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3화. 돌려보낸 선물
강재혁이 보내온 메시지는 짧았다.
[진서아 개인 연락처입니다.]
그 아래로 열한 자리 숫자가 적혀 있었다.
한시준은 회의 자료를 넘기던 손을 멈췄다.
알아내라고 지시한 건 자신이었다. 그런데 막상 번호를 손에 넣고 나니 바로 전화를 걸 마음은 들지 않았다.
지난밤, 서아가 건넨 에덴 명함이 떠올랐다.
저한테 연결되는 번호예요.
개인 번호를 요구한 자신에게 가게 대표 번호를 내밀면서도, 서아는 조금도 미안해하지 않았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동시에 이상하게 계속 생각났다.
시준은 숫자를 한참 내려다보다 휴대전화 화면을 껐다.
진서아라는 이름을 저장하지도 않았다.
여자의 번호를 먼저 알아내고, 먼저 연락하고, 답을 기다리는 남자가 될 생각은 없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오후가 지나도록 시준의 시선은 자꾸 휴대전화로 향했다.
아무 연락도 오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서아는 자신의 번호를 알지 못했다. 시준이 연락처를 알아냈다는 사실조차 모를 것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기분이 나빴다.
마치 자신만 지난밤의 일을 기억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지금쯤 다른 남자의 옆에 앉아 똑같은 미소를 짓고 있을지도 몰랐다.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넥타이를 만지고, 허리를 끌어당겨도 태연한 얼굴로 웃고, 입술이 가까워져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시준은 들고 있던 펜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재혁아."
집무실 한쪽에서 자료를 정리하던 강재혁이 고개를 들었다.
"네, 부사장님."
"선물 하나 보내."
"누구에게 보내면 됩니까?"
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재혁은 잠시 기다리다가 물었다.
"진서아 씨입니까?"
시준의 눈이 천천히 올라갔다.
"말이 많네."
"죄송합니다."
재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블릿을 들었다.
"원하시는 품목이 있으십니까?"
시준은 잠시 생각했다.
지난주 서아가 하고 있던 귀걸이가 떠올랐다. 검은 머리카락 사이에서 길게 흔들리던 금색 장식.
그녀가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는 몰랐다.
알아볼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비싸고 좋은 것을 싫어하는 여자는 없었다.
"귀걸이."
"브랜드는요?"
"제일 비싼 걸로."
재혁의 손이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전달 장소는 에덴으로 하겠습니다."
시준은 대답 대신 다시 회의 자료를 펼쳤다.
그걸로 끝난 일이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 저녁.
에덴 대기실 한가운데에 검은색 상자가 놓였다.
포장을 풀어본 여자들이 주변에 모여 감탄을 쏟아냈다.
"이거 진짜 다이아 아니야?"
"이 브랜드 예약 없으면 못 사는 건데."
"서아 언니, 누가 보냈어?"
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던 서아가 뒤늦게 상자를 돌아봤다.
검은 벨벳 위에 놓인 귀걸이는 화려했다.
작은 조명 아래에서도 눈이 아플 만큼 빛났다.
옆에 놓인 카드에는 한 줄만 적혀 있었다.
[다음에는 이걸 하고 와.]
이름은 없었다.
하지만 누구인지 굳이 물을 필요도 없었다.
서아는 카드를 들어 앞뒤로 살폈다.
정말 그것뿐이었다.
부탁도 아니고 질문도 아니었다.
다음에는 이걸 하고 오라는 지시.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시준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자신의 말을 거절당할 가능성을 애초에 생각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한율그룹 부사장이지?"
옆에 있던 민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서아는 카드를 다시 상자 안에 내려놓았다.
"그런가 봐."
"이걸 그냥 보냈다고?"
"응."
"미쳤다. 언니 진짜 착용할 거야?"
서아는 귀걸이를 한 번 더 바라봤다.
예쁘기는 했다.
가격도 상상 이상일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취향은 아니었다.
지나치게 크고, 지나치게 화려했다. 무엇보다 자신이 고른 물건이 아니었다.
서아는 상자 뚜껑을 닫았다.
"돌려보내."
대기실이 조용해졌다.
민지가 잘못 들은 사람처럼 눈을 크게 떴다.
"이걸?"
"응."
"왜?"
"하기 싫으니까."
실장이 문을 열고 들어오다가 그 말을 들었다.
그녀는 탁자 위의 상자와 서아를 번갈아 봤다.
"서아야. 이거 한시준 부사장이 보낸 거 맞아?"
"아마도요."
"그런데 돌려보내게?"
"네."
"마음에 안 들어도 일단 받아두는 게 낫지 않을까?"
서아는 거울로 실장을 바라봤다.
"받으면 다음에 해야 하잖아요."
"한 번쯤 해주는 게 뭐가 어려워."
"어렵지는 않죠."
서아는 빗을 내려놓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검은 상자를 실장 앞으로 밀었다.
"그런데 싫어요."
실장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상대는 평범한 단골이 아니었다. 한율그룹 부사장이었다. 선물을 돌려보내는 것만으로도 어떤 불이익이 돌아올지 알 수 없었다.
서아는 그런 실장의 표정을 읽고 작게 웃었다.
"제가 싫다고 했다고 예약까지 끊을 남자면, 어차피 오래 못 가요."
"그래도..."
"제가 저 사람한테 선물 달라고 한 적 없잖아요."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뜻은 분명했다.
서아는 손목에 장미 향수를 가볍게 뿌렸다.
"그리고 저 귀걸이 안 예뻐요."
민지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실장도 결국 말리기를 포기했다.
"알았어. 그대로 돌려보낼게."
서아는 다시 거울을 봤다.
한시준이 어떤 얼굴을 할지 아주 조금 궁금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다음 예약은 사흘 뒤였다.
그때 물어보면 대답해주면 된다.
손님이 원하는 물건을 거절한 이유 정도는 친절하게 설명해줄 수 있었다.
검은 상자가 집무실로 돌아온 것은 선물을 보낸 지 세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포장은 처음과 똑같았다.
리본만 한 번 풀었다가 다시 묶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시준은 보고서를 읽다가 상자를 발견하고 시선을 멈췄다.
"이게 왜 여기 있어."
재혁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진서아 씨가 돌려보냈습니다."
시준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유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답니다."
시준의 시선이 상자에 박혔다.
"가격은 알려줬어?"
"매장 측 보증서가 들어 있어서 확인했을 겁니다."
"그런데도 돌려보냈다고?"
"네."
짧은 대답이 이상하게 신경을 긁었다.
시준은 상자 뚜껑을 열었다.
귀걸이는 처음과 같은 자리에 놓여 있었다.
카드도 그대로였다.
[다음에는 이걸 하고 와.]
어제는 아무렇지 않게 적은 문장이 오늘은 우습게 느껴졌다.
진서아는 자신의 요구를 거절했다.
더 비싼 것을 원한다고 말하지도 않았고, 다른 디자인으로 바꿔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아예 받을 생각이 없었다.
시준은 카드 끝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다른 걸로 다시 보내."
재혁이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시준이 고개를 들었다.
"왜."
"어떤 취향인지 먼저 알아보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시준의 표정이 굳었다.
상대의 취향을 알아본다.
그런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본 적이 없었다.
여자들은 시준이 무엇을 주든 좋아했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좋아하는 척했고, 그의 앞에서는 반드시 착용했다.
그게 당연했다.
시준은 상자를 닫았다.
"됐어."
"다시 보내지 않으시겠습니까?"
"안 보내."
그는 돌아온 선물을 책상 서랍 안에 넣었다.
버리라고 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가는 것은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흘 뒤.
서아가 VIP룸 문을 열었을 때 시준은 소파 끝에 앉아 있었다.
평소와 달리 술잔도 들고 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서아의 얼굴을 지나 귀로 향했다.
그녀는 작은 검은색 귀걸이를 하고 있었다.
지난번과도, 자신이 보낸 것과도 다른 물건이었다.
서아는 그의 시선을 알아차리고도 모르는 척 웃었다.
"안녕하세요."
시준은 인사를 받지 않았다.
"귀걸이 왜 돌려보냈어."
서아는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왔다.
첫마디가 그것일 줄 예상한 사람처럼 태연했다.
"마음에 안 들어서요."
"그게 끝이야?"
"네."
서아는 늘 앉던 자리에 앉아 술병을 들었다.
시준이 병 위로 손을 얹었다.
두 사람의 손이 겹쳤다.
"얼마짜리인지 알지."
"대충은요."
"그런데 싫다고 돌려보내?"
서아가 시준의 손 아래에서 천천히 손을 빼냈다.
"비싸면 무조건 좋아해야 해요?"
"싫어할 이유는 없잖아."
"무겁고, 제 취향 아니고."
그녀가 자신의 귀걸이를 손끝으로 가볍게 만졌다.
"지금 한 게 더 예뻐요."
시준은 작은 검은 귀걸이를 바라봤다.
자신이 보낸 것과 비교하면 초라할 정도로 단순했다.
"그건 얼마인데."
서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가격이 궁금하세요?"
"말해봐."
"삼만 원쯤."
시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가 보낸 걸 돌려보내고 그딴 걸 했다고?"
"그딴 거 아니에요."
서아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하지만 웃음이 조금 옅어졌다.
"제가 골랐으니까 이게 더 좋아요."
시준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고른 값비싼 물건보다 서아가 직접 선택한 싸구려 귀걸이가 더 낫다는 말.
그건 가격의 문제가 아니었다.
서아가 무엇을 할지 자신이 정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내가 하라고 했잖아."
"그래서 안 했어요."
"왜."
서아는 술을 따르려다 말고 그를 바라봤다.
"부사장님."
그녀가 조금 가까이 몸을 기울였다.
장미 향이 두 사람 사이로 번졌다.
"제가 부사장님 취향에 맞춰드리는 건 이 방 안에서만이에요."
시준의 눈빛이 낮아졌다.
"밖에서 보내는 선물까지 받고, 하라는 대로 하고, 입으라는 걸 입으면..."
서아의 손가락이 그의 셔츠 깃을 가볍게 정리했다.
"그건 손님한테 잘하는 게 아니라 남자한테 끌려가는 거잖아요."
"나한테 끌려가면 안 돼?"
"아직은요."
또 그 말이었다.
시준이 가장 싫어하면서도 계속 듣게 되는 말.
아직.
가능성이 없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허락한다는 것도 아니었다.
시준은 자신의 셔츠에 닿아 있던 서아의 손목을 잡았다.
이번에는 거칠게 당기지 않았다.
손목 안쪽에 엄지를 대고 맥박을 느꼈다.
서아의 맥박은 일정했다.
자신이 잡고 있는데도 조금도 빨라지지 않았다.
"그럼 언제 끌려오는데."
서아의 시선이 붙잡힌 손목에서 그의 얼굴로 올라갔다.
"그걸 왜 저한테 물어요?"
"네 일이니까."
"아니요."
서아는 시준의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냈다.
"부사장님 일이죠."
마지막 손가락이 떨어졌다.
서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술병을 들었다.
"제가 부사장님을 손님 말고 남자로 보게 만드는 거."
맑은 술이 잔 안으로 흘러들었다.
"그걸 저한테 가르쳐달라는 건 반칙 아닌가?"
시준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서아는 잔을 그의 앞에 내려놓으며 웃었다.
완벽한 미소였다.
오늘도 다른 손님에게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는 표정.
시준은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보낸 선물이 거절당한 것이 기분 나쁜 게 아니었다.
진서아에게 자신이 어떤 것을 주든 결국 수많은 손님 중 하나로 돌아오는 것이 싫었다.
시준은 잔을 들지 않았다.
대신 서아의 귀에 달린 작은 검은 귀걸이를 한참 바라봤다.
"다음에는 선물 안 보내."
"잘 생각하셨어요."
"대신 네가 뭘 좋아하는지는 알아낼 거야."
서아가 가볍게 웃었다.
"그건 좀 어렵겠네요."
"왜."
"지금까지 저한테 물어본 적도 없잖아요."
시준의 표정이 굳었다.
서아는 그가 대답하지 못하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부사장님은 제가 뭘 좋아하는지보다, 부사장님이 준 걸 좋아하는지가 더 중요했죠."
정확했다.
너무 정확해서 불쾌했다.
시준은 처음으로 자신이 진서아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좋아하는 술도, 쉬는 날 하는 일도, 자주 듣는 음악도 몰랐다.
알고 있는 것은 검은 머리와 장미 향, 그리고 자신에게 보여주는 가짜 미소뿐이었다.
서아는 잔을 들어 그의 잔에 가볍게 부딪쳤다.
"이제 술 드실래요?"
시준은 천천히 잔을 들었다.
그날 그는 처음으로 서아에게 무엇을 줄지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 무엇을 물어야 할지 생각했다.
돈을 쓰는 손님이 아니라 한시준이라는 남자를 기억하게 만들려면, 먼저 자신도 진서아라는 여자를 알아야 했다.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계속 특별하지 않은 손님으로 남는 일이었다.
시준은 술을 삼키며 서아를 바라봤다.
다음에는 더 비싼 것을 보낼 생각이 없었다.
대신 그녀가 누구에게나 보여주는 저 완벽한 미소를, 자신 앞에서만은 유지할 수 없게 만들 생각이었다.
# 특별외전 - 우리가 사는 방식## 진서아 시점결혼했다고 해서 라운지의 규칙이 바뀌지는 않았다.한시준도 예외는 아니었다.그런데 결혼 후 첫 금요일, 그는 예약도 없이 라운지 문을 열고 들어왔다.나는 바 안쪽에서 그를 바라봤다."오늘 예약 없는데요."시준이 멈췄다."남편도 예약해야 해?""손님으로 올 거면요."그의 표정이 굳었다.라운지에는 이미 손님이 몇 명 있었다.그중에는 강도현도 있었다.시준은 도현과 바 위에 놓인 디저트 상자를 번갈아 봤다.결혼 전부터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조합이었다."그럼 손님 아니면.""뭐로 왔는데요?"시준은 잠시 생각했다."너 보러.""그건 영업 끝나고요."직원 한 명이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숙였다.시준은 불쾌한 얼굴로 바 끝자리에 앉았다."그럼 예약할게.""오늘은 자리가 없어요.""여기 비어 있잖아.""그 자리는 예약석이에요.""누가.""곧 오세요."시준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나는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예약자를 확인하고 싶을 것이다.남자라면 취소시키고 싶을지도 몰랐다.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잠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끝나면 연락해.""가려고요?""네 규칙이라며."화를 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표정만으로도 라운지 온도가 내려갈 정도였다.그래도 나가야 할 때 나갔다.나는 문을 열고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봤다.직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괜찮으세요?""뭐가?""부사장님 화난 것 같은데.""맞아.""그런데 그냥 보내요?"나는 새 잔을 꺼냈다."화난 건 본인이 해결해야지."그날 마감을 마치고 나가자 시준은 건너편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정확히 네 시간 동안.차에 타자마자 그가 물었다."예약자 누구였어.""여자 손님이요."굳어 있던 얼굴이 아주 조금 풀렸다."그걸 먼저 말했어야지.""왜요?""괜히 기다렸잖아.""여자면 괜찮고 남자면 안 괜찮아요?"시준은 안전벨트를 매주는 척 내 쪽으로 몸을 기울
#특별외전 - 한시준 시점(2)## 네가 내게 걸어오던 날결혼식 날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많이 내리지는 않았다.문제는 비가 내린다는 사실 자체였다.나는 한 시간 단위로 기상 자료를 확인했다.오후에는 그칠 가능성이 높다고 했지만 가능성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실내로 옮길까요?"행사 담당자가 물었다.정원과 연결된 실내 공간은 이미 준비돼 있었다.하객을 전부 수용할 수 있도록 테이블 배치도 바꿀 수 있었다.결정만 하면 됐다.나는 정원 끝의 작은 단상을 바라봤다.서아가 그곳에서 웃고 있는 모습이 상상된다고 말했다.그래서 이 장소를 골랐다.정확히는 서아가 골랐고, 내가 동의했다."기다려."나는 휴대전화를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서아에게 전화하면 드레스와 준비를 마치기도 전에 비 이야기부터 꺼낼 것이다.그녀가 직접 결정하게 해야 했다.그 사실은 알았지만 기다리는 건 여전히 어려웠다.오전 열한 시가 넘어 서아에게 메시지가 왔다.[비 오는 것도 괜찮아요.]나는 화면을 보자마자 전화를 걸었다."밖 봤어?"[봤어요.]"정원 바닥 젖어."[의자만 닦으면 되죠.]"드레스도 젖을 수 있어."[그럼 조금 젖죠.]"감기 걸리면."[한시준 씨.]서아의 목소리에 웃음이 섞였다.[저 결혼하러 가는 거지 야외 촬영하러 가는 거 아니에요.]"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건데."[원래대로 해요.]"비 계속 오면."[우산 쓰고요.]역시 진서아였다.나는 담당자에게 정원 예식을 그대로 진행하라고 말했다.대신 통로 위에 투명 천막을 설치하고, 하객 자리에 우산과 담요를 추가했다.서아가 부탁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선택을 바꾸는 일은 아니었다.비를 멈출 수는 없어도 그녀가 불편하지 않게 준비할 수는 있었다.하객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강재혁은 나를 보자마자 웃었다."긴장하셨습니까?""아니.""넥타이가 비뚤어졌습니다."손을 올려 확인하자 멀쩡했다.재혁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농담입니다.""오늘 끝나고 보자.""결혼
#특별외전 - 진서아 시점(2)## 내가 고른 결혼식결혼식을 하지 않을 생각은 아니었다.다만 한시준과 결혼한다는 이유로 내 결혼식까지 한율그룹 행사가 되는 건 싫었다.그 생각이 더 확실해진 건 한율 비서실에서 보내온 첫 번째 결혼식 기획서를 본 뒤였다.서울 시내 특급호텔 그랜드볼룸.하객 예상 인원 천이백 명.정재계 주요 인사와 계열사 대표, 해외 협력사 관계자까지 포함된 명단.결혼식이라기보다 한율그룹 후계자의 공식 발표회에 가까웠다.나는 기획서를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확인한 뒤 시준을 바라봤다."이거 봤어요?"시준은 소파에 앉아 태블릿으로 업무 자료를 확인하고 있었다."뭘."나는 두꺼운 기획서를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표지에 적힌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한율그룹 한시준 부사장 결혼식 진행안.신부 이름은 작은 글씨로 그 아래에 붙어 있었다.진서아."제 이름이 부제예요?"시준이 문서를 펼쳐보더니 표정이 굳었다."누가 보냈어.""비서실이요."그는 곧바로 휴대전화를 집었다.나는 그의 손을 눌렀다."또 전화부터 하지 말고요.""이건 내가 지시한 게 아니야.""알아요."시준이 원했다면 신부 이름조차 없는 결혼식 기획서가 왔을지도 모른다.그래도 그는 적어도 내게 묻기 전에는 장소조차 정하지 않았다."그럼 어떻게 하고 싶은데."시준이 물었다.나는 기획서를 다시 넘겨봤다."여기 있는 것 중에 마음에 드는 건 하나 있어요.""뭔데.""음식."시준의 입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그것만?""네."나는 기획서를 덮었다."결혼식은 작게 하고 싶어요."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얼마나 작게.""제가 얼굴과 이름을 아는 사람만 부를 수 있을 정도로요.""그럼 한율 쪽은.""시준 씨가 정말 부르고 싶은 사람만요."시준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한율 후계자의 결혼식은 개인 행사가 될 수 없다는 말을 이미 여러 번 들었을 것이다.회사와 집안, 언론과 투자자까지 모두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내가 그 현실을
#특별외전 - 한시준시점 (1) ## 처음으로 갖지 않기로 한 사람결혼한 뒤에도 진서아는 내 것이 아니었다.법적으로는 배우자였고, 같은 주소에 살았으며, 서류 위에는 내 이름 옆에 그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하지만 그것이 서아를 소유할 권리는 아니었다.그 사실을 이해하기까지 나는 너무 많은 것을 망쳤다.에덴에서 진서아를 처음 본 순간, 나는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정확히는 가지고 싶었다.긴 검은 머리와 붉은 입술, 방 안에 들어서는 순간 모든 시선을 자신에게 모으는 태도.자신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여자였다.그런 여자는 익숙했다.원하는 것을 물어보고, 적당한 가격을 제시하면 됐다.그런데 진서아는 달랐다.완벽하게 웃으면서도 나를 보지 않았다.내가 무슨 말을 원하는지 알았고,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도 알았지만, 그 안에 자신은 없었다.세 번의 미소가 전부 같다고 말했을 때 그녀의 눈빛이 처음으로 조금 변했다.그 짧은 흔들림이 마음에 들었다.그래서 손목을 잡았다.그녀가 나를 의식하게 만들고 싶었다."밀어내지 않는다고 원하는 건 아니에요."서아가 내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냈다.기분이 나빴다.내 손을 거절한 여자는 있었지만, 내가 잘못된 기준을 가지고 있다고 가르치듯 말한 여자는 처음이었다.그날부터 나는 진서아를 다시 부르기 시작했다.처음에는 단순한 승부라고 생각했다.다른 손님에게 보이는 얼굴과 내 앞에서 보이는 얼굴을 다르게 만들면 내가 이기는 것이었다.비싼 귀걸이를 보냈다.당연히 하고 올 거라고 생각했다.서아는 돌려보냈다.대신 값도 알 수 없는 검은 귀걸이를 하고 나타났다.내가 선택한 것을 거절하고 자신이 선택한 것을 보여주는 여자.불쾌한데도 눈을 뗄 수 없었다.일부러 늦게 도착한 날에도 그녀는 기다리지 않았다.나를 위해 시간을 비워두는 대신 다른 손님을 받았다.다음부터는 늦지 말라고 했다.그 말을 듣고도 다시 예약했다.지금 생각하면 나는 그때부터 이미 지고 있었다.그녀가 정한 시간에 맞춰
#특별외전 - 진서아 시점(1)##내가 그 남자를 선택하기까지결혼한 뒤에도 한시준은 가끔 나를 손님처럼 기다렸다.정확히 말하면, 내가 허락할 때까지 기다렸다."안 들어오고 뭐 해요?"늦은 밤 라운지 문을 열자 검은 코트를 입은 남자가 계단 끝에 서 있었다.영업은 이미 끝난 시간이었다.직원들도 모두 퇴근했고, 골목에는 겨울비가 가늘게 내리고 있었다."네가 마감 중이었잖아.""열쇠 있잖아요.""라운지 열쇠는 없어.""집 열쇠 말고요."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손님으로 오지 않는 날에는 내가 먼저 부르기 전까지 계단 위로 올라오지 않았다.내 남편이 된 뒤에도 그랬다.처음 만난 날의 한시준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에덴에서 그를 처음 봤을 때, 나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바로 알았다.비싼 정장과 손목시계 때문만은 아니었다.남자를 판단할 때 가장 먼저 보는 것은 시선이었다.무엇을 보고 있는지보다, 그것을 어떻게 보는지가 중요했다.한시준은 사람을 선택하는 눈으로 봤다.마음에 들면 가지고, 싫증 나면 놓아버리는 사람.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가능성은 생각해본 적 없는 남자.그런 남자들은 오히려 다루기 쉬웠다.원하는 말을 해주고, 정해진 순간에 웃어주고, 자신이 특별하다는 착각을 주면 됐다.그날도 평소와 똑같이 웃었다.그런데 그가 말했다.세 번 다 똑같은 미소라고.처음에는 조금 놀랐다.그런 걸 알아보는 손님은 많지 않았다.그렇다고 마음에 들었던 것은 아니다.내 손목을 잡고도 놓으라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놓지 않을 것처럼 굴었으니까."밀어내지 않는다고 원하는 건 아니에요."나는 그의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냈다.그 순간 시준의 눈빛이 달라졌다.기분이 상한 남자의 얼굴이었다.그런데도 화를 내지 않았다.대신 나를 더 오래 봤다.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그가 나를 손님에게 웃어주는 여자가 아니라, 자신을 거절한 사람으로 보기 시작한 것은.비싼 귀걸이를 돌려보낸 건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었다.정말
#외전 5화. 매일 다시 선택할 사람진서아가 한시준의 집에서 지낸 지 여섯 달이 지났다.처음에는 일주일씩 연장하던 동거였다.두 번째 일주일이 끝났을 때는 서아가 먼저 기간을 말하지 않았고, 시준도 묻지 않았다.계절이 바뀌는 동안 드레스룸의 절반은 자연스럽게 서아의 옷으로 채워졌다. 화장대 위에는 립스틱과 향수가 늘어났고, 냉장고에는 시준이 먹지 않던 과일과 탄산수가 들어왔다.침실 구석의 수면등도 여전히 켜져 있었다.이제 시준은 불빛이 없으면 오히려 잠이 오지 않았다.같이 산다고 모든 문제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시준은 서아가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시간을 확인했고, 서아는 그런 시준에게 라운지 영업시간표를 냉장고에 붙여놓으라고 했다.서아는 사용한 컵을 아무 곳에나 두었고, 시준은 발견하는 즉시 정해진 위치로 옮겼다.한 번은 서아가 일부러 컵을 거실과 침실, 드레스룸에 하나씩 놓아두기도 했다.시준은 말없이 전부 치운 뒤 다음 날 같은 자리에 새 컵을 가져다 놓았다."뭐 하는 거예요?""네가 필요해서 둔 줄 알았어.""제가 어지럽힌 거예요.""알아.""그런데 왜 다시 놔요?""내가 치우는지 시험한 거잖아."시준은 서아보다 먼저 그 의도를 알아차렸다.두 사람은 여전히 자주 부딪혔다.하지만 이제는 한쪽이 사라지는 것으로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싫은 것은 싫다고 말하고, 화가 나면 화가 났다고 했다.문을 닫더라도 잠그지는 않았다.그 정도면 두 사람에게는 충분히 평온한 연애였다.서아가 시준의 변화를 눈치챈 것은 목요일 아침이었다.시준은 출근 준비를 하면서도 자꾸 서아의 왼손을 바라봤다.처음 한두 번은 우연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식탁에서도,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차에 타기 직전에도 시선이 같은 곳에 머물렀다.서아가 결국 손을 들어 보였다."왜 자꾸 봐요?"시준이 시선을 피했다."안 봤어.""세어봤는데 일곱 번 봤어요.""그걸 왜 세.""이상하니까요."서아는 그의 앞에 왼손을 내밀었다."뭐 묻었어요?""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