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MELDEN글을 쓴다는 건 결국, 자신의 가장 깊은 비밀을 종이에 흘려보내는 일이다.단어 하나, 문장 하나에 떨리는 감정이 숨어 있고,그 감정을 아무도 모르게 지켜봐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일.서윤에게 있어서 글쓰기는 늘 혼자만의 싸움이었다.모니터 앞, 심장이 두근거릴 만큼 몰입해 쓰던 문장들.그러다 문득 현실로 돌아오면, 그 문장들이 너무 민낯 같아 도리어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순간들.그 모든 것을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그 사람이 바로 ‘류이진’이었기 때문이었다.“시간 괜찮아요?”이진에게 문자를 보내고 답장을 기다리는 짧은 순간조차 서윤은 왠지 긴장되었다.[류이진]네, 어디로 갈까요?그의 대답은 언제나처럼 짧고 단호했지만, 그 안에는 묘하게 안심이 스며 있었다.서윤은 문득 작가와 편집자가 아니라,한 사람과 또 다른 한 사람이 서로에게 가까워지는 이 과정을 글이 아닌 마음으로 써내려가고 있다고 느꼈다.작은 북카페. 낡은 나무 탁자와 조용한 음악, 그리고 구석진 자리.서윤은 가방에서 조심스레 원고를 꺼냈다.이진이 고개를 갸웃하자 그녀는 잠시 숨을 골랐다.“이진 씨, 제가 쓰는 글이에요. 정확히 말하면, 제가 살아있는 시간이에요.”이진은 조용히 받아들었다.그의 손끝이 종이를 넘길 때마다 서윤의 심장도 함께 넘겨졌다.그녀는 그가 읽는 동안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었다.한참이 지나 이진이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이거… 당신이에요.”서윤은 눈을 피했다.“부끄러워요. 이게 다… 진짜 제 이야기 같아서.”“그럼 더 보여줘요.”“…네?”“당신이 쓴 문장 속에서 내가 당신을 더 알고 싶어졌어요.”그 말에 서윤의 눈이 흔들렸다.사람은 자신이 가장 민감한 부분을 꺼냈을 때,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감싸주는 사람 앞에서 진짜로 마음이 열리기 마련이다.그날, 그녀는 자신 안의 가장 깊은 문을 그에게 내어주었다.그날 밤, 서윤은 노트북을 열었다.다른 날과 달리 손끝이 쉽게 글을 눌렀다.그는 나를 읽었다. 나보다
어떤 하루는 오직 마음의 온도만으로 기억된다.그날, 서윤의 하루는 그랬다.짧지도 길지도 않은 대화, 우연한 시선의 교차, 한 잔의 커피와 두 잔의 숨.모든 것이 조용했지만, 이진과 마주했던 그 시간만큼은 기억 저편 어딘가에 오래도록 머무를 것 같았다.“오늘 표정이 다르네요. 당신이 당신을 선택한 표정이에요.”그 말이 서윤의 귓가에 남아, 하루 종일 천천히 퍼져갔다.누군가에게 선택받기 위해 무던히도 애써왔던 시간이 있었다.그러다 문득 자신의 중심이 어디 있었는지도 잊은 채 타인의 시선 속에서 길을 잃기도 했던 시간.그런 시간 너머에서, 그녀는 지금 처음으로 자신에게 다정한 사람을 알아보고 있었다.사무실로 향하는 출근길. 전날보다 조금 가벼운 발걸음이었다.마치 온몸의 긴장이 서서히 풀리는 느낌.서윤은 오늘만큼은 일을 빨리 마치고 싶었다.그 이유가 이진을 다시 만나고 싶어서라는 것을 스스로도 더는 부정하지 않았다.그는 다가오지 않았고, 그렇다고 멀어지지도 않았다.늘 그녀의 반 걸음 옆을, 조용히 같이 걸어주는 사람.그런 거리감이 요즘 서윤에게는 이상하게도 위로가 됐다.하지만 그 평온은 오후 한 통의 전화로 깨졌다.[정하준]'잠깐만 얼굴 좀 볼 수 있을까요. 지금 로비에 있어요.'서윤은 핸드폰을 바라보다 잠시 눈을 감았다.그와의 대화는 언제나 마음을 무겁게 했다.하지만 피하고 싶지도 무작정 밀어내고 싶지도 않았다.그녀는 책임감과 감정 사이에서 항상 더 천천히 움직이는 사람이었다.회사 근처의 작은 공원. 하준은 벤치에 앉아 있었고, 그 앞에 서윤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이런 데서 다 보네요.”그는 억지로 웃었지만, 그 미소는 금방 기울었다.“요즘, 당신을 볼 때마다 무서워요.”“…….”“예전엔 내가 잘 안아주면 당신이 괜찮아질 거라 믿었어요.근데 요즘은… 내가 아무리 가까이 가도 당신이 더 멀리 있는 느낌이에요.”서윤은 조용히 그를 바라봤다.그의 말엔 진심이 있었지만, 그 진심은 너무 늦게 도착한 것이었다.
그날 밤. 하준은 돌아갔고, 서윤은 다시 조용한 공간에 홀로 남았다.TV를 켜지도 않았고, 음악도 틀지 않았다.그저… 침대에 앉아, 이진이 건넨 책을 다시 펼쳤다.책의 한 챕터를 다 읽었을 즈음 핸드폰이 또 울렸다.[류이진]오늘, 당신 생각이 나서요. 그냥… 괜찮았으면 해서요.그 문장엔 아무런 조건도, 확인도, 요구도 없었다.그저 괜찮기를 바라는 마음 하나, 그 마음이 서윤의 밤을 감싸안았다.서윤은 처음으로 자신이 어떤 사랑을 원하는 사람인지 정확히 마주하기 시작했다.확신을 강요하지 않는 사랑, 나로서 충분하다고 말해주는 감정.그런 관계 안에서 자신이 더 빛날 수 있다는 걸 이제는 조금씩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금요일 아침, 서윤은 일찍 눈을 떴다.창밖의 햇살은 눈이 부시지도, 어둡지도 않았다.그저 적당한 온도로 방 안을 채우고 있었고그날의 기분도, 딱 그만큼이었다.어디에도 쏠리지 않고, 한쪽으로 기울지도 않는 조용한 중심의 감각.아침 식탁에 앉아, 서윤은 전날 남겨둔 찬밥을 데워 간단한 아침을 차렸다.계란을 익히는 소리, 커피포트의 물 끓는 소리,모든 것이 익숙하게 반복되었지만 그 반복 속에서 처음으로그녀는 혼자인 시간을 마음 깊이 좋아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혼자인데 고요하고, 고요한데 편안하다.그게 그녀가 요즘 부쩍 자주 느끼는 감정이었다.회사로 향하는 길목, 출근길의 사람들 틈에서 서윤은 조용히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어제 밤, 류이진이 추천한 재즈 플레이리스트.멜로디는 말하듯 흘러들어왔고, 그 멜로디 안에 이진의 배려가 숨 쉬고 있었다.그녀는 이따금 문득 궁금해졌다.그는 어떻게 그렇게 ‘건드리지 않고 다가오는 법’을 아는 걸까.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하준이 문 앞에 서 있었다.그는 전날보다 더 피곤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서윤 씨. 잠깐 시간 좀 괜찮아요?”서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그녀를 회의실 쪽으로 데려갔다.회의실 안. 둘만의 공간.그러나 예전처럼 편안하지 않았다.공
서윤은 이틀째 하준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그는 더 이상 무리하게 다가오지 않았고,그녀 역시 자신이 얼마나 지금을 원하는 사람인지, 조금 더 냉정하게 생각할 시간을 가졌다.오전. 노트북을 덮은 채 서윤은 한참을 거실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어제 밤에 받은 하준의 메시지,그 안에 담긴 확신은 분명 따뜻했지만 왠지 모르게 이질적이었다.그녀를 만나고 나서야 나를 확신했다는 말,그건 왜 이렇게 쓸쓸하게 느껴질까.서윤은 혼잣말처럼 입을 열었다.“나는 그저 누군가의 비교 끝에 택해질 존재가 아니야…”말이 입술 끝에 걸릴 때마다조금씩 그녀의 내면이 다져지고 있었다.점심 무렵, 서윤은 무작정 집을 나섰다.어디론가 향하는 목적은 없었고, 그저 숨이 막히지 않을 공간을 찾고 싶었다.조용한 골목 끝,예전 작가들 모임을 하던 카페가 떠올랐다.그곳은 아직도 같은 자리에 있었다.카페 문을 열자, 익숙한 향과 함께 의외의 얼굴이 그 안에 앉아 있었다.“…류이진?”그도 서윤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들었다.“작가님.”그는 여전히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서윤 씨가 아니라, 작가님이라고.그 호칭 하나에 서윤의 어깨가 순간적으로 긴장을 풀었다.“…이런 데서 다 만나네요.”“제가 자주 오거든요. 여기, 한동안 핑크문 회의할 때도 쓰던 데잖아요.”“그러네요.”서윤은 그의 맞은편에 자연스럽게 앉았다.이유 없는 동행이었지만, 왠지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조용히 커피를 마시며,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침묵이 흘렀다.그러다 이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작가님, 요즘… 무슨 글 쓰세요?”“…아직은 다시 시작 못 했어요.”“그래도 언젠가 다시 쓰실 거잖아요. 그걸 아는 게, 저한텐 은근한 위안이에요.”서윤은 그 말에 살짝 웃었다.“왜요? 제가 글을 쓰면 뭐가 그렇게 좋으신데요?”이진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말했다.“그 글을 통해서, 작가님이 얼마나 깊고 솔직한 사람인지 알 수 있으니까요.저는 작가님이라는 사람 자체에 항상 관심
밤은 깊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서윤은 침대에 걸터앉은 채, 무릎 위에 노트북을 올려두고 있었다.커서가 반짝이는 화면 앞에 앉은 지 벌써 두 시간이 넘었지만,단 하나의 문장도 입력되지 않았다.그녀의 눈은 커서의 깜빡임을 따라가며 자꾸만 멈춰 섰다.글을 쓰고 싶은데,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는다.이상했다. 사랑 이야기를 쓰는 작가인데,지금 가장 선명한 감정을 느끼고 있음에도 그 어떤 언어도 입에 붙지 않았다.서윤은 조용히 노트북을 옆으로 밀어두고, 창문을 열었다.밤바람이 얇은 커튼을 흔들며 방 안으로 밀려들었다.그 바람 속에서, 자신의 감정도 함께 흔들리는 것만 같았다.“나는…”그녀는 중얼거렸다.“내가 쓰는 이야기처럼, 사랑이 뚜렷하고 강렬하게 오는 줄 알았어.”“하지만 지금 이 감정은, 뚜렷하기보다는 불안하고, 강렬하기보다는 조심스럽기만 해.”서윤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그리고 그 안에서,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사랑이란 감정은 때로 사람을 단단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반대로 너무 연약하게도 만든다.’그녀는 그 말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이내 다시 노트북을 펼쳤다.타닥, 타닥.오랜만에, 손가락이 움직였다.그는 매일 그녀를 보며 사랑을 느꼈지만, 동시에 두려움도 함께 느꼈다.그 두려움은 그녀를 잃을까 봐서가 아니라, 자신이 그녀에게 충분하지 않을까 봐서였다.그녀는 그 두려움을 모른 채 매일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 했다.그 확인이 부족해질수록 그녀는 외로워졌고, 그는 더 말이 없어졌다.사랑은 서로에게 무엇을 바라느냐보다, 그 감정을 지켜내는 ‘방식’에 달려 있었다.’서윤은 그 글을 저장하고, 잠시 멍하니 화면을 바라봤다.나는 하준 씨에게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 했던 걸까?그가 내 과거를 묻지 않는 만큼, 나도 그의 과거를 존중한다고 생각했는데.사실은… 내 안에 그 여자의 자리를 지우고 싶었던 걸까.그녀는 자신이 생각보다 더 이기적인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에 빠져들었다.박지현의 말처럼, 오랜 시간이라는 건 강
토요일 아침. 도시는 느리게 움직였다.창밖의 햇살은 맑고 따스했지만, 서윤은 책상 앞에 앉아 창문을 향해 등을 돌린 채 있었다.노트북을 켜고 문서를 열었지만,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대신 떠오르는 건 어젯밤 하준의 표정이었다.“미안한 마음이 남아서 그런 것 같아.”그 말이 이상하게도 계속 귓가를 맴돌았다.미안함. 그건 과거를 향한 감정이어야 하는데,어째서 현재를 향한 주저함이 되는 걸까.서윤은 마우스를 움직여 페이지를 넘기다가 멈췄다.그녀의 소설 속 남주가 여자 주인공을 향해 망설이는 장면이었다.그 남자는 말했다.‘내가 널 사랑하는 건 맞아. 하지만 과거의 그림자가 사라지지 않았어.그게 널 다치게 할까 봐, 겁이 나.’소설 속 그 대사는, 마치 하준의 마음을 베껴낸 것만 같았다.그 순간, 서윤은 자신이 얼마나 글과 현실 사이에서 혼란을 느끼고 있는지를 처음으로 또렷하게 인식했다.점심 무렵. 하준에게 메시지가 도착했다.-오늘 저녁 괜찮으면 우리 동네에서 커피 한 잔 할래요?그 메시지는 짧았지만 지금의 그녀로선 큰 결심이었다.거리를 두겠다고 마음먹은 동시에, 완전히 도망치진 않겠다는 마음이기도 했다.하준은 바로 답장을 보냈다.-좋아요. 몇 시쯤?-여섯 시. 그 카페 기억하죠? 창가에 앉았던 곳.-기억하죠. 오늘은 제가 먼저 가 있을게요.저녁 여섯 시. 서윤이 도착했을 땐 하준이 이미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그는 창밖을 보고 있다가 그녀가 들어오는 걸 알아채고 조용히 일어났다.“날씨가 좋아서 그런가, 오늘따라 카페가 더 포근해 보여요.”그의 말에 서윤은 가볍게 웃었다.“그러네요. 햇살도 그렇고, 조명도 그렇고.”둘은 자리에 앉아 메뉴를 고르다 서윤이 커피를 시키며 물었다.“요즘 지현 씨랑은 자주 이야기해요?”하준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회의가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시간이 생기긴 해요. 그런데… 그게 신경 쓰였어요?”“조금은요. 그 사람은 당신에게 여전히 감정이 남아 있는 것처럼 보여
비가 내렸다. 하늘은 흐렸고, 출판사 건물 창문은 엷은 물결처럼 흐려져 있었다.회의는 없었지만, 박지현은 기획안 정리를 이유로 일찍부터 사무실에 나와 있었다.하준도 예상보다 일찍 들어왔다.“안녕하세요.”지현은 그에게 커피 한 잔을 내밀었다.진한 블렌딩, 예전 하준이 좋아하던 맛.“고마워.”하준은 짧게 인사했지만, 그 커피가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었다.“요즘… 괜찮아 보여서 좋아.”지현은 모니터를 켜며 말을 이었다.“그때는… 너 참 힘들어했잖아.”그때. 그 말 하나에, 하준은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우리, 그
“차서윤 씨 맞죠?”낯선 여자였다. 출판사 1층 카페, 회의 후 앉아 있던 그녀에게 먼저 다가온 여자의 눈빛은 이상하리만큼 친근하면서도 낯설었다.“저, 박지현이에요. 정하준 씨랑 대학 동기였고… 지금은 기획팀에서 일해요.”서윤은 일어서는 순간 멈칫했다.그 이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다.“아… 안녕하세요.”“사실, 언젠가 한 번쯤은 마주칠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준이 예전엔 내 얘기 자주 했거든요.”박지현은 태연하게 커피잔을 집어 들며 말을 이었다.“하준이… 요즘 많이 변했죠?”“…좋아진 것 같아요.”“응. 전
출판사 본사 17층. 유리 벽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도심은 빛나고 있었지만,회의실 안의 공기는 한없이 조용하고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하준은 제안서를 조용히 건넸다.사내 독립 레이블, 작가 맞춤형 기획 중심의 실험적 출판 구조.이 단어들은 기존 출판 체계에선 다소 낯설고 급진적인 제안이기도 했다.상무는 말없이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고,하준은 허리를 반듯이 세운 채 고요히 기다리고 있었다.“…재미있네요.”처음으로 입을 연 건 상무였다.그는 손가락으로 책상 위를 톡톡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기존 체계를 부정하지 않으
서윤은 두 손을 맞잡으며 대답했다.“이번엔, 내가 먼저 그 선을 그어야 할 것 같아요. 그게 나를 지키는 일이라면.”그날 오후, 복도 한편에 있던 하준은 내부 회의가 끝난 직후 팀장의 호출을 받았다.“하준 씨.”“네.”“요즘, 팀 안에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와요. 당신이 핑크문 작가와 사적으로 가까운 거, 다들 알고 있고.”“사생활이 업무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조심하고 있습니다.”“그래도 말이죠… 당신 업무 평가가 감정적으로 해석된다는 보고가 이미 몇 건 올라왔어요. 다른 팀에서 함께 일하고 싶어하지 않는 경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