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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알아채고 있다는 걸, 서로 알고 있었다

مؤلف: 데이지
last update تاريخ النشر: 2026-04-01 13:57:02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더 많은 것이 들렸다.

노트북 쿨러가 돌아가는 소리.

키보드를 치려다 멈춘 손가락의 망설임.

심지어 자신이 들이마시는 숨결까지도, 방 안을 가득 채우는 듯했다.

서윤은 아직도 쓰지 못한 문장 앞에 앉아 있었다.

기억을 더듬었다. 정하준의 말.

그가 밤에 무얼 쓰는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고 말하던 그 순간.

그가 문득 보였던 표정 그건 궁금함보다 조심스러움이 더 짙은 얼굴이었다.

무언가를 안다는 건, 침범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는 그 선을 넘지 않았다.

단지, 서윤이 스스로 그 비밀을 들고 걸어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사람처럼.

그 배려는 오히려 잔인했고, 잔인해서… 더 깊었다.

다음 날 아침. 서윤은 평소보다 조금 일찍 출근했다.

사무실 불이 켜지기 전, 차가운 공기와 조용한 조명이 오히려 좋았다.

그녀는 텅 빈 회의실로 들어가, 블라인드를 내리고 커피를 한 잔 내렸다.

창가에 기대어 앉으니, 문득 어젯밤 썼다 지운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

‘그는 기다렸다. 그녀가 자기 속을 꺼내어 보이기까지. 그래서 도망갈 수 없게 될 때까지.’

서윤은 마음속으로 그 문장을 다시 읊조렸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마음 한켠이 서늘해졌다.

들킨 것 같아서가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들켜 있었던 것 같아서.

오전 회의 시간. 서윤이 자료를 정리하는 동안,  하준은 조용히 그녀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그는 서윤이 자리에 앉을 때마다 미묘하게 시선을 떼지 않았고, 그 눈빛은 말보다 먼저 말을 걸었다.

그녀는 모르는 척, 자료를 넘기며 말했다.

“하준 씨.”

“네.”

“…요즘 무슨 책 읽어요?”

그는 가볍게 웃었다.

“작가님 글이요.”

“…….”

“요즘은 밤마다 한 챕터씩 천천히. 음미하듯.”

서윤은 눈을 들지 않았다. 웃음으로 넘기기엔, 그 말이 너무 선명해서.

“그래서… 음미하면 뭐가 느껴지는데요?”

“음…”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기울였다.

“그 사람이, 되게 많이 외로웠겠구나. 그리고, 너무 조용하게… 사랑을 썼겠구나.”

순간, 회의실의 공기가 멈췄다.

그녀는 마침내 눈을 들었다. 하준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둘은 서로가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알고 있다는 걸 서로 알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단 한마디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들의 마음속엔 정확히 같은 언어가 흐르고 있었다.

점심시간 직전. 서윤은 책상 위에 놓인 하준의 작은 메모를 발견했다.

노란 포스트잇 위, 흐릿한 글씨체.

“숨기고 싶으면서도 들켜도 되는 사람이 생기면 그게 진짜 시작일지도 몰라요.”

서윤은 메모를 손에 쥐고, 아무 말도 없이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 말은 위로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건 아주 조심스럽게 건네는 '나, 알고 있어요.'라는 고백이었다.

그날 밤. 서윤은 마침내 문장을 썼다.

그는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다. 대신, 기다렸다.

그녀가 안으로부터 열리기를 아무 말 없이, 가장 깊은 문장을 꺼내줄 때까지.

그녀는 손끝을 떼고, 문장을 바라보다 서서히… 미소를 지었다.

슬픔인지, 안도인지, 그 감정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단지, 이렇게 쓰고 있는 자신이 이제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만이 천천히 가슴을 채워오고 있었다.

문장을 쓸 때 가장 어려운 건, 무엇을 쓸지가 아니라 무엇까지 쓸지를 결정하는 일이다.

서윤은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극적인 문장도, 상상에 기반한 행동 묘사도,

심지어 사랑이라는 단어조차, 그녀는 늘 정해진 깊이까지만 내어 놓았다.

그 이상을 드러내면, 자신이 너무 보여지는 것 같아서.

그녀에게 있어 글쓰기는 세상과의 밀당이자, 세상에게 마음을 감추기 위한 가장 세련된 방식이었다.

그런데 요즘 그 균형이 깨지고 있었다.

누군가가 그 너머를 보고 있다는 감각.

그저 글을 읽는 것이 아니라 글을 쓰는 마음까지 따라오고 있다는 느낌.

정하준.

그는 여전히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대놓고 그녀를 시험하지도 않았다.

그저 하루하루 아주 조심스럽게 그녀의 리듬에 발을 맞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더 이상해졌다.

서윤은 어느 순간, 그 조심스러움에 자꾸 마음이 무너졌다.

“팀장님, 오늘 점심은 같이 드시죠.”

그의 말은 익숙했다. 그러나 오늘은 평소와 달랐다.

그 말에는 어딘가 ‘기다림’이 실려 있었다.

서윤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대신, 가까운 데로요.”

식당까지 걷는 5분 남짓한 거리.

하준은 그녀의 옆에서 무언가를 자꾸 말하려다,

말을 삼키는 듯한 표정을 몇 번이나 지었다.

그 조용한 머뭇거림이 오히려 말보다 더 많은 걸 전하고 있다는 걸

서윤은 알고 있었다.

식당 안. 적당히 붐비는 점심시간.

그들은 창가 쪽 구석 테이블에 앉았다.

하준이 먼저 국물을 한 숟갈 뜨고 말했다.

“팀장님, 저 요즘… 밤마다 글 써보는 연습 하고 있어요.”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글이요?”

“네. 흉내 같은 거죠. 누군가를 따라 쓴다는 건 어쩌면 무례일 수도 있겠지만… 

이상하게 그렇게 쓰다 보면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아서요.”

그 말은 너무 솔직해서, 피할 수 없었다.

“핑크문 작가님 말인가요?”

“네.”

그는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 글을 읽다 보면… 그냥 자극적인 이야기보다 더 중요한 게 느껴지거든요.

그 사람 안에 얼마나 외로운 공간이 있는지, 얼마나 사랑한다는 말을 직접 못하는 사람인지,

얼마나 조용하게 자기 마음을 숨기고 있는 사람인지.”

서윤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준 씨.”

“네.”

“그런 말, 아무한테나 하지 않죠?”

“아뇨. 하고 싶은 사람한테만 해요.”

그 대답은 담백했고, 그래서 더 깊었다.

말끝이 흔들리지 않았고, 눈빛도 평소보다 더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는 순간, 너무 많은 감정을 들킨 것 같아 숨이 막혔다.

퇴근 후. 서윤은 회사 근처 북카페에 앉아 있었다.

이상하게, 바로 집으로 돌아가기 싫었다.

컴퓨터 앞에 앉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지금은 너무 명백하게 '그’를 떠올리게 될 것 같아서.

책을 펼쳤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그의 말이 자꾸 맴돌았다.

“그 사람 안에 얼마나 외로운 공간이 있는지.”

“하고 싶은 사람한테만 해요.”

이건 누가 봐도 고백이었다. 직설적이지 않지만, 마음을 던지는 말.

그걸 모른 척 넘기려면, 자신의 마음도 모른 척해야만 했다.

그녀는 조용히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새 문장을 메모장에 적었다.

'그는 말하지 않았다. 단지, 매일매일 그의 침묵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말이 들릴수록 자꾸 답장을 쓰고 싶어졌다.'

문장을 쓰는 건 버릇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버릇이 아니라 답장이었다.

그에게, 그리고 그가 이미 알아채고 있는 진짜 나에게 보내는 작은 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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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상사의 비밀 알바   END. 다정한 결말을 상상하며

    이진은 오래도록 회의실에 혼자 앉아 있었다.모든 동료가 퇴근한 후에도 불이 꺼지지 않은 그 공간은그의 미련을 하나씩 부풀리고 있었고, 책상 위에 놓인 종이컵 커피는 식은 지 오래였다.문득, 서윤이 처음 들어오던 날이 떠올랐다.표정도 어딘가 얼어 있고, 말투도 조심스러웠던 그녀.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는 그 조심스러움이 자신의 하루를 조금씩 채우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그는 그녀에게 말하지 못한 수많은 감정을 자신만의 질서와 원칙 뒤에 숨긴 채 시간을 흘려보냈다.그리고 그 시간들은 이제, 그녀가 다른 사람의 곁에 안착하는 것을 지켜보는 시간으로 남아 있었다.서윤은 퇴근길, 작은 골목의 조명을 따라 걸었다.그날은 유난히 바람이 부드러웠고,그 바람은 그녀가 두 팔 안에 껴안고 있는 불안의 조각들을 조금은 밀어내주는 것 같았다.하준과의 사이에는 분명 따뜻함이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어딘가 망설이고 있었다.마치, 스스로를 전부 내어준다는 것이 또 다른 상처로 돌아올까 두려워마음의 일부를 접어두는 습관이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문을 열고 들어온 그녀를 본 하준은 조용히 다가와 외투를 받아주었다.“오늘, 춥진 않았어요?”“응, 바람이… 좀 마음을 쓰다듬는 기분이었어.”하준은 그 말을 듣고도 아무 말 없이 웃었다.그저 주방 쪽으로 걸어가 따뜻한 차를 내리는 손길이 분주했을 뿐이다.“하준 씨.”서윤은 주저하다 그를 불렀다.그는 차를 내려놓으며 시선을 그녀에게 옮겼다.“나… 사실 조금, 무서웠어요.”“…무엇이요?”“내가 쓰는 글이, 누군가에게 읽히는 일도, 그게 나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일도,그리고… 그걸 알아채고도 아무렇지 않게 웃는 하준 씨의 존재도.”하준은 그녀의 앞에 앉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서윤 씨는 계속 조심했어요? 말 한마디, 표정 하나까지도.”“응. 그런데, 하준 씨가 그냥… 아무 말 없이 있어주니까자꾸 말하고 싶어졌어요. 그게 고마웠어요. 무섭기도 했고.”하준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 여상사의 비밀 알바   65. 숨겨온 이름으로 부를 때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서울의 불빛은 하루를 마감한 사람들의 피로를 감싸듯 부드럽게 번져 있었고, 그 창밖을 바라보며 서윤은 손끝으로 머그잔을 감쌌다.잔 안에서 김이 천천히 피어오르고 있었지만,그보다 더 뜨겁게 피어오르던 건 그녀의 목 아래 깊숙이 잠겨 있는 긴장과 두려움이었다.그는 지금, 자신이 가장 오랫동안 감춰왔던 이름 앞에 서 있었다.‘핑크문.’ 그 필명 아래 적어내려간 모든 욕망과 감정,사랑과 환멸, 외로움과 관능의 문장들.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진짜 자신의 또 다른 그림자였다.하준은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있었다.평소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예전보다 깊어 있었다.이제는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다.그가 기다리는 것은 진심, 그리고 그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정말 말해야 할까 싶었어요.”서윤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지만 그 안에는 묵직한 파동이 일고 있었다.“말하면, 모든 게 달라질까 봐 겁났어요. 회사에서의 나, 하준 씨 앞에서의 나,그리고 노트북 앞에서의 나… 그 모든 이름이 한꺼번에 무너질까 봐.”하준은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서윤은 잠시 침묵했다가, 한 손을 뻗어 노트북을 열었다.화면 안에는 수많은 폴더가 정리되어 있었다.그 중 하나 ‘작업 중 원고’라는 이름의 폴더를 클릭하자그 안에 담긴 수십 개의 파일들이 일제히 드러났다.『지독하게, 부드럽게』 『네 이름으로 날 불러줘』『몸의 기억은 마음보다 오래 간다』그리고 가장 마지막, 『내가 너를 쓰기 시작한 날부터』그제야, 하준의 눈이 아주 조용히 흔들렸다.“…그동안 이걸 쓰고 있었어요?”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나예요. 회사에서 보이는 모습보다, 더 진짜 나에 가까운.”하준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파일 하나를 클릭해 첫 페이지를 읽었다.그는 문장을 천천히, 아주 느리게 따라 읽었다.“그 사람은 웃지 않았다. 하지만 눈빛 하나로, 나를 천천히 벗기기 시작했다.”그 문장을 읽고 난 후, 하준은

  • 여상사의 비밀 알바   64. 그 사람의 눈으로 내가 쓰여질 때

    밤늦게까지 이어진 회의, 기록을 정리하고 마지막 보고 메일을 보내기까지의 긴 시간. 사무실엔 이미 대부분의 불이 꺼지고, 복도에는 조용한 정적만이 가라앉아 있었다.서윤은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 커피를 데우러 탕비실로 향했다.하이힐을 벗어둔 발끝이 마룻바닥에 살짝살짝 부딪힐 때마다, 그녀는 오히려 그런 소리에 안도했다.그 어떤 설명도 필요 없는, 익숙한 야근의 공기.그 속에서만큼은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은 채 자기 자신으로 있을 수 있었으니까.컵에 커피를 붓고 뒤돌던 순간, 문득 복도 쪽에서 낮은 인기척이 들렸다.“…팀장님?”그림자처럼 나타난 이진이 탕비실 문턱에 기대선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다크한 수트와 풀린 넥타이, 그리고 그의 손에는 낡은 표지의 소설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이 시간까지… 여기 계셨네요.”그는 그녀의 손에 들린 머그컵을 가리켰다. 서윤은 어색하게 웃었다.“잠깐, 커피 마시러요. 보고서 정리 좀 늦게 끝나서…”그는 아무 말 없이 다가와, 조용히 머그컵을 들어 그녀의 손끝에 닿을 듯 말 듯 가져갔다.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말했다.“이거, 그때랑 똑같네요. 팀장실에서 처음 같이 마셨던 커피 맛.”“…기억하세요?”“이상하게, 그 날 이후로 계속 그 커피 생각이 났어요.쓰고, 묘하게 따뜻하고, 잊히지 않게 만드는 맛.”말의 결이 묘하게 감정의 결을 따라붙는 것 같아, 서윤은 커피잔을 다시 받아 들며 눈길을 피했다.“혹시… 이 책, 읽어본 적 있어요?”이진이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내민 책.붉은색 하드커버에 금박 글씨로 새겨진 제목,'화양연화, 또는 불가해한 감정'그건 서윤이 핑크문으로 활동하던 초창기 시절에 가장 오랜 시간 손질하고, 가장 큰 애정으로 출간했던 첫 19금 단행본 소설이었다.“아… 예전에, 잠깐 본 적 있어요.”그녀는 당황한 기색을 숨긴 채 대답했지만, 이진은 이미 눈빛에서 그 진심의 결을 읽고 있었다.“어쩐지… 문장이 익숙하더라고요. 회의 때 가끔 서윤 씨가 사용하는 어휘들이

  • 여상사의 비밀 알바   63. 네가 웃는 날엔

    창밖의 햇살이 유난히 따사로운 오후였다.회사의 복도에는 점심시간을 알리는 가벼운 발걸음과 웃음소리가 섞여 흐르고 있었지만, 서윤은 그 풍경과 묘하게 어긋나 있었다.작은 회의실 안, 커튼이 반쯤 내려진 조용한 공간 속에서 그녀는 문득, 손끝에 맺힌 미세한 떨림을 느꼈다.노트북을 열어둔 채로 한참이나 화면을 바라보다, 서윤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이진의 말이 계속 귓가를 맴돌고 있었다.“숨기고 싶지 않아요. 당신이 누구든.”그 말은 무심한 듯 다정했고,한편으로는 너무 가까워 두려웠다.“무슨 생각해요?”하준의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서윤은 놀란 듯 고개를 들었고, 그가 이미 문을 열고 들어서 있는 것을 보았다.“여기서 일하고 있었어요?”그녀는 서둘러 노트북을 덮었다.“아니요, 그냥… 잠깐 생각 좀 하느라요.”하준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 맞은편에 앉았다.그의 손에는 커피 두 잔이 들려 있었고, 한 잔을 조용히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요즘 얼굴이 자꾸 피곤해 보여요. 무리하지 말아요, 서윤 씨.”그 말에 서윤은 잠시 숨을 멈췄다.지금, 그녀의 일상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짜였을까.낮에는 마케팅팀의 차서윤이고, 밤에는 핑크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또 다른 자신.그 모든 경계가 무너질 듯한 나날 속에서 이렇게 다정하게 건네는 말 한마디는 가끔 견디기 어렵도록 아프게 다가왔다.“하준 씨.”“응?”“저… 혹시, 내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면, 지금처럼 똑같이 대해줬을 것 같아요?”그는 잠시 놀란 표정이었지만, 곧 잔잔한 미소로 대답했다.“그 사람이 차서윤이라면, 그게 어떤 모습이어도 상관없어요. 난… 그냥 서윤 씨가 웃는 걸 보고 싶어요.그게 내가 좋아하는 그 사람이니까.”서윤은 말없이 커피잔을 들었다. 따뜻한 온기가 손끝으로 전해졌고,그 따뜻함이 마음 어딘가까지 스며드는 것 같았다.그날 밤. 서윤은 이진에게도, 하준에게도 아무 연락을 하지 않았다.창밖엔 봄비처럼 가느다란 비가 내리고 있었고, 그녀는 작은 책상 앞

  • 여상사의 비밀 알바   62. 들키지 않을 방법은 없어도

    낮은 조명이 깔린 회의실 안. 눈을 맞추지 않고 말하는 사람,눈을 맞추고도 말하지 않는 사람.이진은 테이블 너머로 서윤을 바라보며 말했다.“그 원고, 어디까지 쓴 거예요?”서윤의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의자에 등을 기대려다 멈춘 몸은, 오히려 더 조심스러워 보였다.“무슨 말씀이신지…”그녀의 말은 짧았고, 목소리는 낮았다.그러나 그 안에는 너무 많은 말이 숨어 있었다.이진은 그런 그녀를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결국 한쪽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나, 그 소설 좋아해요.”그 말에 서윤은 고개를 들었다.이진의 눈빛은 놀랍도록 담담했고, 동시에 깊었다.“우연히… 아니, 실은 예전부터 알았어요. 차서윤이 핑크문 작가라는 거.”숨이 멎는 것 같았다.서윤은 그 자리에 앉은 채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그리고 조용히 물었다.“…어떻게요?”“너무 피곤한 얼굴로 출근하는 날들, 계속 열려 있는 노트북,이상할 만큼 디테일한 설정 회의, 회의실에서 흘리듯 한 문장들… 전부 다.”이진은 정리된 듯 말했지만, 그 목소리 안에는 혼란이, 그리고 오래된 단념이 스며 있었다.“처음엔 단순한 호기심이었어요. 하지만, 그게 점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고,어느새… 당신의 문장을 기다리는 독자가 됐어요.”서윤은 머리가 하얘지는 느낌이었다.감춰야만 했던 이유들, 들키지 말아야 했던 정체,그리고 그 위에 쌓아 올렸던 조심스러운 관계들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소리 같았다.“팀장님… 죄송해요. 전..”“미안하단 말, 하지 말아요.”이진이 조용히 끊었다.“당신은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어요. 그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뿐.”서윤은 입술을 다물었다. 말을 잇지 못했다.그의 눈빛이, 너무 진지해서, 너무 아파서.그날 오후. 하준은 복사기를 돌리며 무심코 벽에 붙은 게시물을 보고 있었다.그런데, 무심히 흘러나온 동료의 대화 한마디가 귓가에 박혔다.“혹시 우리 회사에… 야한 글 쓰는 작가가 있다던 소문 들었어?”“어? 그거 진짜야?

  • 여상사의 비밀 알바   61. 함께 쓰는 문장

    늦은 밤, 사무실에 남은 불빛은 이제 거의 없다시피 했다. 대부분의 직원들이 퇴근한 시간, 복도 끝 회의실에선 은은한 조명 아래 조용한 타자 소리만이 들려왔다. 차서윤과 정하준.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한 대의 노트북 앞에 있었다.커서가 깜빡이고, 낯선 문장이 화면 위를 조용히 채워나갔다.서윤이 쓴 단어들 위에 하준이 문장을 덧대고, 하준이 놓은 장면 뒤에 서윤이 숨을 불어넣었다.말이 많지는 않았지만, 둘 사이엔 문장보다 더 많은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이 대사, 조금 과한가요?”하준이 조심스럽게 묻자, 서윤은 그의 화면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좋아요. 그러니까... 감정을 숨기지 않아서 좋다고 해야 할까. 그 인물이 꼭 지금의 하준 씨 같았어요.”그 말에 하준의 손이 잠깐 멈췄다.그는 무심한 척 타자를 이어가려 했지만, 화면에 오타 하나가 덜컥 박혔다.“...그 인물, 결국엔 고백하나요?”서윤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웃었다.“고백은... 받을 준비가 된 사람이 먼저 시작하는 거예요. 상대방이 아니고, 자기 자신한테요.”하준은 그 말을 오래 곱씹는 듯, 천천히 숨을 쉬었다.서윤이 늘 쓰던 문장들이었지만, 지금처럼 그녀의 목소리로 들으니 전혀 다른 진심처럼 가슴에 박혔다.그날 밤, 둘은 그 어떤 회의보다 긴 시간을 함께 앉아 있었다.화면에는 둘이 쓴 이야기의 조각들이 하나하나 이어지고 있었고, 그 문장 속에서 둘의 마음은 조용히 이어지고 있었다.“이런 밤, 이상하지 않아요?”회의실을 나와 엘리베이터 앞에 선 서윤이 말했다.“아무도 없고, 다들 퇴근한 건물 안에서...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거.”하준은 그 말을 듣고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전 이상하지 않아요. 오히려 지금이... 자연스러워요.”“왜요?”“낮에는 선배가 너무 선배라서, 제가 쉽게 다가갈 수 없잖아요.근데 밤에는, 이렇게 같은 곳에서 같은 속도로 앉아 있으니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으로 보여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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