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너도 가.”
강은택이 최지호를 돌아보며 짧게 말했다. 최지호는 이번엔 놀라지 않았다. 그가 동행을 요구할 거라고 예상한 듯 묵묵히 겉옷을 챙겨 들며 짧은 외출을 준비할 뿐이었다.
“형, 마트로 간댔지. 그럼 내 차 타자.”
최지호가 겉옷 주머니에서 잘그랑거리며 차 키를 꺼냈다. 야구모자를 아무렇게나 눌러 쓰며 현관으로 향하던 강은택이 순간 멈칫했다.
“야, 설마 그거? 농담하지 마라.”
“왜?”
시선이 마주친 두 사람이 동시에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 타박타박 작은 발소리와 함께 도복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심우주가 사다 준 네이비 색상의 니트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작을 줄 알았던 옷은 소재 특성상 부드럽게 늘어났다. 몸에 딱 맞게 붙은 니트는 여성스러운 라인의 장점만 살려서 훨씬 깔끔한 인상을 주었다. 포대자루 같은 커다란 원피스가 빗물에 젖어 아무렇게나 들러붙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생각보다 좀 짧네요.”
그녀는 어색해하며 원피스 끝자락을 조금 잡아 내렸다. 몸의 굴곡을 따라 천이 당겨지며 생각보다 조금 짧아졌다. 아찔할 정도로 짧은 길이감은 아니었으나 무릎이 완전히 드러나는 기장이었다.
최지호는 말없이 옅게 웃으며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부담스럽지 않은 조용한 칭찬에 도복희가 기분 좋게 웃으며 뺨을 붉혔다.
말이 없는 건 강은택도 마찬가지였으나 그의 표정은 최지호와는 완전 딴판이었다. 분명 심우주의 센스는 나쁘지 않았지만, 강은택은 다리를 훤히 드러내는 게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담요를 둘러 저 희멀건한 작대기 두 개를 가려 버리고 싶었지만, 각설이 같은 꼴로 마트에 데려갈 수는 없었다.
집 밖으로 나온 두 남자는 그녀의 옷차림을 보느라 잠시 잊고 있었던 실랑이를 다시 시작했다.
“그냥 내 차 타자니까. 잘만 굴러가.”
“미쳤냐? 내가 그걸 왜 타."
도복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겁을 먹기는커녕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지금 마트에 사람 많아. 이건 경차 전용 칸에 주차할 수 있어서 편하다니까.”
최지호의 까무잡잡한 손끝이 붉은 담벼락 아래에 선 하얀색 박스카를 가리켰다. 가뜩이나 앙증맞은 형태의 차는 몸집이 큰 최지호의 옆에 있으니 정말 장난감처럼 보였다.
“하…. 이 덩치에 저걸….”
강은택은 저 작은 차가 굴러갈까 걱정하는 게 아니라 그냥 쪽팔려서 타고 싶지 않았다.
“왜요? 저거 4인승 아니에요?”
도복희의 얼굴에는 ‘뭐가 문제죠?’ 라고 쓰여 있는 듯했다. 강은택의 체면 따위는 그녀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결국 세 사람은 귀여운 하얀색 박스카를 타고 인근 마트로 향했다. 최지호가 운전대를 잡았고, 조수석에 앉은 도복희는 나들이 가는 어린 아이마냥 즐거운 얼굴로 차창 밖을 구경했다. 뒷자리의 절반을 차지하고 앉은 강은택은 팔짱을 낀 채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도복희는 마트에 도착하자마자 한눈을 팔기 시작했다. 최지호도 덩달아 벽에 붙은 전단을 보며 ‘오늘의 특가 상품’ 따위에 관심을 가졌고, 방문 목적을 잊지 않은 건 강은택뿐인 듯했다.
강은택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살 것만 사고 가자고.”
미세하게 짜증이 서려 있는 그의 말투를 듣고 다른 두 사람이 정신을 차렸다.
마트 지하에서 지상층으로 올라가자 다양한 매장이 줄지어 있었다. 주방 패브릭, 침구, 유아동복 브랜드 등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자 홈웨어 코너가 있었다. 마트 내에 입점한 브랜드답게 온 가족을 타겟팅했는지, 남자들 중 가장 보수적인 강은택이 보기에도 부담스럽지 않은 잠옷이나 라운지 팬츠 따위가 보기 좋게 진열되어 있었다.
“빨리 사. 살 안 나오는 걸로.”
도복희는 파스텔 톤의 홈웨어 세트가 잔뜩 걸린 행거 앞으로 다가가 잠시 뒤적거렸다. 강은택은 한 발자국 물러서서 잠시 고를 시간을 주었다. 그러나 그녀가 옷에 붙은 가격 태그를 확인하는 걸 보고는 불쑥 다가가 옆에 섰다.
“이걸로 해, 그냥.”
강은택은 디자인이나 색상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가장 무난해 보이는 것을 집어들었다. 장식이 없는 부드러운 소재의 긴소매 티셔츠와 신축성이 좋아 편안한 체크 패턴의 바지로 구성된 옅은 회색의 라운지 세트였다. 오로지 실용성만 고려한 선택이었다.
“저거 주세요.”
강은택이 점원에게 간결하게 말했다.
점원이 눈치껏 다가와 도복희에게 사이즈를 확인했다. 그러는 동안 강은택은 이미 계산대 앞에 가 있었다. 그는 손에 쥔 카드 모서리로 의미없이 계산대를 툭- 툭- 두드리며 지루한 표정을 지었다. 강은택의 눈에 그녀가 점원과 작당모의라도 하듯 쑥덕거리는 모습이 들어왔지만, 그는 모른 척해 주었다. 점원이 박스를 뒤져 꺼내온 새 상품이 그가 고른 것과 다르게 연녹색인 것도 분명 눈치 챘지만, 강은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결제를 위해 카드를 내밀 뿐이었다.
강은택이 도복희와 함께 라운지세트를 사는 동안에 잠시 사라졌던 최지호가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비닐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강은택의 시선이 힐끗 내용물이 비치는 반투명한 비닐백으로 향했다. 슬리퍼가 들어 있었다. 그것도 분홍색 슬리퍼가. 그는 최지호의 난데없는 충동 구매에 미간을 좁혔다. 뭐냐고 묻기도 전에 최지호가 부스럭거리며 그것을 꺼내 바닥에 툭 내려놓았다.
작았다. 그 슬리퍼는 최지호 자신이 신기 위해 산 것이 아니었다.
강은택은 그제서야 도복희의 발끝을 보았다. 그녀가 신은 얇은 컨버스화는 너무도 낡고 꾀죄죄했다. 어쩌면 빗물이 다 마르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이거 신어.”
최지호다운 배려였다. 아마 더 좋은 것을 사 줄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도복희가 부담스러워할 거란 걸 알았다.
“오! 고마워요.”
그녀의 입에서 처음으로 적당한 수준의 감사 인사가 나왔다. 도복희는 지저분한 운동화를 벗고 분홍색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뒤꿈치 쪽이 조금 남았으나 걸어 다닐 때 불편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는 최지호의 손에서 빈 쇼핑백을 받아들어 낡은 신발을 챙겨 넣었다. 그 모습을 빤히 보고 있던 강은택은 그냥 버리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참았다.
“다 샀어? 필요한 거 있으면 빨리 사.”
강은택은 그저 이 귀찮은 일을 얼른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도복희의 입에서는 명쾌하게 ‘다 샀어요’ 라는 말도, 아니면 콕 집어서 무언가 필요하다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잘잘 씹으면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성질 급한 강은택이 결국 또 인상을 썼다.
“뭔데.”
“아직 해가 중천인데?”심우주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도복희가 현관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큰 키 덕분에 어느 문이든 드나들 때마다 살짝 고개를 숙이는 게 습관이 되어 버린 최지호였다. 턱을 들자마자 도복희와 눈이 마주치니 조금 당황하는 듯 보였다.“일요일인데, 어디 다녀오세요?”도복희의 시선이 그의 비어 있는 손에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눈을 마주쳤다.“마트 다녀온 것도 아닌 것 같은데요?”“아, 응…. 잠깐 배달.”“배달요?”도복희는 전혀 감이 안 잡힌다는 듯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최지호는 어쩐지 부끄러워하며 손을 제 등 뒤로 숨겼다. 배달을 다녀왔다는 그의 손에는 거무스름하게 약간의 흙이 묻어 있었다. 그의 입장에선 썩 보여 주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나무 배달.”최지호는 마지못해 꺼내 놓는 사람처럼 짧게 대답했다. 자신이 하는 일을 듣고서 흥미로워하는 여자애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사실 그가 자기보다 훨씬 어린, 도복희의 또래와 이야기를 나눌 일 자체가 딱히 없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는 그 동그란 눈에 깃든 호기심 어린 빛이 금방 사그라들 거라고 여겼다.“우와. 그냥 꽃집 한다고만 들었는데!”도복희는 손뼉을 짝― 치더니, 신이 난 것처럼 생글생글 웃었다.“꽃집 운영하는 거 맞는데, 외곽 쪽에 온실 하우스도 있어.”“대박, 대박. 저 언제 한 번 구경 가면 안 돼요?”예상과는 다른 반응에 최지호가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구경?”“네!”최지호의 눈이 느리게 꿈뻑거렸다. 그녀를 바라보며 예의상 하는 말인지 가늠해 보고 있었다. 그러나 도복희의 표정에 뜬 신호는 분명한 흥미였다.“…그래. 그럼 너 쉬는 날 한번 같이 가자.”“쉬는 날요?”도복희는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가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최지호는 아직 그녀가 강은택의 사무실 아르바이트에 나가지 않게 된 사연을 모르고 있었다.“아아. 저 다시 백수예요.”“아…, 그래?” 최지호는 심우주와 다르게 덜컥 ‘왜’를 묻
도복희는 흥신소 사무소에서 있었던 일을 다른 남자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들이 그 사건을 알게 된 건 며칠이 지난 후였다.한가로운 주말의 낮 시간. 도복희는 거실 소파에 앉아 영화 채널에서 방영해주는 오래된 코미디 영화에 빠져 있었다. 옆에 앉은 심우주는 이미 내용을 알고 있어 흥미를 두지 않았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핸드폰을 두드리던 그의 손가락이 뚝 멈추었다. 심우주는 고개를 들어 도복희를 보았다. 한동안 그녀가 열심히 강은택을 따라 나가던 아르바이트를 더는 나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은 것이었다.“복희야.”“네에.”“그러고 보니까 너 며칠째 알바 안 나가는 것 같다? 짤렸냐?”도복희는 내내 집중하고 있던 TV에서 눈을 떼고 그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어색하게 웃었다. 어쩐지 그 웃음이 탐탁치 않게 느껴진 심우주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왜. 은택이 그놈이 나오지 말래?”“아, 아뇨?”그런 일을 겪었으니 자연스레 나가지 않게 된 것뿐이지, 딱히 강은택에게 직접적으로 아르바이트 관두라는 말을 들은 적은 없었다. 도복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을 내저었다.“그럼 왜 안 나가? 너 돈 벌어야 한다며.”단지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니었다. 심우주의 목소리에서는 분명하게 캐묻는 기색이 있었다. 도복희는 얼른 변명거리를 내놓지 못하고 머뭇거렸다.“…무슨 일 있었구나?”추측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심우주는 도복희에게 조금 더 가까이 몸을 당겨 앉으며 작은 소리로 말을 이었다.“무슨 일인데. 오빠한테 살짝 말해봐.”심우주의 눈이 흥미로 반짝거렸다. 그는 도복희가 겪은 일이 그런 종류일 것이라곤 전혀 예상치 못하고 그저 골때리는 에피소드쯤일 거라 여기는 듯했다.“그게요…….”그녀는 결국 입을 열었다. 강은택이 자리를 비울 때면 1층의 미나 씨와 함께 있는 것이 보통인데, 그날은 어쩌다 보니 잠시 혼자 사무실을 지키게 된 일. 고작 그가 세 시간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런 사건이 터졌고, 자신은 창고에 숨어 있었다는 이야기.
“저는 이미 옆에 있잖아요.”강은택은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어요, 아저씨가 하는 일.”“아.”한 집에 살면서도 도복희가 자신이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전혀 모를 거라고 여겼던 자신의 생각이 조금은 안일했다는 걸 강은택은 지금에서야 느꼈다. 그럼 이 아이는 흥신소 소장이 꽂아주는 아르바이트라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냉큼 따라나섰단 말인가.“겁이 없는 건지.”아니면 세상이 온통 꽃밭인 건지. 강은택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삼켰다.“아저씨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든, 저를 위험하게 만들진 않을 거라고 생각하니까요.”거짓말을 하는 눈은 아니었다. 도복희는 정말로 그렇게 믿고 있는 듯했다.“야, 너.”강은택은 겨우 진정이 된 그녀를 다그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으나 저도 모르게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너 세상이 만만하냐? 너랑 내가 얼마나 봤다고, 뭐 어떻게 굴러먹던 놈인 줄 알고 그렇게 덥썩 믿어?”확실히 도복희는 낯선 곳에서 눈을 떠 낯선 사람들이 주는 음식을 덥썩 받아먹던 여자애였다. 대책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런 아이를 다시 길바닥 헤매고 다니게 뒀다가 무슨 큰일이라도 당할까 싶어, 제 집에 머무르게 하는 중인 강은택이 할 말도 딱히 아니었다. 이미 식구로 스며들기 시작한 도복희가 이 집에 온 지 벌써 한 달이었다.“다른 누군가에게 아저씨가 어떤 사람인지 저는 당연히 모르죠…. 그치만, 제게는 좋은 사람이에요.”“…뭐?”좋은 사람. 흔해 빠졌지만, 자신에게만은 생소한 그 단어에 강은택이 말을 잃었다. 일찍이 부모를 잃고 삐뚤어진 그가 자라면서, 살아오면서 들어본 적 없던 말이었다.강은택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자신의 차에 치였으니, 약과 밥을 먹였을 뿐이고, 회복해서 정상적인 직업활동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잠시 거처를 내어 줬을 뿐이었다. 그런 자신에게 좋은 사람이라니.강은택은 순진한 믿음으로 일렁이는 도복희의 눈을 바라보았다. 복잡한 마음이 들면서도 가슴 한구석에선 책임감과 함께
밖이 고요해졌다. 그들이 돌아간 건지, 아니면 숨을 묵이고 기다리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도복희는 계속해서 창고에 웅크린 채 숨어 있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덜커덩거리며 거칠게 출입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다급한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이내 창고 문이 벌컥 열렸다.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여전히 겁을 먹은 상태인 도복희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창고 문을 열어젖힌 누군가가 도복희에게 손을 뻗었다.“시, 싫어….”도복희는 제대로 보지도 않고서 마구 팔을 휘저으며 그 손을 뿌리쳤다. 입에서 끅끅대는 애처로운 울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아저씨야.” 침착한 낮은 음성. 도복희의 가녀린 팔이 다부진 손에 붙잡혔다. 그녀는 온통 눈물로 젖은 얼굴을 천천히 들었다.“괜찮아?”강은택이었다.창고 앞 좁은 복도에 강은택이 그 큰 덩치를 구기고 도복희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자세를 낮추고 눈을 마주친 그의 표정은 조금 찌푸린 채였으나 옅은 갈색의 눈동자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 도복희의 팔을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그저 감싸는 모양새였다.도복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참고 있던 것이 한꺼번에 무너졌다. 억누르고 있던 가쁜 숨과 함께 안도의 눈물이 터져 나왔다.“아, 아저씨…….”도복희는 저도 모르게 그의 품에 뛰어들었다. 강은택의 단단한 가슴팍에 이마를 박고 꺽꺽 숨 넘어갈 듯한 소리를 내며 울었다. 강은택은 움직이지 못했다. 정확히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멈춘 것에 가까웠다.서른넷. 결코 어린 나이는 아니었다. 맞을 때 최대한 덜 아프게 맞는 요령을 열네 살에 배웠고, 스물쯤엔 동네에서 주먹질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게 됐다. 스물다섯에는 칼날 앞에서 눈을 깜빡이지 않는 요령을 터득했다. 사람을, 그것도 한참 어린 여자애를 달래는 방법은 누가 알려준 적도 스스로 깨우치려고 해 본 적도 없었다.허공에 떠 있던 오른손이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도복희의 등으로 내려앉았다. 어색했다. 강은택은
그건 본능이었다. 도복희는 재빨리 출입구 쪽으로 뛰어가 전등불을 끄고 문을 잠갔다. 잠금 장치를 돌릴 때 손이 두 번이나 미끄러졌다.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캐비닛 옆 벽에 납작하게 몸을 붙일까, 아니면 책상 아래에 몸을 숨길까. 그 짧은 시간 동안 고민한 도복희는 혹시 저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오진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발이 먼저 움직였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발은 빨랐다. 도복희는 화장실 옆 청소도구를 보관하는 작은 창고에 몸을 욱여넣었다. 강은택처럼 체구가 큰 성인 남성이라면 어림도 없었겠지만, 그녀는 몸집이 작았다.문 아래의 작은 틈으로도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비집고 들어온지라 뒤에선 아마 청소도구일 무언가가 등을 찔렀다. 쿰쿰하고 좋지 않은 냄새가 났다. 그러나 그런 불쾌감을 느끼는 것도 잠시였다.사무실 출입문이 부서질 듯 흔들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그녀의 온 신경은 바깥으로 쏠렸다. 다른 자잘한 것들은 더 이상 느껴지지도 않았다.“잠겼네.”“창문 열려 있고, 안에 선풍기도 돌아가는데.”쾅― 문을 걷어차는 듯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도복희는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도복희는 울음이 새어 나갈세라 손으로 입과 코를 세게 틀어막았다.전에도 이런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수년 전, 세상에 서로뿐이던 세 가족의 행복이 박살나던 순간. 도복희가 엄마와 오빠를 잃은 날이었다.보름달이 뜨면 하얀 꼬리가 돋아나는 그녀의 비밀. 그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종족, ‘흰꼬리족’의 고유한 특성이었다.옛날 이야기에 종종 등장하는 구미호. 흰꼬리족은 그 구미호족의 방계쯤 되는 종족이었다. 인간의 간을 취하는 구미호와는 다르게 흰꼬리족은 그런 것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현대에 와서 절멸한 구미호족과는 다르게 흰꼬리족은 아직까지도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흰꼬리족은 다들 흩어져서 조용히 살았다. 도복희는 같은 종족인 엄마, 오빠와 함께 ‘희산’이라는 지방의 작은 산촌 도
점심 식사가 끝난 후, 강은택은 2층으로 도복희를 데리고 올라갔다. ‘가스콘 심부름센터’라는 작은 나무 팻말이 걸린 사무실. 스위치를 눌러 전등불을 켜자 형광등이 윙― 하고 울었다. 1층의 용역 사무소도 충분히 어수선했으나 김미나가 매일 출근하며 기본적인 청소는 했으니 지저분하진 않았다. 그러나 2층에는 군데군데 뿌연 먼지가 쌓여 있었다.강은택은 말없이 자기 책상으로 가서 주머니에 든 차 키를 툭 내려놓았다. 평소처럼 담배를 꺼내 물고 찰칵― 라이터에 불을 켰다가, 담배에 옮겨 붙이기 직전에 이 공간에 저 말고도 다른 사람이 하나 더 있단 것을 자각했다. 도복희는 벽에 걸린 액자 속의 허가증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강은택은 물었던 담배를 그냥 내려놓았다.“청소도구는 화장실 옆 창고에 있다. 쓰레기봉투는 필요하면 편의점에 가서…. 아니다. 그냥 1층에 가서 받아.”“네!”“저기 있는 캐비닛은 열지 말고.”“네!”강은택은 어쩐지 물가에 애를 내놓는 기분이 들었다. 열일곱 살부터 온갖 아르바이트를 섭렵해 온 도복희는 빠릿하고 꼼꼼한 편이었다. 자랑으로 들릴까봐 남들에게 말하진 않지만, 어디 가서 일 못한단 소리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던 그녀였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르는 강은택에게 도복희는 대책 없이 해맑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엉뚱한 여자애였다.창고에서 몇 가지 쓸 만한 청소도구를 찾아낸 도복희는 창문을 활짝 열고 먼지 털기부터 시작했다. 쓰레기통을 비우고, 시들해진 화분에 물을 주고, 커피 자국이 남은 테이블도 닦았다. 캐비닛을 열지 말라고 했으니 캐비닛의 겉면과 손잡이만 박박 닦았다.강은택은 할 일이 있는지 컴퓨터 앞에 앉아서 마우스를 딸깍거렸다. 이따금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도복희를 힐끔거리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시선이 마주쳤다. 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