허락할 때까지 기다렸다."안 들어오고 뭐 해요?"늦은 밤 라운지 문을 열자 검은 코트를 입은 남자가 계단 끝에 서 있었다.영업은 이미 끝난 시간이었다.직원들도 모두 퇴근했고, 골목에는 겨울비가 가늘게 내리고 있었다."네가 마감 중이었잖아.""열쇠 있잖아요.""라운지 열쇠는 없어.""집 열쇠 말고요."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손님으로 오지 않는 날에는 내가 먼저 부르기 전까지 계단 위로 올라오지 않았다.내 남편이 된 뒤에도 그랬다.처음 만난 날의 한시준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에덴에서 그를 처음 봤을 때, 나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바로 알았다.비싼 정장과 손목시계 때문만은 아니었다.남자를 판단할 때 가장 먼저 보는 것은 시선이었다.무엇을 보고 있는지보다, 그것을 어떻게 보는지가 중요했다.한시준은 사람을 선택하는 눈으로 봤다.마음에 들면 가지고, 싫증 나면 놓아버리는 사람.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가능성은 생각해본 적 없는 남자.그런 남자들은 오히려 다루기 쉬웠다.원하는 말을 해주고, 정해진 순간에 웃어주고, 자신이 특별하다는 착각을 주면 됐다.그날도 평소와 똑같이 웃었다.그런데 그가 말했다.세 번 다 똑같은 미소라고.처음에는 조금 놀랐다.그런 걸 알아보는 손님은 많지 않았다.그렇다고 마음에 들었던 것은 아니다.내 손목을 잡고도 놓으라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놓지 않을 것처럼 굴었으니까."밀어내지 않는다고 원하는 건 아니에요."나는 그의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냈다.그 순간 시준의 눈빛이 달라졌다.기분이 상한 남자의 얼굴이었다.그런데도 화를 내지 않았다.대신 나를 더 오래 봤다.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그가 나를 손님에게 웃어주는 여자가 아니라, 자신을 거절한 사람으로 보기 시작한 것은.비싼 귀걸이를 돌려보낸 건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었다.정말
#외전 5화. 매일 다시 선택할 사람진서아가 한시준의 집에서 지낸 지 여섯 달이 지났다.처음에는 일주일씩 연장하던 동거였다.두 번째 일주일이 끝났을 때는 서아가 먼저 기간을 말하지 않았고, 시준도 묻지 않았다.계절이 바뀌는 동안 드레스룸의 절반은 자연스럽게 서아의 옷으로 채워졌다. 화장대 위에는 립스틱과 향수가 늘어났고, 냉장고에는 시준이 먹지 않던 과일과 탄산수가 들어왔다.침실 구석의 수면등도 여전히 켜져 있었다.이제 시준은 불빛이 없으면 오히려 잠이 오지 않았다.같이 산다고 모든 문제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시준은 서아가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시간을 확인했고, 서아는 그런 시준에게 라운지 영업시간표를 냉장고에 붙여놓으라고 했다.서아는 사용한 컵을 아무 곳에나 두었고, 시준은 발견하는 즉시 정해진 위치로 옮겼다.한 번은 서아가 일부러 컵을 거실과 침실, 드레스룸에 하나씩 놓아두기도 했다.시준은 말없이 전부 치운 뒤 다음 날 같은 자리에 새 컵을 가져다 놓았다."뭐 하는 거예요?""네가 필요해서 둔 줄 알았어.""제가 어지럽힌 거예요.""알아.""그런데 왜 다시 놔요?""내가 치우는지 시험한 거잖아."시준은 서아보다 먼저 그 의도를 알아차렸다.두 사람은 여전히 자주 부딪혔다.하지만 이제는 한쪽이 사라지는 것으로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싫은 것은 싫다고 말하고, 화가 나면 화가 났다고 했다.문을 닫더라도 잠그지는 않았다.그 정도면 두 사람에게는 충분히 평온한 연애였다.서아가 시준의 변화를 눈치챈 것은 목요일 아침이었다.시준은 출근 준비를 하면서도 자꾸 서아의 왼손을 바라봤다.처음 한두 번은 우연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식탁에서도,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차에 타기 직전에도 시선이 같은 곳에 머물렀다.서아가 결국 손을 들어 보였다."왜 자꾸 봐요?"시준이 시선을 피했다."안 봤어.""세어봤는데 일곱 번 봤어요.""그걸 왜 세.""이상하니까요."서아는 그의 앞에 왼손을 내밀었다."뭐 묻었어요?""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