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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식어가는 데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저 연락이 뜸해지고,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고, 사랑한다는 말이 사라질 뿐이었다. 그리고 한서윤은 그 모든 변화를 11년이라는 이름으로 견뎌왔다. 오후 7시 30분. 서윤은 레스토랑의 빈 의자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차민혁과 연애를 시작한 지 정확히 11년째 되는 날이었다. 테이블 옆에는 며칠을 고민해 고른 선물이 놓여 있었다. [서윤 : 어디쯤이야?] 한참 뒤 도착한 답장은 짧았다. [민혁 : 회의 길어져. 먼저 먹어.] 서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서윤 : 오늘 기념일이잖아. 기다릴게.] 그러나 답장은 오지 않았다. 오후 8시. 결국 서윤이 먼저 전화를 걸었다. “민혁아, 언제 와?” — 아직 식당이야? “응. 기다리고 있어.” — 아, 왜 아직도 거기 있어? 먼저 먹으라니까. 짜증 섞인 목소리에 서윤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잖아.” — 서윤아. 우리 나이에 무슨 기념일을 그렇게 챙겨? 스무 살도 아니고. 그녀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냥 같이 밥 한 끼 먹고 싶었어.” — 그럼 주말에 먹으면 되잖아. “주말엔 당신 골프 약속 있잖아.” — 그럼 다음 주에 먹든가. 나 지금 바빠. 끊어. 뚝. 전화가 끊겼다. 서윤은 한동안 휴대전화를 내려다보았다. 언제부터였을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고 싶다고 말하는 것조차 눈치를 보게 된 것이. 밤 9시 30분. 민혁의 아파트. “뭐야, 아직 안 갔네.” 퇴근한 민혁이 넥타이를 풀며 말했다. “우리 얘기 좀 하자.” “또 뭐가 서운한데?” 또. 서윤은 그 한마디에 씁쓸하게 웃었다. “민혁아. 우리 마지막으로 제대로 데이트한 게 언제야?” “갑자기 그건 왜?” “내 생일에도 바빴고, 아플 때도 연락 한 통 없었잖아.”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면 되잖아.” “항상 내가 말해야 해?” 민혁이 한숨을 쉬었다. “서윤아, 우리 11년이나 만났어. 아직도 연애 초반처럼 해줘야 해?” 서윤은 그를 바라보았다. 한때는 자신을 만나기 위해 두 시간도 기다리던 남자였다. 추운 겨울이면 차가운 손을 자신의 코트 주머니에 넣어주던 남자. 그 다정했던 사람은 언제부터 사라졌을까. “나 당신한테 큰 거 바란 적 없어.” “그럼 뭐가 문제인데?” “그냥…… 나도 사랑받고 싶었어.” 민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윤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우리 이제 그만하자.” “뭐?” “헤어지자고.” 민혁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기념일에 좀 늦었다고 헤어지자는 거야?” “그것 때문만이 아니야.” “11년이야, 한서윤. 그 세월을 이렇게 끝내겠다고?” 서윤의 눈가가 붉어졌다. “나도 그 시간이 아까워서 못 끝냈어.” “…….” “그런데 민혁아.”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당신이 옆에 있어도 난 오래전부터 혼자였어.” 민혁의 표정이 굳었다. 서윤은 준비했던 선물을 식탁에 내려놓았다. “잘 지내.” 현관문을 열자 민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며칠 지나면 진정되겠지. 그때 다시 얘기하자.” 서윤은 돌아보지 않았다. “이번에는 안 돌아와.” 철컥. 11년의 사랑이 끝났다. 밤 10시 40분. 서윤은 절친 오하린이 운영하는 와인바에 앉아 있었다. “그래서 진짜 끝냈어?” “응.” “잘했어.” 하린의 말에 서윤의 눈물이 떨어졌다. “근데 왜 이렇게 아프냐.” “11년인데 안 아프면 이상하지.” 하린이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이제 그만 참아도 돼.” 서윤은 한참을 울다가 와인잔을 들었다. “나 이제 연애 안 해.” “그래, 쉬어.” “남자는 진짜 지긋지긋해.” 그때였다. “저도요?” 낯선 남자의 목소리. 서윤이 고개를 들었다. 흰 셔츠에 검은 슬랙스. 훤칠한 키와 넓은 어깨, 웃으면 부드럽게 접히는 눈매. 눈에 띄게 잘생긴 남자가 서 있었다. “……네?” “남자 지긋지긋하다면서요. 저도 포함이에요?” 서윤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쪽도 남자잖아요.” “아, 아쉽다.” “뭐가요?” 남자가 싱긋 웃었다. “처음 보는 순간 마음에 들었는데, 시작도 못 해보고 차였네.” “……네?” “강이준입니다. 서른 살이요.” 그가 장난스럽게 고개를 기울였다. “근데 누나.” “저 누나 아닌데요?” “저보다 아홉 살 많으시잖아요.” “그렇다고 처음 보는 사람한테 누나라고 해요?” “그럼 앞으로 자주 보면 되겠네요.” 서윤은 황당해서 웃음을 터뜨렸다. 이준은 그런 그녀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웃었다. “웃으니까 훨씬 예쁘네요.” 서윤의 심장이 순간 움찔했다. 얼마 만이었을까. 누군가 자신을 이렇게 바라봐 준 것이. 그때 이준이 한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오늘은 이만 갈게요.” “네. 조심히 가세요.” 그는 돌아서다 말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 누나.” “왜요?” “오늘은 남자 싫다고 하셨잖아요.” “……네.” 그가 장난스럽게 눈을 접었다. “그럼 내일은요?” “네?” “내일도 남자 싫으세요?” “그걸 왜 물어요?” 이준이 환하게 웃었다. “내일은 저도 기회가 있을까 해서요.” 서윤은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11년의 사랑을 끝낸 바로 그날 밤. 다시는 연애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그녀 앞에, 아홉 살 어린 남자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남자는, 시작부터 선을 넘고 있었다.수요일 아침.[이준 : 누나아! 좋은 아침!][이준 : 어제 멋있었다는 말, 아직 유효하죠?][서윤 : 칭찬에도 유효 기간이 있어?][이준 : 누나 칭찬은 평생 보관하려고요.]서윤은 웃음을 삼켰다. 휴대전화가 울리면 그를 떠올렸다.아홉 살 어린 남자. 연애할 마음도 없는데 자꾸 기다리게 됐다.[서윤 : 오늘도 잘하고 와, 이준아.][이준 : 충성! 오늘 업무 성과 두 배로 내겠습니다!]서윤이 혼잣말했다.“큰 강아지 같아, 정말.”토요일 오전, 플래그십 스토어 조사를 위해 찾은 꽃시장.서윤은 입구에서 이준을 발견했다. 베이지색 재킷에 도면 가방을 멘 그가 그녀를 보자 환하게 손을 흔들었다.“한 팀장님! 여기요!”직원들이 앞서가자 이준이 슬쩍 고개를 숙였다.“누나, 오늘 예쁘네요.”“강 대표님. 업무 중이거든요?”“그래서 작게 말했잖아요.”그가 옷깃을 매만졌다.“저도 오늘 꽤 신경 썼는데, 칭찬 없어요?”“응. 잘 어울려.”“아싸. 오전 목표 달성!”해맑은 미소에 서윤은 결국 웃었다.점검이 시작되자 이준은 달라졌다. 진열대 높이를 재고, 조명 때문에 꽃잎의 색이 달라 보이는 문제를 바로 짚었다.“입구는 낮은 화기를 세 구역으로 나누죠. 고객 동선도 넓어집니다.”“좋네요. 월요일 회의에 반영해 주세요.”“네, 한 팀장님.”그가 메모하는 모습을 보니 믿음직스러웠다.조사가 끝날 무렵, 안쪽 통로로 손수레가 들어왔다.“지나갑니다! 비켜주세요!”사람들이 움직이자 서윤이 옆으로 밀렸다.“어!”이준이 재빨리 서윤의 손을 잡아 중심을 잡아 주었다. 손이 닿은 건 잠깐. 그는 그녀의 손을 자기 팔꿈치 부근 소매로 옮겼다.“자, 여기 잡아요.”“응?”“제 소매요. 누나 잃어버리면 안 되니까.”“내가 무슨 어린애야?”“맞아요. 이렇게 큰 누나 잃어버리면 큰일이죠.”“강이준!”“하하! 자, 출발합니다. 한서윤 어린이!”서윤은 웃으며 그의 팔꿈치 부근 소매를 살짝 움켜쥐었다.그렇게 몇 걸음 걸었을 때였다.툭.
전송 버튼을 누른 지 십 초도 지나지 않았다.[서윤 : 응. 나도 보고 싶네.]화면에 적힌 자신의 문장을 바라보던 서윤은 뒤늦게 얼굴을 감쌌다.‘내가 왜 그랬지?’바로 그때 전화가 울렸다. 강이준.“여보세요?”— 누나. 방금 문자, 진짜예요?“뭐가?”— 나 보고 싶다는 거요.“빵 갖다준다니까 그렇지.”— 아, 크루아상이 보고 싶은 거였구나.목소리가 금세 축 처졌다. 서윤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반반.”— 네?“크루아상 반, 이준이 반.”수화기 너머에서 무언가 쿵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이준아?”— 괜찮아요. 너무 좋아서 책상에 무릎 좀 박았어요.“어휴, 조심 좀 해.”— 누나가 또 이준이라고 불렀다. 오늘 잠은 다 잤네.전화기를 붙든 채 웃던 서윤은 문득 생각했다. 민혁과 통화할 때 마지막으로 이렇게 웃은 게 언제였더라.다음 날 오전 여덟 시 사십 분.[이준 : 누나! 빵집 도착!][이준 : 크루아상이 세 종류인데 긴급회의 필요해요.]함께 온 사진에는 플레인, 아몬드, 초콜릿 크루아상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서윤 : 플레인 하나면 돼.][이준 : 알겠습니다. 나머지는 제가 책임질게요!]‘세 개 다 사겠다는 뜻이네.’서윤은 웃으며 옷장 문을 열었다. 편한 청바지에 흰 니트를 골랐다가, 거울 앞에서 머리를 풀어 내렸다.일부러 꾸민 건 아니었다. 다만 조금 예뻐 보이고 싶었다.오전 열 시, 회사 근처 작은 광장.멀리서 이준이 손을 흔들었다. 회색 후드티 위에 가벼운 재킷을 걸친 모습이었다. 한 손에는 빵 봉투, 다른 손에는 따뜻한 커피 두 잔.“누나아!”달려오던 이준이 그녀 앞에서 멈췄다.“왜 뛰어? 넘어지겠다.”“빨리 보고 싶어서요.”그는 환하게 웃다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왜?”“오늘…… 예쁘네요.”“어제도 그랬잖아.”“어제도 예뻤는데 오늘은 조금 달라요.”“뭐가?”“오늘은 저 보러 나온 거잖아요.”서윤은 대답 대신 커피를 받아 들었다. 괜히 손끝이 따뜻해졌다.두 사람은 광장 옆 벤
월요일 오전 7시 31분.-띠링-[이준 : 누나, 좋은 아침!][이준 : 어제 기다린다고 했으니까 1분도 안 늦었어요.]서윤은 알람보다 먼저 눈을 뜬 자신이 조금 우스웠다.[서윤 : 잘했네, 이준아.][이준 : 칭찬받았다! 오늘도 힘내서 돈 벌게요.][서윤 : 그 돈으로 밥 제대로 챙겨 먹고.][이준 : 네! 누나도요. 사랑... 아니, 좋은 하루요!]서윤은 마지막 문장을 두 번 읽었다.‘사랑이라니.’웃음이 났다가, 금세 마음이 복잡해졌다.점심시간, 사무실 탕비실.“팀장님, 주말에 소개팅 나가셨죠?”커피를 타던 지민이 장난스럽게 물었다.“왜 그렇게 생각해?”“요즘 휴대전화만 보면 웃으시잖아요.”서윤이 대답을 망설이자 지민이 눈을 반짝였다.“진짜 누구 있어요?”“그런 사이 아니야. 그냥 알아가는 사람이야.”“몇 살인데요?”“서른.”“우와, 아홉 살 연하?”지민의 탄성에 서윤이 얼른 손가락을 입술에 댔다.“쉿. 회사에서 소문낼 일 아니야.”“죄송해요. 근데 팀장님, 나이는 왜요? 잘 맞으면 좋은 거죠.”지민은 가볍게 웃고 나갔다.혼자 남은 서윤은 식어가는 커피를 내려다봤다.지민에게는 간단한 일이었다. 잘 맞으면 좋은 것.하지만 서윤은 서른아홉이었다. 이준은 이제 서른이었다.그가 서른다섯이 되는 날, 자신은 마흔넷이다.‘그때도 지금처럼 웃어줄까?’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서윤은 스스로에게 쓴웃음을 지었다.아직 사귀지도 않는 남자와 오 년 뒤를 걱정하다니.오후 5시 50분.퇴근하려던 서윤에게 전화가 왔다.— 누나, 오늘도 고생했어요!“이준아. 너는 퇴근했어?”— 네. 오늘은 도현이가 저녁 사준대요. 제가 하루 종일 싱글벙글했다고요.“좋겠네.”— 누나도 같이 올래요? 아, 아니에요. 갑자기 오라면 부담스럽죠.평소 같으면 웃으며 받아쳤을 말이었다.그런데 오늘은 쉽게 웃음이 나지 않았다.“이준아.”— 네?“너는 왜 나를 좋아해?”잠깐 정적이 흘렀다.— 갑자기 면접이에요?“장난 말고.”이준
일요일 오전 8시 36분.서윤은 휴대전화를 들었다 놓기를 세 번째 반복했다.어젯밤 이준의 목소리가 자꾸 떠올랐다.‘내일은 누나가 먼저 연락해 주면 안 돼요?’평소라면 별생각 없이 보냈을 인사가 오늘은 유난히 어려웠다.‘먼저 연락한다고 무슨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닌데.’서윤은 마침내 메시지를 적었다.[서윤 : 이준아, 잘 잤어?]전송.그녀는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가 곧 다시 집어 들었다.아직 읽지 않았다.‘설마 자고 있나?’그때 화면에 부재중 전화가 떴다. 이준이었다.곧 메시지가 쏟아졌다.[이준 : 누나!!!, 저 지금 너무 좋아서 전화 잘못 눌렀어요.][이준 : 아침부터 심장 공격하면 반칙인데요?]서윤이 웃음을 터뜨렸다.[서윤 : 어제 먼저 연락해 달라면서.][이준 : 그랬죠. 근데 진짜 해줄 줄은 몰랐죠.][서윤 : 그럼 내일부터 안 할게.][이준 : 안 돼요! 취소! 제가 잘못했어요!]뒤이어 두 앞발을 모으고 있는 강아지 이모티콘이 도착했다.‘정말 귀여워.’서윤은 베개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웃었다.오전 열한 시.서윤은 집 근처 서점에서 책을 고르고 있었다. 오랫동안 미뤄두었던 주말의 작은 계획이었다.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누나, 뭐 해요?“서점 왔어.”— 책 좋아해요?“응. 요즘은 바쁘다는 핑계로 잘 못 읽었지만.”— 그럼 오늘은 책 많이 봐요. 방해 안 할게요.잠깐 망설이던 서윤이 물었다.“이준이는 뭐 해?”— 저요? 도현이랑 사무실에서 모형 만들고 있어요.“일요일인데?”— 금요일에 누나한테 멋있어 보였으니까 더 열심히 하려고요.“또 그 얘기야?”— 근데 누나, 방금 ‘이준이는’이라고 했죠?서윤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와, 나 오늘 진짜 복권 당첨된 기분이에요.“그 정도야?”— 네. 누나가 먼저 연락해 주고, 지금은 제 얘기도 궁금해하고.서윤은 책등을 손끝으로 쓸었다.그저 안부를 묻는 일이 누군가에게 이렇게 기쁜 일이 될 수도 있구나.“점심은 먹었어?”— 아직요.“삼각
토요일 오전 9시 12분.-띠링-[이준 : 누나아아! 일어났어요? 나 어제 잠 못 잤어요.]서윤은 이불 속에서 휴대전화를 확인했다.[서윤 : 왜요?][이준 : 누나가 이준아~ 하고 불러준 거 자꾸 생각나서요.][서윤 : 별게 다 좋네요. ㅎㅎ][이준 : 누나가 좋으니까 별게 다 좋아요.]서윤은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아침부터 또 시작이네.’그때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부스스한 머리에 회색 후드티를 입은 이준이 침대에 앉아 있었다. 한쪽 머리가 잔뜩 뻗친 채 입술을 삐죽 내민 모습이었다.[이준 : 누나, 나 오늘 좀 귀엽죠?]서윤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서윤 : 머리는 왜 그래요?][이준 : 누나 생각하다 이렇게 됐어요.][서윤 : 머리랑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이준 : 모르겠어요. 누나가 책임져요.]“푸하하!”서윤은 한참을 웃었다.서른 살이나 먹은 남자가 어떻게 저렇게 천연덕스러울까.그런데 귀여웠다.아주 많이.오후 2시.서윤은 하린의 와인바에 들렀다.“어머, 우리 한 팀장님. 오늘 얼굴에 꽃이 폈네?”“무슨 꽃.”“연애하는 여자 얼굴?”“오하린!”하린은 깔깔 웃으며 커피를 내밀었다.“강이준이랑 어제 밥 먹었다며?”“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도현이한테 자랑했대. 누나가 자기 이름 불러줬다고.”“……뭐?”“그것도 엄청 좋아하면서.”서윤은 얼굴이 화끈거렸다.“아니, 이름 한 번 부른 게 뭐라고!”그때 가게 문이 열렸다.딸랑.“하린 누나!”너무도 익숙한 목소리.서윤이 돌아보자 이준이 커다란 종이봉투를 들고 서 있었다.“어? 서윤 누나!”그의 얼굴이 환해졌다.꼭 산책하러 나왔다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을 발견한 강아지 같았다.“이준 씨? 여긴 어쩐 일이에요?”“하린 누나한테 부탁받은 거 가져왔어요.”그는 봉투를 카운터에 내려놓더니 서윤에게 다가왔다.“누나, 나 보고 싶어서 왔어요?”“아니거든요?”“에이, 난 보고 싶었는데.”이준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누나는 맨날 나만 좋
금요일 오전 7시 15분.한서윤은 거울 앞에서 세 번째 블라우스를 갈아입고 있었다.‘그냥 밥 한 끼 먹는 건데.’아이보리색을 입었다가 벗고, 연분홍색 블라우스를 꺼냈다. 이준과 저녁을 먹기로 한 날이었다. 데이트가 아니라 지난번 약속한 식사일 뿐이라고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되뇌었다.-띠링-[이준 : 누나아! 드디어 금요일! 오늘 저 멋있게 하고 갈 거예요.][서윤 : 업무 미팅이잖아요.][이준 : 미팅 끝나면 누나랑 데이트잖아요. ㅎㅎ]서윤은 웃음을 참으며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누가 데이트래.’그런데도 립스틱을 바르는 손길은 평소보다 신중했다.오후 세 시.회의실 문이 열렸다.“안녕하세요, 한 팀장님.”서윤은 고개를 들었다가 잠시 멈칫했다.짙은 네이비색 정장에 깔끔하게 정리한 머리. 평소의 장난스러운 이준과는 분위기가 달랐다.눈이 마주치자 그가 살짝 웃었다.‘뭐야, 왜 저렇게 입고 왔어….’"안녕하세요, 강 대표님."서윤은 최대한 태연하게 대답했다.하지만 이준은 그녀의 옆을 지나가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누나, 오늘 예쁘네요."서윤의 눈이 커졌다."……!"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기 자리로 걸어갔다.서윤은 어이없는 얼굴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저 남자, 진짜…….'이준은 발표가 시작되자 고객 동선과 공사 일정을 차분히 설명했다. 서윤이 조명에 관해 질문하자 준비해 온 대안 시안을 곧바로 띄웠다.“꼼꼼하게 준비하셨네요.”“감사합니다, 한 팀장님.”그는 정중하게 답했다.그러나 잠시 후 서윤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이준 : 누나, 방금 저 좀 멋있었죠?]서윤은 고개를 들어 그를 흘겨봤다.이준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화면을 넘겼다.오후 다섯 시 사십 분.회의가 끝났다.마지막 직원이 나가자 이준이 기다렸다는 듯 다가왔다.“누나, 이제 밥 먹으러 가요!”“방금까지 강 대표님이더니.”“업무 끝났으니까요. 지금은 누나랑 밥 먹을 강이준.”서윤은 웃으며 가방을 챙겼다.“오늘 정장